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71
제70화
진천으로서는 다행스럽게도 흑의 청년은 가린의 목 대신 자신의 팔을 중요시했다.
가린을 노리던 칼이 방향을 틀어 진천을 크게 베어 갔다. 흑의 청년의 얼굴과 무공을 본 진천은 그가 대웅의 동생임을 알아차렸다. 이름이 건이라고 했던가.
진천의 절멸도와 곽건의 도강이 부딪쳤다. 다음 순간 곽건이 경악성을 내질렀다.
“헉!”
진천의 절멸도가 그의 강기를 싹둑 잘라 버리자 대경실색한 곽건이 훌쩍 물러섰다. 진천은 가린이 팔과 옆구리, 그리고 흉부에 중상을 입었음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를 보살필 여유는 없었다. 황급히 퇴보를 밟았던 곽건이 언제 그랬냐는 듯 칼을 찔러 왔기 때문이었다. 도첨에서는 다시 묵색 강기가 솟구쳤다.
진천은 맞불을 놓지 않고 팔영보를 펼쳐 피했다. 공력의 소모가 극심한 절멸참을 연달아 구사했다가 승부를 매조지 하지 못하면 금세 위태로워질 터였다. 한 차례의 공방이었으나 진천은 곽건의 무위가 초절정에 갓 발을 들여놓은 수준이 아님을 간파했다. 강도와 선명함에서 그의 도강은 의형의 선강에 뒤지지 않았다. 가린을 압도한 정황만으로도 파혼도 이상의 강자임을 웅변하고 있었다.
진천은 쉽지 않은 일전이 될 것임을 직감했다. 대웅이 전하는 바를 초과하는 곽건의 무력 때문이 아니었다. 절멸참을 접하고도 곽건이 움츠러들지 않고 즉각 반격에 나선 것은 불길한 징조였다. 호전성에서 비롯된 만용이라면 좋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희박했다.
곽건은 그의 약점을 감지한 것이었다. 절멸참을 쓰며 이를 악문 모습에서 눈치를 챘을까. 아니면 희미해진 절멸도의 밝기로 알아냈을까. 실마리가 무엇이었건 간에 놀라운 판단력과 결단력이 아닐 수 없었다.
곽건은 진천에게 거리를 벌릴 여지를 허락하지 않고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진천의 좌수에서 섬광이 번쩍였다. 진천이 날린 절멸비(絶滅匕)가 곽건의 오른쪽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크게 휘청거리면서도 곽건은 계속 진천을 압박했다. 회심의 일격이 무위로 돌아갔지만 진천은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확인했다.
첫째, 곽건은 절멸비에 대비하고 있었다. 필히 남천도왕에게서 들었으리라. 그렇다면 절멸삭(絶滅索)에 대해서도 알 거라 보아야 했다.
둘째, 곽건은 무복 안에 호신갑을 착용하고 있었다. 의형이 화월도군과의 대결에 앞서 준비했던 천잠갑의(天蠶甲衣)에 못지않은 기물임에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무리 상체를 틀어 절멸비를 흘려 냈다고 해도 어깨가 뜯겨 나가 우수를 쓰기 힘들었을 터였다.
고전이었다.
곽건의 도강은 팔영보 연회(聯回)로 빗겨 냈지만, 진천은 그의 전신을 휘감은 폭풍 같은 도기(刀氣)에 기혈이 격탕되었다. 곽건은 진천이 빠져나갈 틈을 허용치 않고 자신의 전권에 가두었다. 그는 강할뿐더러 전투 감각도 탁월했다.
진천은 경험의 측면에서 곽건에게 미치지 못함을 절감했다. 곽건은 남천도왕을 비롯한 벽력도문의 도호들을 상대로 상당한 실전 수련을 쌓았음에 분명했다. 반면 진천은 열세 살 이후 창인을 떠나기 전까지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강자들과 손을 섞어 본 적이 없었다. 작년 말 가린을 만났을 때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던 것도 그를 얕잡아 보아서가 아니라 경험이 부족했던 탓이었다.
그나마 중원에 나온 이후 치렀던 의형과 창천도군과의 비무가 큰 도움이 되었다. 그들과의 일전이 없었다면 곽건의 파상 공세에 손발이 어지러워졌을 게 뻔했다. 곽건이 발산하는 투기(鬪氣)는 맹렬하되 의형의 천생살기에 비할 바는 아니었고 위압감 역시 창천도군이 한 길 위였다.
불리한 형세였지만 진천은 평정심을 유지했다. 기실 그에게 유리한 점도 있었다. 무엇보다 곽건이 펼치는 도법들이 눈에 익었다. 두 달 넘게 매일이다시피 행했던 대웅과의 비무 수련 덕분이었다. 곽건이 부리는 칼의 길을 미리 읽은 덕분에 진천은 치명타를 허용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이었다. 곽건은 필시 그를 익숙함의 늪에 빠뜨린 후 역으로 찔러 올 것이었다. 진천은 그 순간을 노려 되받아치기로 마음먹었다.
