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73
제72화
열린 창으로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가부좌를 풀고 일어선 진천은 햇빛을 반기며 어지러이 춤을 추는 먼지들을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삶은 먼지일까 햇빛일까. 문득 떠오른 단상에 쓰게 웃고는 밖으로 나갔다.
막 해가 뜬 이른 시각임에도 부지런한 일꾼들이 삼보장 정문으로 일고여덟씩 무리 지어 들어오고 있었다. 석재가 산더미처럼 쌓인 죽림으로 이동하며 그들이 마당을 힐끔거렸다. 서툰 인부들이 마구잡이 공사를 한 듯 이곳저곳이 엉망이 되어 있었다. 곽건의 도강이 남긴 흔적들이었다.
진천은 폐허가 된 마당을 빙 둘러 지하 연무장을 건설하는 곳으로 갔다. 노덕이 벌써 나와서 공수(工首)들과 오늘의 작업에 관해 의논 중이었다. 진천이 다가가자 이십여 명의 공수들이 허리를 반으로 접었다. 원치 않는 공대였지만 진천은 그냥 내버려 두었다. 그나마 무턱대고 엎드렸던 첫날에 비해서는 나아진 것이었다.
진천은 노덕과 눈인사를 했다.
“좀 더 주무시지 않고요.”
노덕의 눈이 퀭했다. 밤새워 얘기들을 나누고 새벽녘에야 해산했으니 한 시진도 눈을 붙이지 못했을 터였다.
“허허, 늙으면 잠이 없는 법이라네. 충분히 잤으니 염려하지 말게나.”
듣는 귀가 많은지라 노덕은 진천의 상태에 관해 물어보지 않고 넘어갔다.
“북운상단에 갈 참인가?”
“아닙니다. 방문하기엔 너무 이르니 한 시진쯤 후에 가 볼까 합니다.”
기실 오재승은 빨리 보기를 학수고대할 것이었다. 어제 결정적인 대목에서 대화가 끊긴 데다 삼보장에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 몹시 궁금해할 터이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부탁할 일도 있는지라 진천은 오전 중으로 북운상단을 찾기로 했다.
“그러면 가서 쉬는 게 어떤가. 여기는 나에게 맡겨 두게나. 오늘은 돌을 깨지는 않을 터이니 덜 시끄러울 걸세.”
“알겠습니다, 대인. 무리하지 마시고 쉬엄쉬엄하십시오.”
노덕과 헤어진 진천은 와옥으로 돌아가지 않고 후원으로 향했다.
별채를 지나던 진천이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백와옥을 빠져나온 하수린이 그에게로 달려오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마치 사슴을 노리고 달려드는 표범 같았다.
“어디 가요?”
“산보를 하려던 참이오.”
“같이 가요. 괜찮죠?”
거절할 구실이 없었기에 진천은 하수린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었다.
“현매는 방금 전까지 나와 얘기를 나누다가 갑자기 쓰러졌어요.”
“…….”
“잠들었다고요.”
“알아들었소.”
“귀가 간지럽진 않았나요?”
“……!”
“현매에게서 당신의 과거사를 들었어요. 삼보장에선 비밀도 아니라더군요. 더욱이 당신의 ‘고귀한 혈통’도 이제 알게 됐으니 당신에 관해서는 모든 게 밝혀진 셈이네요.”
진천은 쓰게 웃었다. 간밤에 그에게 토설을 강요한 이는 대웅이었다. 어차피 조만간 드러날 터였기에 진천은 순순히 털어놓았다. 의외로 다들 충격을 받지 않은 표정들이었다. 몇몇은 마치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기까지 했다.
“당신과 내가 한 핏줄이라는 걸 아나요?”
진천의 처진 눈초리가 위로 올라갔다.
“무슨 소리요?”
“우리는 먼 친척이에요. 내 어머니도 그곳 출신이거든요. 당신 모친처럼 ‘고귀한 혈통’을 이어받진 않았지만 엄연한 직계예요. 솔직히 두 분이 알고 지냈을 가능성은 희박해요. 대충 촌수를 따져 보니 십일 촌쯤 되니까. 그래도 혈연임에는 분명해요. 참, 나는 당신한테 이모뻘이에요. 그러니 앞으로는 깍듯이 모셔야 할 거예요.”
진천은 실소했다. 그러면서 하수린이 모친을 화제로 삼지 않기를 바랐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하수린은 자신의 모친에 관해 언급했다.
“내 무재의 구 할은 어머니한테 물려받았어요. 아버지도 하남 무림에서는 알아주는 기재지만 어머니에겐 비교가 안 돼요. 일찍부터 제대로 무공을 익혔다면 어머닌 분명 일세를 풍미한 고수가 되었을 거예요. 너무 안타까워요. 그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도 고작 권각술 따위만 배웠다니. 어떻게 그럴 수 있죠? 남존여비라는 덜 떨어진 사상을 당연시하던 고대 왕국이 멸망한 지가 언젠데. 그들은 나에게도 외가지만 정나미 떨어지는 족속이에요.”
