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82
제81화
권왕이 볼품없이 자란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뭔가 복잡한 사연이 있는 게로구나. 환인(幻人)들의 비기(秘技)를 그 흉악한 놈에게 넘겨준 자가 네 아비라니. 필시 반대급부가 있었을 테지. 흠, 내가 맞춰보마. 옳지, 그걸 미끼로 그 학사가 네 어미와의 연분을 맺게 해달라고 그놈에게 요구했을 듯싶구나. 무가의 사위가 되려고 말이다. 무가도 보통 무가더냐? 정파제일가인 원주 강가가 아니더냐? 더욱이 그가 노렸던 여아의 부친은 정맹의 주인인 북천도왕이다. 하잘것없는 문인 신세에 그만한 신분 상승도 없었을 게야.”
진천은 헛웃음이 났다. 권왕이 펼치는 상상의 나래는 진실과 구만 리쯤 떨어진 곳으로 그를 데려가고 있었다.
하지만 권왕의 추론은 현실을 반영하는 바가 없지 않았다.
무림의 태동 이후 천하의 위계질서는 변화를 거듭해왔다.
초기에만 해도 문인들은 문무농상의 전통에 따라 무인들과만 자리를 바꾸었을 뿐 상층부를 유지했다. 하지만 세월이 흐름에 따라 상계에 자리를 내주더니 이백 년 전의 혼란기 이후로는 농민들의 아래로 떨어졌다. 그러다 작금에 이르러서는 공인(工人)들보다 낮은 취급을 받기에 이르렀다.
힘을 숭상하고 실리를 추구하는 세태에서 고리타분하기 짝이 없는 옛글이나 읽고 허황된 소리만 일삼는 부류는 설 곳이 없었다. 절대다수의 민중은 권력과 멀어진 글쟁이들을 실속 없이 밥만 축내는 무리로 폄하하고 업신여겼다. 그러다보니 자식에게 글공부를 시키겠다는 이들이 갈수록 줄어들었다.
그럼에도 학림(學林)은 꿋꿋이 존속했다. 영광스러운 과거에 견주면 비교 자체가 민망하리만큼 위축되긴 했으나 진리를 탐구하고 인간의 정신적 품격을 고양시키고자 하는 바람을 가진 이들은 들판의 잡초들처럼 끊임없이 나타났다.
이는 자부심만은 둘째가라면 서러울 학인들이 배를 곯고 조롱거리가 되는 한이 있어도 자신이 선택한 길을 포기하지 않고 학맥이 이어지도록 필사의 노력을 경주한 덕분이었다. 하지만 무학(武學)에도 심오한 문리(文理)가 요구되기에 무림의 강대방파들이 학자들을 보호하고 양성한 탓도 상당했다.
무가에 소속되더라도 하인들과 다를 바 없었으나 그래도 안전과 생계가 보장되기에 문인들로서는 감지덕지한 정책이 아닐 수 없었다. 극히 소수지만 대학(大學)으로 인정받으면 무가의 명숙에 준하는 대우를 받는 경우도 있었기에 학림의 요체는 오롯이 보존되었다.
그렇더라도 전체적으로 보아 문인들의 처지가 형편없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었다. 그들을 빈민과 동격으로 간주하는 이들도 부지기수였다.
진천이 권왕의 억측을 바로잡았다.
“제 선부(先父)는 팔영보를 가지고 큰 외숙과 거래를 하지 않았습니다. 좀 전에 말씀드린 대로 당신에겐 필요도 없거니와 외숙의 간청으로 아무 조건 없이 건네주었다고 들었습니다.”
“하면 네 아비는 다른 이들에겐 그 비술을 전하지 않았던 게냐?”
권왕의 질문에 진천은 불현듯 모친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무리 졸라도 부친이 그녀에게 팔영보의 구결을 알려주지 않았다며 모친은 분을 터뜨리곤 했다. 그녀가 지아비에 대해 품었던 유일한 원망이었다.
“제가 알기로는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두 악종이 뒈졌으니 이제 너만의 독문비기가 되었구나. 그나저나 심히 고약하도다. 전날 잔살광마와 귀도마의가 추적자들을 뿌리치며 보였다던 기이한 신법이 환문의 절기였을 줄이야. 하늘이란 작자가 실로 무심하구나. 전설로만 전해지는 고대 이인(異人)들의 비공을 악귀들의 수중에 떨어지게 하다니.”
“…….”
“팔영보라 함은 극상으로 펼쳤을 때 여덟 개의 그림자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뜻이렷다? 그림자란 곧 환신(幻身)일 테지?”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제가 이해하기로는 팔 단계의 경지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하면 너는 몇 단계더냐?”
“사오 단계쯤 되는 것 같습니다.”
“그놈들은 어느 정도였다더냐? 강호를 횡행할 때 말이다.”
“일사부가 약간 나았으나 공히 이 단계였다고 들었습니다.”
“허어, 고작 이 단계의 성취로 용호가 포함된 추포들을 닭 쫒던 개로 만들다니. 네가 팔영보를 완성하는 날엔 무왕들조차도 잡지 못하는 유령이 되는 게 아니냐?”
