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94
제93화
진천은 차근차근 풀어나가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무황은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진천의 질문에 기억을 더듬은 권왕이 잔뜩 인상을 구겼다.
“그는 진진(眞眞)의 무형지독에 중독된 상태였다. 거기에 소(蘇) 형의 검에 우수(右手)가 잘렸다. 나의 주먹에는 두개골이 으스러졌고 막가(鄚家)의 일장으로 복부가 터져나갔다.”
진천은 권왕이 언급한 삼인의 신분을 알았다.
진진은 독후 연진진(延眞眞)일 테고 소 형은 검왕 소진(蘇進)이 분명했다. 막가가 장왕(掌王) 막우천(鄚宇天)임은 불문가지였다.
권왕이 말을 이었다.
“진진은 제아무리 무황이라도 결코 독중지왕(毒中之王)을 해독할 수 없을 거라 호언장담했지만 그녀 자신부터 자기 말을 믿지 않았다. 우리 세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목 대신 팔을 자른 소 형은 말할 것도 없고 머리를 부수고 배를 터뜨린 나와 막가도 무황이 죽었을 거라 확신하지 못했다.”
“어쨌거나 무황은 운신불능의 상태였겠군요. 그런데 어떻게 그를 놓쳤습니까?”
“천려일실이었느니라. 거사를 치르기에 최적지로 여겼던 호야곡 아래에 무저갱이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느냐? 게다가 하필이면 막가가 날린 장공을 맞고 날아간 무황이 그 좁은 틈으로 빠질 거라고 누가 예상을 했겠느냐? 이게 다 그 멍청한 막가 탓이다. 그 작자가 조금만 더 세게 쳤거나 아니면 약간만 약하게……, 아니다, 다 부질없는 소리다. 그치를 욕한다고 그날로 되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아무튼 무황은 시신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로 우리 눈앞에서 사라져버렸느니라.”
“무저갱으로 내려가 수색하지 않으셨습니까?”
“왜 안 했겠느냐? 당연히 바로 그가 떨어진 곳으로 따라 들어갔지. 아, 다 들어간 건 아니다. 무황의 반격에 중상을 입은 소 형과 얼이 빠진 진진은 빼고 나와 막가만 쫓아갔느니라. 우리도 정상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무황의 죽음을 확인해야 했다. 하지만 그를 찾지 못했다. 수십 장을 내려가니 바닥이 늪이더구나. 냄새가 지독했다. 아마 동물들의 사체가 썩어 이루어진 시소(屍沼)였을 게다. 나와 막가는 시독(屍毒)에 중독될 위험을 무릅쓰고 늪 속을 샅샅이 뒤졌다. 그리고 발견했다. 무황이 아니라 여섯 줄기로 뚫려있는 수로를.”
권왕의 일그러진 얼굴에서 진천은 당시 그가 느꼈을 암담함을 짐작했다.
“수로들도 일일이 살펴보았느니라. 그 중 두 군데는 인근의 시내로 이어져 있더구나. 몇날 며칠을 고생했지만 결국 어디에서도 무황의 시신은 건지지 못했다.”
“그 늪에 떨어진 사람 몸뚱이만한 물체가 하천으로 연결된 두 개의 수로에 자연적으로 빨려 들어갈 가능성이 어느 정도나 되었습니까?”
“역시 핵심을 찌르는구나. 나중에 수십 차례 반복해서 실험해보았지만 가라앉기만 할 뿐 한 번도 거기로 빠져나가지 않았느니라.”
진천은 비로소 확실히 이해했다.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무황은 스스로의 힘으로 사지에서 탈출한 것이었다.
호야곡의 일이 알려지자 무림은 발칵 뒤집혔다.
오랜 칩거를 깨고 본격적으로 천하일통의 대장정에 나섰던 무황 나중강이 일차 목표였던 월교로 향하던 도중 그의 최측근이라 할 호련사성에 의해 오체분시의 참사를 당한 사건은 삼백 년 이래 최대의 기변으로 무림사에 기록되었다.
강호는 절대지경에 들어선 것으로 평가받던 무황의 패배와 죽음을 쉬이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러나 호련사성의 좌장이라 할 일권무적(一拳無敵) 태진광이 무황의 오른팔을 증거로 내놓자 믿지 않을 수 없었다. 똑바로 선 자세에서 발목에 손가락이 닿을 만큼 긴 우수는 무황의 상징과도 같았다. 그 기형적인 팔은 일권무적의 주먹에 박살이 나는 바람에 식별이 불가능하다는 면상을 대신하기에 충분한 징표였다.
