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80
제79화
강선이 뒤따라 낭떠러지에서 뛰어내리자 진천은 비상수단을 꺼냈다.
그는 틀림없이 위에서 공격을 가해올 것이었다. 강선의 칼에서 도기가 분출되자마자 진천은 절멸삭(絶滅索)을 절벽에 쏘았다. 바위에 꽂힌 절멸삭을 이용해 몸을 당긴 진천은 가까스로 도풍을 벗어났다.
그러나 안심할 계제가 아니었다. 그가 내상의 악화를 무릅쓰고 특단의 조치를 취한 것처럼 강선 역시 보다 강력한 수단을 꺼내들 가능성이 농후했다. 진천은 벽에 달라붙은 순간 바위의 돌출부분을 디딤돌 삼아 위로 솟구쳤다. 그 직후 그가 있던 자리에 수백 개의 파편이 날아와 박혔다. 하나하나가 내공을 담고 있었기에 치명적인 무기였다.
이 장 가까이 도약했음에도 진천은 왼쪽 허벅지에 칼 조각 하나를 허용하고 말았다. 근육이 뭉텅 잘려나간 다리가 금세 피로 물들었다. 그나마 반사적으로 빗겨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파편에 실린 내기에 뼈가 갈릴 뻔했다.
절멸삭을 구사한 대가로 울혈을 토한 진천은 속절없이 추락했다.
상당한 높이였으나 지면에 닿는 것은 금방이었다. 대책 없이 땅바닥과 충돌하면 뼈도 추리지 못할 터이기에 진천은 우선 수평으로 엎드린 몸을 대(大)자로 만들어 하강속도를 늦췄다. 그러고는 다시 한 번 절멸삭을 쏘기 위해 역천기결을 운용했다.
하지만 진천은 구명줄 역할을 해 줄 절멸삭을 절벽에 뻗어내지 못했다. 부운공으로 일시지간 허공에 정지해 있던 강선이 그가 떨어지기를 기다려 공격을 가해왔기 때문이었다. 비환으로 피하며 진천은 절멸삭 대신 절멸비를 날렸다.
진천의 반격에 강선은 대경실색했다. 황급히 협도로 쳐냈지만 진천의 절멸비는 한 자루가 아니었다. 뒤이어 날아온 백색 비수에 우견(右肩)을 찍힌 강선이 경악성을 내질렀다. 반 이상 잘린 그의 오른팔이 허수아비의 옷처럼 너덜거렸다.
진천은 자세를 바꿔 머리를 아래로 하고는 강선에게 미끄러지듯 하강했다. 파즉살을 쓰느라 귀두도를 잃고 어깨의 중상으로 협도도 사용불가가 된 강선은 진천의 접근을 막기 위해 왼손바닥으로 장풍을 쏘았다. 장공의 대가 못지않은 위력이었다. 하지만 진천은 비환으로 공중에서 방향을 트는 신기를 과시하며 강선의 임기응변을 무위로 돌렸다.
진천은 기어이 강선에게 달라붙었다.
엉겨 붙은 두 사람은 허공에서 육탄전을 벌였다. 둘 다 오른팔을 쓸 수 없었기에 몸싸움은 치열하면서도 어색했다. 다리로 강선의 하체를 단단히 감은 진천은 왼손으로 그의 목을 끌어당기며 면상에 박치기를 가했다. 코가 깨진 강선이 짧은 신음성을 흘렸다.
진천은 서둘렀다. 약간의 우세를 점했다고 기뻐할 때가 아니었다. 지면과의 거리는 불과 이십여 장이었다. 이대로 추락하면 즉사를 면치 못할 터였다. 무리한 역천기결의 운용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지만 어떻게든 절멸삭을 한 번 더 부려야 했다.
강선을 밀어낸 반동으로 약간의 여유를 얻은 진천은 절멸삭을 발하려다 보류했다. 강선이 부운공을 펼쳤음을 인지해서였다. 진천은 그의 덕을 보기로 했다.
떨어졌던 진천이 다시 일직선으로 하강해오자 강선은 이를 갈았다.
하지만 함부로 장공을 쏘아낼 수는 없었다. 사이한 기공을 구사하는 진천에게 통할지도 의문이거니와 그러다 부운공이 풀리는 날엔 땅바닥에 의해 전신의 뼈가 박살나는 참사를 면치 못할 터이기 때문이었다.
별 다른 저항 없이 강선에게 달라붙는데 성공한 진천은 그와 한 덩어리가 되어 떨어져 내렸다. 그 와중에도 양인은 착지의 충격을 상대에게 전가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엎치락뒤치락했다. 격렬한 몸부림의 최종승자는 진천이었다. 불리한 자세였으나 마지막 순간 몸을 비튼 진천은 강선의 왼 어깨가 먼저 땅에 닿도록 만들었다.
