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85
제84화
강연의 일생은 금지된 것에 갈망의 여정이었다.
그녀가 그토록 바라마지 않았던 대상은 무공이었다. 강가 직계의 다른 여식들처럼 다섯 살에 처음 팔비수와 원앙각을 배운 강연은 소꿉놀이보다 백만 배나 재미있는 권각술에 흠뻑 빠져들었다.
강가는 오래 전의 뼈아픈 경험으로 인해 여식들에게 번천도공은 전수하지 않았지만 최소한의 호신술은 가르쳤다. 호신술이라고 해도 팔비수와 원앙각 모두 절학으로 꼽혀 손색이 없는 무공들이었다.
강연이 군계일학의 무재를 지녔음은 곧 드러났다. 그녀는 숙달하는데 칠팔 년이 걸린다는 팔비삼십이수(八臂三十二手)와 원왕십팔각(鴛鴦十八脚)을 단 육 개월 만에 체득했다. 재주가 유별나게 뛰어나다고 평가받던 여아들도 빨라야 삼사 년이었다.
전례가 없는 강연의 성취는 강가의 화제가 되었다. 원로들은 너도나도 내원에 몰려들어 어린 소녀에게 무공시연을 청했다. 강연은 신이 나서 앙증스럽고도 현란한 춤사위를 자랑스레 펼쳐보였다.
그러나 그녀의 날개는 돋자마자 꺾여버렸다. 일찌감치 장차 무림을 호령하는 무후(武后)가 되겠다는 꿈에 부풀어있던 그녀를 좌절시킨 이는 다름 아닌 그녀의 부친 강운이었다. 정맹의 권좌에 오른 경사스러운 날에 태어난 막내딸을 장중보옥으로 여기며 예뻐하던 강운은 가문의 율법을 그녀에게 주지시키며 더 이상의 무학은 배울 수 없음을 못 박았다. 강연이 울며불며 매달렸으나 강운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실의를 넘어 절망에 빠진 강연은 성격도 변했다. 쾌활하고 매사에 자신만만하던 소녀는 얼굴에 늘 우울함과 낙담을 드리운 여자로 자라났다.
권왕이 혀를 찼다.
“쯧쯧, 가여운 지고. 강 맹주도 참 지독하구나. 고명딸이 그 정도의 무재를 보였으면 가법을 바꾸어서라도 뒤를 받쳐줄 일이지. 거름과 물을 주고 햇볕을 쬐어주어도 모자랄 판에 무참히 새싹을 짓밟아 버리다니. 고작 대여섯 살밖에 안된 아이한테.”
진천은 쓰게 웃었다. 외조부가 권왕의 말처럼 했더라면 여러 사람의 운명이 바뀌었을 터였다. 무엇보다 모친이 그토록 원한에 사무친 삶을 살다가 가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대체 왜 그랬을까? 아무리 강가에 면면히 내려오는 전통이라 해도 강 맹주의 권위와 권한이면 얼마든지 폐지할 수 있었을 터인데. 기실 그런 악습을 태동시킨 사건은 벌써 이백 년이나 지나지 않았더냐. 강산이 수십 번이나 바뀌는 동안 그깟 과거의 악몽 하나에 얽매어 숱한 여아들의 재능을 사장시켰다니 참으로 한심한 노릇일세. 그야말로 빈대 한 마리 잡으려다 초가삼간을 몽땅 태워먹은 꼴이 아닐 수 없다.”
적절한 비유가 아니었으나 진천은 권왕의 진의를 이해했다. 외조부의 조치는 그의 피를 이어받아 무인의 천성을 타고난 모친에겐 지나치게 냉정하고 가혹한 처사였다.
권왕이 눈가에 흐르는 진물을 닦으며 물었다.
“강 맹주가 왜 그랬다고 생각하느냐?”
“모르겠습니다.”
“어허, 그러지 말고 말해 보거라. 듣자하니 네 녀석에겐 남의 속을 읽어내는 용한 재주가 있다면서?”
“…….”
“어서.”
권왕의 재촉에 진천은 마지못해 답변했다.
“순전히 제 억측임을 전제로 들어주십시오. 그 당시 외조부께선 정맹의 맹주 위에 오른 지 몇 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무위도 아직 절대지경에 들기 전으로 알고 있습니다. 강가를 비롯한 오대세가엔 외조부에 필적하는 강자들이 두어 명씩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일자 눈을 게슴츠레 뜨며 권왕이 정정했다.
