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86
제85화
정맹에서 소동을 일으킨 강연은 본가로 돌아온 후 부친에게 불려가 꾸중을 들었다.
십 년 전이었다면 체벌도 감수해야 했을지도 몰랐으나 재발 시 금제를 가하겠다는 경고를 받는 선에서 그쳤다. 오십대 중반에 들어서며 절대지경의 초입에 들어선 데다 십여 년에 걸친 권력투쟁에서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두고 정맹을 장악한 강운은 이전보다는 확실히 여유가 있었다.
오랫동안 소원하던 부친과 오랜만에 독대한 강연은 그 기회를 빌려 무공을 전수해주기를 눈물로 호소했다. 그러나 강운은 어떤 남자와도 교분조차 나누지 않고 평생 강가의 귀신으로 살겠다며 번천도공을 가르쳐달라는 그녀의 간청을 묵살했다.
가문의 비전이 안 된다면 외부의 심공이라도 익히도록 허락해 달라는 강연의 애원에도 강운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러다 그의 완고함에 혈루를 흘리며 절규하던 그녀가 끝내 혼절하자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는지 며칠 후 그녀를 찾아와 뜻밖의 제안을 했다. 훗날 그녀가 누군가와 연분을 맺어 아들을 낳으면 두 가지 조건을 충족시킨다는 전제 하에 강가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것이었다. 그리되면 그녀는 아들을 통해 강가의 무학을 얻는 대리만족을 할 수 있을 터였다.
권왕이 불쑥 물었다.
“두 가지 조건이란 게 무엇이더냐?”
“하나는 제 어머니의 짝이 되는 사내에게 연고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녀의 아들이 그녀에 준하는 무재를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허어, 그런 욕심이. 여하간 네 어미로서는 감지덕지였겠구나. 꿩 대신 닭이라고 자기 아들이라도 강가의 신공절학을 습득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진천은 고소를 지었다. 비유 실력이야 그렇다 쳐도 권왕은 번번이 헛발만 짚었다.
“유감스럽지만 외조부의 제안은 조금도 어머니를 기쁘게 하지 못했습니다. 제 어머니는 그런 식의 대리만족에 안주할 성정이 아니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어머니는 위로를 받기는커녕 불같은 분노가 일었다더군요. 외조부께선 자신이 원해서 딸로 태어난 게 아닌데 어째서 그런 천형(天刑)을 감내해야 하느냐며 울부짖는 어머니를 두고 방을 나간 후 다시는 그녀를 찾지 않았답니다.”
“강 맹주답군. 강호의 동도들은 그를 일러 철혈지존이네 뭐네 떠들어대지만 그냥 인간이 독한 것뿐이다. 아니, 독하다기보다는 졸렬하다는 말이 더 어울리겠구나. 어찌 제 딸 하나 보듬지 못하고 그리 모질게 굴었단 말이냐. 못난 위인 같으니.”
정파 무림의 지배자를 거침없이 비난한 권왕이 다음 이야기를 재촉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느냐. 결과적으로만 보면 강 맹주의 제안에 응한 셈이 아니더냐? 네 아비는 문사이니 무림문파를 배경으로 하지 않았을 테고 네 녀석 재주가 네 어미에 뒤질 성싶지 않은데.”
“저는 제 어머니에 비해 많이 부족합니다.”
“그런 어쭙잖은 겸양은 집어치우래도.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말고 네 어미에 대해서나 계속 얘기해 보거라.”
권왕의 면박에 진천은 겸연쩍은 미소를 머금었다.
부친에게서는 결코 바라는 바를 얻지 못하리라는 결론에 이른 강연은 그녀의 욕망을 채워줄 사냥감을 모색했다.
그녀가 노린 이는 수년 째 만무서고의 틀어박혀 두문불출하던 큰 오라비 강진이었다. 기실 그에게도 어린 시절부터 수십, 수백 번이나 심공을 알려달라고 청했다가 퇴짜를 맞았으나 그 외에는 대안이 없었다.
강진에게 사람을 보내 방문을 청한 강연은 그가 방으로 들어오자 자물쇠를 걸어 잠그고는 열쇠를 삼켰다. 그러고는 대뜸 자기 목에 비수를 들이댔다. 당황한 강진이 영문을 묻자 강연은 탁자에 준비된 지필묵을 가리키며 심공 구결을 적으라고 요구했다. 자기 말을 따르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자결할 거라는 그녀의 위협에 강진은 혼비백산했다.
