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74
제73화
진천은 해가 지기 전에 보경산맥에 당도했다.
남북으로 칠백 리에 걸쳐 뻗은 보경산맥은 중립 지대와 정맹의 영토를 가르는 경계선 중의 하나였다. 험준한 산악이 아니었기에 처처에 상춘객들이 넘실거렸다.
진천은 사람들의 발길과 눈길이 닿지 않는 곳으로만 골라서 이동했다. 중인의 주목을 피해 경신을 펼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주안에서 보경산맥까지 오는 동안 네 번이나 그를 알아보는 이들을 만났기 때문이었다. 특히 인파로 붐비는 시진을 지날 때는 어김없이 그를 보고 어리둥절해하거나 당황하는 자들을 접했다. 흑문이나 상운 같은 정보 조직에 속한 문통(聞通)들일 터였다. 시치미를 뚝 떼고 거리를 벌렸지만 등줄기가 따끔거렸다.
보경산맥을 넘은 진천은 인적이 드문 경로를 택하기로 했다. 원주에 이르기 전에 행적이 노출되는 건 바람직한 일이 아니었다.
초행이지만 지리에 대해서는 자신이 있었다. 소싯적에 대륙 전역을 떠돌며 몸으로 지리를 익혔다는 허 노야에게서 전수받은 지식도 상당하지만 요 며칠간 북운상단의 오재승이 건네준 지도책을 꼼꼼히 살펴보고 숙지한 덕분이었다. 진천은 중원 어디든 헤매지 않고 찾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해가 서산이 되어 버린 보경산맥 뒤로 넘어갔다.
어둠이 내려앉은 들판을 달리며 진천은 자신의 자신감이 허세가 아님을 확인하고는 뿌듯했다. 지도에 나온 손금 같은 선들과 수십, 수백 리에 걸쳐 이어지는 지형지물을 대비시키는 작업은 결코 간단치 않았지만 시행착오도 거의 없이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수목들의 바다라 할 밀림에서 단련한 지리 감각에 더해 오재승이 제공했던 지도들의 정확성에 힘입은 바가 컸다.
혹시 모를 목격자와 내상의 악화를 염려해 전속력으로 경공을 전개하지는 않았지만 쉼 없이 달린 덕택에 진천은 해가 밝아 오기 전 원주에서 천팔백 리쯤 떨어진 오로(五盧)에 이르렀다. 진천은 오로에서 말을 구해 가인(佳仁)을 경유한 후 우경(優慶)까지 갈 참이었다. 우경에서 원주는 지척이었다.
인구 이십만의 대도인 오로는 정맹의 대표적인 상도(商都) 중 하나였다. 오로는 신분을 증명하는 신패 없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도시로도 유명했다. 오로를 직할지로 둔 고암(古巖) 설가(薛家)가 원활한 상행위를 위해 일체의 검문을 폐지했기 때문이었다.
진천은 오로에 들기 전 중립 지대에서 구해 두었던 죽립을 썼다. 위장이라하기엔 민망스러운 수준이었지만 효과는 탁월했다. 그의 얼굴에서 그나마 특징적이라 할 처진 눈이 가려졌기에 아무도 하급의 장돌뱅이처럼 보이는 그를 눈여겨보지 않았다.
마방(馬房)에 들른 진천은 늙었지만 튼튼한 말을 구입했다. 그를 얕잡아 본 상인이 바가지를 씌우려 들었으나 흥정을 위해 말을 섞어 보고는 보기와 달리 만만치 않은 고객임을 간파하고서 적당한 값에 내놓았다.
새로운 주인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노마는 진천이 고삐를 당겨도 따라오지 않고 버텼다. 진천은 말을 강압적으로 다루지 않고 다독거리며 친해지려 애썼다. 진심이 통했는지 말은 차츰 말을 들었다.
연습 삼아 대여섯 번 도화각 마차의 준마들을 타 본 게 전부였지만 진천의 기마술은 흠잡을 데 없었다. 노마는 자기의 힘과 속도에 순응하는 새 주인의 조종술에 신이 난 듯 힘차게 달렸다. 자주 휴식을 주어야 했지만 노마는 한 시진 반 후 진천을 오로에서 사백 리 떨어진 당진(棠津)에 진천을 데려다주었다.
당진의 마방에서 최상급의 여물로 노마의 노고에 감사를 표한 진천은 다른 말로 갈아타고 소추(小秋)로 향했다. 다시 세 필의 말에게 신세를 지며 가인과 장동(長洞), 그리고 문기(雯崎)를 거쳐 우경에 도달했을 때는 자시(子時)가 임박한 한밤중이었다.
우경에서 원주까지는 이백 리 길이었다.
진천은 거기서부터는 경신을 펼쳤다. 날을 넘기고 축시(丑時) 초에 원주 근역의 우정산(牛鼎山)에 이른 진천은 협곡의 동굴에서 운공에 들었다. 이틀간의 강행군으로 번 세 시진의 여유를 지친 육신의 회복에 쓸 참이었다.
