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69
제68화
진천은 오재승으로부터 강호의 전반적인 정세에 관해 들었다.
기존에 그가 가지고 있던 정보의 태반은 허 노야로부터 얻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십 년 이상 지난 내용들인지라 그것으로 중원의 현황을 파악하기엔 무리가 따랐다. 부족한 부분은 노덕과 대웅이 메워 주었다.
오재승이 전하는 정보들은 양과 질 모두에서 그들에게서 취한 것들을 압도했다. 오재승의 설명을 듣고서야 진천은 비로소 무림의 판도에 관해 제대로 된 윤곽을 그려 낼 수 있었다.
우려한 대로였다. 천지문이나 농막 등에 일어난 변고는 반세기 동안 공고하게 유지되어 온 질서의 붕괴를 알리는 신호탄일 공산이 컸다. 둑은 일각이 무너지면 곧 전체가 터지는 법이었다.
문제의 근원은 현재 사패(四覇)가 포화 상태라는 점이었다. 먼 옛날 여러 개로 나뉜 왕국이 천하의 패권을 차지하려 저마다 부국강병을 추구한 것처럼, 사패 또한 지난 오십여 년간 생존을 위해, 그리고 득세를 위해 강자의 양성에 심혈을 기울여 왔다. 그 결과 삼백 년 전의 초인시대를 제외하면 무림사에 유례가 없는 절정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당금 무림의 백대고수 끝자락에 겨우 걸리는 이들도 이백 년 전이었다면 능히 십대고수에 꼽히리라는 게 정설이었다. 더욱이 지금은 일천 년 무림사를 통틀어 여덟 명밖에 없었던 절대지경의 무존(武尊)들이 아홉 명이나 출현한 기적의 시대였다. 최강자로 자타가 공인하던 무황(武皇) 나중강(羅重剛)은 이미 오십 년 전에 유명을 달리했지만, 그를 제거했던 구(舊) 사왕(四王)과 그 이후 등장한 신(新) 사왕(四王)은 여전히 건재했다.
중원이 넓다 하나 산을 부수고 바다를 가르는 절대무인들이 여덟 명이나 공존하기엔 턱없이 좁은 땅이었다. 그럼에도 대륙이 맹수들의 전쟁터로 화하지 않고 무성 소구의 태평성대에 버금가는 평화를 누린 것은 전적으로 각각 두 명씩의 무왕들을 품은 사패의 전력이 절묘한 균형을 이룬 덕분이었다. 무황과 일통무련(一統武聯)의 유산이라 할 중립 지대가 완충 역할을 해 준 탓도 상당했다.
하지만 내부의 힘이 폭발할 지경에 이르렀기에 사패로서도 확장에 나서지 않을 도리가 없는 국면이었다. 그러지 않으면 전날 정파 무림의 주도권을 놓고 벌어졌던 원주 강가와 마령 문가의 갈등처럼 내분으로 치달아 자멸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오재승의 노안에 그늘이 졌다.
“차후 중립 지대가 사패의 사냥터로 변할 거라고 보오?”
“그럴 가능성이 높을 듯싶습니다.”
침묵에 잠긴 오재승을 보며 이번에는 진천이 물었다.
“구(舊) 사왕의 근황에 대해 더 아시는 바가 없습니까?”
“보름 전을 기준으로 검왕(劍王)이 월교에 있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다른 삼왕의 소재는 불명이오. 권왕(拳王)은 넉 달 전 정맹에 모습을 드러낸 이후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고, 장왕(掌王)은 일 년 팔 개월 전 고화산(高華山)에서 목격된 것이 마지막이었소. 독후(毒后)의 경우는 벌써 삼 년째 종적이 묘연하오. 그녀가 희귀한 독물을 찾아 남해로 떠났다는 설이 잠시 나돌았지만 신빙성은 낮다는 게 중론이오.”
“그렇군요.”
“그들의 신상에 이상이 생겼으리라 보오?”
“글쎄요. 다만 이번 사태와 관련해 몇 가지 추측은 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추측이라면?”
“우선 그분들 간의 결속이 느슨해졌을 가능성입니다. 주지하다시피 구 사왕이 사패에 몸을 담은 것은 의탁의 의미보다는 견제의 목적이 더 컸습니다. 사패는 중립 지대에서 도모할 작업에 관해 그분들에게 사전에 알려 주었을 게 틀림없습니다. 그러지 않고 일을 추진했을 때의 후과를 감당키 어려울 테니까요.”
“금번에 발생한 사태들이 구 사왕의 동조하에 일어났다는 말이오?”
“동조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방관의 약속은 받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중립 지대의 보존과 현상 유지를 강력하게 요구하던 구 사왕이 왜 그랬을 것 같소?”
“모르겠습니다.”
짐작하는 바가 없지 않았으나 추론에 불과했기에 진천은 말을 아꼈다. 좀 더 물고 늘어지려던 오재승이 생각을 바꿨다.