강진이 만류하자 농담이 아님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강연은 날카로운 비수를 목에 쑤셔 넣었다. 아직 구양의 묘약을 복용하기 전이었던 강진은 그녀의 목덜미에서 솟구치는 선혈에 얼이 빠졌다. 강연은 눈도 깜박이지 않고 비수를 옆으로 긋기 시작했다. 그대로 내버려두면 혈맥을 상하지 않더라도 출혈로 사망할 수도 있는지라 강진은 허둥지둥 붓을 들었다.
독기로써 오라비의 심약함을 공략한 강연은 결국 그로부터 번천심공의 바탕이 되는 현무심법(玄武心法)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번천심공에는 미치지 못했으나 강호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을 절학이었다. 더욱이 강연이 익힌 권각술과 궁합이 맞는 심공이기도 했다.
반 시진에 걸쳐 홀린 듯 현무심법을 써내려간 강진은 기록을 마친 후 탈진지경에 이르렀다. 강연은 실신 직전인 그를 끌어안고 죽을 때까지 은혜를 잊지 않겠다며 울먹였다. 뒤늦게 후회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 강진으로서는 비밀이 새어나가지 않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권왕이 오므라진 입을 크게 벌렸다.
“하아, 정녕 독한지고. 과연 강 맹주의 딸이로다. 그나저나 참으로 한심한 종자로세. 어린 누이가 제 목숨을 담보로 협박했기로서니 그렇게 쉽게 넘어가다니.”
진천은 씁쓸했다. 일사부는 결코 쉽게 넘어간 것이 아니었다. 모친은 정말로 죽을 각오를 했고 일사부는 그걸 알아보았을 뿐이었다. 그로서는 불가피했던 굴복이었다.
“어쨌거나 네 어미는 원을 풀었구나. 그런데 결국 들통이 난 것이었어. 잔살광마 노릇을 하던 그놈이 잡혀왔을 때 불었을 테지? 웃기는 놈일세 그려. 몸종의 행방은 끝까지 함구했으면서 저를 구한 누이를 위태롭게 만들다니. 네 어미로서도 처벌을 피해 창인으로 달아날 수밖에 없었을 게야. 그렇지 않더냐?”
이어질 내용이 비극인지라 심장이 쓰라린 중에도 진천은 실소했다. 권왕은 알아맞히는 데는 영 소질이 없었다.
“죄송하지만 전후 관계가 조금 틀립니다, 어르신. 나중에 제 어머니가 심공을 익히고 있음이 발각되긴 했으나 일사부가 누설한 것은 아닙니다.”
추측이 빗나가서 불만스러운지 권왕의 목소리가 퉁명스러워졌다.
“그럼 누구더냐? 설마 네 어미가 제 입으로 토설하지는 않았을 게 아니냐?”
강연은 필사의 결기로 강진에게서 획득한 현무심법을 몰래 익혔다.
정종심법(正宗心法)인지라 바로 효력이 생기지는 않았으나 반년쯤 꾸준히 운공하자 단전에 엄지만한 응어리가 들어섰다. 그 응어리가 풀리며 기이한 기운이 혈류를 따라 돌자 강연은 전율했다. 드디어 내공이 생긴 것이었다.
강연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한줌밖에 안 되는 미약한 공력이었지만 바위도 때려 부술 것 같았다. 과도한 희열감으로 심장이 터질 지경이었던 강연은 가까스로 자제했다. 내공이 갓 생성되는 시기에 지나치게 흥분하면 주화입마에 들 수 있다던 강진의 경고를 상기해서였다.
강연은 밖에서는 절대로 내공을 운용하지 않았다. 연무장에서 섣불리 주먹이나 발길질에 내공을 실었다가 들키는 날엔 큰일이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방에서의 수련이 갑갑해졌다. 강연은 체내에 휘도는 힘을 마음껏 부려보고 싶었다. 허공이 아니라 나무나 돌에게.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을 상대로.
호위무사들과 비무를 하며 몇 번이나 자제력을 잃고 내력이 담긴 권공을 펼칠 뻔한 강연은 이대로는 버틸 수 없음을 자각했다. 그녀의 욕구는 이미 포화상태였다. 그렇다고 남들이 보는 데서 폭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강연은 묘안을 짜냈다.
정맹에 다녀 온 이후로 일 년 가까이 일체 내원을 벗어나지 않았던 강연은 어느 날 봄바람을 쐬고 싶다는 구실로 네 명의 호위무사를 대동하고 원주 외곽의 우정산으로 향했다. 산세가 험준하고 협곡이 깊어 상춘의 장소로는 어울리지 않는 곳이었으나 호위무사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그녀를 따를 도리밖에 없었다.