천하는 숨을 죽이고 호련사성을 지켜보았다. 공히 사십 대에 접어든 사인은 이미 난세십군을 발아래 두는 강자로 인정받고 있었다. 그들만으로도 능히 삼패의 하나를 감당할 정도로 막강한 전력이었다. 거기에 주군을 시해했음에도 일권무적과 검치(劍痴)는 일통무련의 무인들 중 절반이나 변함없는 충성을 맹세할 만큼 신망이 두터웠다. 그들만 거느려도 호련사성은 지상 최강의 방파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권무적을 필두로 한 호련사성의 다음 행보는 삼패와 세간의 예측을 훌쩍 벗어난 것이었다. 그들이 전격적으로 일통무련의 해체를 선언하자 강호는 반신반의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들의 처사가 위장이 아님이 드러났다. 무황을 제거한 이유가 세상의 평화를 위함이었다고 밝히며 호련사성은 차후로도 전쟁을 막는데 온힘을 기울이겠다는 뜻을 알렸다. 그러면서 일통무련의 영토는 중립지대로 둘 것이며 사패 중 누구라고 그 땅을 침범하면 그들이 나서 응징하겠노라고 공언했다.
일통무련의 일백여 무인들은 호련사성의 결정에 반기를 들지 않고 뿔뿔이 흩어졌다. 대개는 중립지대 곳곳에 터를 잡았으나 더러는 삼패의 본파로 돌아갔다. 호련사성은 각각 사패에 몸을 담고 그들을 감시하는 역할을 자임했다. 이삼 년 간 크고 작은 진통을 거치며 마침내 중립지대를 완충지로 둔 사패 체제가 완성되었다.
그러는 동안 비교불가의 무력을 과시하며 사패의 강자들을 무릎 꿇린 호련사성은 사왕(四王)으로 발돋움했다. 십 년 후 사패의 새로운 주인들이 그들에 필적하는 무위를 증명함으로써 무림은 무려 여덟 명이나 되는 절대자를 갖게 되었다. 그들 하나하나가 왕년의 무황에 버금가는 절대지경의 무존(武尊)들이었기에 사가들은 삼백 년 전에 이어 제이의 초인시대가 열렸음을 만천하에 공표했다.
진천은 가장 궁금한 점을 물었다.
“네 분은 어째서 무황을 죽이기로 결의하셨는지요?”
백미를 이마 가운데로 밀어 올려 삿갓 꼴을 만들며 권왕이 반문했다.
“이미 다 알려져 있지 않으냐?”
진천은 고소를 지었다.
“큰 형님께서 천하에 혈풍을 일으킬 대전란을 막으러 나섰음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나머지 세 분은 어딘지 석연치 않습니다.”
“그래도 그 늙은이들 모두 수십 년이나 중립지대를 보존하기 위해 애를 쓰지 않았더냐? 그만하면 진정성이 있다고 봐줘야 하지 않겠느냐?”
진천은 권왕의 미끼를 물지 않았다.
“외람되오나 그 분들이 그런 짐을 떠맡은 건 세상의 평화를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었을 듯싶습니다.”
“다른 이유라면?”
“무황의 부활과 보복에 대한 대비입니다.”
“…….”
권왕의 침묵이 길어지자 진천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혹시 네 분은 신(新) 사왕이 등장할 거라 예측하지 않으셨습니까? 당시엔 아직 네 분에게 견줄 수 없었지만 사패가 품은 신예들이 장차 네 분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강자로 성장하리라 기대했을 성싶습니다만.”
“계속해 보거라.”
“감히 추측컨대 무황에 대한 네 분의 두려움은 세인들이 상상하는 것보다 컸던 것 같습니다. 호야곡에서는 그를 물리쳤지만 그가 살아서 돌아오면 네 분만으로는 상대하기 버거울 거라 여기지 않으셨는지요? 그래서 네 분 못지않은 강자들을 원군으로 두고자 했을 테지요. 함께 무황을 대적해야 할 그들이 자기들끼리 싸워 상잔하기라도 하면 곤란할 터이니…….”
“그쯤이면 됐다. 대체 머리에 뭐가 들었기에 그렇게 직접 본 것처럼 그림을 떡하니 그려내느냐? 참으로 신통방통하구나.”
“…….”
“사소한 오류는 있다만 대체로 네 말이 맞다, 아우야. 진진과 막가는 네 말마따나 무황이 되살아나 목을 따러 올까봐 전전긍긍했지만 나나 소 형은 경우가 달랐다. 나는 무황이 우리들만이 아니라 세상 전체를 지우려고 들까봐 노심초사했고 반면 소 형은 그가 돌아오기를 학수고대했구나. 어쨌거나 우리는 그의 회생을 기정사실로 보았다. 그리고 그가 우리 앞에 나타난다면 우리 모두를 짓누를 무위를 현시하리라 예상했다. 터무니없는 소리로 들리겠지만 그는 그 정도로 무서운 인물이었다.”
