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89
제88화
해가 어느 새 중천으로 올랐다.
갑자기 허기가 진다며 권왕이 진천을 두고 숲으로 들어갔다. 모처럼 쉴 기회가 생긴 진천은 내-외상을 돌보았다. 강민과의 비무에서부터 강선과의 추격전이 끝날 때까지 당한 부상의 범위와 정도는 다대하고도 심각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회복불능의 치명상은 입지 않았다. 팔영보의 비기와 의형에게서 받은 천잠보의 덕분이었다.
권왕은 진천에게 운기조식할 시간을 허락하지 않고 일다경도 지나지 않아 손에 살이 토실토실 오른 토끼 한 마리를 들고 돌아왔다. 열양장(熱陽掌)으로 불을 일으켜 사냥해 온 토끼를 구운 권왕이 다리 하나를 떼어 진천에게 권했다.
“일일일식을 한다고 들었다만 아직 식전일 테지?”
식욕이 전혀 없었으나 진천은 권왕이 내미는 고깃덩이를 받아들었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다. 오늘 내가 베풀었으니 다음에 네가 대접해야 하느니라.”
“알겠습니다.”
사흘 굶은 사람처럼 게걸스럽게 토끼고기를 먹어치우는 권왕에게 진천이 조심스럽게 물을 청했다. 기실 진즉부터 갈증으로 목이 타들어갈 지경이었다. 권왕이 선뜻 허리춤에서 수통을 꺼내 진천에게 건네주었다. 뭐라 형용하기 힘든 고약한 냄새가 났지만 진천은 꿀물인 양 달게 마셨다.
“다 마셔도 된다. 아까 그 강에 가서 또 떠오면 되니까.”
진천이 두어 모금만 마시고 물주머니를 돌려주자 권왕이 말했다.
“아닙니다, 어르신. 충분히 목을 적셨습니다.”
권왕이 일자로 붙은 눈을 일그러뜨렸다.
“물에 악취가 나서 그런 게지? 그렇게 역겹더냐?”
권왕의 직설에도 진천은 당황하지 않고 차분히 대응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자란 창인은 물이 아주 귀한 곳입니다. 칠팔 년 전까지만 해도 물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과 살인이 다반사로 일어나곤 했지요. 저는 어릴 때부터 목마름을 해소할 만큼만 마시는 게 습관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먹을거리도 구하셨는데 어르신께 강까지 다녀오시는 노고를 보탤 수는 없지요.”
진천의 해명에 수긍했는지 권왕이 껄껄 웃었다.
“노고랄 게 뭐 있느냐? 한달음에 갔다 올 수 있는데.”
기분이 풀린 권왕이 다시 식사에 몰두했다. 제 몫을 다 먹은 진천은 그가 토끼고기를 해치울 때까지 기다렸다. 권왕이 불쑥 물었다.
“뭘 그렇게 유심히 쳐다보고 있느냐?”
“네?”
“흥, 시치미 떼기는. 네 녀석만 남의 속을 읽는 게 아니다.”
“……?”
“지금 이도 없는 늙은이가 어떻게 고기를 뜯고 씹는지 궁금해 하고 있지 않았더냐?”
대꾸할 말이 없어 진천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권왕의 비결을 이미 눈치 챘음을 밝히는 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진천을 꿀 먹은 벙어리로 만든 권왕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비밀이지만 내 특별히 알려주마. 이가 없으면 잇몸이라지 않더냐. 물론 내 잇몸은 보통 잇몸이 아니고 천하최강의 잇몸이니라. 꾸준한 단련으로 돌을 으깨는 건 물론이고 쇳덩이도 자를 수 있으니까. 그러니 이깟 육질쯤이야 식은 죽 먹기다.”
진천은 과장이 아님을 알았다. 우스꽝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권왕은 신체 내외가 모두 금강불괴일지도 몰랐다.
“대충 먹었으니 하다 만 얘기나 마저 하려무나. 어디까지 들었더라? 맞다, 네 애비어미 사이에 사랑의 불꽃이 튀었다는 대목에서 끊겼지. 거기서부터 다시 이어 보거라.”
권왕의 표현은 진실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날의 일로 호감이 생기긴 했으나 강연의 감정이 연정으로 발전하는 데는 상당한 시일이 소요되었다. 그나마 진서의 경우에는 강연에 대해 불꽃은 고사하고 한줌의 호의조차 품지 않고 있었다. 그에게 그녀는 무가의 여식답게 무례하고 심기가 불안정한 제자일 뿐이었다.