“누구에게 들었는지 모르겠다만 네가 잘못 알고 있는 게다. 사십 년 전에도 강 맹주는 정파의 일인자였느니라. 물론 마령 문가의 섬전도군(閃電刀君)처럼 그와 엇비슷한 무력을 가졌다고 세인들이 평가하던 노장들이 더러 있긴 했다. 하지만 열 명 이상이라니, 어불성설이야. 오대세가를 다 합쳐도 기껏해야 서넛이었을 게다. 그나마도 강 맹주에겐 어림도 없었어. 문가의 섬전도군이든 설가의 태양장(太陽掌)이든 제대로 붙었다면 일백 초 이내에 그의 쌍칼에 무릎을 꿇었을 게야. 내가 보장하마.”
진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어르신. 사실을 바로잡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제 말의 요지는 당시 외조부의 입지가 지금처럼 탄탄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맹주가 되는 과정은 물론이고 그 이후에도 사대세가의 견제가 상당했으리라 봅니다만.”
“그렇긴 했지. 원래 정파 늙다리들의 특징이 아니더냐. 감 놔라 대추 놔라. 여기 놔라 저기 놔라. 지긋지긋하다.”
생각만 해도 넌덜머리가 나는지 권왕이 수박만한 머리통을 절레절레 흔들었다.
“외조부께서는 아마도 규율의 철저한 적용과 집행으로 잡음을 최소화시키고자 하셨을 것입니다. 사대세가가 간섭할 빌미를 주지 않으려고 말입니다.”
권왕이 백미를 꿈틀거렸다.
“그러고 보니 그렇구나. 원체 고지식한 위인이기도 하거니와 정맹의 주인이 되었을 무렵엔 유독 융통성이 없었더랬지. 다들 뒤에서 갑갑하다고 엄청나게 욕들을 하곤 했다. 솔직히 나야 흐뭇했지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잘못을 저지른 놈들은 엄정히 처벌하는데 얼마나 통쾌하던지. 저마다 잘 났다고 날뛰던 사대세가의 망둥이들이 맹규(盟規)를 어긴 자기 숙부마저 가차 없이 쳐내는 강 맹주의 서슬에 주눅이 들어 바짝 엎드리던 꼬락서니가 눈에 선하구나.”
“그랬군요.”
“어쨌거나 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겠다. 강 맹주는 정맹에서의 행태를 자신의 가문에서도 반복한 게야. 그렇지? 밖에서 새는 바가지가 안에서 새지 않을 리 없잖으냐?”
이번에도 부적절한 비유였으나 진천은 수긍했다.
“그렇습니다. 지금은 어떠실지 모르겠으나 당시 외조부께선 예외를 두는 일을 극히 꺼리셨을 듯싶습니다. 그러한 태도를 제 어머니에게 견지했을 터이고요.”
“흠, 충분이 일리가 있다. 그 즈음의 강 맹주는 바늘로 찌를 틈조차 안 보일 정도로 팍팍하게 굴었으니까. 대충 의구심이 풀렸으니 네 어미 얘기나 계속해 보려무나.”
권왕을 납득시킨 진천은 굳이 또 다른 추정을 밝히지는 않기로 했다.
가장 의지하고 사랑하는 부친에 의해 생애 최초이자 최대의 좌절을 맛 본 강연은 외톨이가 되었다.
그녀 스스로도 남들과 어울리지 않았고 다른 이들도 나이답지 않게 음산한 기운을 풍기는 그녀를 멀리했다. 강연이 말을 주고받는 친족은 가문을 통틀어 큰 오라비인 강진뿐이었다. 일종의 동병상련이었다. 그러나 강진조차도 몰래 무공구결을 알려달라는 그녀의 간곡한 청을 매몰차게 거절했다. 누이가 한없이 안쓰러웠으나 그에겐 부친의 엄명을 거역할 용기가 없었다.
강연은 별 수 없이 어린 날 익힌 팔비수와 원앙각의 수련에 매진했다. 과한 수련으로 팔과 발이 몇 번이나 부러졌고 손등과 손바닥엔 돌덩이 같은 굳은살이 박였다. 열 살 무렵 강연은 권각술만으로 가문의 도공(刀功)에 정식으로 입문한 또래의 사내아이들을 압도했다. 모두들 그녀의 무재에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외공만으로는 한계가 분명했다. 그녀에게 상대도 되지 않던 소년들이 내공을 지니며 점차 무력이 비등해지더니 종내는 거리를 벌리기 시작하자 강연은 미칠 것만 같았다. 호위무사들을 꼬드겨 그들의 삼류심법이라도 얻으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들키는 날엔 자신의 목이 날아가는 것은 물론이고 삼족이 멸할 수도 있음을 알기에 아무도 그녀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남들이 심공과 절학이라는 준마를 타고 질주하는 동안 자신만 시시한 권각술이나 무한 되풀이하며 굼벵이처럼 기어가고 있다고 여긴 강연에게 하루하루는 지옥이었다. 십대 초반에 이미 팔비수와 원앙각을 새로운 경지로 끌어올리는 놀라운 성과를 이루었지만 그녀의 목마름은 갈수록 커져갔다. 그러던 중 무슨 일이 있어도 상승무공을 배우고야 말겠다는 욕망을 부채질한 일이 일어났다.
