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90
제89화
침상 아래 널브러진 강연 앞에 주저앉은 진서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악담을 퍼부었다.
자신이 그녀를 유혹하고 정을 통한 까닭은 단지 신분상승을 위한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며 실상 여자로서의 매력은 한 줌도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이왕 재수 없게 걸려 빠져나갈 구멍이 없게 되었으니 그동안 참았던 이야기나 실컷 하고 염왕을 보러 갈 참이라고 소리쳤다.
아혈을 찍히지 않았기에 말을 하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으나 강연은 진서가 원성을 쏟아내는 동안 한 마디도 내뱉지 못했다. 그의 저주에 충격을 받아서가 아니었다. 그를 살릴 수 없는 자신의 무기력함이 너무나 비통했기 때문이었다.
강연은 알고 있었다. 진서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저런 천박한 소리를 뱉어낼 이가 아니었다. 그가 그러는 건 그래야만 해서였다.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그리고 아마도 무량서원의 학사들을 지키기 위해.
진서에게 이런 짓을 강요한 자가 둘째 오라비임은 불문가지였다. 강연은 강선에게 구명을 청하는 건 그를 기쁘게 할 뿐임을 깨달았다. 아무리 애원해도 그는 진서를 살려두지 않을 터였다. 진서의 말마따나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 형국이었다.
강연은 눈물을 쏟으며 진서를 응시했다. 험언을 폭포수처럼 뿜어내는 입과는 달리 진서의 눈은 호수처럼 잔잔하고 평온했다. 그의 눈은 말하고 있었다.
‘나를 용서해 주오. 부디 강녕하구려.’
강연도 눈으로 응답했다.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강연은 자신을 여자로 받아들여주어 고맙다는 인사는 하지 않았다. 심중에 움튼 결심도 표출을 삼갔다. 지금은 사과만이 사랑하는 이에게 전해야 할 유일한 감정이었다.
강선이 요구한 말들을 마친 진서는 시퍼렇게 날이 선 그의 칼을 맨손으로 잡고는 자신의 목을 찔렀다. 얼마든지 막을 수 있었지만 강선은 진서가 자진하도록 내버려두었다. 진서의 목에서 솟구친 피분수가 강연의 얼굴에 비처럼 쏟아졌다.
그날 하나의 목숨이 하릴 없이 사라졌지만 강연의 몸 안에 또 다른 생명이 깃들었음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진천은 부친의 최후를 자세하게 묘사하지 않고 간단하게 줄였다.
“강가의 처분에 따라 제 선친은 자결을 했답니다. 어머니에겐 따로 체형(體刑)이 내려지지 않았지만 학림의 학사들을 초빙하는 등의 지원은 전부 중단되었습니다.”
“죽은 네 애비만 억울하게 되었구나. 저를 사모하는 여아의 가슴에 한을 남기지 않으려던 마음씀씀이가 그런 식으로 대가를 치르다니. 가여운 지고.”
진천은 권왕의 동정이 비운에 간 부친에게 위로가 되기를 바랐다.
“그 다음은 빤히 보이는구나. 네 어미는 네가 배 속에 들어섰음을 알고는 그 악종들이 달아난 곳으로 갔을 테지? 그놈들의 마공을 자식에게 전수받을 요량으로 말이다.”
큰 틀에서는 사실이었기에 진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강연은 복수를 꿈꾸었다.
사랑하는 이의 목숨을 앗아간 원흉은 둘째 오라비인 강선이었다. 그가 그날 그 시간에 침실에 들이닥친 건 우연일 수가 없었다. 필시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눈을 내원에 심어두었을 터였다. 강선의 끄나풀이 된 자도 처단해야 했다. 의심 가는 시비가 서넛 있었다. 어쩌면 그들 모두가 간자였을지도 몰랐다.
당장이라도 강선의 숨통을 끊고 싶은 욕망이 용암처럼 들끓었으나 강연은 은인자중했다. 강선은 절정지경의 검호였다. 그녀의 무력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그를 당해낼 수 없었다. 가령 자고 있을 때 암습한다고 해도 살해는 불가능했다.
하지만 기필코 이룰 것이었다. 십 년, 아니 백 년이 걸려서라도. 무공으로 안 되면 독을 써서라도.
그러나 강연의 결심은 얼마 지나지 않아 흔들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흔들렸다기보다는 변경한 것이었다. 매달 치르는 행사가 두 달째 소식이 없자 강연은 전율했다. 첫 달엔 심대한 충격으로 인한 여파라 여겼으나 두 번째 달마저 하혈을 하지 않은 건 다른 이유가 있다는 뜻이었다.
자신이 임신했음을 깨달은 강연은 염두에 두었던 모든 계획을 폐기했다. 강선을 죽이는 정도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그녀의 배 속에 든 아이는 강자독식이 아니 만민호혜의 시대의 도래를 열망하던 진서의 염원에 따라 천리를 거스르는 무도한 무인들을 처단하고 그들의 세상인 무림을 찢어발기는 칼이 되어야 했다.