다른 곳에서는 때아닌 휴전이 이루어졌다.
방금 전까지 사투를 벌이던 이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싸움을 멈추고 두 청년이 벌이는 쟁투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 대결의 결과에 따라 그들의 운명이 결정될 것이었다.
삼보장 인사들은 간이 졸아들다 못해 녹아내릴 지경이었다. 곽건은 괴물이었다. 반각 가까이 강기를 뿜어낼 수 있는 공력이라니. 그의 칼이 떨어진 자리는 벼락을 맞은 고목처럼 찢기고 갈라졌다. 그 무시무시한 도강이 하나라도 진천의 몸에 적중된다면 진천은 이승을 하직해야 할 터였다.
벽력도문의 네 도객은 진천의 신법에 홀렸다. 현란하다는 표현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어찌 사람의 몸으로 저런 동작들이 가능하단 말인가. 진천은 폭우조차 범할 수 없는 바람과 같았다. 그를 젖게 하려면 사방을 아예 물로 채워야 할 것이었다.
주목하는 대상은 상반됐지만 승부에 대한 양측의 예상은 동일했다. 곽건 승! 진천 패! 승패는 곧 생사와 동의어였다.
무거운 정적이 장내에 안개처럼 깔린 가운데 안구를 쏟아 낼 듯 왕방울 눈을 부릅뜨고 있던 대웅이 느닷없이 고함을 내질렀다.
“안 돼!”
남천도왕의 삼대무학은 알고도 막지 못한다는 절학이었다. 모르고 당하면 더더욱 대응 불가였다.
진천은 곽건이 파도천망(破刀天網)을 결정타로 쓰지는 않으리라 보았다. 대웅이 이미 선보였으니 꺼릴 공산이 컸다. 그렇다면 십전섬뢰(十電閃雷) 아니면 격격쇄(隔擊碎)일 것이었다. 진천은 전자일 거라 예측했다. 팔영보의 현묘함을 감안한 곽건은 그쪽의 성공 가능성을 보다 높이 칠 터였다.
곽건의 뱀눈을 예의 주시하고 있던 진천은 안광의 미묘한 변화를 놓치지 않고 선제적으로 치고 나갔다. 변변한 반격도 없이 후퇴를 거듭하던 진천이 갑자기 달려들었지만, 곽건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염두에 두었던 필살기를 터뜨렸다. 그의 칼에서 뻗어 나온 열 줄기의 강선(鋼線)이 진천의 동체를 꿰뚫었다. 하지만 진천은 쓰러지지 않고 곽건에게 쇄도했다.
모골이 송연해진 곽건이 재빨리 칼을 들어 진천을 내리쳤다. 땅 밑에서 누군가 잡아당긴 것처럼 아래로 쑥 꺼지며 진천이 곽건의 측면을 공략했다. 회선보로 피해 내려던 곽건은 단말마의 비명을 내질렀다. 한 자 길이였던 진천의 절멸도가 일순간 길어지고 휘어지며 그에게 달라붙었기 때문이었다.
진천의 절멸참이 곽건의 우측 늑골부터 허벅지까지 갈랐다. 호신갑 덕분에 두 동강이 나는 참사는 모면했지만 곽건은 전투 불능에 빠졌다. 그러나 진천은 마무리를 짓지 못했다. 곽건의 뱀눈에 어린 독기를 보자마자 진천은 가일수 대신 보신을 택했다.
비환을 펼친 진천의 신형이 찰나지간 이 장을 이동했다. 한 움큼의 피를 토해 낸 진천은 가까스로 몸을 가누었다. 심히 위험했다. 조금만 늦었다면 곽건의 격격쇄에 의해 심장이 터졌을 것이었다.
진천은 쓰러진 곽건에게 다시 달려들었다. 그를 확실히 제압해야 상황을 종결할 수 있을 터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간발의 차이로 곽건을 확보하는 데 실패했다. 넋이 나간 채 관전 중이던 벽력도문의 도객들 중 한 명이 정신을 차리고 공격해 오자 진천은 그를 상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벽력도문의 제이호법 조중운이 진천을 제지하는 사이 곽건의 친위대장 모주석이 주군을 안아 들었다. 그러고는 지체 없이 대문을 향해 몸을 날렸다. 진천과 맞선 조중운은 그의 절멸도에 도신이 반 토막 나자 미련 없이 퇴각했다. 제삼호법 최태와 곽건의 친위대원 양일도 잽싸게 동료들의 뒤를 쫓았다.