아무리 부운공을 썼다하나 정말 뜬구름처럼 가벼울 수는 없었기에 강선은 어깨가 으스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이로써 양팔을 다 쓰지 못하게 된 강선은 몸을 일으키더니 옆으로 굴러간 진천에게 발길질을 했다. 내공이 실린 발이기에 진천은 황급히 피해냈다. 옆구리를 걷어차이면 내장이 모조리 터져버릴 터였다.
허리를 튕겨 기립한 진천이 좌수를 뻗었다. 그의 손끝에 일렁이는 하얀 기운을 본 강선이 미련 없이 돌아섰다. 그러고는 떨어질 듯 위태롭게 덜렁거리는 오른팔을 잡고서 전속력으로 달아났다.
절멸도를 부리는 위협으로 강선을 쫓아버린 진천은 그가 자신의 진정한 상태를 눈치 채지 못하도록 목구멍까지 올라온 응혈을 도로 삼켰다. 곳곳에서 터진 혈맥들이 핏덩어리를 이루고 있었다. 내상만 심각한 게 아니었다. 전신의 뼈마디가 비명을 질러댔다.
강선이 작은 흑점으로 화하자 진천은 그가 간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허벅지의 부상으로 걷기조차 힘들었으나 아직 위기가 완전히 종식된 것이 아니기에 한가로이 운공에 들 수는 없었다. 한시 바삐 안전한 곳으로 피신해야 했다.
철구에 당한 도객들이나 마혈이 풀린 강정이 쫓아올 가능성은 희박했지만 모를 일이었다. 더욱이 강가로 돌아간 강선이 또 다른 추격대를 보내올 확률은 대단히 높았다. 길어야 한두 시진의 여유가 주어졌을 뿐이었다.
진천은 머릿속에 숙지한 원주의 지리를 검토하며 탈출로를 모색했다. 가장 좋은 경로는 원주의 북쪽에 흐르는 도화강(桃花江)을 타고 서쪽으로 빠져나가는 길이었다. 도화강은 여기서 멀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거기엔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 첫째, 해가 지려면 아직 멀었고 둘째, 강선도 그의 수읽기를 짐작하고 있으리란 점이었다.
잠영을 한다고 하더라도 숨을 쉬기 위해 주기적으로 수면 위로 머리를 내밀어야 할 터이니 야음을 틈타지 않으면 눈에 띌 공산이 컸다. 강선이 도화강 전역에 감시망을 펼칠 것임은 불문가지였다.
그럼에도 진천은 고심 끝에 도화강을 택하기로 결정했다. 산중으로 이동하거나 협곡의 동굴 따위에 숨는 것은 더욱 위험했다. 아무리 흔적을 지운들 추적의 전문가들을 완전히 따돌리기는 어려웠다. 강가에서 희미한 냄새 하나로 수천 리를 쫓을 수 있다는 흑미백서(黑尾白鼠) 같은 영물을 부린다면 몇 시진도 지나지 않아 덜미를 잡힐 게 뻔했다.
진천은 일단 다시 산을 오르기로 했다. 산정에서 도화강 줄기를 확인할 참이었다. 절뚝거리며 나아가던 진천이 문득 발걸음을 멈췄다. 기이한 위화감이 가슴을 쓸고 지나갔다. 어디선가 누군가 그를 보고 있었다.
진천은 눈을 깜박거렸다.
왼편의 큼직한 바위 위에 시커먼 그림자가 나타났다. 분명 방금 전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인영이었다.
난데없이 출현한 괴인이 쪼그려 앉아있다고 여겼던 진천은 곧 착각이었음을 깨달았다. 괴인은 서 있었다. 진천이 착각한 이유는 그가 난쟁이였기 때문이었다. 삼 척이나 될까. 예닐곱 살 소동의 키였다.
하지만 괴인의 머리통은 범인보다 컸다. 거기에 주름이 가득한 얼굴은 족히 팔십은 넘어보였다. 이가 빠져 오므라든 입술은 합죽이였고 동공을 보기 어려울 만큼 일자로 붙은 눈가엔 누런 진물이 흘렀다.
입고 있는 의복은 누더기나 다름없었다. 원래는 백의였을지도 모르지만 워낙 때가 묻은 탓에 검은 넝마로 보였다. 한마디로 괴인은 상거지의 몰골이었다.
진천과의 거리가 이 장이 넘었지만 썩은 내가 그의 코까지 스며들었다. 하지만 진천은 인상을 쓰지 않고 오른팔의 통증을 참으며 억지로 포권을 취했다.
“무림말학 진천이 권왕(拳王) 어르신을 뵙습니다.”
진천의 입에서 천지를 경동시킬 별호가 흘러나왔다.
괴인이 탄성을 토해냈다.
“호오! 난줄 어떻게 알았느냐? 우리는 분명 초면일 터인데.”
진천은 고소를 머금었다. 어떻게 모를 수 있단 말인가.
권왕의 외관을 알기 위해서는 굳이 오재승의 신세를 질 필요도 없었다. 너무나 특징적인 용모이기 때문이었다. 설혹 그와 흡사한 모습을 한 이가 있더라도 무공을 흉내 낼 수는 없을 터였다. 진천은 권왕이 지척에 이르도록 기척조차 감지하지 못했다.