강연은 큰 오라비가 있는 창인으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강진의 절학과 구양의 심공은 그녀의 딸, 혹은 아들을 지상최강의 무인으로 만들어줄 수 있을 터였다.
강연은 강선의 첩자 노릇을 한 년이 양 볼 가득 주근깨를 박은 소향임을 알아차렸다.
그 사건이 있고서 보름 후 소향은 내원을 떠나 보원각으로 들어갔다. 밀고의 공에 대한 보상임에 틀림없었다. 그녀를 불러 불문곡직 목을 꺾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강연은 살의를 억눌렀다. 소향의 명줄을 자르는 건 언제라도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편안한 죽음을 허락해서는 안 되었다. 소향은 공포에 떨며 고목(枯木)처럼 사위어가다 비참한 종말을 맞이해야 했다.
강연은 은밀히 자신이 그녀의 ‘죄’를 알고 있음을 소향에게 전달했다. 그녀의 기대대로 ‘소화원 아씨’의 보복이 두려워 겁에 질린 소향은 새로운 주인인 강선에게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보내달라고 간청했다. 강선은 그녀의 애원을 무시했다. 그에게 있어 어린 시비의 목숨이 지닌 가치는 파리나 모기의 그것보다 나을 게 없었다.
절망한 소향은 빠릿빠릿한 일처리로 인정받았던 평소와 달리 잦은 실수를 저질렀다. 그에 따른 꾸중과 경고가 그녀의 불안감을 더욱 가중시켰다. 결국 소향은 내원으로 돌려보낸다는 시비장(侍婢長)의 통보를 받은 날 서까래에 목을 맸다. 보원각에 온 지 두 달 만이자 강연이 강가를 탈출하기 전날의 일이었다.
애꿎은 희생양이 된 소녀의 불행을 떠올리며 착잡해진 진천의 귀에 권왕의 태평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그나저나 용케도 그 멀리까지 찾아갔구나. 아이까지 밴 몸으로 쉽지 않았을 터인데.”
진천은 불현듯 창인에 있는 허 노야가 떠올랐다.
모친은 무작정 내원을 나선 것이 아니었다. 창인 행을 결심했을 때부터 그녀는 자신을 그리로 데려다 줄 조력자를 머릿속에 마련해두고 있었다. 다름 아닌 마령 문가의 전(前) 총관, 허 노야였다.
강연은 그자를 두 번 본 적이 있었다. 한 번은 팔 년 전이었고 다른 한 번은 불과 석 달여 전이었다. 전자는 정맹에서였고 후자는 내원에서였다.
강연에겐 남들이 알지 못하는 특별한 능력이 있었다. 한 번 본 것을 심상에 각인하는 능력이었다. 정맹에서 고암 설가의 형제와 시비가 붙은 날 오전 강연은 마령 문가의 총관이라면서 오대세가의 정영들에게 인사를 하던 중년인을 보았었다. 당시만 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별이었으나 어딘지 음침한 그의 눈빛은 그녀의 기억에 저장되어 있었다.
그러다 백일 전쯤 내원에 들어온 장인(匠人)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그가 작년에 강호를 떠들썩하게 했던 소문의 장본인임을 인지해서였다. 외양은 물론이고 음성도 바뀌었으나 분명 전날 정맹에서 보았던 자와 동일인이었다.
강연은 내원 여인들의 발을 주물럭거리며 본을 뜨는 장인의 정체를 폭로하지 않고 묵과했다. 굳이 거만하기 짝이 없던 마령 문가 도객들을 기쁘게 할 까닭이 없었다. 그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끼쳤다는 자의 용기와 수완이 가상하기도 했다.
강연은 창인 행을 작심한 순간 장인으로 행세하는 그를 길잡이로 삼기로 결정했다.
모친과의 조우가 우연이자 운명이었다던 허 노야의 회상을 상기한 진천은 쓰게 웃었다.
거사를 치른 후 문가의 추적을 피해 온 대륙을 떠돌던 허 노야는 여덟 달이 지난 뒤 마령에서 불과 삼백 리 떨어진 영암에 정착했다. 그는 거기서 악어가죽으로 질기면서도 편안한 신발을 만드는 갑화(甲靴) 장인으로 변신했다. 처음부터 치밀하게 준비해두었던 안배였다.
허 노야는 대담하게도 세 번이나 마령 문가에 들어가 그들을 농락했다고 했다. 마령 문가는 여인들의 갑화를 전문적으로 제작하는 초로의 장인이 그들의 충견 노릇을 하다가 목을 물어뜯고 달아난 반도임을 꿈에서도 알지 못했다.
