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87
제86화
공중에서 떨어져 내린 검은 인영을 본 강연은 간이 철렁 내려앉았다.
흑의인의 정체가 둘째 오라비인 강선이었기 때문이었다. 그와는 원래부터 물과 기름 같은 사이였으나 이 년 전 용봉대전 이후로는 견원지간처럼 변해버렸다. 나이와 무력의 차이가 워낙 큰지라 치고받으며 싸우지만 않았을 뿐 오누이가 서로에게 뿜어내는 적개심은 확연했다.
강연은 어릴 적부터 그녀를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던 강선을 싫어했다. 그녀와 열한 살 터울인 강선은 시도 때도 없이 그녀 앞에서 칼바람을 일으키는 재주를 뽐내며 으스대곤 했다. 그가 현시하는 도기(刀氣)가 부러워 죽을 지경이었던 강연은 자기에게도 가르쳐 달라고 졸랐다. 그러나 매번 그녀에겐 가문의 비학을 배울 자격이 없다는 싸늘한 면박만 받았을 뿐이었다. 둘째 오라비의 의도가 자신에게 좌절감을 안겨주는데 있음을 인지한 강연은 분개했다.
강선의 치기는 그가 십대 후반으로 들어서며 잦아들었지만 강연의 심상에 새겨진 분함은 지워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었다. 강연은 강선을 볼 때마다 그러한 심사를 눈빛에 담았고 강선은 그런 강선에게 멸시의 안광으로 되갚았다.
가뜩이나 좋지 않았던 둘의 관계는 용봉대전을 계기로 악화되었다. 준우승이라는 준수한 성적을 얻었으나 강선은 누이동생 앞에서 패배한 모습을 보여준 것을 치욕으로 여겼다. 강연은 둘째 오라비의 자격지심을 즐겼다.
이따금 마주칠 때마다 둘만이 아는 격렬한 감정의 공방전이 벌어졌다. 승자는 대개 강연이었다. 노골적인 조롱기가 깃든 그녀의 눈을 보기만 해도 분통이 터질 것 같았으나 강선은 차마 강연에게 손을 댈 수 없었다. 아무리 화가 나도 넘지 말아야할 선이 있음을 자각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그녀의 도발임을 알고 있어서였다.
강선은 결국 강연을 피해 다녔다.
자칫 자제력을 잃고 그녀에게 손찌검을 했다가는 뒷감당이 어려워질 게 뻔했다. 강선은 누이에 대한 부친의 애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기실 어린 강연에게 자신의 무공을 과시했던 까닭도 부친의 편애에 있었다. 스스로를 강가 최고의 기재로 여기고 정맹주가 된 부친의 유일무이한 후계자라 자부했던 강선은 누이동생의 무재가 발견된 후 부친이 그녀가 딸로 태어났음을 한탄하자 극심한 굴욕감을 느꼈다. 그 전에는 관심조차 없었던 누이가 한없이 미워지기도 했다.
그렇게 시작된 악연이 십 년 가까이 이어졌고 최근에는 둘만의 미묘한 신경전에서 연패를 거듭하던 터에 엉뚱한 우정산에서 마침내 대역전의 기회를 잡은 셈이었으니 강선으로서는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강연은 둘째 오라비에게 고개를 숙이기는 죽기보다 싫었으나 자존심을 내려놓고 빌었다.
강선은 제발 눈 감아 달라는 그녀의 간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러고는 다짜고짜 그녀를 기습해 혈도를 점했다. 아혈까지 찍어 강연의 입을 막아버린 강선은 그녀를 들춰 메고 계곡을 빠져나갔다. 두 사람을 본 호위무사들은 눈을 휘둥그레 떴지만 연유를 묻지 못하고 강선의 뒤를 따랐다.
강가로 돌아온 강선은 강연을 자기 방에 가둔 후 만무서고로 향했다. 그리고 형인 강진에게 모든 게 드러났으니 전후사정을 상세히 고하라고 윽박질렀다. 강연이 현무심법을 익히고 있음과 그녀에게 그 심법을 전한 이가 그라는 사실을 강선이 알고 있다고 하자 강진은 새파랗게 질렸다. 강선은 심약한 형을 거세게 다그쳤다. 강진은 아우의 기세를 감당치 못하고 일 년여 전에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강진의 자백을 확보한 강선은 그마저 제압해 서각의 밀실에 두고는 부친을 찾아갔다. 강선에게서 실제보다 부풀린 보고를 받은 강운은 진노했다. 강선은 부친의 명에 따라 형과 누이를 은밀히 그의 처소로 옮겼다.
강운은 몸소 아들과 딸을 취조했다. 강진은 죄를 인정하며 선처를 호소했으나 강연은 용서를 빌기는커녕 자신은 잘못한 게 없다고 대들었다. 무인이 무공을 갈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냐는 그녀의 항변은 부친의 심화에 기름을 끼얹었다.