열두 살 때 강연은 처음으로 정맹이 있는 일신(日新)을 방문했다.
그녀에겐 천하제일도(天下第一都)의 마천루보단 각종의 병기들을 지닌 채 대로를 활보하는 무인들이 훨씬 더 큰 구경거리였다. 강연은 그들이 어떤 식으로 무기를 부리는지 궁금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녀의 호기심은 상당부분 충족되었다. 기실 일신행의 목적은 유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용봉대전을 관전하기 위해 정맹을 찾은 것이었다. 그해에는 그녀의 둘째 오라비인 강선이 출전할 예정이었다.
용봉대전은 정파 무림의 후기지수들이 모여 무공을 견주고 친목을 다지는 축제였다. 각 가문의 명예가 걸려있을뿐더러 우승자는 거의 예외 없이 삼사 년 후 용호가 될 수 있었기에 축제라기보다는 전장(戰場) 같은 분위기였다.
오대세가를 포함한 정파 명문대가의 후예들이 펼치는 치열한 승부를 관전하며 강연의 심장은 소망과 절망으로 범벅이 되었다. 그들과 같은 용봉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결코 그들처럼 될 수 없을 터였다.
그해의 결승은 원주 강가의 강선과 사평 팽가 팽하연(彭霞蓮)간의 결전이었다. 관전하던 강연의 심장이 뭍에 나온 물고기처럼 팔딱거렸다. 팽가 여인의 검은 둘째 오라비의 쌍도에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강가에서는 절대로 보지 못할 광경이었다.
강연은 평소 형과 누이를 대놓고 멸시하던 둘째 오라비의 패배를 넋 놓고 지켜보았다. 세상 최고의 기재인 양 으스대던 둘째 오라비는 한낱 여인의 검을 넘지 못하고 무너졌다. 팽하연이 일찍이 무재를 널리 알린데다 스물 셋인 강선보다 다섯 살이나 연상이었기에 그렇게 충격적인 결과라고 하긴 어려웠으나 강연에겐 하늘과 땅이 뒤바뀔 정도의 대사건이었다.
강연에게 중요한 점은 팽하연이 여인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녀가 할 수 있다면 자신도 가능하리라 믿은 강연은 더 늦기 전에 어떻게든 심공을 익혀 공력을 쌓기로 결심했다.
드물게 인내심을 발휘하던 권왕이 아는 이름이 나오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입을 벌렸다.
“네 어미가 자하검선(紫霞劍仙)에게 단단히 자극받은 게로구나.”
자하검선은 팽하연의 별호였다. 용봉대전의 우승으로부터 이십팔 년이 지난 현재 그녀는 사평 팽가 무력 서열 삼위로 인정받는 검호였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보다 직접적인 계기는 따로 있었습니다.”
“직접적인 계기라니?”
“용봉대전이 끝난 후 명가의 후손들과 친교를 나누던 중 제 어머니는 열다섯 살쯤 되는 고암 설가의 소년과 시비가 붙었답니다. 어머니 주장으로는 그가 남들 모르게 ‘고자나 다름없는 강가의 여식’이라며 놀렸다더군요. 모욕을 참지 못한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그의 턱을 부쉈답니다. 그러자 곁에 있던 그의 형이 반사적으로 어머니의 따귀를 때렸답니다. 어머니는 선풍각(旋風脚)으로 반격했다더군요. 강가의 소녀인데다 나이도 어려 보여 방심했던지 그는 어머니의 발뒤꿈치에 갈비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도 무사하지는 못했습니다. 설가의 청년이 날린 장풍에 가슴을 맞고 쓰러졌으니까요. 분을 이기지 못한 어머니는 피를 토하면서도 그에게 달려들었답니다. 다행히 주위 사람들이 달려와 말린 덕분에 더 이상의 불상사는 없었지만 장공으로 인해 흉골에 금이 가고 내장이 상하는 경험을 한 제 어머니는 기필코 심공을 익혀 열 배로 갚아주겠다고 다짐했다더군요.”
권왕이 감탄했다.
“진정한 부전여전이로세. 권각술만 익힌 열두 살의 꼬맹이가 장공을 구사하는 놈에게 정면으로 맞서다니. 강 맹주는 살쾡이 같은 폭풍도가 아니라 호랑이의 기질과 자질을 물려받은 네 어미를 후계자로 키워야 했어.”
진천은 쓰게 웃을 따름이었다.
“그래서 어찌 되었느냐? 네 어미는 바람을 이루었더냐?”
권왕의 질문에 진천이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비극을 말해야 할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