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77
제76화
강민의 칼을 빗겨냈지만 진천은 그의 도기(刀氣)가 정수리에 꽂히는 것을 느끼고 혼비백산했다. 강민은 처음부터 그가 피할 방향을 예측하고 그리로 진력(眞力)을 쏘아낸 것이었다.
이는 결코 간단한 수법이 아니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도기를 갈무리하고 있어야 하거니와 목표물이 이동하는 방향은 물론이고 속도와 거리까지 정확하게 짚어내야 하기 때문이었다.
호신강기를 두르지 않은 상대라면 일격에 절명시킬 수 있는 무서운 수법이기도 했다. 강기를 머금지는 않았으나 강민의 도기는 바위도 쪼갤 위력을 갖고 있었다. 사람의 두개골을 부수는 건 어렵지 않을 터였다.
위기를 인지하자마자 진천은 팔영보의 최절초라 할 비환을 펼쳤다. 그러자 이번에는 강민이 놀랐다. 그의 암류(暗流)는 분명 진천의 두부(頭部)에 떨어졌다. 더욱이 육질을 가르는 손맛까지 느껴졌다. 그러나 머리가 깨졌거나 어찌어찌 피하더라도 최소한 어깨는 찍혔을 진천은 온데간데없고 그가 발한 필살의 도기는 엄한 공간만을 갈랐을 뿐이었다.
유령처럼 사라진 진천의 신형이 이 장 떨어진 곳에 나타나자 강민은 종조부의 전언이 엉터리였음을 깨달았다. 사실 절정의 하(下)에도 미치지 못하는 그의 안목을 크게 신뢰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차이가 현저할 줄은 몰랐다.
강민은 욕지기가 치밀었다. 간신히 수강(手剛)을 형성할 정도의 수준이라더니. 창천도군이 본연의 무력을 삼 할도 발휘하지 않았을 거라더니. 하남신룡의 무위가 절정의 상(上)이나 기껏해야 초절정의 초입이라더니. 터무니없는 분석이었다.
방금 현시한 신법 하나만으로도 진천은 초절정고수로 평가받아야 마땅했다. 가문을 통틀어도 그러한 신기를 구사할 수 있는 이는 서넛에 불과했다.
단 일초의 공방으로 진천을 인정한 강민은 최고조의 투지를 끌어올렸다. 장차 걸어가야 할 지존지로(至尊之路)에 최대 장애물(障碍物)이 될 자를 일찌감치 눌러놓고 싶었다.
진천을 쫓지 않고 제자리에 선 강민이 오른 허리에 매달린 칼도 꺼냈다. 협도와는 반대로 폭이 넓고 끝이 뭉툭한 귀두도(鬼頭刀)였다.
강민의 양 손에 들린 두 자루의 칼이 마치 서로에게 인사하듯 도명(刀鳴)을 토해냈다.
키이이이.
우우웅.
상이한 칼 울음이 이른 아침의 대기를 찢어발겼다.
캉!
칼들을 부딪쳐 불꽃을 튀겨낸 강민이 진천에게 쇄도했다. 이로써 이종사촌들 간의 본격적인 대결이 시작되었다.
기실 대결이라고 표현하기엔 어폐가 있었다. 진천이 충돌을 자제하고 회피로 일관했기 때문이었다.
강민의 쌍도가 현란한 춤사위를 과시하며 그를 몰아세웠으나 그의 몸을 범하는 데는 번번이 실패했다. 강민이 일으킨 도기의 폭풍은 진천이 아니라 애꿎은 돌바닥만 쓸고 지나갔다.
진천이 미꾸라지처럼 칼의 그물에서 빠져나가자 강민은 약이 바짝 올랐다. 속도로는 뒤질 게 없었으나 도저히 그의 신출귀몰한 보법을 제어할 수 없었다. 술래잡기를 하듯 너른 연무장을 빙글빙글 돌아가며 쫓고 쫓기던 두 사람은 동시에 멈춰 섰다. 정확히 말하자면 강민이 추격을 단념하자 진천도 발을 세운 것이었다.
강민이 진천을 노려보았다.
“뭐하자는 수작이냐?”
진천이 반문했다.
“뭐가 말이오?”
뿌드득.
말문이 막힌 강민이 이를 갈았다. 멀찌감치 떨어져 관전하던 강정이 그의 심사를 대변했다.
“비무를 한다는 놈이 도망만 다녀서야 되겠느냐? 알량한 발재주는 충분히 보았으니까 이제 제대로 붙어봐라.”
진천은 강정의 요구를 묵살하고 기감을 끌어올렸다.
