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92
제91화
불길한 예감은 적중했다.
“듣자하니 도화각주와 형제결의를 했다던데 나하고도 격의 없이 호형호제 하며 지내는 게 어떠냐?”
권왕의 말을 짐작했으면서도 진천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팔십 년에 가까운 나이 차이 때문만이 아니라 강호의 배분 상으로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제안이었다. 세상에 나온 지 석 달밖에 안 된 후기지수가 일 갑자가 넘는 세월 동안 천하의 정점으로 군림해 온 절대자와 의형제를 맺는다는 건 온갖 기사(奇事)로 점철된 장구한 무림사(武林史)에도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 아이에게서 너를 아우로 삼고자 했던 계기에 대해 들었다. 과장도 적잖이 섞여 있는데다 그 아이의 주관적인 판단인지라 썩 신뢰하지는 않았느니라.”
진천은 환갑이 지난 의형을 ‘그 아이’라고 부르는 권왕의 언사에 쓴웃음이 났다. 그의 대꾸를 기다리지 않고 권왕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오늘 강가 아이들과의 추격전에서 네가 드러낸 행태를 보고는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너는 심지어 살의가 청명한 날의 보름달만큼이나 확연했던 폭풍도에게조차 살수를 자제했다. 그 지독한 놈의 양 팔을 다 망가뜨리긴 했지만 목을 부러뜨리거나 자르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음이야. 그렇게 급박한 상황에서도 적이나 다름없는 자의 목숨을 빼앗으려 들지 않다니,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할 태도가 아닐 수 없다.”
진천은 불현듯 어린 시절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그날 모친은 그에게 비수를 쥐어주며 기르던 강아지를 죽이라고 강요했다. 독심(毒心)이 무인이 되는데 필수적인 자질임을 강조하며. 차마 친형제처럼 소중히 여기던 어린 개의 배를 가를 수 없었던 진천은 비수를 내던지며 명을 철회해 줄 것을 애원했다.
모친은 그의 간청을 들어주는 대신 그를 때렸다. 진천이 기억하는 최초의 매질이었다. 참나무 가지가 부러질 때까지 맞고 있던 진천은 결국 비수를 들어 강아지의 목을 찔렀다. 매를 견디지 못해서가 아니라 광기에 젖은 모친이 진짜로 미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여섯 살 어림의 그날은 진천에게 있어 특별한 날이었다. 태어난 지 다섯 달밖에 안 된 개의 목에서 솟구친 핏줄기가 그의 가슴에 튀었을 때 진천은 심장이 녹아내렸다. 진천은 강아지와 자신의 생명이 소멸되는 그 순간의 끔찍한 느낌을 결코 잊지 못했다.
그날 이후 진천은 살생을 금했다. 아무리 모친이 난리를 쳐도 살명(殺命)에는 절대로 응하지 않았다. 그 고집이 훗날 비극을 초래했지만 진천은 모친의 자결의 협박에도 어린 날의 결심을 끝끝내 지켰다.
“네 행동에 반했다던 도화각주의 말이 비로소 이해가 되더구나. 지켜만 본 나도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는데 직접 겪었으니 얼마나 놀라고 감동했겠느냐?”
“…….”
“뭐, 그 아이가 부러워서 너에게 형님 대접을 받으려는 건 아니니 오해는 말거라. 나는 단지 거추장스러운 예의에 묶인 네 녀석의 경직성을 풀어주기 위해 편하게 형, 아우로 지내자는 게다. 어떠냐? 내 말에 따르겠느냐?”
“말씀은 고맙지만 제가 감히 어떻게…….”
“어허, 이놈이. 또 군소리. ‘감히’고 나발이고 그냥 하자는 대로 하자.”
“…….”
“어디 한 번 불러 보거라. ‘형님’하고.”
“…….”
“불러 보래도. 아니, 잠깐. 도화각주에게도 그리 호칭할 터이니 나중에 헷갈릴 수도 있겠구나. 셋이 같이 있을 경우를 대비해 구별을 해야 할 터. 그래,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큰 형님’이라고 하면 되겠구나. 자, 아우야. 어서 큰 형님이라고 불러 보려무나.”
“하지만…….”
“이놈이 그래도. 여우고기를 삶아먹었나 왜 이렇게 꼬리가 길어. 설마 내가 늙었다고 괄시하는 게냐? 얼마 있으면 관에 들어가 누울 늙은이가 창창한 네 녀석 앞길에…….”
“아닙니다, 어르신. 제가 어찌…….”
“어르신? 내 얘기를 코로 들었구나. 이젠 대놓고 나를 무시하는…….”
“그게 아니라……, 알겠습니다, 큰 형님. 분부에 따르겠습니다.”
“뭐라고? 목소리가 너무 작구나. 다시 말해 보거라.”