“그들의 동정에 관한 정보는 항상 특급 비밀이지만, 새로운 소식이 들어오면 지체 없이 진 공자에게 전해 주겠소. 나 같은 늙은이가 쥐고 있는 것보단 진 공자처럼 명민한 분이 만지작거리는 게 훨씬 유용할 테니.”
진천은 쓰게 웃었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었다. ‘특급 비밀’ 운운은 대가를 바라는 기대감의 표명이었다.
“제 출신에 대해 상운에서는 어디까지 추적했는지요?”
질문의 의도를 파악한 오재승이 기꺼이 미끼를 물었다.
“두 달 반 전 팔정포에 하남편봉을 꺾은 신성이 나타났다는 급보가 퍼진 후, 상운을 비롯한 모든 정보 조직이 진 공자의 배경을 캐러 달려들었다오. 하지만 성과는 미미했소. 진 공자가 꼭 하남 무림 출신이라는 보장이 없으니 말이오. 중원 무림의 기인이사가 키운 신룡이 우연히 팔정포에 들렀을 수도 있고 아니면 하남편봉과의 대결을 위해 일부러 그곳을 찾았을 수도 있지 않겠소. 범위가 너무나 막연한 탓에 더듬이질은 시작부터 난관에 봉착했소. 그러다 한 달 전 흑문에서 유력한 조각을 찾아냈소. 뭔지 아시겠소?”
진천의 입가에 고소가 걸렸다.
“오란의 염방일 테지요.”
오재승이 빙그레 웃었다.
“그렇소. 정월 초에 그곳에서 기이한 사건이 발생했다는구려. 기실 노부는 전에 그에 관한 정보를 얻었음에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오. 염방은 하남 무림 칠강(七强)에 속하지만, 중원에서는 머나먼 오지의 하잘것없는 방파에 지나지 않는지라 신경 쓰지 않았던 게요. 아무튼 방주인 단혼겸(斷魂鎌)과 염방십이랑(鹽幇十二狼)이 한날 아침에 실종된 사건으로 오란 일대가 떠들썩했던 모양이오. 염방의 숙적인 수룡보의 소행일 거라는 풍문이 돌았지만 흑문의 조사 결과 사실무근임이 밝혀졌소. 흑문은 염방 무리의 자취를 면밀히 훑었소. 그리고 그들이 성주평까지 말을 타고 갔다는 것을 알아냈소. 거기서 가장 가까운 무림방파는 수룡보였으나 진즉 그들을 용의자에서 지운 흑문은 다른 곳을 주목했소.”
진천을 지그시 바라보며 오재승이 뜸을 들였다. 진천은 잠자코 기다렸다.
“다름 아니라 ‘도망자들의 땅’으로 불리는 창인이었소. 최근 수십 년간 상승의 무인이 그곳으로 도피했다는 소문은 없지만 모를 일이잖소. 절정의 고수가 아무도 모르게 창인으로 스며들었을지. 그리고 그가 엄청난 후계자를 길러 냈을지. 흑문은 만약 진 공자가 하남 무림 태생이라면 창인이 출신지가 아닐까 점찍었소. 하남편봉을 상대로 진 공자가 현시한 무위라면 혼자서 능히 염방의 십삼 인을 처리할 수 있었을 거라는 가정이 근거였소. 기실 진 공자의 존재를 전제하지 않으면 그자들의 느닷없는 행방불명은 설명하기 어려웠소.”
“흑문이 창인에 들어가 확인을 했습니까?”
“허허, 상운도 마찬가지지만 흑문은 무력 집단이 아니라오. 사람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눈과 귀를 가졌지만, 아무리 그들이라도 창인처럼 외떨어진 장소에선 공기가 될 수 없소. 금방 주목을 받을 테니 말이오.”
“그렇군요.”
“더욱이 창인은 추포(追捕)들의 무덤으로 악명이 자자한 곳이오. 지하에 거미줄처럼 깔렸다는 미로에 갇히든 쏘이기만 하면 즉사를 면치 못한다는 독물에 당하든 창인에 발을 들여놓으면 빠져나오지 못한다는 속설이 있다오. 어차피 소기의 성과를 달성했으니 흑문으로서는 구태여 모험을 할 까닭이 없었소. 정보를 팔아먹으면 그뿐, 뒤는 무인들의 몫이었소. 사패는 이미 조사대를 파견했을 테지만 구 일 전 구인결 이후 정예들을 추가로 보냈을 가능성이 농후하오.”
진천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예상했던 흐름이었지만 그래도 친인들의 안위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상이 진 공자의 배경에 관해 노부가 취득한 정보의 전부외다.”
마무리를 지으며 오재승이 눈을 게슴츠레 떴다. 진천은 그의 기대에 부응했다.
“창인은 제 고향이 맞습니다. 태어난 곳은 오란이지만 돌이 되기 전에 창인에 가서 강호에 나오기 전까지 쭉 거기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제 사부들은…….”
