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72
제71화
대웅이 모두에게 자신의 개인사를 털어놓았다.
그의 고백이 이어지는 동안 좌중엔 깊은 침묵이 흘렀다. 그를 바라보는 눈길에 비난이나 비웃음은 담겨 있지 않았다. 다들 그를 이해했다. 곽건을 실제로 보고 겪었기 때문이었다. 불문곡직 친형을 죽이려 드는 동생이라니.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행태였다.
“나는 아우가 무서워 집에서 도망친 겁쟁이요. 나 때문에…….”
노미현이 대웅의 자기비하를 막았다.
“대 가가는 절대로 겁쟁이가 아니에요. 아까 그자가 나를 희롱했을 때 호통을 쳤잖아요? 부상 중인 몸임에도.”
하수린이 노미현을 거들었다.
“현매의 말이 맞아요. 그치가 날 위협했을 땐 나, 아니 우리 전체를 보호하기 위해 앞으로 나섰어요. 겁쟁이라면 결코 그런 행동을 할 수가 없어요.”
콧김을 뿜어내며 가린이 가세했다.
“대웅은, 용감하다.”
마무리를 지은 이는 여상구였다.
“그렇다마다. 무엇보다 자넨 위험을 무릅쓰고 내 목숨을 구해 주지 않았는가. 고맙네. 자네는 내 생명의 은인일세.”
대웅이 다시 울먹거렸다. 진천이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눈물이 터지는 사태를 예방했다.
“그들은 누구였나?”
질문에 답하기 위해 대웅이 감정을 추슬렀다.
“둘은 벽력도문의 호법들이고 나머지 둘은 건이 놈의 친위대야.”
“무위는?”
“모두 절정 이상이야. 벽력도문 내의 무력 서열을 따지자면 두 호법은 공히 십 위 언저리고 친위대 놈들도 이십 위 안에는 들어.”
하수린의 눈썹이 갈매기를 그렸다.
“어쩐지. 구레나룻 늙은이는 적운도 못지않은 강자였어. 붉은 수염도 만만치 않았고.”
대웅이 질린 듯하수린을 보았다.
“노인은 제이호법 조중운이고 적염의 장년인은 건이 자식의 친위대장인 모주석이오. 그들을 홀로 상대하다니 하 소저의 무공이 실로 놀랍소.”
하수린이 겸양지덕을 보였다.
“간신히 버티는 수준이었어요. 진 공자가 조금만 늦게 당도했으면, 아니 현매가 몸을 던져 붉은 수염을 막아 주지 않았다면 내 등짝은 반으로 갈렸을 거예요. 말이 나온 김에 물어보자, 현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어? 너는 도풍에 쓸리기만 해도 위험천만인데.”
노미현의 뽀얀 볼이 발갛게 물들었다.
“그때는 언니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나뿐만이 아니라 오라버니와 소영 언니도 마찬가지였어요. 서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이심전심으로 우리도 도와야 한다는 뜻이 통했어요. 나를 그 칼잡이에게 던진 이도 소영 언니였어요. 실은 깜짝 놀랐어요. 소영 언니가 나를 던져서가 아니라 내 마음을 정확히 알고 그대로 행해 줘서.”
차소영이 어색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렇게 간절한 눈빛인데 어떻게 모를 수 있니. 내버려 두면 무작정 뛰어들 게 빤해서 그럴 수밖에 없었어. 지금은 웃지만 얼마나 두려웠는지 몰라. 네가 변을 당할까 봐.”
하수린이 노미현을 응시했다.
“날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어째서 나를 구하려고 목숨을 건 거니?”
하수린의 눈을 피하지 않고 직시하며 노미현이 반문했다.
“언니는 왜 달아나지 않았나요? 얼마든지 몸을 뺄 수 있었는데. 막강한 데다 살기등등한 적들과 맞서 싸울 필요가 없었잖아요.”
하수린이 쓰게 웃었다.
“글쎄 말이야. 내가 왜 그랬을까.”
탁자를 사이에 둔 두 여인이 몸을 기울여 서로의 손을 잡았다. 분위기가 훈훈해졌지만 진천의 낯빛은 어두웠다.
* * *
진천의 요구에 따라 하수린이 곽건 일당과의 대치와 격돌 과정을 복기했다.
“……그러던 차에 때맞춰 당신이 나타난 거였어요. 당신과 그치가 붙을 땐 그들과 상호 견제하며 관전에 집중했고요.”
묵묵히 고개만 끄덕이는 진천을 보며 여상구가 하수린의 말을 이어받았다.
“아우님을 믿었네만 한편으론 조마조마했다네. 어린놈이 보통이 아니더구먼. 철곤귀가 위축될 만도 했네. 벽력도문이 괴물을 길러 냈어.”
모두들 여상구의 감상에 십분 공감한다는 표정이었다.
대웅이 변명하듯 말했다.
“나는 건이 자식이 그 정도로 강해졌을 줄은 몰랐어, 천. 그놈이 십전섬뢰를 쏘았을 땐 네가 죽는 줄 알고 간이 내려앉았더랬다. 정말 아찔했다.”
