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91
제90화
진천은 단도직입했다.
“청컨대 어르신께서 저희를 이끌어주십시오.”
권왕이 백미를 꿈틀거렸다.
“밑도 끝도 없이 그게 무슨 말이더냐?”
“저와 삼보장의 제 친인들은 최근에 중립지대 곳곳에서 발생한 사태들이 지난 반세기 동안 공고히 유지되어 오던 강호의 질서에 근본적인 균열이 생겼음을 보여주는 징조이자 난세 도래의 전조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천지문의 변고가 두드러졌지만 농막과 만금장, 그리고 백도방에서도…….”
권왕이 진천의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시시콜콜히 설명할 것 없다. 네 형세판단에 대해서는 이미 삼보장의 아이들로부터 들었느니라.”
짐작했던 바였지만 진천은 시치미를 뗐다.”그러셨군요.”
권왕의 일자 눈 속에서 까만 동공이 시퍼런 빛을 발했다.
“얼핏 그럴 듯하게 들리나 네 추론에 심각한 결함이 있음을 아느냐?”
진천의 답을 기다리지 않고 권왕이 말을 이었다.
“사패가 나와 세 구닥다리들을 무시하고 그런 짓을 벌일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이 점을 제대로 해명하지 못하면 터무니없는 억측이자 망상일 뿐이야. 네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전혀 다른 성질의 사안들을 교묘하게 엮어 하나로 연결된 것처럼 보이도록 만들었더구나. 그 궤변으로 삼보장의 순진한 녀석들을 현혹시키는 데는 성공했을지 모르나 당사자인 나한테는 어림도 없다.”
진천은 권왕의 매서운 안광을 피하지 않고 직시했다.
“외람되오나 저는 아직도 정맹에서 어르신께 백도방의 일을 사전에 알렸으리라 믿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농막이나 천지문…….”
“어허, 그래도 이 녀석이!”
권왕의 음성에 노여움이 묻어나자 진천은 확신이 흔들렸다. 정말로 일방적인 수읽기에 지나지 않았단 말인가. 사패가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크기의 방파들을 노리고 집어삼킨 그 일련의 움직임들이 그저 우연의 일치였단 말인가.
“그렇다면 답해 보거라. 내 최초의 질문에 대해서.”
진천은 비로소 안도했다. 삼보장의 친인들이 권왕에게 그의 추정에 대해 말하지 않았을 리 만무했다. 권왕은 알면서도 그를 시험하고 있는 것이었다.
“저는 세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습니다.”
“세 가지씩이나. 그래, 어디 한 번 들어보자.”
“첫째는 기한의 만료입니다. 헤아려보니 일통무련(一統武聯)이 해체되고 사패가 천하를 분할한 지 올해로 딱 오십 년이 되었더군요. 저는 어르신을 비롯한 사왕(四王)께서 그 기간 동안은 일통무련의 영토였던 중립지대를 존속시키기로 사패와 협약을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네 분과의 계약이 종료됨에 따라 사패는 부담 없이 중립지대 진출에 나선 게 아닐까요?”
“두 번째는?”
“네 어르신들 간에 의견이 달라졌을 가능성입니다.”
“어째 표현이 유하구나. 삼보장 아이들 말로는 우리 늙은이들 간의 알력이나 균열이라고 했다면서.”
“…….”
실태를 알아차린 권왕이 헛기침을 했다.
“헛흠, 계속해 보거라.”
“구(舊) 사왕으로 묶여있지만 어르신과 다른 세 분은 성향이 사뭇 다르다고 들었습니다. 예컨대 마련에 계신 장왕(掌王) 어르신은 부귀영화와 환락을 추구하는 반면 월교로 들어가신 검왕께서는 세사에는 일절 관심을 두지 않고 오로지 무공일도에만 전심전력을 쏟는 분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서벌의 독후(毒后)께서는…….”
“됐다, 그쯤해라. 그치들 얘기를 듣고 있자니 속에서 열불이 나는구나.”
“…….”
“마지막은 무엇이더냐?”
진천은 망설였다. 그의 속을 안다는 듯 권왕이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괜찮으니 말해 보거라. 우리 구닥다리들이 사패의 주인들한테 밀렸을 거라고…….”
무심코 말을 내뱉었던 권왕이 자신의 경솔함을 자책했다.
“늙으면 입을 다물어야 하거늘. 어찌 이리 방정맞단 말인가.”
진천은 잠자코 있었다. 예상대로 권왕이 참았던 말을 쏟아내었다.
“어차피 들통 난 거, 그냥 가자. 그러니까 네 녀석은 나나 다른 세 늙은이가 쇠약해져서 강 맹주 등이 하자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을 거란 뜻이렷다?””아닙니다, 어르신. 제가 감히 어떻게…….”
