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93
제92화
“혹시 무슨 일이 일어날지 기다려보는 시간이 아니었습니까?”
진천의 반문에 권왕이 눈을 크게 떴다가 다시 일자로 붙였다.
“무슨 일? 막연하게 말하지 말고 탁 집으려무나.”
“무황(武皇)과 관계된 일일 것 같습니다.”
권왕의 찢어진 눈이 한껏 떠졌다.
“계속해 보거라.”
“세상에는 전날 호야곡(虎爺谷)에서 무황이 네 분에 의해 오체분시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죽지 않은 게 아닐까요? 혹은 사망을 확인하지 못했거나. 어떤 방식으로든 네 분의 포위망에서 벗어난 무황이 다시 힘을 회복해 돌아올 가능성에 대비해서…….””됐다, 그 정도로도 충분하다.”
진천의 말을 자른 권왕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참으로 보통 머리가 아니구나. 네 진정한 재주는 무공이 아니라 그 방면에 있을 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우리 늙은이들이 오십 년 동안 꽁꽁 숨겨온 비밀을 단박에 알아맞힌단 말이냐? 설마 했는데 놀라울 따름이다.”
“그저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어허! 또 그런다.”
“…….”
“한두 번이라면 모를까 연이어 정확히 짚어내는 건 운이 아니라 전적으로 실력소관인 게야. 그러니 괜한 겸양일랑 부리지 말거라, 아우야. 외려 거들먹거리는 인상을 줄 수가 있음이야.”
“알겠습니다, 큰 형님.”
권왕이 말을 잇지 않고 입을 다물자 진천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정말 그가 살아있습니까?”
권왕은 묵묵부답했다.
무황 나중강은 전설적인 무인이었다.
그는 육십여 년 전 사파 무림의 거두 백야수(白夜獸) 장전(張塡)을 꺾음으로써 강호초출을 알렸다. 당시 그의 나이는 사십이 세였다.
나중강의 과거 행적은 장막에 가려져있었다. 그의 출신내력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그야말로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신성이었다. 사파 칠대고수에 속하는 백야수를 압도하는 무위를 지닌 강자가 불혹이 넘도록 무명(無名)으로 있었다는 자체가 매우 특이한 일이었다.
세상에 이름 석 자를 알린 나중강은 비무행에 나섰다. 그로부터 삼 년 간 대륙을 종횡하며 정사마(正邪魔)의 강호들을 상대로 치른 서른세 번의 비무에서 전승을 거둠으로써 나중강은 천하를 경동시켰다.
십전객(十全客) 나중강이 천하제일인일 거라고 떠드는 호사가들이 나날이 늘어갔다. 무림의 일인자를 다투던 난세십군(亂世十君)이 그와의 대결을 회피한 탓에 증명하지는 못했으나 그의 연승가도에 제물이 된 이들의 면면이 워낙 화려했기에 그들의 주장에 동조하는 분위기가 대세를 이루었다.
결국 주원(周原)에서 난세십군의 일인이자 사평 팽가의 가주인 오행검군(五行劍君) 팽현찬(彭玄贊)을 물리침으로써 나중강은 오랫동안 공석이었던 천하제일인의 권좌에 올랐다.
사십 대 중반에 무림의 정점에 우뚝 선 나중강은 일통무련(一統武聯)을 출범시켰다.
거창한 명칭이었으나 기실 총 인원이 오십에도 미치지 못하는 소규모 방파였다. 그럼에도 무림은 그들을 경시하지 못했다. 연주인 나중강을 비롯해 하나 같이 일당백의 위용을 자랑하는 강자들이기 때문이었다.
기실 나중강에겐 추종자들이 그보다 훨씬 많았다. 비무행 초기부터 그를 쫓아다니며 응원하던 무리가 점점 불어나 종래에는 수만을 헤아렸다. 그들 가운데는 나름 무명(武名)을 지닌 강자들도 상당수 섞여있었다. 정파의 오대세가나 사파칠문, 혹은 마도사류(魔道四流)가 집단의 힘으로 나중강을 핍박하거나 제거하지 못한 까닭도 그 때문이었다.
나중강은 자기를 따르는 자들 중 절정 이상의 무위를 가진 무인들만 추려 수하로 삼았다. 그러고는 그들을 이끌고 십 년 이내에 군웅할거의 난세를 평정하고 대륙을 통일하겠다고 공언했다.
나중강의 야망에 화들짝 놀란 정사마의 지배자들은 허울뿐이었던 회의체를 명실상부한 결맹으로 강화시키기로 합의했다. 정맹과 사벌, 그리고 마련이 중원의 동남부에서 세력을 키우고 있던 월교와 더불어 사패(四覇)를 이루게 된 배경이었다.