날이 밝기 전 동굴을 나온 진천은 우정산에서 나와 원주로 향했다. 원주는 정파제일가로 군림하는 강가의 본거지답지 않게 인구 오만 어림에 불과한 소도였다. 그중 삼분지 일이 강씨(姜氏) 일족이었다.
원주엔 낮게 누운 와옥만 즐비할 뿐 고루거각들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곳이었지만 그래서 역설적으로 위엄을 자아내는 측면도 있었다. 진천은 저자로 들어가지 않고 원주 외곽을 타고 돌았다. 강가 직계들의 거주지는 북쪽의 둔덕에 위치했다. 진천이 둔덕 아래 왔을 때 마침 해가 떴다.
새 아침의 보드라운 햇살을 받으며 진천은 잠시 갈등했다. 은밀히 심장부로 잠입할 것인가. 아니면 공개적으로 방문을 알릴 것인가.
일관성을 고려한 진천은 전자를 택했다. 원주에 와서 느낀 첫인상은 경계가 의외로 허술하다는 점이었다. 자신감의 표현이겠지만 소란이 벌어질 것도 각오했던 그로서는 허탈할 지경이었다.
진천은 강가가 어디까지 자신의 접근을 용인하는지 시험해 보기로 했다. 길이 나 있지 않은 쪽으로 둔덕을 오른 진천은 근처의 커다란 느티나무에 올라갔다. 칠팔 장 높이의 거목 꼭대기에 오르자 고즈넉한 마을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오재승에게 얻은 정보에 따르면 백여 가구가 이십만 평의 대지에 흩어져 있다고 했다. 직계의 총인원은 대략 천오백 정도라 했다.
마을을 훑어보던 진천은 고개를 갸웃했다. 기와집들은 규모와 구조가 엇비슷했다. 딱히 두드러진 특징을 지닌 곳을 찾지 못한 진천은 나무에서 내려왔다. 계획의 수정은 불가피했다.
진천은 잡풀 하나 떨어져 있지 않은 깨끗한 길을 부지런히 쓸고 있는 칠십 대 노인에게 다가갔다. 노인이 비질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짐짓 인상을 썼지만 이방인에 대한 반응이라기보다는 쭉 편 허리에서 올라오는 통증 탓이리라 진천은 짐작했다.
“뉘시오?”
약간의 당혹감이 담긴 목소리로 노인이 물었다.
진천은 품에서 오각 금패를 꺼냈다.
“제게 이 신물을 주신 분을 뵈러 왔습니다.”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노인이 금패를 확인하지도 않고 바짝 엎드렸다.
“비천한 것이 귀빈을 몰라 뵈어서 죄송합니다.”
진천은 당황했다.
“아닙니다. 일어나십시오.”
진천이 노인의 겨드랑이에 손을 집어넣고 일으켰다. 노인은 황송해하며 진천의 부축에 응했다. 하지만 허리는 반으로 접은 상태였다.
그가 알기로 금패는 강가를 통틀어도 삼십 개를 넘지 않았다. 행색은 허름하지만 목전의 청년은 그와 같은 아랫것들이 감히 대면조차 할 수 없는 지체 높은 거물임에 분명했다. 그렇지 않으면 금패를 받았을 리 만무했다.
멀리 일정한 간격을 떨어져 빗자루를 놀리고 있던 몇몇 하인들이 상황을 감지하고는 진천과 노인을 주시했다. 그들을 일별한 진천은 자신이 아니라 신패 주인의 신분을 밝혔다.
“그 어른의 성함은 찬자(燦字)입니다. 이곳의 주무(主務)로 알고 있습니다만. 어디에 계시는지 아십니까?”
“제발, 말씀을 낮추십시오. 주무님의 거처라면 잘 알고 있습니다. 공자님을 안내할 이를 불러올 테니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진천은 노인에게 직접 안내를 부탁하고 싶었지만 부담스러워할 게 빤한지라 그가 하자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도망치듯 잰걸음으로 진천에게서 멀어지는 노인에게 그의 동료들이 연못에 떨어진 살코기를 발견한 잉어들처럼 모여들었다. 힐끔거림과 웅성거림이 보이고 들리더니 그들 중 하나가 어디론가 뛰어갔다.
잠시 후 일군의 무인들이 진천이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그들의 선두에 섰던 오십 대 초반의 중년인이 물었다.
“귀하가 정말로 하남신룡이오?”
포권을 취하며 진천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 * *
진천은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깊고 그윽한 맛이 혀에 배어들자 정신이 또렷해졌다. 다도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지만 매우 귀한 차임은 알고도 남았다.
진천이 차를 음미하고 있을 때 문이 열리더니 강찬이 헐레벌떡 들어왔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네. 의관을 갖추느라 좀 늦었네.”