틀림없이 지켜보는 눈들이 있을 터였다. 그러나 어떤 기운도 포착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이 관전자들의 부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연무장이 워낙 넓은 탓에 담장 바깥을 두루두루 살피는 게 어렵기도 하거니와 그들이 소수인데다 고수이고 거기에 기를 감추고 있다면 탐지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진천이 대꾸는커녕 일별도 주지 않고 무시하자 강정이 발끈했다.
“건방진 놈. 민이가 봐줘서 그렇지 진짜 실력을 보였다면 너는 지금쯤…….”
강민이 강정의 말을 잘랐다.
“그만.”
강정은 움찔했다. 말 한마디로 그의 입을 다물게 한 강민이 진천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다시 시작하자. 이제부터는 다를 거다.”
진천은 긴장했다.
강민의 움직임이 느려졌기 때문이었다. 흥분으로 물들어 있던 그의 동공도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바람직한 징조가 아니었다.
강민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진천을 몰아갔다. 진천은 거리를 유지하며 강민의 기습에 대비했다. 이삼 장의 간격을 두고 두 사람은 전진하고 물러서기를 반복했다. 진천은 커다란 갈지자 행보를 펼치며 연무장의 중앙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주의했다. 연무장이 넓다하나 귀퉁이 쪽으로 몰리면 아무래도 행동에 제약이 따를 터였다. 강민과의 정면충돌은 최대한 삼가야 했다.
진천은 그로서는 무의미한 이 비무가 별 탈 없이 끝나기만을 바랐다. 강민으로 하여금 그의 무공을 드러내도록 부추긴 큰 외숙의 의도에 선의가 깃들었으리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가급적 그에게 빌미를 주지 않을 참이었다.
강민이 서서히 속력을 높였다. 그에 조응해 진천의 발놀림도 빨라졌다. 진천의 보법에 어느 정도 적응한 강민은 불필요한 동작들을 버리고 퇴로를 차단하는 데 주력했다. 진천은 그가 시나브로 대문 왼편의 담장으로 몰아가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아직 공간에 여유가 있었으나 미리 빠져나오기로 작정한 진천은 무시무시한 칼바람을 빗겨내며 연무장 가운데로 내달렸다. 그 순간 난데없는 굉음이 들리며 느닷없이 나타난 석벽이 그의 진로를 방해했다.
우르릉.
바둑판처럼 반듯하게 짜인 연무장 돌바닥 일부가 우후죽순처럼 솟아나고 있었다. 진천은 강정이 기관장치를 작동시켰음을 알았다. 비무를 재개하기 직전 강민이 전음으로 지시했음에 틀림없었다.
삼면에서 올라온 석벽들에 가로막힌 진천은 선택의 기로에 섰다. 뛰어오를 것인가 돌아설 것인가.
전자는 위험했고 후자는 비무에 임하며 정했던 원칙에 어긋났다. 어느 쪽도 상책이 아니었다. 심사숙고할 여유가 없었기에 진천은 본능에 따랐다. 몸을 돌린 진천에게 강민이 날린 도풍이 불어 닥쳤다.
진천은 다시 한 번 결단의 순간을 맞이했다. 도풍을 피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강민은 필히 후속타를 준비해두고 있을 터였다. 아마도 일격필살을 노리는 결정타일 것이었다.
강민이 살의를 품었는지는 불분명하나 비무에서 불상사가 일어나더라도 개의치 않을 것임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진천은 그가 마지막 순간 손속에 사정을 둘 거라는 기대를 접었다. 결국 자신의 안위는 스스로 돌보아야 했다.
입술을 질끈 깨문 진천은 역천기공을 운용했다.
내상이 아물지 않은 상태라 심장이 터질 듯한 고통이 엄습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강민의 전진을 저지하지 않으면 궁지에 몰릴 게 뻔했다.
진천은 강민에게 절멸비를 쏘기로 했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서가 아니라 절멸도법에는 방어술이 없으니 불가피한 결정이었다.
진천의 좌수에서 하얀 빛이 터져 나오자 그를 덮쳐오던 강민이 상승의 이형환위를 발하며 공중으로 몸을 띄웠다. 그러면서 쌍도를 낫처럼 휘둘렀다. 칼끝에서 분출된 두 줄기의 강선(鋼線)이 진천에게로 날아왔다.
화연으로 강선들을 벗어나려던 진천은 당황했다. 앞선 것은 허상을 관통했지만 뒤의 것은 그의 실체를 따라왔기 때문이었다. 예기치 않은 상황이었으나 진천은 침착하게 강선을 겨드랑이 사이로 흘려내었다. 그러나 강선이 갈고리처럼 되돌아왔다. 더욱이 소멸된 줄 알았던 첫 번째 강선도 그의 등을 찔러왔다. 진천은 하나는 가까스로 피해냈으나 하필이면 두 벽이 만나는 모서리에 몰리는 바람에 다른 하나는 오른쪽 어깨에 허용하고 말았다.