권왕이 바지에 손을 문지르며 손바닥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그래서 어찌 되었느냐? 강 맹주 성질에 그냥 넘어갔을 성싶진 않은데.”
진천의 이마에 그늘이 내렸다.
“제 어머니는 단전을 폐하는 벌을 받았습니다. 일사부는 오른손을 잘렸습니다.”
권왕의 일자 눈이 동그래졌다.
“허어, 설마 했더니. 실로 독한 위인이로다. 어찌 제 자식들에게 그렇게 가혹한 처벌을 내린단 말인가. 당시 네 어미는 아직 열다섯 살도 되지 않았을 터인데.”
정확히는 열네 살 생일을 보름 앞 둔 날이었다. 진천은 그날의 일을 회상하며 원독을 뿜어내던 모친의 핏발선 눈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녀에게 있어 단전의 파괴는 참수(斬首)보다 중한 형벌이었다.
권왕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이상하구나. 잔살광마는 두 손이 다 멀쩡하다고 들었는데. 그건 어찌 된 일이더냐?”
비감한 심사에도 진천은 고소를 지었다. 조금만 생각하면 알 수 있는 일이 아닌가.
“하나는 의수(義手)였습니다.”
진천의 대답에 권왕이 민망한지 헛기침을 했다.
“커흠, 짐작했던 대로구나. 이미 알고 있었지만 혹시나 싶어서 물어봤던 게다.”
“네, 어르신.”
별안간 권왕이 씩 웃었다.
“여하간 궁금증 하나가 풀렸다. 무슨 궁금증인지 알겠느냐?”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한 번 맞춰 보거라.”
“…….”
“어서.”
“제 무공에 관한 것일 듯싶습니다. 오른손을 잃었으니 일사부가 좌수로만…….”
눈썹을 찡그리던 권왕이 진천의 말을 자르고 들어갔다.
“호오, 그놈 참 정말 물건일세 그려. 남의 속을 읽는다더니 허풍이 아니었어.”
진천은 부인하려다 ‘어쭙잖은 겸양’이라는 핀잔을 들을 게 빤한지라 입을 다물었다.
“네 녀석이 괴이한 강기를 좌수로만 부려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참이었다. 잔살광마의 뿌리가 강가의 번천도공에 있으니 쌍도(雙刀)를 쓰는 게 정상인데 말이다. 나는 네가 아직 충분한 화후에 이르지 않아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이제 보니 애당초 좌수도(左手刀)가 될 수밖에 없는 조건이었구나.”
“그렇습니다.”
추론 방면으로는 허술한 구석이 많았으나 권왕은 무공에 관해서는 빈틈이 없었다.
“말이 나온 김에 물어보자. 너는 잔살광마가 남긴 무학을 어느 정도까지 성취했느냐?”
무림에서는 금기에 가까운 민감한 질문이었으나 권왕은 거침없이 내뱉었다. 진천은 권왕과 대면하고서 정했던 기조대로 순순히 답변했다.
“평가를 내려줄 일사부가 팔 년 전 유명을 달리했기에 정확히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제 자신은 거의 완성단계에 이르렀다고 봅니다. 다만 아직 공력이 부족해 일사부가 예견했던 위력은 구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구나. 인정하긴 싫지만 그 악종 놈은 제법 무재가 있었던 게야. 특히 쌍전(雙電)을 흉내 낸 수법은 꽤 인상적이었다. 좌수 하나로 쌍칼과 동일한 효과를 내다니.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진천은 권왕이 절멸비를 말하고 있음을 알았다. 역시 예리한 안목이었다. 그러나 절멸비는 쌍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무학이었다. 내공이 뒷받침된다면 일수에 두 자루가 아니라 여섯 자루를 날릴 수 있을 터였다.
권왕이 화제를 전환했다.
“이제 네 어미 얘기나 더 해보려무나. 단전이 깨지고 난 후 그 아이는 어찌 되었더냐?”
고통스러운 내용으로 돌아가게 되어 진천은 괴로웠다.
최강의 무인이 되고자하는 야망이 산산조각 난 강연은 폐인이 되었다.
그녀는 실성한 사람처럼 맥락 없이 희죽거리다가 느닷없이 통곡하곤 했다. 굶기를 밥 먹듯이 하는 바람에 피골이 상접하도록 야위어갔고 얼굴에는 노파처럼 검버섯이 피기 시작했다.
그녀에게 닥친 비극을 알지 못하는 주변 사람들은 그녀의 돌변에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강연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에 없던 활력을 과시했었기에 그들의 당혹감은 당연지사였다. 강선이 우장산에서 그를 보았던 호위무사들에게 철저한 함구령을 내렸기에 그와의 관련성을 아는 이도 없었다.