진천은 전적으로 수긍했다. 기실 상대의 수를 미리 읽고 대비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화연(化煙)을 펼칠 겨를도 없이 열 개의 꼬치에 관통당한 고깃덩이 신세가 되었을 터였다.
하지만 대웅은 곽건이 십전섬뢰에 이어 격격쇄까지 구사했음은 모르고 있었다. 곽건의 화후가 조금만 높았더라면, 그리고 비환(飛幻)이라는 구명절초가 없었더라면 십중팔구 그 자리에서 이승을 하직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진천은 곽건이 아니라 그가 대동한 이들의 무력에 더 신경이 쓰였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런 자들을 곽건에게 딸려 보낸 남천도왕의 저의가 꺼림칙했다. 단순히 곽건의 호위용으로 붙였을 거라 여기기엔 과도한 처사였다.
진천은 해석을 위해 머리를 굴리는 대신 직로를 택했다.
“네 조부의 허락 없이 그가 너를 해하려 들 수 있나, 대웅?”
진천의 질문에 대웅의 면상이 하얗게 질렸다. 그의 대답이 늦어지자 진천이 압박했다.
“아무리 악독하기로서니 비위 좀 건드렸다고 모두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 건 이해하기 어렵다. 네 동생은 애당초 살의를 품고 오지 않았을까 싶다. 문제는 그가 아니라 네 조부다. 남천도왕의 사전 허락 없이 네 동생이 그런 짓을 결행했을지 의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의 성정을 잘 모르니 확신할 순 없다. 그래서 네 판단을 듣고 싶다, 대웅.”
대웅이 마지못해 얄팍한 입술을 열었다.
“나도 몰라, 천. 건이 놈은 모두가 두려워하는 독종이지만, 할아버님에겐 순한 양이나 다름없어. 그놈이 할아버님의 뜻을 거슬러 나를 죽이려 들었을 거라 보기는 어려워. 하지만 할아버님이 나를 죽이라고 명령했을 것 같진 않아. 문주 위에 오르는 과정에서의 골육상잔을 철저하게 금지한 분이거든. 당신이 최초로 그 전통을 깼으니까. 아무도 할아버님의 경쟁자가 될 수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지만.”
진천은 한숨이 나왔다. 도움이 되기는커녕 되레 헷갈리게 만드는 진술이었다.
“그렇다면 다음은 어떨 것 같으냐?”
“다음이라니?”
“네 동생은 중상을 입었다. 남천도왕이 친히 나서서 보복하려 들지 않을까?”
그제야 중인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모두의 얼굴이 굳었지만 대웅은 의외로 담담했다.
“그 점에 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할아버님은 건이 놈이 설욕하길 바라실 테니까. 그 자식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설령 할아버님이 대신 빚을 갚아 주겠다고 해도 자기한테 맡겨 달라며 간청할 게 틀림없어. 그놈은 그런 놈이야.”
부담을 던 진천의 낯빛이 풀렸다.
여상구의 이마 주름이 물결치듯 움직였다.
“교활해 보이는 낯짝이었는데 제법 사내다운 구석이 있군.”
칭찬이 못마땅한지 대웅이 콧방귀를 꼈다.
“흥, 사내는 무슨. 알량한 자존심일 뿐이오. 그리고 착각하지들 마오. 그놈은 정정당당함과는 거리가 먼 위인이오. 천이를 꺾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거란 말이오. 만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공개 비무를 벌여 망가진 자존심을 회복하려 들겠지만, 승리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으면 천이의 힘을 빼놓기 위해 무슨 수작을 벌일지 모르오.”
진천에게 고개를 돌리며 대웅이 몇 마디 덧붙였다.
“그러니 자나 깨나 조심해야 해, 천. 그 지독한 놈과 얽힌 이상 앞으로 발 뻗고 자기는 글렀어.”
진천은 북운상단주 오재승에게 들었던 정보를 친인들과 공유했다.
그의 설명이 끝나기 무섭게 하수린이 불쑥 물었다.
“소중걸이란 사내는 몇 살이라고 하던가요?”
진천은 용모화에서 보았던 얼굴을 상기했다. 특징이 너무나 뚜렷해 길을 가다 지나치더라도 금방 알아볼 것 같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나이는 추정하기 어려웠다. 스물로도 보이고 마흔이라고 해도 그러려니 할 터였다.
“그의 나이에 관해서는 아는 바가 없소. 용모화로 보건대 그리 많지는 않은 듯하오.”
침묵으로 일관하던 고량이 모처럼 발언했다.