“그럴 리가요.”
권왕이 피로 범벅이 된 진천의 허벅다리를 흘긋 보았다.
“지금 다시 보여주는 건 무리일 테지? 아까 공중에서 구사한 수법 말이다.”
진천은 쓰게 웃었다.
“아닙니다, 어르신. 가능합니다.”
권왕이 일어서려는 진천을 말렸다.
“아서라. 그냥 해 본 소리다. 그것보다 하던 얘기나 마저 해 보거라. 강 맹주의 큰 아들놈이 어쩌다가 그런 괴물이 되었는지. 무가의 자손이 의생인 귀도마의와는 어떤 계기로 어울렸는지. 이제 딴 소리는 그만 하고 거기에만 집중해라.”
이야기가 옆길로 샌 건 자신의 잘못이 아니었지만 진천은 억울함을 내색하지 않고 권왕의 청에 응했다.
강진은 마음이 여린 만큼이나 다정다감한 사람이었다. 무인으로서는 결격이었으나 그런 품성 덕분에 그의 하인들은 그를 인간적으로 좋아했다. 구양(具陽)은 그중에서도 유독 강진을 따랐다.
구양은 강진의 유모의 둘째아들이었다. 말하자면 둘은 한 젖을 먹고 자란 사이였다. 기질이 맞았는지 강진은 한 살 아래의 구양을 친동생처럼 아꼈고 구양은 강진을 태양처럼 숭배했다. 일곱 살 이후 강진이 가문의 애물단지로 전락했을 때도 구양의 충정은 변함이 없었다.
구양은 공식적으로는 강진의 몸종이었으나 사적으로는 그의 둘도 없는 벗이었다. 강진은 누구에게도 밝힐 수 없는 내밀한 심사를 구양에게는 날 것 그대로 털어놓았다. 기실 시시콜콜히 말해줄 필요도 없었다. 구양은 그의 눈빛, 표정, 목소리만으로도 무엇을 괴로워하고 어떤 욕망을 품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아차렸다. 가히 진정한 지음이었다.
구양이 열네 살 때 전기가 찾아왔다. 당시 그의 모친이 까닭 모를 괴질에 걸리자 효심이 지극했던 구양은 밤낮없이 지극정성으로 간호했다. 강진도 매일같이 병실에 들러 유모의 상태를 살피고 명의(名醫)들을 붙이는 등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두 사람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구양의 모친은 발병 후 넉 달을 넘기지 못하고 저승의 문턱을 넘고 말았다.
강진은 실의에 빠진 구양에게 천수원(天手院)으로 가서 의학을 익히도록 권유했다. 백여 일 간 모친을 돌보던 그가 의원이 되고자하는 원(願)을 세웠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강진과 헤어지기 싫었으나 구양은 결국 그의 뜻에 따랐다. 그러면서 기필코 최고의 명의가 되어 강진의 ‘고질병’을 고치고 ‘조문’도 치료하겠다고 맹세했다.
하늘같은 주인이 지상최강의 무인이 될 수 있도록.
예상외의 전개에 당혹스러웠던지 권왕이 눈살을 찌푸렸다.”갸륵한 구석이 없잖아 있지만 왠지 석연찮도다. 그놈에게 무슨 병이 있었다는 게냐? 그리고 조문은 또 무어야?”
“일사부는 자신의 심약함을 ‘고질병’이라고 불렀답니다. 조문이라 함은 내공의 빈약함을 말합니다. 일찌감치 가문의 기대 밖으로 밀려난 탓에 일사부는 변변한 영약조차 복용하지 못했답니다. 공력이 부족하면 강인한 심성을 가진들 강자가 될 수 없으니 일사부가 고수가 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과제를 다 해결해야 했던 겁니다.”
진천의 설명에 권왕이 일자로 붙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제야 알겠다. 그 구양이란 놈은 정공심법이 아닌 마공을 구상하려던 것이었어. 그렇지 않으냐?”
반드시 마공이라고 규정하기는 어려웠으나 역천기결이 순리를 거스르는 심공임에는 분명했기에 진천은 순순히 시인했다.
“그렇습니다.”
권왕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그 악종이 천민들에게 퍼뜨렸다는 괴이한 역병도 그와 무관치 않겠군.”
진천은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일사부의 ‘조문’이 아니라 ‘고질병’과 관련된 일이었습니다.”
권왕이 집요하게 물고 넘어졌다.
“그젯밤 삼보장에서 하남편봉이란 아이를 보았다. 소수마공을 익혔다지만 구음절맥이라 하니 수백 여아들의 순음지기를 취했다는 혐의는 벗었다지.”
진천은 권왕이 무엇을 의심하고 있는지 알았다.
“이사부는 영약의 도움 없이 공력을 급속도로 증진시킬 수 있는 비법을 연구했습니다. 물론 순수한 심법만으로는 그러한 결과를 얻기 어려웠습니다. 어느 정도는 외물(外物)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었지요.”
“그 외물이란 게 무고한 이들의 생목숨은 아닐 테지?”