자리에서 일어나며 진천도 사과했다.
“아닙니다. 사전에 통보도 드리지 않고 이른 아침부터 불쑥 찾아와서 제가 죄송합니다.”
강찬이 호기를 과시하려는 듯 껄껄 웃었다.
“서로 실책이 있었으니 이번 승부는 비긴 걸로 판정하겠네.”
진천은 미소로써 강찬의 농에 화답했다.
“어쨌거나 잘 왔네. 솔직히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네만, 자네라면 언제든 환영일세. 전날 약속한 대로 내 아끼던 설산삼주를 기꺼이 대접함세.”
“고맙습니다, 어르신.”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강찬과 구인결을 화제로 얼마간 사담을 나누던 진천은 본 용건을 밝히기로 했다.
“가주님께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만, 괜찮을는지요?”
별안간 강찬의 면상이 굳었다.
“가주라면 도왕(刀王) 말인가?”
정확히는 북천도왕(北天刀王)이었지만 진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르신.”
강찬의 표정을 살핀 진천은 그가 언짢아하고 있음을 알았다. 근간에 상당한 무명을 얻었다고는 하나 새파란 후기지수가 정파 무림의 절대자를 친견하겠다고 나서는 꼴이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실제로 강찬의 좁은 심보는 불쾌감으로 가득 찼다. 전날 남천도왕이 만수보에 나타나긴 했으나 무왕들은 아무나 아무 때고 볼 수 있는 이들이 아니었다. 그것은 강찬 자신처럼 극소수의 친인들만이 누리는 특권이었다.
강찬이 어깃장을 부렸다.
“나와는 사촌지간을 넘어 친형제 이상으로 막역한 사이이니 내가 권하면 즉시 자네를 만나 주기야 하겠지만 당장은 곤란하네. 절차를 밟아야 한다는 말일세. 가까운 사이일수록 예의를 지켜야 하는 법이니까. 나는 사사로운 친분을 앞세워 공적인 업무를 처리하는 자들을 극도로 혐오하는 사람일세. 설마 나를 그런 부류의 위인으로 보았단 말인가? 그렇다면 심히 유감이구먼.”
절로 쓴웃음이 났지만 진천은 표정관리를 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어르신. 수십 년간 정파제일가의 대소사를 관장하시면서 사무사의 공정함과 탁월한 경륜으로 만인의 존경과 칭송을 받으셨음을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진천의 아부가 통했는지 동태처럼 딱딱해졌던 강찬의 낯짝이 삶은 문어처럼 풀렸다.
“험험, 안다니 다행이군. 내 입으로 말하긴 그러네만 나는 정맹의 맹주 노릇도 해야 하는 운(雲) 형님에게 사실상 가문을 다스리는 중책을 위임받은 이후 만사에 무사(無私)와 공정의 원칙을 철저히 적용했다네. 만수보에서 자네들에게 망신을 당한 마령 문가가 이십 년 전에 총관이란 작자를 잘못 부려서 큰 낭패를 보았음을 아는가? 후계자 문제로 바람 잘 날이 없는 사평(沙平) 팽가(彭家)는 물론이고, 성주 성가나 고암 설가 등도 크고 작은 구설수가 그치질 않았네. 그러나 우리 강가는 지난 이십 년간 모깃소리만 한 잡음도 없이 완벽한 치세를 이루었다네. 안팎을 가리지 않고 모두들 내 공이라고 떠들고 있음을 아네만, 나로서는 그저 내가 세운 원칙을 엄정히 실행한 것밖에 없네.”
진천의 면전에 침까지 튀겨 가며 자기 자랑을 쏟아 내던 강찬이 정색하더니 진천이 우려하는 말을 덧붙였다.
“그런 의미에서 도왕을 알현하고 싶다는 자네의 청은 우리의 친분과 무관하게 공식적인 절차에 따라 진행할 참일세. 정확히 언제 그를 보게 될는지는 미리 알려 줄 수 없네. 그의 일정에 따라야 하니까.”
진천은 이번에는 고소(苦笑)를 억제하지 않았다.
“제가 도왕 어르신을 뵙고자 하는 까닭은 단지 무림 말학으로서 인사를 올리고자 함이 아닙니다. 저는 그분과 사적인 관계로…….”
백미를 실룩거리며 강찬이 진천의 말을 끊었다.
“무슨 소린가? 도왕에게 구인결에 대해 보고하며 오래도록 얘기를 나눴네만 그에게서 자네를 안다는 말은 전혀 듣지 못했는데. 거짓으로 기만할 셈이라면 상대를 잘못 골랐네.”
진천은 강찬이 또 장광설을 늘어놓기 전에 단도직입했다.
“도왕 어르신은 제게 외조부가 되십니다.”
일순 멍해지더니 강찬의 눈이 튀어나올 듯했다.
“뭣이? 설마 네가 연(蓮)이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강찬은 말을 맺지 않고 진천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