진천은 하수린의 분노에 공감했다. 그의 모친에게 일어난 비사(悲史)도 ‘위대한 가문’의 ‘치졸한 가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당신 어머니는 어땠나요? 당신을 보면 그분의 무재도 보통이 아니었을 것 같은데.”
하수린이 우려했던 질문을 던졌다.
“많이 아쉬워하셨소.”
진천의 짤막한 답변에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으나 하수린은 더 캐려 들지 않고 넘어갔다. 노미현에게서 그들 모자의 사연을 들은 탓이리라.
* * *
두 사람은 연못가의 정자에 들어가 휴식을 취했다.
작정이라도 한 듯, 하수린이 다시 부담스런 주제를 꺼내 들었다.
“현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일전에도 똑같은 걸 물었던 걸로 기억하오만. 내 대답도 그때와 동일하오.”
“정말 그녀에게 연심을 느끼지 않나요?”
“…….”
“현매는 당신을 좋아해요. 사내로서. 알고 있겠죠?”
“…….”
“참 곤란한 상황 아닌가요? 대 공자는 현매에게 푹 빠져 있고, 현매는 해바라기인 양 당신만 바라보고, 당신은 대 공자를 살뜰히 챙기니 말이에요. 왠지 익숙한 느낌이 들지 않나요?”
진천은 여전히 묵묵부답했다. 하지만 하수린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모를 수가 없었다.
엇갈린 애정으로 인해 비극으로 치달았던 젊은 날의 주안삼보와 작금의 세 남녀는 비슷한 처지였다. 노덕은 전하연을 맹목적으로 연모했지만 전하연의 마음은 고숭에게 가 있었다. 고숭은 남녀 간의 연정보다는 형제지의를 우선시한 인물이었다. 그들은 꼬이고 꼬인 매듭을 풀지 못해 불행의 구렁텅이에 빠져들고 말았다.
“당신이 얼마나 명석한지 알지만, 이 난제를 푸는 건 쉽지 않을 거예요. 왜냐하면 그 삼각관계에 한 명이 더 추가되니까요.”
진천을 빤히 쳐다보며 하수린이 말을 이었다.
“원체도 당신에게 반했지만 요 보름간 구인결을 치르고 당신과 함께 지내는 동안 사랑이 더 깊어지고 단단해졌어요. 당신 생각만 해도 심장이 두근거리고 가슴이 뜨거워져요. 내가 잘못된 건가요?”
“…….”
“장차 천하가 혈풍에 휩쓸릴지도 모를 엄혹한 시국에 이런 한가한 소리나 하고 있어서 한심한가요?”
“…….”
하수린이 고양이를 닮은 눈을 치떴다.
“그렇게 청산유수인 사람이 왜 이렇게 꿀 먹은 벙어리처럼 굴죠? 벽에다 대고 떠드는 기분이네요. 내가 싫다고 해도 좋으니까 뭐라도 말해 봐요.”
진천이 무겁게 닫혀 있던 입을 열었다.
“남녀 관계에 대해 내가 갖고 있는 원칙이 있소.”
“잠깐만요. 원칙 얘기가 나왔으니 내 것부터 먼저 말할게요.”
“…….”
“나는 내 마음을 속에 담아 두지 못해요. 좋으면 좋다고 하고 싫으면 싫다고 하죠. 괜한 손해를 자초하는 때도 많고 무례하거나 경솔하다는 비난도 받기 일쑤지만 그게 나예요. 그래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전날과 오늘 당신에게 연심을 고백한 거예요. 하지만 이 점은 분명히 해 두고 싶어요. 나는 당신에게 내 마음을 받아들여 달라고 구걸하고 싶은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어요. 그건 전적으로 당신의 선택이에요. 나를 좋아하면 좋겠지만 설사 내가 싫다고 해도 상관없어요. 속이야 상하겠지만 어쩌겠어요. 싫다는데. 나에게 고백할 자유가 있는 것처럼 당신에게도 거부할 권리가 있어요. 그 반대도 마찬가지고요.”
진천은 하마터면 박수를 칠 뻔했다.
“하 소저의 말에 동의하오. 누구든 다른 이에게 마음이 끌리는 자체는 아무 문제가 없소.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그 마음을 대상자에게 전하는 행위도 지극히 온당하오. 하지만 하 소저 말마따나 수용 여부는 그 대상자의 선택에 달려 있소. 어떤 선택이든 존중해야 하오. 이 원칙만 잘 지키면 불필요한 갈등이나 후유증을 줄일 수 있을 거라 보오.”