뜻밖의 횡재에 오재승의 귀가 쫑긋 섰다. 하지만 그는 진천의 뒷말을 듣지 못했다.
* * *
“어린놈의 주둥이가 걸레짝이로구나. 함부로 놀리다간 찢어지는 수가 있으니 조심해라.”
곽건에 못지않은 험언(險言)을 내뱉으며 여상구가 경고했다.
일순간에 분위기가 살벌해졌다. 곽건의 뱀눈에 시퍼런 불꽃이 일렁거렸다.
하지만 곽건은 분기를 행동으로 옮기지 않고 다시 한번 냉정하게 전력을 분석했다. 기실 분석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일방적 우세였다. 하남신룡이 있다면 모를까, 그가 부재한 상황이라면 승산은 무조건 십 할이었다. 설령 그가 나오더라도 팔 할이 넘을 것이었다.
간을 졸이게 만드는 무시무시한 살기를 뿜어내고 있지만 도화각주는 구인결에서 당한 내상이 완치되지 않았음에 틀림없었다. 와옥에서 이리로 달려오는 동안 그가 보인 신법은 초절정은커녕 절정의 하(下)에도 미치지 못했다.
다만 인면요괴는 추정했던 것보다 부상 정도가 덜했다. 상체의 반이 갈라진 중상을 입었다고 들었는데 깊이 팬 자국만 보일 뿐이었다.
형인 곽웅은 계산에 넣지도 않았다. 회복도 되지 않았을 터이거니와 설사 멀쩡한 몸이라고 해도 변수가 될 수 없었다. 그 겁쟁이는 눈만 부라리면 저항의 의지를 상실하고 주저앉을 게 뻔했다.
문제는 하남편봉이었다. 그녀의 무위가 두려운 건 아니었다. 투명에 이르지 못한 백색의 소수로는 그의 칼을 받아 낼 수 없을 터였다. 그녀가 꺾은 적운도(赤雲刀)는 도호(刀豪)로 불려 손색이 없는 자이나 도강(刀剛)을 구사하는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다.
곽건은 하남편봉을 수중에 넣고 싶었다. 인면요괴도 탐이 났지만 그녀가 훨씬 구미에 당겼다. 그녀를 휘하에 두고 부릴 수 있다면 친위대 전체를 내줄 용의도 있었다.
생각을 정리한 곽건이 입을 뗐다.
“허세가 심하군, 늙은이. 나야말로 그 더러운 주둥이를 찢어 버리고 싶지만 집안의 애물단지를 돌봐 준 공을 봐서 참겠다. 하지만 또 한 번 망발을 떨면 내일의 해를 못 볼 줄 알아라.”
여상구는 살기를 갈무리하며 자중했다. 본연의 무력을 발휘할 수 없는 상태기도 했지만 급전이 벌어지면 노덕―노미현 부녀와 고량―차소영 부부가 변을 당할 터이기 때문이었다. 진천이 오기까지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야 했다.
여상구의 태도를 굴복으로 해석한 곽건이 하수린에게 눈을 돌렸다.
“어째서 저런 자들과 섞여 있나, 하남편봉?”
질문의 의도를 몰라 하수린은 묵묵부답했다. 그녀에게서 대꾸가 없자 곽건이 단도직입했다.
“나에게 오라. 네게 무명과 장래성에 걸맞은 권세와 부귀를 주마.”
하수린의 가지런한 눈썹들이 일그러지며 두 마리 갈매기로 변했다.
“당신의 수하가 되란 말인가요?”
“그렇다. 나는 장차 천하의 지존이 될 몸. 나를 섬기면 너는 훗날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지고한 신분이 될 것이다.”
하수린이 눈초리를 치켜 올렸다.
“내가 싫다면?”
도발적인 어투에 곽건의 뱀눈이 찌그러졌다.
“권주를 마다하고 벌주를 마실 참인가?”
자신의 답변으로 상황이 악화되리라 예감했지만, 하수린은 목전의 무뢰한에 대한 반감을 속에 가둘 수가 없었다.
“나는 닭 머리가 될지언정 봉의 꼬리 노릇을 하고 싶은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어. 게다가 네가 봉인지도 의심스럽고.”
곽건의 전신에서 가공스러운 기운이 분출되었다. 일만 근의 압기가 하수린의 동체를 짓눌렀다. 설마 그가 그 정도의 강자일 줄은 몰랐던 하수린은 당황했다. 곽건의 무형지기에 반응한 가린이 으르렁거리자 여상구가 급히 그의 팔뚝을 잡았다.
막강한 내공이 담긴 안광으로 하수린을 쏘아보며 곽건이 위협했다.
“내가 누군지 몰랐을 테니 이번은 봐주겠다. 무릎을 꿇어라. 그리고 충성을 맹세하라. 그러면 방금 전의 발칙함은 불문에 부치겠다. 그러지 않으면…….”
누군가 곽건의 말을 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