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70
제69화
“그러지 마라, 건아.”
타이르기보다는 애원하는 목소리였다.
하수린에게서 떨어진 곽건의 시선이 목소리의 주인공에게로 향했다.
“설마 했는데, 정말이었군. 몇 달 새 이렇게 간덩이가 커졌을 줄은 몰랐어.”
대웅이 부들거리는 다리를 움직여 앞으로 나갔다. 그로서는 용기를 쥐어짠 행동이었으나 다른 이들의 눈에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가련해 보였다.
“나하고 얘기하자. 여기 이 사람들은 아무 상관이 없잖으냐.”
“간이 부푼 대신 머리는 졸아들었군. 그새 까먹었어? 내가 누군지. 주제넘게 나서지 말고…….”
말끝을 흐린 곽건이 비릿하게 웃었다.
“아냐. 잘 나왔다. 어디 강호에서 굴러먹으며 갈고닦았다는 솜씨 좀 볼까. 해일도를 묵사발로 만들었다지? 자, 덤벼 봐.”
곽건이 칼을 뽑는 시늉을 하자 대웅의 다리가 풀렸다. 그러나 대웅은 주저앉지 못했다. 노미현이 다가와 그의 손을 잡았기 때문이었다.
“이이는 부상에서 회복되지 않았어요. 그리고 무기도 없어요.”
대웅이 다급히 노미현을 뒤로 떠밀었다.
“여긴 나에게 맡기고 어서 와옥 안으로 들어가구려, 노 소저.”
곽건의 뱀눈이 더 가늘어졌다.
“어럽쇼, 이건 또 뭐지? 집안에서도 늘 치마폭에만 기어 들어가 숨어 살더니 밖에서도 그러는 모양이군. 그리고 누구 맘대로 들어가? 그 계집은 나와 함께 문으로…….”
노미현을 감싸 안은 대웅의 입에서 천둥 같은 고함이 터져 나왔다.
“닥쳐! 함부로 말하지 마라.”
누구보다 대웅 자신이 가장 놀랐다.
곽건의 눈자위에 살기가 번들거렸다.
“이로써 확실해졌군. 너는 미쳤어. 미친놈이 온 세상을 돌아다니며 집안 망신을 시키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집에 가자. 따끔하게 치료해 주마.”
사시나무 떨듯 흔들리면서도 대웅은 버텼다.
“할아버님께 외유의 허락을 받았다. 그분의 뜻을 어길 참이냐?”
별안간 곽건이 광소를 터뜨렸다.
“크하하핫. 그게 네 구명줄이냐? 그런데 이걸 어쩌나? 할아버지는 나더러 알아서 하라고 했는데. 무슨 말인지 알지?”
대웅이 대답을 못 하자 곽건이 정색했다.
“장난은 여기까지. 분명 한 마리도 빠짐없이 들어 있다고 들었는데 가장 큰 월척이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갔군. 한꺼번에 처리하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지. 다들 오체투지하고 얌전히 혈도를 찍혀라. 저항하는 자는 목을 베겠다.”
곽건의 좌우에 섰던 사인의 도객이 일제히 발도했다.
일촉즉발의 순간 대웅이 양팔을 벌리며 삼 보 전진했다.
“나를 데려가라, 건아. 이들은 아무 상관도 없으니 건드리지 마라.”
곽건은 대웅의 요청을 묵살했다.
“아직도 뻣뻣하게들 서 있군. 저 계집만 남기고 모조리…….”
곽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여상구가 외쳤다.
“저자를 잡아라, 가린.”
팔뚝을 잡고 있던 여상구의 손에 떨어지자 가린이 고삐 풀린 말처럼 뛰쳐나갔다.
곽건에게 달려든 가린이 통나무처럼 두껍고 기다란 팔을 휘둘렀다. 하지만 곧바로 괴성을 토해 내며 뒤로 물러섰다. 어느새 뽑아 든 곽건의 칼에서 선연한 강기가 솟구쳤기 때문이었다. 가린을 쫓으며 곽건이 명을 마무리 지었다.
“죽여라!”
난전이 펼쳐졌다.
전선은 세 군데였다. 가린이 곽건을 상대하는 동안 하수린과 여상구는 각각 두 명의 도객을 감당해야 했다.
세 곳 모두 초반부터 절대열세였다.
흑색 무복을 입은 청년의 도강이 그의 갑피를 깨뜨릴 위력을 지녔음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가린은 충돌을 꺼리며 후퇴했다. 곽건은 노골적으로 가린의 목만 노림으로써 살상의 의지를 분명히 했다.
가린의 위급한 처지를 보면서도 하수린과 여상구는 그를 도울 여력이 없었다. 그들을 합공하는 칼잡이들은 전원이 절정의 무위를 뽐내는 강자였다.
청사편은 물론이고 소수까지 꺼내 들었지만 하수린은 일방적으로 몰렸다. 일대일로는 해 볼 만했지만 둘은 버거웠다. 그나마 방패로 활용한 소수 덕분에 칼을 몸에 허용하진 않았으나 확연한 열세였다.
