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8
제7화
장초가 고량과 염방의 도래를 감지한 것은 기감 덕분이 아니었다.
“저 방울 소리가 침입자를 알리는 신호인가?”
“눈치가 빠르군, 노인장. 그렇소. 이건 예비 경계령이오. 그놈들이 나산 저편에 출현했다는 뜻이오. 걸을 수 있소? 구경하러 가야지.”
“어제처럼 창인 사람들이 죄다 나가서 싸움을 지켜볼 거란 말인가?”
“미쳤소? 그건 소집령이고. 경계령이 울릴 때는 경비를 담당하는 마흔세 명을 제외하면 누구도 밖에 나가서는 안 되오. 어제 노인장이 왔을 때처럼.”
“외지인은 수에 관계없이 경계령을 내리는가?”
“꼭 그렇지는 않소만 대개는 그렇소. 자, 쓸데없는 건 그만 묻고 서두릅시다. 고량이란 자는 어제 해 질 녘에 떠나지 않았소? 하루 만에 오란(五欄)까지 가서 염방 패거리를 끌어왔다는 건, 오며 가며 내내 열나게 달렸다는 방증이오. 그놈들이 다 와서 느긋하게 걸어오지는 않을 테니 곧 나산을 넘으리라고 보아야 하오.”
말을 하는 와중에 장초가 고통의 신음성을 흘리며 옆의 침상 하나를 밀었다. 얼른 침상을 내려간 노덕이 거들었다.
끼이익.
침상이 밀려난 자리에 방석 두 개 크기의 구멍이 나왔다.
“따라오쇼.”
장초가 불문곡직 시커먼 구멍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노덕도 안으로 뛰어들었다. 미끄럼을 타듯 그의 신형이 비스듬한 각도의 통로를 따라 쭉 내려갔다. 바닥에 발이 닿자 두툼한 손이 노덕의 팔을 잡았다. 노덕은 반사적으로 손을 뿌리치며 몸을 움츠렸다. 암흑 속에서 비명과 함께 욕설이 터져 나왔다.
“어억, 이런 썅. 뒈지게 아프네.”
“아, 미안하네.”
“제길, 내 손을 놓치면 길을 잃고 개고생할 테니 싫어도 잡고 있으쇼. 나도 썩 좋지는 않소. 야들야들한 여인네의 섬섬옥수면 모를까.”
“알았네.”
장초가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칠흑 같은 어둠을 밀며 나아갔다. 노덕은 중간중간 갈림길이 있음을 알았다.
“여기가 그 유명한 창인의 지하 미로구먼.”
“아니오. 거기로 연결되긴 하지만 이 굴은 생긴 지 십 년도 안 됐소. 마을을 만들며 집들을 지을 때 파 놓았지.”
“대공사였겠구먼.”
“그렇지는 않소. 창인은 흙이 부드럽고 돌이 드문 지형인지라 착굴은 식은 죽 먹기였소.”
“그런데 이렇게 얕으면 무너지지 않을까?”
“창인은 사막이나 같소. 비가 오지 않는다는 소리요. 여기서 십사 년을 굴러먹는 동안 딱 두 번 봤소. 그것도 새끼염소 오줌처럼 찔끔거리는 정도였지. 그보다, 좀 더 빨리 걸을 수 없소?”
“미안하네.”
“아, 젠장.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 소린 그만하쇼. 행여나 나중에 내가 노인장을 구박했다고 뒤끝 많고 성질머리도 고약한 허 노야에게 이르지나 마쇼. 그 노인네한테 잔소리 듣는 건 질색이오.”
“안심하게나. 그런 일은 없을 걸세. 나는 그저 자네의 친절에 고마울 따름일세.”
“쳇, 옆구리 찔러 절 받는 격이군. 아무튼 이제부턴 입은 다물고 걷는 데만 집중하쇼. 이렇게 달팽이처럼 가다가 늦으면 낭패 아니오? 천이가 재주를 제대로 부리기만 하면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후딱 끝내 버릴 터인데.”
노덕은 ‘진천의 재주’를 주제 삼아 대화를 이어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장초의 역정을 염려해 꾹 참았다.
한 점의 빛도 없던 암흑의 공간이 갑자기 밝아졌다.
노덕의 손을 놓은 장초가 속삭였다.
“다 왔소. 이리로.”
노덕은 장초의 엉덩이를 보며 토굴의 사다리를 기어올랐다.
구멍을 빠져나오자 한 평 남짓한 방이 나왔다. 창도 없었고 천장도 낮았다. 장초가 무릎을 꿇은 자세로 벽에 붙었다.
“흠, 다행히 제때 도착했군.”