영암에서의 새로운 삶에 그럭저럭 만족하며 여생을 그곳에서 보내려던 허 노야는 어느 봄날 불쑥 나타나서는 그가 누군지 안다며 다짜고짜 창인으로 데려가 달라는 여인의 청에 마음을 바꿨다. 그녀가 마령 문가에 그를 고발할까봐 저어해서가 아니라 그와 같은 도망자 신분임을 직감하고는 동병상련의 정이 일어서였다.
모친과 부녀 행세를 하며 대륙을 종단해 창인까지 나아갔다던 허 노야를 떠올린 진천은 권왕의 감상에 뒤늦게 대꾸했다.
“제 어머니에게 운이 따랐던 듯싶습니다. 어찌어찌 길을 아는 이를 만나 그와 동행했다더군요.”
진천은 허 노야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아꼈다. 권왕은 ‘길을 아는 이’에 관해 꼬치꼬치 캐묻지 않고 넘어갔다.
“창인에서 그 악종들과 재회한 네 어미는 그자들에게 너를 맡겼구나.”
“그렇습니다.”
권왕이 진천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선재로다. 하늘이 드물게 제대로 일을 했음이야. 천하의 악귀들을 사부로 두었으면서도 네가 이리도 반듯하게 자랐으니. 더욱이 원독에 사무친 네 어미는 자모(慈母)와는 거리가 멀었다면서?”
“…….”
진천의 쓰라린 심사를 아랑곳하지 않고 권왕이 그의 성장기를 듣기를 청했다.
“삼보장주와 도화각주에게서 대충 들었다만 네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알고 싶구나.”
진천은 허공으로 시선을 올렸다. 마침 지나가던 조각구름이 중천에 뜬 해를 가렸다. 진천은 마음에 둔 이야기를 꺼내려면 앞으로도 먼 길을 가야 함을 알았다.
일몰이 가까워지자 하늘 끝자락이 붉게 물들어갔다.
노을은 이제 막 퍼지기 시작했지만 진천의 회고는 막바지에 이르렀다. 진천은 밀림에서 돌아온 직후 창인에서 노덕과 고량을 만났던 일을 담담히 진술했다.
“……그래서 노 대인도 돕고 제 어머니의 유지를 받들어 정맹의 용호가 되기 위해 중원에 오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창인을 떠난 이후의 행적에 관해서는 권왕이 삼보장의 친인들로부터 상세히 들었으리라 짐작한 진천은 뒷말을 잇지 않고 가만히 기다렸다.
“삼보장주의 말에 따르면 정월 초순에 창인을 출발했다니 네가 세상에 발을 들여놓은 지 이제 겨우 백일가량 지났구나. 그 짧은 기간 동안 당금 강호 최고의 유명인사가 된 기분이 어떻더냐?”
권왕의 물음에 진천은 새삼스레 지난 석 달여 간 엄청난 일들을 겪었음을 깨달았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마령 문가와 치렀던 구인결이 단연 최고의 대사였지만 진천 개인적으로는 팔정포에서 있었던 하수린과의 비무가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
진천은 기실 최소한 이 년의 여유를 두고 용호의 입단을 추진할 참이었다. 중립지대를 횡행하는 악인들을 치죄하는 협행을 통해 서서히 정명(正名)을 얻고 그를 바탕으로 정맹의 심사를 통과한다는 것이 그의 복안이었다. 하지만 하수린과의 일전으로 단박에 최강의 후기지수라는 무명(武名)을 얻는 바람에 창인을 떠나며 구상했던 바를 전면 수정해야만 했다.
“저로서는 그저 얼떨떨할 따름입니다.”
진천은 분에 넘치는 명성을 얻어 난감하기 이를 데 없다는 말을 혀끝에서 바꾸었다. ‘쓸데없는 겸손’이라며 권왕이 면박을 줄 게 뻔해서였다.
“이제 고작 열여덟 살이라지? 그렇게 어린 나이에 그 정도의 위명을 얻은 이는 일천 년 무림사를 통틀어 네가 유일할 게다. 영세제일인(永世第一人)으로 불리는 천무대제(天武大帝)조차도 약관에 이르러서야 이름을 날리지 않았더냐?”
권왕이 무신(武神)이라는 별칭을 지닌 불멸의 초인까지 들먹이자 진천은 몸 둘 바를 몰랐다.
“하지만 너무 일찍 튀어나온 감이 없지 않구나. 당금 무림에 득시글거리는 호랑이들은 변방에서 올라온 유룡(幼龍)이 천룡으로 성장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게다. 더욱이 강가를 등에 업으려던 계획이 초장부터 어긋나지 않았느냐. 든든한 뒷배는커녕 강력한 적을 만든 꼴이니 네 앞길이 썩 평탄치는 않을 것 같구나.”
진천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야말로 심중의 언사를 토해내야 할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