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78
제77화
강선과 눈을 마주친 진천은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냉혹함 속에 강렬한 살의를 담고 있는 눈. 그것은 먹잇감을 향해 달려드는 맹수의 눈이었다.
강선의 동공에 깃든 단호한 의지를 감지한 진천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했다. 그가 돌연 등을 돌려 연무장 뒤편으로 경신을 전개하자 강선이 소리쳤다.
“잡아라!”
명을 내리면서 강선이 방향을 틀어 진천을 쫓으려했다. 그러나 목소리 하나가 그의 발을 잡았다.
“잠깐 멈추십시오, 백부.”
찰나지간 갈등한 강선은 고개를 돌렸다. 그를 불러 세운 강민의 사나운 눈길이 그의 면상에 꽂혔다. 건방진 조카의 태도에 울화가 치밀었으나 강선은 무표정을 유지했다. 그러고는 그의 아들을 비롯해 진천을 추적하는 오인(五人)에게 명령을 내렸다.
“잡아서 제압하라. 저항하면 죽여도 좋다.”
부친의 추살령(追殺令)에 신이 난 강정이 호들갑을 떨었다.
“저놈은 민이의 쌍전에 심한 내상을 입었습니다. 팔도 쓰지 못합니다. 그러니 조금만 몰아도 제풀에 지쳐…….”
아들의 경망스러운 언행에 분기가 솟구친 강선은 평정을 잃었다.
“입 다물고 쫓기나 해라.”
부친의 호통에 강정이 등에 창을 맞은 듯 휘청거렸다.
강선의 시야에 이 장 높이의 연무장 담장을 훌쩍 뛰어넘는 진천의 모습이 들어왔다. 이어 다섯 개의 인영이 그를 따라 솟아올랐다. 지금이라도 추격에 가세할지를 두고 망설이던 강선은 두 줄기의 따가운 시선을 느끼고는 몸을 돌렸다.
동생과 조카가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강선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평생 그에게 주눅이 들어있던 아우는 천군만마를 거느린 장수인 양 기세등등했다. 부친에게서 공식적인 후계자로 인정받은 제 자식을 믿는 탓이었다. 새삼스레 출중한 조카와 대비되는 한심한 아들이 떠오른 강선은 암울할 따름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둘을 맞바꾸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대가로 팔 하나를 떼 줄 용의도 있었다.
“어째서 나와 상의도 없이 민이를 그 반도의 자식과 붙였단 말이오?”
강명의 항의에 강선은 시치미를 뗐다.
“내 뜻이 아니었다. 민이 스스로가 반도의 후예를 보고자 했을 뿐이다.”
“흥, 내가 형님의 속셈을 모를 줄 알고. 연이의 아들놈과 민이가 상잔하게끔 만들려는 수작이 아니었소? 변명할 생각일랑…….”
“함부로 지껄이지 마라.”
강선이 말을 끊으며 매서운 눈빛을 쏘아내자 강명은 자기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인지하자마자 분노를 폭발시켰다.
“형님이야말로 닥치시오. 이 일을 결코 좌시하지 않겠소. 반드시 민이의 부상에 대한 책임을 물을 거요. 아버님이 돌아오시는 대로…….”
강민이 흥분하는 부친의 팔을 잡아당겼다.
“진정하세요, 아버지. 저는 괜찮습니다. 그와의 비무도 제가 자청한 것입니다.”
“하지만, 민아…….”
기세가 꺾인 강명이 말끝을 흐렸다.
강민이 강선을 주시했다.
“그는 쌍전과 흡사한 무공을 구사했습니다. 정이 형 말처럼 정말 고모란 여자가 가문의 비전을 훔쳤단 말입니까?”
고작 그 질문을 하겠다고 내 발목을 잡았단 말이더냐, 이놈.
심중에서 올라오는 역정을 목구멍에서 차단한 강선은 가능한 한 온화한 음성을 발하려 애썼다.
“본가는 그리 허술하지 않다. 도적은 따로 있느니라.”
강민의 면상에 짙은 의구심이 떠올랐다. 진천이 달아난 후방의 벽을 일별한 강선이 말을 이었다.
“그 얘기는 네 애비에게 들으려무나. 나는 이제 도적의 후예를 쫓아야겠다. 그 아이를 놓치면 가문에 크나큰 누가 될 것이야.”
강민은 응답을 주지 않고 제 부친을 돌아보았다. 강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카의 암묵적인 허락을 받은 강선이 신형을 날렸다. 강명-강민 부자는 연무장을 쏜살같이 가로질러 담벼락으로 비약하는 그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진천의 머릿속에 오만가지 생각이 맴돌았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외가의 힘을 빌려 난국을 타개하려던 계획은 완전히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담판을 지으려 했던 외조부의 부재가 결정적인 원인이었지만 외사촌과의 비무를 받아들인 것도 경솔한 선택이었을지 몰랐다.