중립을 표방한 월교를 뺀 삼패(三覇)는 나중강과 일통무련을 공동의 적으로 선포했으나 그들을 멸하기 위한 즉각적인 연수합공(聯手合攻)에 나서지는 못했다. 연합은커녕 내부단속을 하는 데도 골머리를 앓았다. 우습게도 자기들끼리의 갈등으로 초장부터 이전투구를 벌이며 해체의 위기에 처했던 삼패를 결속시킨 것은 일통무련이었다.
본격적으로 행동에 나선 일통무련이 파죽지세로 수백 개의 문파들을 복속시키며 세를 확장하자 정맹 등은 주도권을 쥐기 위한 내부투쟁을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대세가든 사파칠문이든 단독으로는 일통무련을 감당할 수 없었기에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욱일승천의 기세를 과시하던 일통무련도 삼패가 전열을 정비하고 대항에 나서자 주춤거렸다. 그들의 진군을 가로막는 데는 성공했으나 삼패는 일통무련을 지우는 데는 실패했다. 먼저 손해를 보지 않으려는 고질적인 병폐 탓이었다. 삼패가 서로에게 선공을 떠넘기며 눈치를 보는 동안 일통무련은 야금야금 그들의 영토를 갉아먹어 들어갔다. 그러다 일통무련의 몸집만 불려주게 될 터인지라 삼패의 수뇌부는 어쩔 수 없이 결단을 내렸다.
사상 초유의 정사마 연합군을 맞은 일통무련은 존망의 기로에 선 것처럼 보였다.
아무리 천하제일인이 포함되어 있더라도 전력의 차이가 확연했다. 일통무련이 창립된 후 삼패에서 나와 그들에게 합세한 절정의 강호가 수십여 명 더 있었으나 정사마의 정예들로 꾸려진 일천의 대군에는 중과부적일 게 뻔했다.
온 강호의 이목이 일통무련이 자리한 보영(寶營)으로 몰렸다. 일통무련의 옥쇄는 당연시되었다. 승패가 정해진 싸움이었기에 세인의 관심사는 그들이 얼마나 버틸는지에 집중되었다.
이윽고 결전의 날이 닥쳤다. 일통무련의 일백여 무인들은 그들의 열 배 가까운 적을 맞아 결연히 싸웠다. 그리고 아무도 상상치 못했던 이변이 벌어졌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일통무련의 승리였다. 그것도 단순한 승리가 아니라 일방적인 대첩이었다. 연합군은 무려 칠백에 달하는 사상자를 내고 일패도지한 반면 일통무련의 전사자는 사십에 불과했다.
천지를 뒤집어놓은 결과에는 몇 가지 원인이 있었다.
첫째, 예상을 상회하는 나중강의 무력이었다. 나중강은 난세십군의 삼인을 홀로 상대하면서도 우위를 점하며 그들 중 혈마(血魔) 고승수(高昇秀)의 목을 날려버리기까지 했다. 몸통에서 떨어진 혈마의 두부(頭部)가 핏줄기를 뿜으며 공중으로 솟아오르자 마령 문가의 도호 문자권(文資權)과 사파의 삼검문주(三劍門主) 양민(梁旻)은 전의를 상실했다. 그러고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등을 돌려 달아났다. 그들의 황당하고도 때 이른 도주는 전황에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
둘째, 일통무련에겐 막강한 원군이 있었다. 월교의 금수위(金袖衛)들이었다. 스무 명 남짓에 지나지 않은 소수였으나 전원이 절정 이상인 데다 세 명은 초절정의 고수였기에 오대세가 하나와 맞먹고도 남을 전력이었다. 금수위들은 특히 마련의 마인들을 상대로 무자비한 검을 휘둘렀다.
셋째, 호련사성(護聯四星)의 등장이었다. 훗날 사왕(四王)이라 불리게 되는 네 신진강호들의 무위는 정사마 연합군을 충격의 도가니에 빠뜨렸다. 공히 삼십대로 보이는 일녀삼남은 각기 다른 무공으로 그들이 맡은 전장을 초토화시켰다. 오대세가와 사파칠문의 수장들이라 해도 일대일로는 역불급이었다. 우두머리를 잃은 이리떼가 흉포한 호랑이들을 피해 달아나는 건 필연지사였다.
넷째, 연합군의 구성과 임전자세에는 애초부터 근본적인 결함이 있었다. 정예라고 했지만 정맹의 오대세가와 사벌의 칠대문파, 그리고 마련의 사마류는 자신들의 알짜배기들은 내놓지 않았다. 일천대군의 팔 할은 정사마의 지배세력이 아닌 주변방파의 핵심인물들로 채워져 있었다. 보상을 약속받았지만 사실상 강압으로 참전한 그들이 필사의 투지를 불태우기란 어려운 노릇이었다. 가뜩이나 몸을 사리던 차에 정사 무림의 명망가들이 너도나도 꼬리를 말고 내빼자 다들 그들의 뒤를 따랐다. 도망치는 적들을 쫓아가 죽이는 것만큼 쉬운 일도 없기에 일통무련의 무인들은 마음 놓고 살육전을 벌였다. 연합군 희생자들의 대다수는 이 과정에서 발생했다.