그들이 사라지자 진천이 구토하듯 울혈을 게워 냈다. 하지만 그에게로 달려오는 친인들을 일별한 진천은 미소를 지었다. 죽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기묘한 침묵이 실내를 감돌았다.
다들 극도의 흥분 상태였으나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들을 둘러보며 진천은 새삼스레 가슴을 쓸어내렸다.
북운상단의 오재승에게 사문에 관해 토설하려는 찰나 방 밖에서 누군가 급보를 전했다. 일다경 전쯤 삼보장에서 뾰족한 비명 소리가 들렸다는 보고였다. 오재승이 하남신룡과의 대담을 방해하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두었으나 그의 수하들 중 한 명이 책망을 들을 것을 무릅쓰고 용기를 낸 것이었다. 비명 후에는 이상 징후가 없었다고 했지만, 심각한 상황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기에 진천은 오재승의 양해를 구하고 곧장 북운상단을 나와 삼보장으로 달려갔다.
삼보장의 담장 역할을 하는 참나무 숲이 시야에 들어왔을 때 진천의 귀가 기음을 잡아냈다. 마음이 급해진 진천은 수백 장을 한달음에 내달렸다. 그러고는 단숨에 수림과 죽림을 넘어 삼보장 경내로 뛰어내렸다. 반의반 각만 늦었어도 천추의 한을 남겼을 터였다.
“다들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진천의 소감에 가린이 청면을 구기며 으르렁거렸다. 진천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이 경우의 ‘무사함’은 아무 탈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단지 ‘살아 있음’을 의미했다. 그만큼 흉험한 싸움이지 않았던가.
기실 시종여일 무기력하게 서 있어야만 했던 노덕과 사소한 찰과상이 생긴 차소영을 빼고는 전부 반 시진 전의 상태가 아니었다. 기껏 어깻죽지의 부상이 아물었던 가린은 그에 준하는 중상을 입었고 여상구와 대웅, 그리고 고량은 내상이 악화되었다. 특히 여상구는 외상도 상당했다. 진천은 혈인이 된 의형의 모습에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정작 본인은 뭐가 좋은지 연신 싱글벙글했다.
개중 가장 멀쩡했으나 하수린 역시 아주 온전치는 않았다. 벽력도문의 노인과 마지막으로 격돌했을 때 상호 전력을 쏟아 내는 바람에 내상을 입었거니와 전신에 난 크고 작은 도상(刀傷)으로 피투성이였다. 하지만 그녀 역시 여상구처럼 치료와 환복을 미루고 참석을 고집했다.
용감하게 무인들의 격전에 끼어들었던 노미현은 심신에 받은 충격으로 제 발로 걷지도 못하고 차소영의 부축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그녀의 무사함이야말로 천운이었다.
모두들 착석하자 진천이 의형에게 물었다.
“어찌 된 일인지요?”
여상구가 눈을 돌려 하수린을 보았다. 그의 의사를 알아들었지만 하수린이 고개를 저었다.
“나보다 현매(賢妹)가 먼저 말하는 게 좋겠어요. 나는 그녀의 비명 소리를 듣고 뛰어나갔으니까요.”
하수린의 호칭에 노미현이 봉목을 찡그렸다. 그러나 불쾌감의 표시라기보다는 당혹감에서 나온 반응이었다. 하수린을 흘긋 쳐다본 노미현이 선홍빛 입술을 뗐다.
“아까 등을 걸러 나갔다가 문으로 들어오는 그들과 마주쳤어요. 그들의 중앙에 섰던 자가 대뜸 상스러운 희롱을 일삼더니 자기가 벽력도문에서 온 곽건이라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곽건의 언동을 떠올리며 노미현이 몸서리를 쳤다.
“……와옥으로 달려가려 했지만 밧줄에 묶인 듯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모두에게 알리려고 소리를 지른 거예요. 곧바로 수린 언니가 달려 나와 나를 그자의 압박에서 풀어 주었어요.”
노미현의 기습에 이번에는 하수린이 아미를 찡그렸다. 하지만 그녀의 갈매기 눈썹은 단순히 놀람의 표현이었다.
진천은 서로를 현매와 언니로 부른 두 여인의 교감을 반겼다. 무슨 영문인지 몰랐지만 흐뭇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노미현과 엷은 미소를 교환한 하수린이 그녀의 말을 이어받았다.
“이제부터는 내가 얘기하죠. 그 끔찍한 뱀눈이…….”
“하아!”
대웅의 탄식이 하수린의 설명을 중단시켰다. 모두의 시선이 그의 해골 면상으로 모였다. 대웅은 진천과만 눈을 맞췄다.
“다 내 잘못이다, 천.”
진천이 손을 뻗어 옆자리에 앉은 대웅의 앙상한 어깨를 잡았다. 하지만 그의 흐느낌을 막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