“아니긴, 이 녀석. 삼보장에서 네가 지껄였다던 소리를 세세하게 들었거늘. 설마 내 기억력이 이틀도 못 간다고 여기는 건 아닐 테지? 그런 게냐?”
“그렇지 않습니다. 어르신.”
쩔쩔 매는 진천을 노려보던 권왕이 껄껄 웃었다.
“실로 영악한 놈이로세. 조금도 겁을 먹지 않았으면서 시늉을 하다니. 누굴 속이려고.”
“죄송합니다.”
웃음기를 거둔 권왕이 진지한 음성으로 물었다.
“네가 보기엔 그 세 가지 가능성 중에서 뭐가 정답일 것 같으냐?”
“모르겠습니다.”
“또 한 번 그런 소리를 하면 정말로 화를 낼 거다. 입 아프게 하지 말고 딱딱 토해내거라.”
“…….”
“어서!”
“셋 중 하나만 꼽으라면 첫 번째일 듯싶습니다. 하지만 나머지들도 어느 정도 연관성이 있을 것 같습니다.”
“말인즉슨 우리 네 늙은이가 종이호랑이로 전락했다는 게로구나. 그런 주제에 사패에 대항해 뭉치지도 않고. 더 나아가 그들과 한통속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게지?”
부인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기에 진천은 난감했다. 답변을 재촉하지 않고 기다리던 권왕이 문득 기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우우, 너를 닦달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전부 사실인 것을.”
권왕이 황혼으로 물든 천공으로 시선을 올렸다.
“아무리 찬란하던 태양도 때가 되면 지는 법이다. 하물며 사람이야. 백 년 가까이 살았으니 삶에 미련은 없다만 두고 갈 세상에 대한 걱정까지 없을 수는 없구나.”
권왕의 진심을 느낀 진천은 숙연해졌다.
“네 포부에 관해서는 삼보장의 아이들에게서 들었다. 마도(魔道)를 타도하고 싶다고?”
“그렇습니다.”
“사파(邪派)는?”
“그들도 혁파해야 할 대상입니다.”
“정파는 어떻더냐? 그들 중에도 위선자와 악종들이 부지기수임을 아느냐?”
“그렇더라도 마도나 사파보다는 낫습니다. 백성의 칠 할을 노예로 부린다는 마련은 없어져야 마땅합니다. 그들이 다스리는 땅에서는 수천만의 민중이 가축보다 못한 삶을 영위한다고 들었습니다. 같은 시대, 같은 하늘 아래 살면서 그들의 고통을 방관하는 것은 온당한 처사가 아니라 믿습니다.”
“너는 살인은 물론이고 싸움 자체를 극도로 꺼린다고 들었다. 마련에게 대적할 힘이 있는지는 차치하더라도 그들과 전쟁이 일어나면 숱한 목숨이 희생될 게 아니더냐?”
“제가 자란 창인은 부족한 물과 먹을거리를 두고 분쟁이 끊이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하루도 빠짐없이 악다구니와 비명이 지하미로에 울려 퍼졌습니다. 저는 샘물을 쟁탈하기 위해 매일 같이 벌어지는 살상을 멈추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수원(水源)들을 차지한 패거리들을 찾아다니며 모두가 균등하게 나눠마시자고 설득했습니다. 그들은 제 얘기에 콧방귀를 꼈습니다. 실은 저 역시 그들이 제 말에 귀를 기울일 거라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뜻이 맞는 몇몇 친인들과 함께 무력행사에 나섰습니다. 싸움과 갈등을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싸워야만 했습니다. 몇 달 간에 걸친 투쟁의 과정에서 적지 않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으나 지금 창인은 평화로운 마을이 되었습니다. 지난 칠 년 동안 밀림에서 이주해온 이들을 포함해 인구가 네 배 이상 불었음에도 아무 다툼 없이 물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으나 창인의 흑도와 마련의 마두들은 격이 다르다. 전란에 휩쓸려 죽어나가는 이들의 숫자도 수십이나 수백이 아니라 수만, 수십만에 달할 게다. 어쩌면 수백만이 될지도 모르고.”
“저도 전쟁을 바라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완충 역할을 해온 중립지대가 사라지면 사패대전(四覇大戰)의 발발은 필연지사일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천무대제가 재림하지 않는 한 천하의 누구도 대란을 저지하지 못할 테고요. 그렇다면 중립지대가 아직 존속하는 동안 마련과 ‘작은’ 전쟁을 벌임으로써 그 시기를 늦추는 게 나을 성싶습니다. 정맹과 사벌은 중립지대 정벌을 보류하고 관망할 거라고 봅니다. 월교는 애초부터 현재의 질서가 유지되기를 바랐을 테니 더더욱 그럴 테고요.”