견갑골이 으깨지는 부상을 당한 진천은 안면을 일그러뜨렸다. 하지만 이만하길 천만다행이었다. 의형에게 받은 천잠갑의가 아니었다면 어깨가 통째로 뭉개지며 오른팔을 잃었을 지도 몰랐다.
강민의 처지는 진천보다 나빴다.
진천이 날린 절멸비는 하나가 아니라 그의 강선처럼 둘이었다. 진천의 두 번째 절멸비는 강민의 옆구리에 적중했다. 조금만 왼쪽을 겨냥했다면 복부가 뚫렸을 것이었다.
강민은 비무 지속을 고집하지 않고 귀두도를 칼집으로 돌려보냈다. 손바닥으로 상처를 막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지 않으면 내장이 쏟아질 판이었다.
뜯겨나간 부위를 지혈하며 강민이 진천을 응시했다. 그러고는 머릿속에 든 질문을 입으로 토해내었다.
“네가 어떻게 쌍전(雙電)을 아는 거냐?”
진천은 내심 감탄했다. 강민은 절멸비의 원형이 강가의 도법에 있음을 간파한 것이었다. 남천도왕과 창천도군이 그랬던 것처럼. 전날 구인결의 판정관을 맡았던 강찬은 목전에서 보고도 감조차 잡지 못했었다.
비무가 급작스럽게 중단되자 기관장치를 조작해 석벽을 내리고는 진천과 강민이 있는 곳으로 달려왔던 강정이 씩씩거렸다.
“저놈이 쌍전을 안다고? 어쩐지 어른들의 표정이 심상치 않더라니. 고모란 여자의 짓임에 틀림없어. 가문의 비전을 도둑질해가서는…….”
진천이 강정의 말을 끊었다.
“말조심하오. 내 어머니는 그런 적 없소.”
진천의 경고에 분기탱천했지만 강정은 감히 무력도발을 감행하지는 못했다. 쌍전을 구사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진천은 그의 상대가 아니었다. 번천일백팔도(翻天一百八刀)의 네 정점 중 하나인 쌍전은 오의를 깨우치기도 하늘의 별을 따는 것만큼이나 어렵거니와 설사 이해했다고 해도 최소 이 갑자의 내공이 없으면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절학이었다.
진천에게 기가 죽었던 강정은 다음 순간 반색했다. 진천이 별안간 한 움큼의 피를 게워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그렇지. 네놈이 민이와 대등할 리가 없지. 훔쳐 배운 아류로는 정통의 무학을 이기지 못하는 법이다. 팔도 쓸 수 없게 된 모양인데……,어럽쇼?”
강정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제 보니 속에 보의(保衣)를 입고 있었구나. 그래서 민이의 쌍전을 맞고도 멀쩡한 거였어. 교활한 놈. 비겁하게 비무에서 보의를 착용하다니. 그래놓고는 무방비로 나온 민이에겐 가차 없는 살수를 썼단 말이지.”
진천의 갑작스러운 토혈에 어리둥절한 기색이었던 강민도 찢어진 의복 사이로 빠져나온 천잠갑의를 발견하곤 눈빛이 사나워졌다.
진천은 그저 쓰게 웃었다. 해명은 불필요했다. 비무를 원한 이는 그가 아니었다. 비무 전에 천잠갑의에 대해 밝힐 의무도 없었다.
그에 관해서는 생각이 다른지 진천을 쏘아보는 강민의 안광에 살기가 서렸다. 암암리에 내력을 다리에 주입하며 진천은 급전을 대비했다. 강민은 오른손에 아직 협도를 쥐고 있었다. 진천은 불문곡직 그가 칼을 부릴 가능성을 팔 할 이상으로 보았다.
하지만 예측은 빗나갔다. 강민이 자중해서가 아니라 외부의 개입 탓이었다. 몇몇 인영이 대문을 놔두고 담장 위에서 연무장 안으로 뛰어내렸다. 모두 여섯이었다. 진천은 그 중 두 사람을 알아보았다. 오재승이 준 용모화에서 본 인물들이었다.
둘 다 오십 대 초반이었고 생김새도 쌍둥이처럼 흡사했다. 실제로 두 장년인은 한 살 터울의 친형제였다. 형은 강선이고 동생은 강명이었다. 그들은 각각 강정과 강민의 부친이기도 했다.
진천은 좌우에서 그에게 달려오는 두 외숙들 중 왼쪽의 강선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오재승이 전한 정보에 따르면 그가 강가의 실세였다. 오늘 이 자리가 어떻게 정리될 지는 그의 의중에 달려 있을 터였다.
그러나 진천이 강선을 주시한 건 그런 이유에서만은 아니었다. 진천은 확인하고 싶었다. 일사부와 어머니가 증오해마지 않았던 이의 얼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