여상구는 하수린보다 사정이 더 나빴다. 그의 태극선은 강기는커녕 변변한 선기(扇氣)조차 뿜어내지 못했다. 난생처음 경험하는 무시무시한 살기로 도객들이 주춤거리지 않았다면 초장에 끝났을 터였다. 하지만 여상구의 상태가 정상이 아님을 간파한 두 도객은 회심의 눈빛을 교환했다.
달아나던 가린이 반격을 꾀했다.
아흐레 전 파혼도를 물리쳤던 수법은 여전히 유효할 터였다. 적의 칼을 등이나 어깨에 맞아 주고 그 대가로 목을 움켜쥘 수만 있다면 대번에 전세 역전이었다.
속도를 조절하며 가린은 곽건이 접근하길 기다렸다. 횡으로 날아드는 그의 칼이 목에 떨어지려는 찰나, 가린이 구부정한 몸을 쭉 폈다. 그 바람에 곽건의 칼은 가린의 목이 아니라 오른팔 상완(上腕)에 박혔다.
좌측으로 회전한 가린이 왼손으로 곽건의 목을 움켜쥐려 했다. 그러나 간발의 차이로 놓치고 말았다. 가린의 노림수를 알고 있었던 듯 곽건이 그의 동체에 칼을 박아 두는 우를 범하지 않고 재빨리 빼낸 탓이었다. 그가 전력을 싣지 않아 팔이 잘리지는 않았지만 가린은 이 차 공격에 고스란히 노출되고 말았다.
곽건의 칼끝에서 석 자 길이의 강기가 솟아나더니 가린의 허리를 베어 갔다. 거구에 어울리지 않는 날렵함을 과시하며 상체를 틀었지만 가린은 일격을 허용하고 말았다. 갈라진 그의 옆구리에서 피 분수가 솟구쳤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칙칙한 도강이 목으로 올라오자 가린은 뱀눈을 가진 청년이 소의 눈을 한 진천과는 완전히 다른 족속임을 깨달았다.
하수린은 아미를 찡그렸다.
노장(老壯) 중 늙은 쪽은 무위도 상당하거니와 매우 노련했다. 그를 우선적으로 처치함으로써 돌파구를 열려 했던 하수린은 장년의 도객을 청사편으로 견제하며 노인에겐 허점을 노출시켰다. 노인이 그녀를 찌르기 위해 들어오면 소수폭(素手爆)으로 뭉개 버릴 참이었다. 소수에 깃든 백 년 적공이 못내 아까웠지만 찬밥 더운밥을 가릴 계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노인은 미끼를 물지 않고 되레 거리를 벌렸다. 그러면서 전투에 참가하지 못하는 이들에게로 발을 옮겼다.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애써 전권(戰圈)을 이동했던 하수린은 찰나지간 갈등했다. 어떻게 할 것인가.
판단을 내리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하수린은 자신의 선택에 욕지기가 치밀었다. 저들이 뭐라고 내 목숨을 걸어야 한단 말인가. 하지만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기다릴 겨를이 없었기에 내처 달려갔다.
“거기 서!”
하수린의 요구에 응하기라도 한 듯 갑자기 멈춰 선 노인이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그에게로 돌진해 오는 그녀에게 강력한 도풍(刀風)을 날렸다. 때맞춰 장년의 도객이 그녀의 후방으로 짓쳐 들었다.
진퇴양난에 빠진 하수린은 결단을 내렸다. 둘 모두를 막을 수 없다면 차라리 강한 쪽을 맞아 승부수를 띄울 작심이었다. 뇌려타곤을 시전할 줄 알았던 하수린이 예상을 깨고 칼바람을 거슬러 자신에게 달라붙자 노인이 당황했다. 그러나 백전노장답게 순식간에 평정을 되찾은 노인이 도기(刀氣)에 쓸려 휘청거리는 하수린의 몸통을 일도양단하려 들었다. 하수린은 피하지 않고 소수로 맞불을 놓았다.
캉!
칼날에 부딪친 희디흰 손이 굉음을 토해 내었다. 하마터면 칼을 놓칠 뻔했던 노인이 두 걸음 물러섰다. 그가 비운 공간을 채우며 크게 일보 전진한 하수린이 수도(手刀)로 노인의 명치를 찔러 갔다. 바로 뒤에 이른 장년의 도객이 칼을 치켜들었음을 감지했지만 하수린은 공격을 고수했다. 내친걸음이거니와 이제 와서 피하기도 늦었다.
여상구는 최후를 예감했다.
평소의 오 할에도 미치지 못하는 공력으로는 역불급이었다. 하나도 감당키 어려운데 둘이라면 해 보나마나였다. 하지만 죽을 때 죽더라도 벽력도문의 칼잡이들에게 본때를 보여 주고 갈 참이었다. 둘 중 하나는 오늘 그와 더불어 염왕을 알현해야 할 것이었다.