노덕이 장초 옆으로 붙었다. 장초처럼 벽의 갈라진 틈에 눈을 갖다 대자 외부가 훤히 보였다.
“저기는 어제 거기가 아닌가?”
“그렇소. 창인의 공식적인 싸움터라고나 할까.”
노덕은 밖을 바라보았다. 공터의 중앙에 칠 인이 나와 있었다. 모두 낯이 익었다. 진천과 어제 객잔에서 보았던 장한들이었다.
“아까 창인의 경비를 맡은 이들이 마흔셋이라지 않았나? 어째서 저들만 나온 건가?”
“소 잡는 데 닭 잡는 칼들까지 다 나올 건 없잖소?”
이상한 비유였지만 일일이 지적하지 않고 노덕이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일곱 명으로 충분할까?”
장초가 송충이 같은 눈썹을 찡그리며 불쾌감을 드러내었다.
“아직 못 믿는 거요? 천이 없이 저들만으로도 염방쯤이야 거뜬히 패대기칠 수 있소. 저기 푸줏간 성가(成家)와 대장간의 배씨 형제는 나하고 큰 차이가 나지 않소. 나머지 세 나무꾼도 그들과 능히 일백 초를 겨룰 실력자들이오. 어제 그치가 가세한 게 아니라면 염방 따위가 어찌해 볼 전력이 아니오.”
“그렇구먼.”
노덕은 다시 바깥을 주시했다. 진천이 여섯 동료에게 뭔가 이야기를 하는 모습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옆에서 씩씩거리는 소리가 들려 노덕이 고개를 돌렸다. 털투성이 장초의 면상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왜 그러는가?”
“저 녀석은 다 좋은데 저게 탈이야. 이러면 관전의 재미가 확 떨어지잖아.”
장초의 청력은 노덕이 듣지 못한 진천의 말을 잡아낸 모양이었다.
“그가 저들에게 뭐라고 했는데 그러는가?”
“이따 보면 알 거 아뇨.”
장초의 뚱한 대꾸에 노덕은 재차 묻기를 단념했다.
* * *
어스름이 깔렸다.
지는 해를 등진 십여 개의 기다란 그림자가 빠른 속도로 공터로 접근했다. 그들은 진천 일행이 선 곳에서 칠팔 장 떨어진 곳에 이르러서야 달리기를 멈추었다. 모두 열네 명이었다.
불청객들이 일사불란한 움직임을 선보이며 일렬횡대로 도열했다. 고량과 더불어 두 발 앞으로 나와 무리의 수장임을 알린 이는 황금색 안대로 왼눈을 가린 육십 세 언저리의 초로였다. 애꾸 노인은 하남 무림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고수이자 염방의 주인인 단혼겸(斷魂鎌) 신충(申忠)이었다.
냉혹한 성정으로 악명이 자자한 신충은 목전의 칠 인을 샅샅이 훑었다. 정확한 형세 판단은 임전에 있어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약하면 짓밟고 강하면 물러서기. 그 단순한 원칙에 충실했던 덕택에 신충은 싸움을 거듭하다 결국 염방의 패권을 거머쥘 수 있었다.
신충의 우안(右眼)이 일자로 붙었다. 그의 기감이 적들을 만만치 않은 자들이라 판단했다는 뜻이었다.
기실 예상한 바였다. 오는 내내 반신반의했지만 간단한 상대들이었다면 중원의 이름난 강호인 금강권이 조력을 요청했을 리 만무했다. 그렇더라도 신충은 어안이 벙벙했다. 어떻게 오지 중의 오지인 창인에 저런 강자들이 도사리고 있단 말인가.
창인에 이르기까지 삼백 리는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불모지였고 그 너머는 독물이 우글거리는 밀림이었다. 창인은 중원에서 달아난 자들에게나 매력적인 땅이었다.
밀림에 들어가서 뒈지거나 개미굴 같은 지하에서 벌레를 잡아먹으며 연명하고 있어야 할 도망자들이 그럴듯한 마을을 건설하고 있다는 풍문을 접한 것은 벌써 오륙 년 전이었다. 진위를 확인하려 수하들을 파견했던 신충은 그들이 올린 보고에 눈살을 찌푸렸다.
무릇 무슨 변화든 원인이 선행하는 법이었다. 사람이 몰려들고 집과 길이 생긴다는 것은 어디엔가 먹을 게 있다는 증거였다. 그러나 수하들은 창인에 건질 만한 게 없다고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그들의 안목을 신뢰했기에 신충은 즉각적으로 창인을 접수하려던 욕심을 접고 나중에 인구가 불어나 노예로 삼을 만한 젊고 튼튼한 종자들이 늘어나면 그때 가서 손을 쓰기로 정리해 두었다.