그러나 진천은 자책을 자중했다. 그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 상황에서는 이미 외통수에 몰린 격이었다. 모친의 신분을 밝힘으로써 그의 내력을 알게 된 외숙부는 일사부와의 연관성을 의심했음에 틀림없었다. 그러니 설령 외사촌의 비무 청을 끝까지 거절했더라도 어떤 방식으로든 그의 무학의 연원을 캐려고 들었을 것이었다.
외숙의 눈동자에 번들거리던 진득한 살기를 상기한 진천은 가슴이 쓰렸다. 오해가 아니었다. ‘저항하면 죽여도 좋다’는 말에서 속을 고스란히 드러내지 않았던가.
진천은 궁금했다. 외숙은 강가의 치욕이라 할 일사부의 정체가 강호에 노출되는 것을 꺼려 그를 죽이라고 한 걸까, 아니면 그가 모친의 원한을 갚을 것을 두려워 해 선수를 치려던 것일까.
어느 쪽이든 납득하기 어려운 처사였다. 결심을 집행하기에 앞서 몇 마디 대화는 나눌 수 있지 않은가.진천은 외숙을 두고 ‘피도 눈물도 없는 악한’이라던 모친의 평가가 과장이 아님을 알았다. 화가 나기보다는 서글픈 일이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진천은 숲으로 내달렸다.
연무장은 마을의 북녘에 위치해 있었고 그 뒤로는 울창한 산림이었다. 진천은 산명(山名)이 떠오르지 않아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산세가 깊고 동서로 팔십 리에 걸쳐 뻗은 대산임을 기억하고 있었다.
가파른 비탈을 비스듬히 올라가며 진천은 추격자들을 빠르게 살폈다. 모두 다섯 명이었고 전원이 절정 이상의 고수였다. 그들과의 거리는 팔구 장 정도였다. 한 호흡만 지체해도 따라잡힐 거리였다.
진천은 외숙들이 보이지 않아 의아해하면서도 안도했다. 그들이 붙었으면 진즉 덜미를 잡혔을 터였다. 팔영보는 천하제일의 보법으로 손색이 없는 절학이었으나 경공에는 상대적으로 취약했다.
그렇더라도 정상적인 상태였다면 추격하는 이들을 어렵지 않게 따돌렸을 것이었다. 그러지 못한 건 내상 때문이 아니라 어깨에 입은 부상 탓이었다. 오른팔이 제멋대로 흔들리는 바람에 최고속도를 내기가 어려웠다.
추격자들 중 한 명이 멀리서 도풍을 쏘았다. 화살처럼 날아온 칼바람은 아슬아슬하게 진천을 스치고 지나갔다. 진천의 운이 좋아서가 아니라 그가 마지막 순간에 옆으로 비켜낸 덕분이었다.
그러나 진천은 삐죽 튀어나온 돌부리에 발이 걸리는 바람에 비틀거렸다. 찰나지간 균형을 잃고 멈춰 선 진천의 동체에 다섯 줄기의 도풍이 들이닥쳤다. 진천은 미끄럼을 타듯 경사면 아래로 몸을 날렸다. 도기(刀氣)들에 머리가 상하는 참사는 모면했으나 추격자들과의 거리가 줄어들고 말았다.
두 명의 도호(刀豪)가 잽싸게 수평으로 이동하며 진천에게 쇄도했다. 순식간에 진천과 삼사 장 떨어진 곳에 이른 도호들이 쌍칼을 휘둘렀다. 대호의 발톱 같은 도기가 진천을 덮쳤다. 진천은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그가 궁여지책을 쓰려다 제 발로 궁지에 들어갔다고 여긴 도호들은 쾌재를 불렀다. 공중에서는 피할 곳이 없었다.
진천에게 결정타를 가하려던 두 도호는 다음 순간 하체에서 올라오는 극통에 비명을 내질렀다.
“악!”
진천이 날린 철구들에 무릎과 정강이를 격타당한 도호들이 자갈투성이 흙바닥에 넘어졌다. 그러면서 뒤이어 날아올 암기를 꺼려 비탈을 데굴데굴 굴렀다.
둘을 떨궈냈지만 진천의 사정은 오히려 악화되었다. 그들이 근거리에서 날린 도풍을 비환으로 벗어나는 사이 강정을 포함한 세 도객이 지척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진천은 어떨 수 없이 정면승부를 택했다. 강정은 고량보다 약간 강한 정도겠지만 다른 둘은 하수린에 못지않은 강자들일 터였다. 지금 등을 보이면 뒷목이 무사하지 못할 게 뻔했다.
바닥에 착지한 진천이 도주를 포기하고 돌진해오자 강정이 고함을 쳤다.
“죽여!”
도객들의 양안에 분기가 돋았다. 그들은 강정보다 한 배분이 높았다. 종가의 적통에다 이십 대에 용호가 된 천하기재라 하나 숙부뻘인 자신들에게 명령조로 내뱉는 언사가 고울 리 없었다. 하지만 강정의 무례를 따지고 있을 계제가 아니었기에 도객들은 진천부터 공략했다.