고문을 배우기 위해 서진과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며 강연은 가랑비에 옷이 젖듯 서서히 그에게 빠져들었다. 진서는 그녀가 알고 있던 어떤 사내와도 달랐다. 그는 문일지십의 천재였지만 재주를 뽐내는 일이 없었고 온화하면서도 강인했다. 진서의 심오한 학식과 순후한 인품에 매료된 강연은 그를 생각하느라 밤을 홀딱 지새운 어느 날 자신이 그를 사모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벼 베기가 끝난 논두렁의 허수아비와 동급으로 취급했던 학림의 인사에게 반한 심상을 자각하곤 강연은 소스라쳤다.
열병이라도 난 듯 심장이 뜨거워졌지만 강연은 자신의 마음을 진서에게 고백하지 못했다. 그가 그녀의 연정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어서였다. 진서는 문자 그대로 서치(書癡)였다. 그의 관심사는 오로지 책뿐이었다. 보통의 남자들이 바라마지않는 권력과 재물과 여색은 그에겐 벌판을 지나가는 바람처럼 무의미한 것들이었다.
가슴앓이를 견디며 강연은 진서의 마음에 들기 위해 전심전력을 다했다. 배움에 임하는 그녀의 태도가 한결 진지해지자 진서도 그녀에게 정성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학문에 열의를 쏟는 기특한 제자에 대한 호응이었을 뿐이었다.
모친과 선친이 연결되는 과정을 자세히 풀어놓고 싶지 않았기에 진천은 그에 관련된 내용을 통째로 생략했다. 모친에게 있어 그 이 년은 행복감보다는 이룰 수 없는 사랑으로 인한 고통으로 얼룩진 기간이었다.
“제 부모는 서로에 대한 존중심을 가지고 학문에 매진했습니다. 그러다 강가와 약속한 기한이 다가오자 선친은 무량서원으로 돌아갈 의사를 밝혔답니다. 제 어머니에게는 다른 스승을 구해 공부를 계속하도록 일렀다더군요.”
“싱거운 위인이로세. 처녀의 가슴에 불을 질렀으면 끝까지 책임을 져야지. 네 어미 배 속에 너를 들여놓고는 나 몰라라 하고 떠났단 말이더냐? 그런데 대관절 어떻게 정을 통했다더냐? 아무리 무가의 여식이라도 정식으로 혼례를 치르지 않고서 바깥 남정네와 제 침실에서 운우지락을 나누기는 쉽지 않았을 터인데.”
진천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권왕의 적나라한 표현 탓이 아니라 자신이 생긴 내막을 알고 있어서였다.
진서는 남녀 간의 일에는 문외한이었으나 보름달만큼이나 선연한 강연의 연심을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끝끝내 그녀가 바라는 마음은 주지 않았다.
진서가 강가를 떠날 시일이 다가오자 강연은 애가 닳았다. 이제 헤어지면 다시는 그를 보지 못할 것만 같았다. 절박함과 분노와 절망감은 그녀로 하여금 특단의 대책을 강구하도록 강제했다.
온갖 수단을 동원해 자신의 방으로 진서를 들이는 데 성공한 강연은 문에 자물쇠를 걸었다. 그러나 팔 년 전 큰 오라비에게 했던 것처럼 목에 비수를 들이대고 진서에게 바라는 바를 요구하는 짓은 삼갔다. 진서는 그런 위협이 통할 사람이 아니었다.
강연은 미리 장치해 두었던 미혼향(迷魂香)을 방안 가득 뿌렸다. 목석이라도 욕정의 화신으로 만들 수 있다는 강력한 음약 성분이 담긴 꽃향기를 쐰 진서는 대번에 어찌 된 상황인지 파악했다.
발정 난 짐승이 되어 강연을 덮치는 대신 바닥에 좌정한 진서는 날뛰는 그의 심신을 다스렸다. 흰자위의 핏발이 서고 혈관이 부풀어 올랐으나 결과부좌를 풀지 않는 진서를 응시하며 강연은 비참함에 몸을 떨었다. 그러나 그대로 내버려두면 일 각 안에 혈맥이 터져 죽을 터였기에 그에게 해약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상상초월의 색욕에서 해방된 진서는 강연의 처사에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그녀를 위무했다. 그러고는 뜻밖의 태도에 놀라는 강연을 보듬었다. 그날 두 사람은 서툰 사랑을 나누었다. 둘 모두에게 인생의 처음이자 마지막 정사였다.
“대답은 안 하고 무슨 생각을 하는 게냐?”
권왕의 목소리가 진천을 상념에서 깨웠다.
“선친은 강가를 떠나지 못했습니다. 제 어머니와 연분을 맺은 사실이 드러나 처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권왕이 바늘에 찔린 듯 움찔거렸다. 진천은 그가 선친이 이십 년 전쯤 사망했다는 자신의 말을 상기했음을 직감했다.