진천은 음울했다. 할 수만 있다면 부인하고 싶었다.
“전날 일사부가 희생자들을 살해하기 전에 참혹한 고문을 가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이사부의 처방대로 잔인한 행동을 반복함으로써 ‘고질병’을 치료하기 위함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들이 죽어가면서 뿜어내는 원혈(冤血)을 취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원혈이 역천기결이라 명명한 심공을 발현하는 데 필수적인 재료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분노로 인해 권왕의 주름 가득한 안면에 경련이 일었다.
“내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석년 잔살광마에게 죽임을 당한 이들은 일천에 육박한다. 한낱 마공을 이루려고 그런 천인공노할 짓을 저지르다니. 정녕 악독한 종자들이로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기에 진천은 침묵했다.
권왕이 예상했던 뒷말을 쏟아내었다.
“네 사부란 놈이 일천의 원혈을 필요로 했다면 너는 얼마나 먹은 게냐? 그놈보다 네 무력이 월등한 걸 보면 배 이상 취했을 테지? 네가 직접 행했느냐 아니면 그 악종들이 갖다 바쳤더냐?”
권왕의 음성에 노골적인 혐오감이 배어나왔다.
바윗덩이 같은 무게가 실린 권왕의 안광이 진천을 짓눌렀다.
그의 호감이 옅어지다 못해 사라질 지경임을 감지했지만 진천은 조바심을 내지 않고 침착함을 유지했다.
“저로서는 천만다행히도 저는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역천기결을 익혔습니다.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이사부는 원혈을 대체할 방안을 찾았습니다. 다름 아닌 독물(毒物)이었습니다. 실은 궁구 끝에 얻은 성과가 아니라 우연한 발견이었습니다. 이사부가 정맹의 추적을 피해 달아났던 창인은 밀림지대와 가깝습니다. 창인의 터줏대감들에게 밀려 밀림에 들어갔다가 몇 차례 생사의 고비를 넘기던 중 독초들이 원혈과 비슷한 작용을 한다는 걸 알게 된 이사부는 본격적으로 연구에 매달렸습니다. 그리고 십 년 후 마침내 원하는 비법을 완성했습니다. 이사부는 팔십여 종의 독물들을 배합해 원정을 제조했습니다. 저는 다섯 살부터 오 년 간 그 원정을 주입받았습니다. 그것이 제 공력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진천은 원정을 단전과 심장에 들이는 과정에서 수백 번이나 죽었다 깨어나야 했던 지옥의 시간들을 구구절절 읊지는 않았다. 모친과 사부들이 그의 목숨을 대상으로 도박을 했다는 사실도 속에 가두었다.
여하간 험악해졌던 권왕의 표정이 한결 풀렸다.
“그럼 너는 독인(毒人)인 게로구나?”
“아닙니다, 어르신. 독공을 익히지도 않았고 남들에게 제 피가 닿아도 중독되거나 탈이 나지도 않습니다. 제 단전에 응축된 원정은 역천기결을 운용할 때마다 녹으며 제 체내의 잠력(潛力)을 극대화시킬 뿐입니다.”
“얼마나 녹았는데?”
“저 자신도 정확히는 모르지만 삼 할쯤 녹았을 듯싶습니다.”
“흐음, 삼 할에 벌써 초절정의 경지에 들었으니 다 녹으면 절대지경에도 어렵지 않게 이르겠구나.”
권왕은 농담하듯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지만 기실 엄청난 얘기였다.
당금 무림을 제외하면 일천 년 무림사를 통틀어 절대지경에 발을 들여놓았다고 평가받는 무존(武尊)들은 단 팔인(八人)에 불과했다. 백 년에 하나 꼴도 안 될뿐더러 초인들의 시대로 불리는 삼백 년 전 여섯 명이 한꺼번에 출현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사오백 년에 하나가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진천이 쓰게 웃었다.
“어찌 내공만으로 절대고수가 되기를 꿈꾸겠습니까? 제 무재는…….”
권왕이 진천의 말을 잘랐다.
“어허, 괜한 겸양 부릴 것 없느니라. 네 녀석 재주를 오늘 내 눈으로 보았거늘. 남천도왕의 후계자란 아이와 사투를 벌여 상당한 내상을 입었다면서. 그런 상태로 이번엔 북천도왕이 기른 기린아와 싸워 우세를 점하지 않았더냐. 네가 독한 마음을 품었다면 그놈은 아까 연무장에서 비명횡사를 면치 못했을 터. 근래 세인들이 떠드는 대로 너는 장차 여덟 늙은이들의 군웅할거를 종식시키고 난세를 평정하게 될 게다. 물론 도중에 변을 당하지 않고 살아남는다면 말이지만.”
무시무시한 예언을 뱉어낸 권왕이 진천을 재촉했다.
“그보다 끊어졌던 얘기나 이어보려무나. 어쩌다가 서로를 살뜰히 챙기던 선량한 주종이 사악하기 이를 데 없는 마귀들로 변신했는지. 네 애비와는 어떻게 연결되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