“……큰 형님 분부에 따르…….”
“크하하핫! 곡차를 끊은 지 오래다만 흠뻑 취하도록 마시지 않을 수 없는 날이로다. 싸움 구경도 하고 재미난 이야기도 듣고 팔자에 없던 동생까지 생겼으니. 예서 잠시만 기다려라. 내 후딱 원주의 주루로 달려가서 독주 한 동이를 가져오마.”
“그러지 마십시오, 큰 형님.”
“훔쳐온다는 게 아니다, 아우야. 아무렴 내가 도적질을 하겠느냐? 술값을 놓고 올 테니 아무 걱정하지……. 아! 강가 아이들의 추적을 염려하는 게냐? 흠, 그렇군. 내가 너무 흥분했구나. 어쩐다. 그렇지. 함께 가면 되지 않으냐?”
“…….”
“그렇게 내키지 않으냐? 허어, 모처럼 주기(酒氣)에 빠져보려 했는데 네가 정히 싫다면 어쩔 수 없지.”
“아닙니다, 큰 형님. 다녀오십시오. 저는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내가 간 동안 그놈들이 오면 어쩌려고?”
“그들은 오지 않을 것입니다. 설혹 오더라도 어떻게든 대처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염려 마시고 다녀오십시오.”
“이렇게 하자꾸나. 만약 강가의 아이들이 몰려오면 나를 팔려무나. 그놈들이 불신하거들랑 반각만 지나면 증명할 수 있다고 으름장을 놓거라. 내 이름값이 예전만 못하다 하나 그 정도 시간은 벌어줄 수 있을 게다. 지금부터 일다경 이내에 다녀올 터이니 그 동안에 별 일이야 없겠지.”
“그렇게 하겠습니다, 큰 형님.”
권왕은 천 길 낭떠러지를 서슴지 않고 뛰어내렸다.
허공을 가로질러 날아가는 권왕의 신형을 바라보던 진천은 그가 까만 점으로 화하자 숲으로 시선을 돌렸다. 강가 도객들의 도래를 경계해서가 아니었다. 진천은 녹색의 풍경에 편안함을 느꼈다.
전신에서 극통이 올라왔지만 진천은 안면을 일그러뜨리는 대신 미소를 지었다. 권왕과의 조우는 망외의 행운이었다. 외조부와의 담판을 통해 강가의 일원이 되려던 구상이 깨져버린 대신 생각지도 않았던 막강한 원군을 얻은 셈이었다.
권왕이 지닌 무게감은 마령 문가 전체와 맞먹었다.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몰랐다. 권왕은 검왕(劍王) 소진(蘇眞)과 더불어 팔대무왕의 최강을 다툰다고 평가받는 무존(武尊)이었다. 그가 한 편이 된다면 마도 타도의 염원이 비현실적인 몽상만은 아닐 터였다.
권왕은 해가 떨어지기 전에 단애로 돌아왔다.
시간과 거리를 따져 본 진천은 권왕의 경공 속도가 자신의 세 배에 달하리라 판단했다. 실로 엄청난 무위였다.
허공답보(虛空踏步)의 신기를 펼치며 진천의 앞에 떨어져 내린 권왕이 제 몸통만한 술통을 내려놓았다. 그가 뚜껑을 열자 은은한 주향(酒香)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내가 단주 전에 즐기던 홍화(紅花)다, 아우야. 일부러 큰 객잔에 가서 가져왔느니라. 냄새가 옅다고 얕보다간 큰 코 다칠 게다. 두주불사의 주당들도 한 바가지면 나가떨어질 독주이니. 자, 먼저 맛을 보거라.”
진천은 마다하지 않고 술독을 안아들었다. 그러고는 한 모금 들이켜자 마치 불덩이를 삼킨 듯 속이 뜨거워졌다. 권왕이 미리 말해주지 않았다면 당황했을 터였다.
진천이 바로 항아리를 내려놓자 권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더 마시지 않고.”
“죄송하지만 저는 어떤 술이든 한 모금만 마시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습니다, 큰 형님.”
칠 년 전 지하미로 수원(水源)의 지배권을 두고 창인의 다른 패거리들과 벌인 전쟁에서 최종적인 승리를 거둔 날 진천은 대왕객잔의 장초 등이 권하는 탁주를 밤새 쉬지 않고 받아 마시다가 고주망태가 되었다. 술이 깬 후 취중에 추태를 부렸음을 어슴푸레 기억한 진천은 다시는 술을 입에 대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금주가 한 모금의 음주로 완화된 건 허 노야의 권고 때문이었다. 너무 맑은 물에는 고기가 살지 못하는 법이라며 허 노야는 지나친 금욕이 주위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 수 있으니 술자리에선 분위기를 맞춰 줄 정도로만 마시는 게 어떠냐고 했다. 스승으로 여겼던 허 노야의 충고에 따라 진천은 그 다음부터 한 모금의 술을 스스로에게 허락했다.