“설마 그 처벌이라는 게 네 애비의 목을 치는 것이었더냐? 법도니 윤리니 따지는 학자 나부랭이들이 통치하던 시절도 아니고 둘이 좋아서 한 일을 두고 그럴 것까지는 무어야.”
진천은 입술을 깨물었다. 어쩌면 예정된 비극이나 마찬가지였다. 선친에 대한 모친의 연정은 내원의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모친은 아무도 모를 거라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모두가 안다는 사실을 그녀만 몰랐다.
강연에게 감시의 눈과 귀를 붙인 이는 강선이었다.
그녀가 학사 따위에게 홀렸다는 풍문을 헛소리로 치부한 대부분의 친족들과는 달리 강선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전날의 경험 때문이었다.
강선은 강연이 기거하는 소화원의 시비들 중 영악한 아이 셋을 골라 포섭했다. 그녀들의 임무는 강연과 진서의 동태를 유심히 살펴보다 수상쩍은 기미가 보이면 강선에게 즉각 보고하는 것이었다.
강선의 기대와는 달리 일 년이 지나도록 두 사람은 그가 놓은 덫에 걸려들지 않았다. 공부를 위해 둘만이 있는 경우는 비일비재했으나 육체적 교합을 시도하는 정황을 잡지는 못했다. 강선은 실망을 금치 못했지만 감시망은 그대로 존속시켰다. 뭐라도 잡히면 좋고 그렇지 않아도 손해 볼 일은 없었다.
그러다 자신이 그러한 조치를 취했는지조차 잊어버릴 즈음 망외의 월척이 낚였다. 보원각(寶元閣)으로 달려온 주근깨투성이 시비가 급보라며 전한 내용에 강선은 소름이 돋았다.
누이가 시건방진 학사 놈을 데리고 침실에 들어가다니. 그러고는 문을 걸어 잠그다니.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른다면 삼척동자일 터였다.
주근깨 시비는 위험을 무릅쓰고 아씨의 방에 다가가 벽에 귀를 대고 상황을 보다 정확히 파악하려했다며 제 공을 내새웠다. 안에서 야릇한 신음성이 들렸다는 그녀의 말에 강선은 앞뒤 잴 것 없이 보원각을 나가 소화원으로 달려갔다.
소화원에 들이닥친 강선은 곧장 강연의 처소인 유현옥(柳晛屋)에 들어가 그녀의 방 앞에 섰다. 내공으로 청력을 끌어올릴 필요도 없었다. 가쁜 숨소리가 그의 고막을 간질이고 있었다. 두 연놈이 방안에서 경주를 하고 있을 리는 만무하기에 확신이 선 강선은 불문곡직 방문을 걷어찼다. 그러고는 막 절정에 이르렀던 남녀의 상열지사를 현장에서 포착했다.
강선은 진서의 머리채를 잡고 침상에서 끌어냈다.
그를 제지하려 달려드는 누이동생을 가차 없이 뿌리친 강선은 그녀가 계속 악을 쓰며 매달리자 아예 그녀의 마혈을 점해 바닥에 팽개친 후 발버둥치는 진서를 질질 끌고 집법원(執法院)으로 향했다. 때 아닌 소동에 강가의 친족들이 밖으로 나와 강선의 행사를 지켜보았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못한 알몸으로 굴욕적인 구경거리가 된 진서는 거듭 최소한의 배려를 요구했다. 그러나 강선은 묵살했다. 수백 쌍의 눈이 주시하는 가운데 집법원까지 끌려간 진서는 뇌옥도 아닌 마당 한가운데 던져졌다.
혈도를 찍어 그의 행동을 제약할 수도 있었으나 강선은 양 무릎을 망가뜨렸다. 다리가 꺾이는 중상을 당한 진서는 수치감과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혼절했다.
강선의 오촌숙부이자 집법원주인 강유(姜裕)는 그에게 상황 설명을 듣고는 노발대발했다. 이름과는 달리 너그러움과는 거리가 먼 위인인 강유가 즉결처분을 명하자 강선은 자신에게 처형을 맡겨달라고 청했다. 강유는 누이동생의 명예를 더럽힌 자의 목을 직접 치고 싶다는 조카의 원을 들어주었다.
혈도를 짚어 진서를 깨운 강선은 그를 다시 소화원으로 데려갔다. 유현옥에 이르러 따라오던 군중을 물리친 강선은 진서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시키는 대로 따르지 않으면 가문의 위신에 먹칠을 한 강연을 가만두지 않을뿐더러 무량서원을 잿더미로 만들겠다는 강선의 협박에 진서는 몸서리를 쳤다. 공갈이 아니었다. 강선은 그러고도 남을 자였다.
강연의 침실로 들어간 강선은 칼을 뽑아들었다. 그러고는 집법원주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은 진서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러 온 자신의 아량에 감사하라고 강연에게 이죽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