진천이 반문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몰라 뵙기엔 너무 유명한 분이시지 않습니까?”
권왕의 허연 눈썹이 일그러졌다.
“내 꼴을 보고 짐작했다는 뜻이렷다?”
진천은 식은땀이 났다. 권왕은 왜소한 체구에 어울리지 않는 호방한 성품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변덕이 죽 끓듯 하는 괴팍한 성정으로도 악명이 자자했다. 대답을 잘못 했다간 경을 치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진천은 솔직히 시인했다.
“죄송합니다.”
사납게 진천을 노려보던 권왕이 돌연 껄껄 웃었다.
“죄송할 게 뭐 있느냐? 내 꼬락서니가 원래 이런 걸.”
파안대소하던 권왕이 이번엔 갑자기 정색했다.
“듣자하니 네놈이 내 제자랍시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닌다던데, 사실이냐?”
진천은 쓴웃음이 났다. 강호 일각에서 그가 권왕의 후인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구인결 당시 하수린이 내뱉었던 억측이 와전되며 파생된 결과였다.
“그런 적 없습니다, 어르신.”
권왕이 눈을 부라렸다. 그러자 눈주름에 가려져 있던 까만 눈동자가 나타났다.
“틀림없으렷다? 내가 거짓말 하는 종자를 제일 싫어한다는 걸 아느냐? 나중에 거짓임이 드러나면 네 목을 비틀 것이야.”
권왕의 엄포에 위축되지 않고 진천은 담담히 대꾸했다.
“정말입니다, 어르신.”
다시 눈을 일자로 붙이며 권왕이 압박했다.
“내가 네 사부가 아니면 누가 네 사부더냐? 이실직고하렷다.”
진천은 권왕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미 아시잖습니까?”
권왕의 일자 눈에 감춰진 동공이 반짝거렸다.
“뭐라? 그게 무슨 말이더냐?”
진천이 처진 눈을 살짝 떴다 내렸다.
“삼보장에서 제 친인들을 만나 저에 관해 들으셨을 것 아닙니까?”
권왕이 백미를 씰룩거렸다. 그리고 마른 오징어를 씹듯 입술을 오물거렸지만 말은 뱉어내지 않았다.
진천은 제대로 짚었음을 알았다.
권왕의 출현이 우연일리 만무했다. 그가 이 자리에 나타난 건 강가에서부터 따라왔다는 뜻이었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강민과의 비무부터 지켜보았을 가능성이 높았다.
둘 중 하나였다. 권왕이 강가에 머물러 있다가 ‘하남신룡’의 방문을 전해 듣고는 밖으로 나왔던가, 아니면 외부에서 강가를 찾았다가 연무장에서 일어난 소동을 감지하고는 그리로 왔던가.
진천은 후자라고 보았다. 권왕이 애당초 강가에 있었다면 외숙은 강민에게 그와의 비무를 사주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권왕의 이목을 끌 것을 꺼렸을 터이기 때문이었다. 외숙의 입장에서는 도중에 권왕이 등장하면 그에게 번거로운 설명을 해야 하는 정도를 넘어 후환제거작업 자체를 추진하지 못할 위험성이 다분했다. 그렇다면 권왕이 밖에서 왔다고 보는 편이 보다 타당한 추정이었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하필이면 그때 강가를 찾았을까? 북천도왕을 만나기 위해서? 그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진천은 권왕이 보고자 했던 이가 북천도왕이기보다는 자신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정파 무림을 떠받치는 두 기둥은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앙숙으로 알려져 있었다.
권왕이 그를 보러 강가에 왔다는 추론이 옳다면 나머지는 간단했다. 현재의 시점에서 그의 행방을 아는 이들이 삼보장의 지인들밖에 없으니 권왕은 필히 그들을 먼저 만났을 터였다. 진천은 권왕이 그들에게서 그의 행선지는 물론이고 신상내력도 들었을 거라 추측했다. 며칠 전에 거의 모든 사적 비밀에 대한 해제를 선언했으니 지인들도 부담 없이 권왕에게 그의 내밀한 사정들을 알려주었을 것이었다.
권왕이 개구리처럼 바위에서 폴짝 뛰어내려 진천의 앞에 섰다. 그러고는 침을 튀기며 말을 쏟아냈다.
“전서구를 받아 내가 삼보장에 갔던 일을 읽을 겨를이 없었을 테니 순전히 머리를 굴려 짐작했을 테지? 무재만 특출한 게 아니라 두뇌 또한 비상하다고 하더니 과연 그렇구나. 허어, 평범하기 이를 데 없이 생긴 녀석이 비범하기 짝이 없는 기재로세, 그려. 그나저나 오늘 강가의 칼잡이들과는 왜 드잡이 질을 한 게냐? 너는 강 맹주의 하나 밖에 없는 외손자라면서?”
진천은 권왕과의 대화가 길어질 것임을 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