진천의 음주법이 불만스러운지 권왕이 허연 눈썹을 씰룩거렸다.
“그래서야 간에 기별이나 가겠느냐?”
진천은 중대한 기로에 섰음을 알았다. 권왕은 그의 취향을 존중해주거나 강권할 것이었다. 진천은 전자이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후자라면 관계의 성격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불가피했다.
진천의 속을 읽었는지 권왕이 더 이상 권주하지 않고 술통에 손을 뻗었다.
“내 주도(酒道)를 보여 주마, 아우야. 모름지기 사내란 일단 술잔에 입을 대면 바닥에 아무 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끝을 봐야 하느니라.”
커다란 항아리를 번쩍 들어 올린 권왕이 화염 같은 독주를 활짝 벌린 입 속에 들이부었다.
콸콸콸.
술독에서 쏟아져 나온 불그스레한 액체가 권왕의 목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걸 보며 진천은 혀를 내둘렀다. 권왕은 내공으로 주정(酒精)을 태우는 게 아니었다. 그는 그냥 생술을 들이붓고 있는 것이었다. 도대체 저 작은 몸에 어떻게 그 많은 술을 집어넣을 수 있는지 진천은 신기할 따름이었다.
말리지도 못하고 우두커니 서서 권왕의 폭음을 지켜보던 진천은 마침내 술이 방울방울 떨어지자 자기도 모르게 맥이 빠졌다.”꺼어어억!”
요란한 트림을 토해낸 권왕이 손등으로 입가를 훔쳤다.
“어떠냐, 아우야?”
진천은 솔직한 감상을 밝혔다.
“대단하십니다, 큰 형님.”
만족스러운지 권왕이 파안대소했다.
“크하핫. 내가 대단하긴 하지. 아무렴, 그렇고말고.”
해가 지고 어둠이 내렸다.
권왕의 우렁찬 코골이가 야심한 밤의 정적을 깨뜨렸다. 곯아떨어진 권왕을 바라보던 진천은 묘한 감정이 들었다. 권왕에겐 그의 코골이가 강가 무인들을 끌어올 수 있다는 걱정 따윈 한 줌도 없었다. 오든 말든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안위에 대한 완벽한 자신감이야말로 강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한편 진천은 기꺼웠다. 무방비상태로 누운 권왕의 여유는 그에 대한 신뢰의 표시이기도 했다. 아무리 절대지경의 고수라 해도 손만 내밀면 닿을 거리에 초절정의 무인을 두고 태평스레 수마에 빠진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진천은 문득 실제로 암습을 가하면 권왕을 해할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권왕은 그의 절멸참이 목에 떨어져도 무사할까. 강기를 맞고도 끄떡없는 금강불괴에 이르렀다는 설이 사실일까.
권왕을 내려다보며 그런 생각을 하던 진천은 일순 등골이 오싹해졌다. 일자로 붙은 권왕의 눈에서 청광이 번득였기 때문이었다. 착각이 아니었다. 코 고는 소리가 뚝 멎더니 싸늘한 음성이 권왕의 오므라든 입술을 비집고나왔다.
“내 껍질이 얼마나 질긴지 시험해보고 싶으냐?”
진천은 모골이 송연했다. 설마 권왕에게 남의 마음을 읽는 비술이라도 있단 말인가.
벌떡 일어선 권왕이 우드득 목을 풀었다.
“왜 대답이 없는 게냐?”
진천은 솔직히 말했다.
“큰 형님이 주무시는 중에도 기습을 방비하실 수 있을지에 대해 호기심이 생기긴 했습니다. 물론 정말로 실행할 작정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아셨습니까?”
“도산검림(刀山劍林)의 강호에서 굴러먹으며 이 나이가 되도록 목숨을 부지한 데는 다 이유가 있느니라.”
진천은 권왕이 그 이유를 구체적으로 풀어주길 기다렸다. 하지만 권왕은 설명을 잇는 대신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전날 우리 네 구닥다리가 사패(四覇)의 전(前) 주인들과 협상을 벌이며 일통무련의 영토를 중립지대로 두고 오십 년 간 보존하자고 했던 까닭을 아느냐?”
“모르겠습니다.”
“또 그 소리. 괜한 겸양을 떨면서도 결국은 죄다 맞추지 않았더냐? 그 명민한 머리를 굴려 보거라, 아우야. 어째서 오십 년일까?”
진천은 질문의 방점이 중립지대 설정의 목적보다는 오십 년이라는 기간에 있음을 알았다. 그러자 퍼뜩 한 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