“듣다 보니 네가 삼보장의 아이들에게 밝혔다던 구상하고는 뭔가 다르구나. 너는 강가의 일원이 된 후 정파 무림의 편에 서서 마련 타도의 길에 나설 참이라고 했다던데. 그러면서 정맹이 방관할 거라……, 가만, 이제 보니 요 녀석, 나를 끌어들일 속셈이로구나. 아까 나더러 너희를 이끌어달라는 소리가 이 소리였던 게야. 허, 그놈 참. 강가를 놓치고는 즉흥적으로 나를 구워삶을 생각을 하다니 보통 꾀가 아니도다.”
진천은 땅에 손을 짚고 엎드렸다.
“부디 저를 이끌어주십시오, 어르신. 삼보장의 노 대인처럼 선업을 쌓아 제 사부들이 세상에 남긴 빚을 조금이라도 갚고 싶습니다.”
부드러운 경기가 진천의 몸을 밀어 올렸다. 진천은 권왕의 무형지기에 저항하지 않고 다시 앉은 자세를 취했다.
권왕이 엄숙히 말했다.
“너와의 인연은 내게도 전기가 아닐 수 없다. 요새 심란하던 차에 내 제자라고 사칭하고 다닌다는 종자를 보러 가벼운 마음으로 찾았던 삼보장에서 네 얘기를 듣고는 처음 여인의 옷고름을 푸는 숫총각처럼 심장이 쿵쾅거리더구나. 그래서 네가 돌아올 때까지 그곳에 진득하게 붙어있지 못하고 부리나케 원주로 달려왔느니라. 하루라도 빨리 너를 만나 삼보장의 아이들이 이구동성으로 전한 대로의 인물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뜻밖의 상황이 펼쳐져있어 당황스러웠지만 중간에 끼어들지 않고 끝까지 너를 지켜보았다. 내 잠정적인 결론은 적어도 네가 살인귀와는 거리가 먼 성정이라는 것이었다. 너는 추격자들을 죽일 수 있었음에도, 그렇게 하는 게 너에게 유리했음에도 살수를 자제하더구나. 강가와 원수가 되는 걸 꺼려 그랬을 지도 모르나 어쨌든 그 위급지경에서 쉬이 보일 수 있는 태도는 아니었다. 나는 네 행동에 깊은 인상을 받았느니라.”
진천은 사랑하는 이에게 고백을 받은 사람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권왕은 어린 시절부터 최고의 우상이었다. 그가 팔대무왕 중 으뜸을 다투는 절대강자라서가 아니라 무림을 대표하는 협객이기 때문이었다. 허 노야에게서 권왕의 일대기와 활약상을 들으며 진천은 언젠가 그 위대한 영웅을 만날 수 있기를 꿈꿨다.
“나는 어쩌면 이런 만남을 고대해왔는지도 모른다. 지난 오십 년의 세월은 나에게도 족쇄였느니라. 상호 불침의 금약에 묶여 마련과 사벌의 영토에서 벌어지는 참상들을 전해 들으면서도 분연히 떨쳐 일어서지 못했다. 천하의 안녕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자위했지만 비겁한 변명에 지나지 않구나. 아무 것도 못하고 어영부영하다 염왕이 부를 때가 다가오고서야 내가 얼마나 어리석은 위인인지 깨달았다. 일찍이 파사현정(破邪顯正)의 뜻을 세웠으면서도 수십 년 내내 마도와 사파가 창궐하고 번성하는 꼴을 지켜만 보고 있었구나. 그렇다고 정파 무림을 혁신하는 과업을 이룬 것도 아니다. 한마디로 나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늙은이였던 게야.”
권왕의 자조에 마음이 아팠으나 진천은 섣부른 위로를 삼갔다. 권왕이 대뜸 일자 눈을 부릅뜨더니 동공에 힘을 주었다.
“나에게 너를 이끌어달라고 했더냐? 거절하겠다. 나는 그럴 능력이 없음이야.”
진천은 실망하지 않고 묵묵히 권왕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대신 내가 너에게 청하마. 나를 이끌어다오. 삼보장의 아이들이 너를 믿고 따르는 것처럼 나도 네 충실한 견마가 되어 네가 가고자 하는 길에 동참하고 싶구나.”
“견마라니 천부당만부당…….”
“이놈아, 단지 비유적인 표현이잖으냐? 괜한 걸로 꼬투리 잡지 말고 요지를 이해해야지.”
진천이 기립하며 포권을 취했다.
“존경하는 어르신과 한 배를 타게 되어서 기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일생일대의 영광…….”
“집어 쳐라. 입 발린 소리는 정파 나부랭이들한테서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느니라. 지긋지긋하단 말이다. 앞으로 나를 대할 때는 친구를……, 가만, 그럴 게 아니라 아예…….”
말끝을 흐리는 권왕을 보며 진천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