시내가 흐르는 골짜기에 들어간 강연은 수욕을 하겠다며 호위무사들을 밖으로 몰아냈다. 자기가 부르기 전까지는 어떤 일이 있어도 계곡 안으로 들어오지 말라는 그녀의 엄명에 호위무사들은 난감해 했다. 가주의 영애가 외출할 시엔 그녀에게서 삼 장 이상을 떨어져서는 안 된다는 규칙을 어겨야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명을 어기면 자신의 알몸을 훔쳐볼 의도로 간주해 목을 베겠다는 그녀의 엄포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그녀만 두고 계곡을 빠져나갔다.
호위무사들을 따돌린 강연은 봉인을 해제하고 내공을 담은 권각술을 펼쳤다. 기대와 달리 바위를 박살내기엔 어림도 없었다. 암석은커녕 나무조차 깨지 못했다. 차라리 맨 주먹으로 치는 게 더 위력적일 터였다.
열 달 동안 불철주야 쌓은 공력이 미풍에 불과함을 확인한 강연은 실망했다. 이래서야 어느 하 세월에 목표로 삼았던 팽가의 여검사에게 견줄 수 있는 무위에 이르겠는가. 눈앞에 생생하던 그녀의 자줏빛 검기가 아스라이 멀어진 기분이었다.
그러나 강연은 첫술에 배부르길 바라는 건 욕심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자신에겐 아직 그녀를 따라잡을 십육 년의 말미가 있었다. 열세 살의 그녀에겐 백 년과 다를 바 없는 장구한 시간이었다.
반드시 그녀를 능가하는 무인이 될 테야. 그리고 언젠간 여중제일인이라 불리는 월교의 교주도 넘어설 테야. 나아가 아버지를 비롯한 세상 모든 이들을 발아래 두는 절대무존이 되고 말테야.
다시금 결의를 다진 강연은 우정산에서의 첫 수련을 마무리 지었다.
“어째 느낌이 좋지 않구나. 제 딴에는 꾀를 부린 모양인데 너무 허술하구나. 아무리 하잘것없는 무사들이라도 수욕하는 소리와 수련의 기음을 분간하지 못할 만큼 둔하지는 않을 터인데. 분명 이상하다고 생각했을 게다. 그러곤 상부에 보고를 했겠지.”
“제 어머니는 사전에 충분한 거리를 두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방금 어르신께서 말씀하신 경우에 대비하여 미리 마음이 동하면 수욕하기 전에 수련을 할 수도 있다고 호위무사들에게 넌지시 알렸답니다.”
자꾸 추측이 빗나가자 권왕이 허연 눈썹을 실룩거렸다.
“어쨌거나 네 녀석이 굳이 이 얘기를 꺼낸 것으로 보아 그 일이 사달의 빌미가 된 게야. 그렇지 않으냐?”
부정하면 그 유명한 주먹으로 머리라도 칠 기세인지라 진천은 실소했다. 권왕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일면 사실이었기에 진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어르신.”
권왕이 득의만면했다.
“크흐, 내 그럴 줄 알았느니라. 그나저나 그 어린 것의 몸부림이 실로 애처롭구나. 얼마나 간절했으면 그렇게 구차스럽게……, 쯧쯧.”
진천은 혀를 차며 말을 맺는 권왕의 심정이 기꺼웠다. 그 시절의 모친은 동정 받아 마땅한 소녀였다.
“우정산에서 돌아온 제 어머니는 만무서고로 일사부를 찾아가 내공의 운용과 활용에 관한 조언을 청했습니다. 일사부에게 조언과 더불어 여러 가지 주의사항을 들은 어머니는 그 이후 두 달에 한 번씩 우정산으로 가서 자신의 진도를 확인했습니다. 만족스럽진 않지만 차곡차곡 쌓이는 공력에 마냥 뿌듯했다더군요.”
“자못 흐뭇한 대목이건만 어이해 썩은 감을 씹은 표정이더냐?”
권왕의 돌발질문에 진천은 가슴이 미어졌다. 우정산의 계곡을 드나들었던 팔 개월은 모친에겐 다섯 살까지의 유년기를 제외하면 인생에서 유일하게 행복에 겨웠던 시간이었다.
“방금 전 어르신의 말씀처럼 우정산에서의 수련은 제 어머니에게 닥친 불행의 단초가 되었습니다. 가문의 누군가 그녀의 행동에 주목하곤 은밀히 뒤를 따랐지요. 봄, 여름, 혹은 가을이라면 모를까 한 겨울에도 산행을 나간다니 수상쩍었나 봅니다. 어머니는 위에서 지켜보는 눈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일 년 반의 적공이 담긴 권각술을 극성까지 펼쳐보였답니다. 그 탓에 비밀을 들키고 말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