막강한 공력을 실은 여섯 자루의 칼이 진천에게 짓쳐들었다.
도객들이 휘두르는 쌍도(雙刀)의 벽에 뛰어든 진천은 화연을 발해 그물을 지나는 바람처럼 빠져나갔다. 여섯 조각으로 갈렸어야 할 그의 몸이 멀쩡한 상태로 나타나자 도객들은 대경실색했다. 그러나 산전수전을 다 겪은 노련한 무인들답게 재빨리 후속공격을 가했다. 강정만이 일시적으로 얼이 빠져 멍하니 보고만 있었을 뿐이었다.
그의 부친인 강선이 알았다면 속이 터졌을 노릇이었다. 강민과의 비무 시 진천이 펼쳤던 신기막측(神奇莫測)한 보법을 코앞에서 보지 않았던가. 그러고도 예측이나 대비를 하지 못했다는 건 무인으로서 결격이었다.
진천은 그의 몸에 떨어지는 칼들을 감수하고 애초의 목표물이었던 강정에게 육박했다. 두 자루는 빗겨냈지만 다른 두 자루는 왼팔 상박과 오른쪽 옆구리에 일격을 허용하고 말았다. 하지만 상체를 틀어 정면으로 맞지는 않은 데다 천잠갑의 덕분에 살과 뼈가 갈리는 중상은 면할 수 있었다.
칼들에 서린 내력에 기혈이 격탕되었지만 진천은 강정의 면상에 주먹을 뻗는데 성공했다. 강정은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막았다. 하지만 진천의 진정한 노림수는 그의 턱이 아니라 사타구니였다. 진천의 슬격(膝擊)에 낭심(囊心)을 가격당한 강정이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진천은 그를 따라붙으며 목을 낚아챘다. 강정의 마혈을 찍은 진천이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흠칫거리는 도객들을 보며 진천이 위협했다.
“물러서시오. 따라오면 이자의 목숨을 보장할 수 없소.”
공갈이 아님을 증명이라도 하듯 진천이 강정의 목을 감은 팔에 힘을 주었다. 강정이 숨 넘어 가는 소리를 냈다.
“제, 제발, 살려줘!”
다행인지 불행인지 혼절하지 않은 강정이 구명을 간청했다.
황망한 중에도 진천은 불현듯 의형이 떠올랐다.
곽건과 혈전을 벌였던 날 앞으로의 행보에 대해 밤을 새워 논의하던 중에 여상구가 불쑥 물었다.
“만약 오늘과 같은 위급한 사태가 발생하여 나를 비롯한 이 자리의 친인들이 인질로 잡힌다면 어쩔 참인가, 아우님?”
여상구는 진천의 답변을 기다리지 않고 요청했다
“우리를 신경 쓰지 말고 싸우게나. 혹시 상대가 감당불가의 강적이거든 뒤도 돌아보지 말고 달아나게.”진천은 쓰게 웃었다.
“입장이 바뀐다면 어쩌시렵니까, 형님. 적이 저를 잡고서 항복하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협박한 데도 그냥 도주하시겠습니까?”
여상구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즉답했다.
“나는 당연히 그의 요구에 응할 걸세. 내 명줄을 보존하겠다고 아우님 목숨을 위태롭게 만들 수는 없지.”
진천은 헛웃음이 났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형님.”
여상구가 정색했다.
“경우가 다를세. 예컨대 적이 팔대무왕 급의 절대강자라고 가정해 보세나. 나는 아우님의 복수를 할 능력이 없으나 아우님은 가능하지 않은가. 나는 아우님을 믿고 기꺼이 적의 칼날에 목을 내밀 참일세. 혹여 내가 아우님에게 부담이 된다면 적이 내 목숨을 빌미로 아우님에게 굴종을 강요하기 전에 나 스스로 혀를 깨물고 말 걸세. 그러니 절대로 나를 구한답시고 아우님의 안위를 방기하지 말게나.”
진천은 할 말을 잃었다. 좌중을 둘러보며 여상구가 광기 어린 눈을 번득였다.
“여기 있는 모두가 명심하길 바란다. 누구도 아우님이 나아갈 길에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야.”
그러면 자신이 용서치 않을 거라는 여상구의 서슬에 삼보장 인사들은 모골이 송연했다. 그를 제어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으나 진천은 만류를 자제했다. 의형의 흥분이 고조되었을 때는 잠시 내버려두는 게 상책이었다. 친인들은 나중에 따로 다독일 참이었다.
묵직한 정적이 실내를 누르는 가운데 고량이 침묵을 깼다.
“도화각주의 말씀이 지극히 타당하오. 이견이 있을 수 없소.”
두 사람과는 다른 의견을 갖고 있었으나 진천은 입을 다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