강연은 심지가 다한 촛불처럼 꺼져 들어갔다. 그러나 그녀는 절망의 늪 속에서도 숨을 이어갔다. 그녀로 하여금 생존의 끈을 놓지 않도록 한 이는 큰 오라비인 강진이었다.
강진은 우수가 잘렸으나 낙담하지 않고 오히려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았다. 이는 그가 낙천적인 성정이라서가 아니었다. 강진은 진즉부터 쌍칼을 부리는 가문의 번천도공을 일도법(一刀法)으로 통합시키는 무학을 구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막연한 윤곽만 그려냈을 뿐 좀처럼 구체화시킬 수가 없었다. 그러던 차에 도객으로서는 치명적이라 할 단수형(斷手刑)을 받았으나 손목이 베이는 찰나 신기한 경험을 했다. 뿌연 안개 속에서 한 줄기 빛이 날아와 그의 뇌리에 꽂힌 것이었다. 그 서광은 절멸도법의 단초가 되었다.
강진은 누이에게도 희망의 불씨를 심어주었다. 단전이 아니라 골수나 심장을 내공을 기르는 그릇으로 삼았다는 고대 이인들의 야사를 들려주며 강진은 그들의 비공(秘功)을 찾아보겠다고 강연에게 약속했다.
반신반의하던 강연은 강진이 고대의 환인들로부터 비롯되었다는 팔영보를 펼쳐보이자 기절초풍할 듯 놀랐다. 그녀가 보기에도 심상치 않은 신법이었다. 강연은 그 절기를 구사하는데 내공이 거의 필요치 않다는 강진의 말에 심장이 떨렸다. 강진이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면 그녀에겐 아직 꿈을 실현할 기회가 남아있었다.
강진은 팔영보의 구결을 가르쳐달라는 강연의 간청을 물리쳤다. 그녀가 욕심을 부리다 또 다시 경솔하게 처신하다가 걸리는 날엔 그때야말로 경을 치를 거라는 이유에서였다. 강진은 강연이 스무 살이 되기 전에 가시적인 성과를 내겠다면서 만약 그러지 못한다면 팔영보를 전수해주마고 그녀를 달랬다. 그의 고집을 꺾지 못한 강연은 어쩔 수 없이 인고의 세월을 받아들여야 했다.
지옥 같은 시간이 흘러갔다.
강연은 내원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고 강진은 밖으로만 떠돌았다. 강연은 서너 달에 한 번씩 본가로 돌아오는 큰 오라비를 붙잡고 진도를 물었다. 고대 이인들의 비공을 찾는 작업은 별무성과였으나 구양이 연구하는 역천기결을 염두에 둔 강진은 조만간에 결과물을 보게 될 거라며 보채는 누이를 다독거렸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강연은 큰 오라비의 눈빛이 이상하게 변하고 있음을 알아차렸지만 밤낮없이 궁구에 몰두하느라 그런 것이려니 하고 넘어갔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그가 가져다 줄 과실 뿐이었다.
강진은 그녀가 가출하는 등의 급한 일이 생겼을 때 연락방법을 만들자는 누이의 청에 망설이다 청송의 비처를 알려주었다. 구양과 두 달에 한 차례씩 비밀리에 회동하는 장원이었다.
권왕이 잡초 같은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의외로구나. 그놈이 잔살광마임을 몰랐다 하나 네 어미는 어찌하여 은신처를 불었단 말이냐? 필시 그놈에게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말을 들었을 터인데.”
“제 어머니는 강가 원로들의 꼬임에 넘어갔습니다.”
“꼬임이라니?”
“일사부에겐 아내가 있었습니다. 서로 간에 애정이 두텁지는 않았으나 어쨌든 부부지간이니 보통 사이는 아니지요. 강가의 원로들은 제 어머니에게 그녀가 급병(急病)으로 사경을 헤매고 있다고 했답니다. 일사부에게 처의 임종을 지킬 기회는 주어야하지 않겠느냐는 종조부들의 간곡한 설득에 어머니는 청송의 장원에 대해 알려주었답니다. 한편으로는 일 년이 넘도록 그녀에게 얼굴을 비치기는커녕 서신 한 장조차 보내지 않은 일사부에 대한 원망도 작용했던 것 같습니다.”
“자승자박이로다. 하늘의 그물이 성긴 듯 보이나 악행을 저지른 자들은 반드시 걸려들게…….”
말끝을 흐리던 권왕이 욕설을 내뱉었다.
“제기랄, 하늘이란 작자에게 또 속을 뻔했네. 걸려들긴 뭘 걸려들어. 도로 풀어줄 거면 애초에 잡지나 말 것이지.”
“…….”
“어쨌거나 네 어미는 그 악종에게 병 주고 약 준 셈이로구나. 체포에 결정적 역할을 했으면서 그놈을 탈출시켰으니.”
“…….”
“왜 대꾸가 없느냐? 달아나면서 잔살광마는 네 어미더러 창인으로 오라고 일렀겠지? 너를 배고서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