압도적인 전력의 우위에도 불구하고 도객들은 여상구를 쉬이 처치하지 못했다. 상처 입은 짐승처럼 날뛰는 그의 귀기 서린 동공에 물귀신이 되겠다는 결의가 약여했기 때문이었다. 두 도객은 직접적인 격돌을 피해 일 장 밖에서 여상구를 공략했다. 전신에 도흔이 새겨진 여상구는 이내 피투성이가 되었다. 그러나 쓰러지기는커녕 갈수록 흉포해졌다. 여상구는 무려 삼십여 초나 버티는 기염을 토하며 도객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무리한 내공의 운용으로 내상이 도진 여상구는 결국 한계에 봉착했다. 부채를 쥘 힘조차 사라진 여상구가 팔을 늘어뜨렸다. 두 자루의 칼이 무방비 상태가 된 그의 몸에 떨어졌다.
기적은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
여상구를 구한 이는 대웅이었다. 기회를 엿보다 결정적인 순간 전장에 뛰어든 대웅은 도객들의 칼들이 여상구를 갈가리 찢어 버리기 직전 그를 안고 뒹굴었다. 그의 바람대로 벽력도문의 제이호법(第二護法) 조중운(趙重雲)과 곽건의 친위대장 모주석(毛柱石)은 차마 문주의 장손을 베지 못하고 칼을 회수했다.
가까스로 여상구를 사신의 손아귀에서 빼냈지만 위기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계집’만 남기고 모조리 죽이라던 곽건의 명령을 상기한 조중운과 모주석은 다시 치켜든 칼에 내공을 불어넣었다. 문주는 오천 리 떨어진 장산(長山)에 있지만 소주(少主)는 엎어지면 코가 닿을 곳에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나중의 질책보다는 당장의 엄벌이 두려웠다.
하수린의 등을 쪼개려던 곽건의 친위대원 양일(梁一)은 중간에 끼어든 물체를 보고는 기겁했다. 그것은 여인이었다. 보통의 여인이 아니라 양일이 평생 본 여인들 중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하지만 양일이 쭈뼛거린 까닭은 신이 빚은 미녀를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그녀가 유일하게 소주의 살생부에서 제외된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그녀를 해쳤다간 성질머리 더러운 소주에게 명을 어긴 죄로 목이 날아갈지도 몰랐다.
아슬아슬하게 칼을 거둔 양일에게 두 줄기의 권풍이 날아들었다. 양일은 헛바람을 들이켰다. 중상을 입어 운신이 어렵다고 여겼던 금강권과 암소 정도의 존재감만 가졌던 장신의 여자가 내뻗은 주먹들엔 경시하지 못할 경력이 실려 있었다.
하나를 치면 다른 하나에게 당할 우려가 있었기에 양일은 일단 횡보를 밟아 상대의 공세를 흘려 냈다. 그러고는 재빨리 칼을 휘둘러 적들의 추격을 저지했다. 다음 순간 양일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기세 좋게 달려들었던 금강권과 여자가 그의 도기(刀氣)조차 감당하지 못하고 추풍낙엽처럼 쓸려 나간 것이었다.
엎어지고 넘어진 그들을 절단 낼 것인지 아니면 제삼호법(第三護法)을 도와 하남편봉을 제거할 것인지를 두고 양일은 저울질했다. 그 찰나의 망설임이 고량과 차소영의 목숨을 구했다.
기적의 마무리는 진천의 몫이었다.
죽림 위를 가로질러 삼보장 경내로 뛰어내리며 진천은 상황을 파악했다. 경중을 가리기 어려울 정도로 세 곳 모두 절체절명의 위급지경이었다. 그나마 하수린이 있는 쪽이 일말의 여유가 있었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가린을 향해 전속력으로 질주하며 진천은 어정쩡한 자세로 선 중년의 도객에게 여섯 알의 철구를 날렸다. 연이어 의형과 대웅에게 접근하는 두 도객에게 나머지 철구들을 쏟아부었다.
첫 번째 도객은 진천의 암기를 피해 내지 못하고 어깨와 팔꿈치에 하나씩의 철구를 허용했다. 칼을 놓치지는 않았지만 고통에 찬 신음성을 흘리며 도객이 비틀거렸다.
여상구와 대웅을 노리던 도객들은 각각 다른 방식으로 진천의 철구에 대처했다. 노인이 도막을 펼쳐 철구들을 튕겨 낸 반면, 장년인은 소낙비를 피해 물러섰다. 결과적으로 장년인의 선택이 옳았다. 그는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지만 노인은 도막을 뚫고 들어간 철구 하나에 가슴팍을 격타당했다. 이는 노인의 무력이 약해서가 아니라 그를 주된 목표물로 삼은 진천이 그 방면으로 전력을 다한 탓이었다.
임시방편으로 급한 불을 끈 진천은 흑색 무복의 청년이 가린의 목을 자르기 직전 그에게 이르는 데 성공했다. 진천의 좌수 끝에서 돋아난 하얀 고드름이 흑의 청년의 팔을 찔러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