“사 년 전 보령에서 천지십수(天地十手)의 일인인 우상진(禹常進) 형과 조우해 손을 섞은 적이 있다. 막판에 그의 양보로 억지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승패를 나누기 힘들 만큼 백중지세였다. 천지십수는 다들 그와 무력이 비슷하다고 들었다. 특히 그들의 좌장 격인 철혈수(鐵血手) 마지웅(馬砥雄) 대협은 절정 상(上)의 강자로 알려져 있다. 초절정 고수로 평가받는 백(白) 문주를 차치하더라도 그들만으로 어지간한 방파를 쓸어 버리고도 남을 전력이다. 그런 이들을 단 일각 만에 몰살시켰다면 엄청난 강자가 아닐 수 없다. 만약 소중걸이란 자가 너나 대웅의 동생과 동년배라면 무림은 석년의 팔대무왕을 능가하는 신성들을 셋이나 맞이하게 되는 셈이다.”
모두들 동의를 표했다.
천지문은 중립 지대 최강을 다투는 문파였다. 그들과 비등한 곳은 더러 있으니 그들보다 강한 세력은 전무했다. 일천의 일류 무사를 거느린 농막도 문도가 이백에 불과한 천지문에 한 수 접고 들어가야 했다. 이는 보유한 상승 고수의 질에서 천지문이 농막을 압도했기 때문이었다.
“다음 날 장마류(掌魔流)의 마인들이 천지문을 접수했다니 그자는 마련 출신임에 분명하군. 허어, 벽력도문만이 아니라 마련도 괴물을 키워 냈구먼그래.”
여상구의 말에 고량이 도끼눈을 일그러뜨렸다. 그의 원수인 혈영장 남진은 마련 장마류를 대표하는 마두들 중 한 명이었다.
고량의 심사를 아랑곳 않고 여상구가 말을 이었다.
“어쩌면 정맹과 월교에서도 굉장한 물건들이 나올지 모르겠네. 바야흐로 새로운 영걸(英傑)들의 시대로구먼. 물론 아우님이 개중 단연 으뜸이 될 걸세. 그렇지 않은가?”
맞장구칠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진천은 쓴웃음을 지을 따름이었다.
오늘 생사투를 벌였던 곽건만 해도 그의 하수가 아니었다. 순수한 무력만 따진다면 오히려 곽건 쪽이 아주 약간이나마 우위에 있다고 보아야 했다. 그의 승리는 일 푼의 운과 보다 적절했던 임기응변 덕분이었다. 몸에 이상이 없다는 전제하에 서로의 패를 아는 상태에서 다시 싸운다면 불리한 국면에 처할 가능성이 십 할에 가까웠다.
하지만 진천은 의형의 맹목적인 기대감에 초를 치지 않고 화제를 바꾸었다.
“천지문에서 일어난 것 외에도 주목해야 할 사건들이 있습니다.”
좌중의 눈과 귀를 모은 진천이 농막과 만금장의 기변에 대해 알려 주었다.
여상구가 제일 먼저 의미를 알아차렸다. 그의 이마를 가로지른 일자 주름이 깊어졌다.
“허어, 이제 천하는 전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겠구먼.”
노덕도 눈가에 주름을 잡았다.
“그게 무슨 소리요, 여 각주? 사소한 사안들은 아니나 지나친 비약인 듯싶소만.”
“내 억측이 아니라 아우님의 고견이외다. 아우님은 벌써 한 달 전부터 이런 일들이 일어나리라 예상하고 있었소, 노 장주. 마령 문가가 백도방을 노릴 때부터 말이오.”
여상구가 공을 떠넘기자 진천은 자신의 추론을 간추려 모두에게 들려주었다.
대웅이 이의를 제기했다.
“사패가 중립 지대를 먹어 치우도록 구(舊) 사왕이 방관할 리가 없잖아, 천. 네 말마따나 이번에 벌어진 일련의 사태를 우연의 일치라 보긴 어렵지만 설사 네 주장이 맞더라도 사패 간의 단발적인 작당이 아닐까? 한 번만이라면 사왕을 어떻게든 구워삶을 수 있었을 것 같은데.”
“실은 그 그림도 그렸더랬다, 대웅. 하지만 오 단주에게서 사패 내부의 사정을 자세히 들은 후 지워 버렸다. 수십 년간 키운 힘에 걸맞은 이득을 창출하지 않으면 사패는 안으로 터질 지경에 이르렀다더구나. 중립 지대의 총면적은 사패 전체의 영토와 맞먹는다. 거기서 나오는 곡물과 재화 또한 어마어마한 양이다. 사패의 입장에서는 내전의 위험을 방치하느니, 바깥의 탐스러운 먹이를 취하는 게 훨씬 나았을 거다. 물론 그러려면 구 사왕이라는 걸림돌을 먼저 치워야 했겠지. 어떤 방식으로 그 난제를 해결했을지는 모르지만 그에 관해 몇 가지 가설은 세울 수 있을 것 같다. 중요한 건 무슨 내막이 있었는지 따져 보는 게 아니라 앞으로 일어날 변화들에 우리가 어떻게 대처하느냐다. 기왕 이렇게 모였으니 이 자리에서 그걸 논의했으면 한다.”
한마디라도 놓치면 소외되기라도 하는 양 모두들 온 정신을 모아 진천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