“품성이 따뜻한 줄 알았는데 이런 면에서는 차갑기 이를 데 없군요. 그래서 결론이 뭔가요? 나와 연인지연을 맺을 의향이 있나요? 아니면 매몰차게 뿌리칠 텐가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듯해 진천은 맥이 빠졌다.
“양자택일을 하기는 이른 시점인 것 같소만.”
하수린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여지를 주겠단 말이군요. 그렇죠?”
꼭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진천은 말을 아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무언가 주저하던 하수린은 직설적인 성격답게 목구멍에 걸린 말을 토해 내었다.
“나는 구음절맥이에요. 그게 무슨 의미인 줄 알죠?”
진천이 입을 열기도 전에 하수린이 스스로 답했다.
“설사 우리가 연인이 된다고 해도 운우지락은 나눌 수 없다는 뜻이에요.”
하수린의 아미들이 갈매기를 그렸다.
“그래서 미리 말해 두고 싶어요. 우리의 연분이 이루어진 이후 당신이 다른 여자들에게 정욕을 해소한다고 해도 나는 개의치 않을 거예요. 그녀들과 정신적인 교감까지 나눈다면 언짢을 테지만 그것도 간섭하지 않을 작정이에요. 당신을 사랑하지만 당신이 내 소유물은 아니니까.”
진천은 놀랐다. 하수린의 선언은 그의 인식과 일맥상통했다.
“우리는 보기보다 공통점이 많구려.”
하수린의 눈썹 끝이 위로 휘었다.
“설마 내 말을 빌미로 마음껏 씨를 뿌리고 다니겠다는 소리는 아니겠죠? 그런 마음가짐이라는 거지 난봉꾼은 질색이에요. 솔직히 말해 봐요.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여인들을 홀리고 품었나요?”
진천은 그저 쓰게 웃었다.
“그만 들어갑시다. 의형과 대웅에게 들렀다가 북운상단에 가 봐야 하오.”
하수린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진천의 팔을 잡았다. 그녀의 손을 뿌리치지는 않았지만 진천이 당김에도 응하지 않자 하수린이 따라서 일어섰다. 두 사람의 얼굴이 코가 닿을 듯 가까워졌다.
하수린이 진천의 턱에 입김을 토해 내며 물었다.
“입 맞춰도 돼요?”
“안 되오.”
검지로 하수린의 이마를 밀어내며 진천이 대답했다.
* * *
곽건이 삼보장을 침입한 날로부터 닷새가 지났다. 그와의 일전에서 입은 내상이 아물지 않았지만 진천은 외가로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사부들의 정체가 언제 밝혀질지 몰랐기에 더 미루기 어려웠다.
진천은 당분간은 사패가 준동하지 않으리라 예측했다. 그들은 마령 문가가 백도방을 집어삼킨 연후에나 움직일 것이었다. 백도방이 마령 문가의 수중에 떨어지면 사패는 본격적으로 중립 지대 사냥에 나설 공산이 컸다. 그리되면 삼보장과 도화각은 정맹이나 마련의 일차적인 먹잇감이 될 터였다. 진천은 그 전에 외가의 어른들을 만나 비빌 언덕을 만들고 싶었다.
삼보장의 호위는 하수린과 가린에게 맡겼다. 가린은 예의 경이로운 자가 치유력을 다시금 과시하며 전투에 지장이 없을 만큼 회복된 상태였다. 하수린에게서 가린이 최우선적으로 잡아먹고자 하는 상대가 그에게서 곽건으로 바뀌었다는 귀띔을 들은 진천은 기분이 묘했다.
여상구는 진천에게 천잠갑의(天蠶甲衣)를 떠넘겼다. 싸우러 가는 길이 아니란 핑계를 대며 극구 마다했으나 여상구가 전에 없이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진천은 할 수 없이 의형이 건네주는 보의(寶衣)를 내의 삼아 입었다. 갑의라고 했지만, 군문이 있던 시절 장수들이 걸쳤다는 갑옷처럼 딱딱한 구석은 전혀 없고 비단처럼 부드럽고 가벼웠다.
기실 천잠갑의는 군데군데 찢어지고 뚫려 넝마 같았다. 전날 화월도군의 탄강이 만든 상처였다. 당시 여상구는 천잠갑의를 여덟 겹이나 포갠 후 심장 부위에 고정시켰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즉사를 면치 못했을 터였다.
전날 밤 삼보장의 친인들에게 출발을 알린 진천은 동이 트기 전 조용히 삼보장을 나섰다. 그의 목적지는 주안에서 정동(正東)으로 사천 리가량 떨어진 원주였다. 원주는 정파 무림의 최강의 세력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강가(姜家)의 터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