근래 들어 수확의 시기가 무르익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적지 않은 인원을 동원해야 하는 데다 시급을 다투는 사안도 아니었기에 차일피일 미루던 참이었다. 수백 명의 노예를 끌고 말도 달리지 못하는 돌투성이의 삼백 리 험로를 이동하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기실 창인에 관해서는 수룡보와 사오 년째 신경전을 벌이는 중이었다. 그들이 선수를 치면 나중에 무안평 어림에서 노예들을 빼앗는 게 훨씬 수월할 터이기에 신충으로서는 상당한 수고를 감내하면서까지 거사를 벌일 생각이 없었다. 문제는 수룡보의 늙은 생강도 똑같은 수읽기를 하고 있으리라는 점이었다. 그런 연유로 창인은 여태껏 버리지도 않고 뜯어 먹지도 않은 계륵으로 남아 있었다.
신충은 애써 신경을 끊었던 창인을 뜻밖의 인물이 거론할 거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칠 일 전 야밤에 은밀히 그를 방문해서는 귀가 솔깃해지는 제안을 하고 떠났던 고량이 오늘 아침 불쑥 찾아와 창인으로 함께 가 달라고 요구했을 때, 신충은 어리둥절했다. ‘물건’을 오란 인근에서 넘겨주겠다던 계획을 변경한 이유가 회수를 방해하는 무리가 있어서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신충은 음모가 아닌지 의심했다. 창인에 고량 정도의 고수를 성가시게 할 자들이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도망자들의 땅’이라 불리지만 창인은 무공을 지닌 이들에게는 매력적인 도피처가 아니었다. 죄를 짓거나 이런저런 이유로 강대한 세력에게 쫓기는 무인들은 산서 무림 너머의 사막을 건너 서역으로 가거나 하다못해 평북 무림을 지나 빙원과 북해로 가곤 했다. 중원만큼 풍족하지는 않지만 거기엔 무공을 활용해 유세를 떨 수 있는 또 다른 세상이 있었다.
반면 창인 이남의 밀림은 위험하기만 할 뿐 먹을 게 없는 곳이었다. 갈 데까지 간 종자들이라면 모를까 위계의 꼭대기에서 거들먹거리던 무인들이 선호할 리 만무했다. 그러니 고량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신충은 심사숙고 끝에 고량의 청에 응하기로 결정했다. 고량이 술수를 부릴 유형이 아님을 파악해 둔 탓이었다. 고강한 무공과는 별개로 고량은 행사가 허술한 작자였다.
칠 일 전 심야에 그를 찾아온 괴인을 보았을 때, 신충은 등골에 오한이 일었다. 본능적으로 막강한 고수임을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사정이 있어 본명을 밝히기 어렵다는 괴인을 보며 신충은 갈등했다.
밟을 것인가 물러설 것인가.
신충은 후자를 택했다. 결과적으로는 현명한 판단이었다.
괴인이 떠난 직후 흑문(黑門) 분타를 찾은 신충은 중원 신흥 강호들의 용모파기를 샅샅이 뒤졌다. 괴인의 정체가 몇 년 전부터 주안 일대에서 위명을 떨치기 시작한 금강권 고량임을 확인한 신충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만약 그를 제압하려 했다면 염방은 다대한 피해를 입었을 게 뻔했다. 무엇보다 신충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워졌을 터였다.
사나흘간 금강권 고량에 대한 정보를 닥치는 대로 긁어모은 신창은 그가 정맹이 주목할 정도로 강하지만 고지식하기 짝이 없는 성정임을 알아냈다. 하여 고량이 말한 ‘송아지만 한 자옥’은 사실일 공산이 컸다. 그렇다면 황금 일백 관과의 교환은 엄청난 이득이 아닐 수 없었다. 그만한 크기면 가공하지 않고 원석 그대로 팔아도 최소한 그 세 배는 받을 수 있을 터이기 때문이었다.
고량이 오늘 해 뜨기 무섭게 찾아와서는 함께 ‘물건’을 가지러 가야 한다고 재촉했을 때, 신충은 칠 일 전처럼 선택의 기로에 섰다. 그러고는 결국 보물에 대한 욕심을 이기지 못하고 출행을 결정했다.
성주평(晟紬平)까지는 말을 타고, 거기서부터는 오후 내내 경공을 전개해 창인에 이른 신충은 비로소 고량의 말이 과장이 아님을 알았다.
그의 전면에 선 자들은 왜 나와 있는지 이해가 안 가는 애송이 하나만 빼면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기운을 뿜어내는 강자들이었다. 그와 염방의 최정예들을 보고도 겁먹은 기색이 없는 패거리를 응시하며 신충은 어쩌면 오늘의 일진이 사나울지도 모르겠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