일통무림의 보영대첩은 무림의 판도를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참패의 책임을 서로에게 미룬 삼패는 나중강의 첫 목표가 자신이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 기실 아직 일통무림의 힘은 그들 중 어느 한 곳도 확실히 능가한다고 보기 어려웠다. 예컨대 오대세가가 일치단결한다면 정맹은 능히 일통무련과 자웅을 결할 수 있었다. 하물며 삼패의 총합은 말할 것도 없었다. 설령 월교가 일통무련의 편에 선다고 해도 여전히 삼패의 넉넉한 우세였다.
그러나 보영에서의 패퇴에도 불구하고 삼패는 교훈을 얻지 못했다. 협상에 나선 삼패의 원로들은 단합은 고사하고 서로를 헐뜯으며 사사건건 날을 세웠다. 제이차 연합군의 결성은 요원해 보였다. 적의 적은 일시적으로나마 친구가 될 수 있었지만 워낙 기질과 이해관계가 상충한 탓에 삼패는 하나로 쉬이 융합하지 못했다.
그러는 동안 일통무련은 착실히 영역을 확충해나갔다. 일직선으로 밀어붙일 거라던 세간의 예상과 달리 사뭇 조심스러운 행보를 보였으나 그들은 호련사성을 앞장 세워 중원의 동서남북에 십자형의 영토를 건설했다. 자중지란에 빠진 삼패가 수수방관하는 통에 저마다 난세십군에 필적하는 무위를 뽐내는 사인(四人)의 신흥강자는 별 다른 저항에 부닥치지 않고 상하좌우 수천리의 광대한 영역을 일통무련에 귀속시켰다.
발등에 불이 떨어졌지만 삼패는 연합전선의 구축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미루었다. 같고도 다른 꿈을 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일통무련이 자신이 아닌 이패(二覇) 중 하나를 골라 침공하리라는 기대와 계산이었다. 그리 되면 남은 하나와 손을 잡고 일통무련과 상호 사활을 건 대결전에 나설 참이었다. 거기서 승리를 거둔 연후 자신의 연합세력을 상대로 대륙의 운명을 건 최후의 일전을 벌인다는 것이 그들의 그린 큰 그림이었다.
마련과 사벌에 대한 정맹의 혐오와 반감은 일통무련에 대해 가진 것보다 훨씬 다대했다. 사벌 역시 정맹과 마련을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원수로 간주했다. 패도(覇道)를 지향하는 데다 정파와 사파에 대한 증오로 똘똘 뭉친 마련은 말할 것도 없었다. 무림사 내내 마도를 멸시하며 그들의 머리 위에 군림해 온 정사(正邪)의 적들을 쓸어버릴 수만 있다면 부모자식을 팔아도 상관없을 판이었다.
삼패의 동상이몽을 이용해 뿌리를 다지고 골간을 튼튼히 한 일통무련은 드디어 용틀임을 시작했다. 놀랍게도 그들의 일차 사냥감은 삼패가 아니라 동맹군으로까지 여겨지던 월교였다. 스스로를 무황이라 칭한 나중강은 무력(武曆) 일천이십육 년 일백이십 명의 절정고수들을 거느리고 월교로 향했다. 바야흐로 천하대전이 시작될 참이었다.
“나도 모른다.”
권왕이 한참 만에 무겁게 닫혀 있던 입을 열었다.
만족스러운 답이 아니었으나 진천은 뒷말을 재촉하지 않고 잠자코 기다렸다. 권왕의 백미가 이마 가운데로 모였다.
“그는 죽었을 테지만 어쩌면 살았을 게다.”
하나마나한 첨언이었다. 진천은 이해하기 쉽게 내용을 정리했다.
“무황이 큰 형님을 비롯한 네 분에 의해 치명상을 입은 건 확실한 듯싶습니다. 하지만 세간에 알려진 대로 머리와 사지가 잘리지는 않은 모양이군요. 시체를 남기지도 않았고요.”
“그래.”
짧은 대꾸만 주고 권왕이 다시 입을 다물자 진천이 말을 이었다.
“독후께서 무황의 시신을 녹인 게 아니라면 그가 스스로 네 분의 포위를 빠져나갔다는 뜻인가요? 아니면 혹시 조력자가 있었을까요?”
“일통무련의 무인들을 실질적으로 부리던 자는 무황의 심복이라 할 마뇌(魔腦) 온소진(瑥炤辰)이었다. 나와 동료들은 거사 직전에 그자의 머리부터 날렸느니라. 그러니 무황을 도운 자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렇군요. 그러면 무황은 제 힘으로 사지에서 벗어나 사라졌다는…….”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 죽은 자가 어떻게 움직일 수가 있겠느냐?”
맞는 말이긴 했지만 앞뒤가 맞지 않은 말이기도 했다. 진천은 갈수록 아리송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