진천은 별로 실감이 나지 않았다. 무황 나중강이 실로 대단한 무인이긴 했지만 팔대무왕 전원이 그와 비슷한 나이에 그와 대등한 무위에 도달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권왕의 감상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이제 와서 보면 다 기우였던 게야. 하지만 당시만 해도 우리는 이삼십 년만 지나면 그가 돌아올 거라 믿었다. 중립지대 존속 기간을 오십 년으로 둔 건 혹시 몰라 최대치로 잡은 게다. 사패는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자기들로서는 손해 볼 게 없으니 당연지사였지. 지금이야 결맹으로서 손색이 없는 탄탄한 짜임새를 갖췄다만 그때는 조직도 허술한 데다 소속된 방파들 간의 알력으로 정사마 모두 바람 잘 날이 없었거든. 월교를 제외한 삼패가 오십 년은 너무 길다고 난색을 표하긴 했으나 무난하게 우리 의사를 관철시켰더랬다. 일통무련이 소유했던 재물을 잔뜩 떼 준 덕분도 있었고.”
“그랬군요.”
“기실 지루하고도 짜증나는 과정이었다. 그때 생각만 해도 넌덜머리가 나는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세 구닥다리들은 나처럼 무림의 패권이나 이권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나를 앞으로 떠밀고는 다들 뒷짐을 쥔 채 구경만 하더구나. 괘씸한 늙은이들 같으니. 하는 수 없이 내가 사패의 주인들을 상대로 팔자에도 없는 협상가 노릇을 해야만 했다. 시시콜콜히 늘어놓자면 오늘밤을 홀딱 새워도 모자라겠지만 큰 줄기는 세 가지였다. 중립지대 보장, 존속 기간, 그리고 우리 네 명의 의탁이었지. 물론 사패의 우두머리들에겐 무황의 부활가능성에 관해서는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치들은 그저 횡재한 기분이었을 게다.”
진천은 권왕이 애초의 질문을 상기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자 어쩔 수 없이 다시 운을 뗐다.
“무엇이 기질과 성향이 상이한 네 분으로 하여금 무황 제거의 대사에 동참하게 했는지요?”
권왕이 망설였다.
“추잡스러운 부분이 섞여있어서 말하기가 껄끄럽구나. 나도 네 비사를 캐물었으니 알려는 주겠다만 듣고는 잊어버리려무나. 내가 외인에게 누설했다는 걸 알면 진진이 나를 잡아먹으려 들 테니까.”
독후를 떠올렸는지 몸서리를 친 권왕이 누가 들을 세라 목소리를 낮췄다.
“진진, 그러니까 독후하고 불리는 여자가 엄청난 미인이었다는 걸 알고 있느냐, 아우야?”
“몰랐습니다. 독후께선 항상 이마부터 목까지 가리는 두꺼운 면사를 착용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녀는 가히 경국지색이었느니라. 진진을 실제로 본 자들이라면 누구라도 그녀를 천하제일미로 꼽았을 게야. 이틀 전에 만나본 삼보장의 여식도 제법 곱더라만 진진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진천은 천하제일미라는 단어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굳이 따지지 않았다. 권왕이 별안간 정색했다.
“혹시 네가 오해할까 봐 미리 말해 둔다만 나는 진진의 미모에 혹한 적이 없느니라. 그녀만이 아니라 내 평생 한 번도 여인의 미색에 홀려 정도를 벗어나는 짓은 하지 않았다. 모름지기 멸사봉공의 대의를 품은 사내라면 무엇보다 경계해야 하는 게 여색이니라. 너도 조심해야 한다, 아우야. 전날 보니 삼보장의 여식과 하남 무림의 여아 둘 다 너를 심중에 둔 듯한 눈치던데. 그 방면으로는 문외한이라 할 나까지 알아차릴 정도면 꽤나 열렬한 게지. 어련히 알아서 잘 하리라 믿는다만 까딱 잘못하면 여난에 빠져 허덕일 수 있음이야.”
“명심하겠습니다.”
“그래야지. 그런데 무슨 얘기를 하다가 옆길로 샜지? 아, 진진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말하다가 말았지. 자고로 꽃이 지나치게 향기로우면 똥파리가 꼬이는 법이다.”
이상한 비유였으나 진천은 잠자코 권왕의 다음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