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95
제94화
해가 아직 지지도 않았는데 성급한 달이 동녘하늘에 얼굴을 내밀었다.
지하연무장 건설에 땀을 쏟던 수백여 일꾼들이 그날의 작업을 마치고 무리지어 삼보장을 빠져나갔다. 쑤우우. 진종일 소음에 시달리던 죽림과 참나무 숲이 갑작스레 찾아온 평온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서서히 어둠이 내려앉자 노미현과 차소영이 와옥에서 나와 등을 걸기 시작했다. 원래는 진천이 도맡아서 하던 일이었으나 그가 없을 때는 그녀들이 대신하곤 했다. 삼보장은 아직도 하인들을 두지 않고 있었다.
청와옥을 돌던 노미현은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정문으로 시커먼 그림자가 들어서는 장면이 시야에 잡혔다. 노미현은 문득 기시감이 들었다. 이레 전에도 이 시각에 벽력도문의 칼잡이들이 방문하지 않았던가.
괜히 불안해지자 노미현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자라를 보고 놀란 가슴이 솥뚜껑에 반응하는 격이었다. 그날과는 사뭇 다르지 않은가. 오늘의 불청객은 다섯이 아니라 혼자였다. 더욱이 칼이나 겉으로 드러난 다른 병장기도 없는 듯했다.
노미현은 나지막이 차소영을 불렀다.
“언니.”
별채로 앞서 가던 차소영이 고개를 돌렸다.
“왜?”
노미현이 가만히 턱짓을 했다. 차소영의 시선이 너른 마당을 가로질러 대문으로 향했다. 불청객과 그의 빈틈없는 걸음걸이를 본 그녀의 표정이 굳었다. 그러나 차소영은 침착한 음성으로 노미현에게 지시를 내렸다.
“수린이를 불러와라, 미현아.”
검은 인영을 일별한 노미현은 후원의 연무장으로 달려갔다. 차소영은 그녀와 반대로 정문으로 나아갔다. 그녀가 다가오자 흑의인은 걸음을 멈추고 기다렸다. 그와의 거리가 십 보로 줄어들자 차소영도 멈춰 섰다.
차소영은 괴인을 응시했다. 죽립에 가려 면상이 보이지 않았지만 언뜻 드러난 각진 턱에 수염이 무성했다. 신장은 그녀보다 작았으나 어깨가 떡 벌어지고 체구가 우람하여 거한처럼 보였다.
흑의 괴인이 발산하는 위압감을 견디며 차소영이 물었다.
“당신은 누구죠?”
괴인은 대답을 주는 대신 죽립을 벗었다. 마치 그를 보면 그녀가 금방 정체를 알아볼 거라는 듯이.
차소영은 재빨리 사내의 얼굴을 훑었다. 사각 턱에 매부리코. 갈고리처럼 끝이 위로 휜 눈. 먹물로 찍어 바른 듯 새카만 눈썹. 일견에도 거칠고 사나운 느낌을 주는 인상이었다. 나이는 스물다섯쯤일까? 더 많거나 어쩌면 그보다 적을 수도 있었다.
기억을 뒤졌지만 사내가 누군지 알아내지 못한 차소영이 다시 물었다.
“당신은 어디서 온 누군가요? 여기는 무슨 일로 온 거죠?”
괴인이 왼쪽 눈을 찡그렸다. 자기를 몰라볼뿐더러 질문이 추가되어 기분이 언짢은 모양이었다. 일순지간 그의 전신에서 흉포한 기운이 일자 차소영은 바짝 긴장했다. 그러나 괴인은 분기를 표출하지 않고 그녀의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을 내놓았다.
“하남편봉을 데리러 왔다.”
돌발 사태에 대비했던 차소영은 맥이 풀렸다. 하수린의 친인이었단 말인가.
“당신이 누군데 나를 데리러 왔다는 거죠?”
경공을 발해 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온 하수린이 차소영 옆에 착지하며 괴인에게 질문을 던졌다. 곧이어 노미현을 어깨에 올린 가린이 달려와 두 여인과 나란히 섰다. 노미현을 내려놓은 가린이 금방이라도 괴인에게 달려들 듯 씩씩거리자 하수린이 그의 팔뚝을 잡고 진정시켰다.
가린에게 예기를 쏘았던 괴인이 기운을 거두고 하수린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녀를 뚫어져라 노려보는 그의 고리눈에서 강렬한 빛이 폭사되었다.
“마음에 든다.”
괴인의 일성에 하수린은 어이가 없었다.
“누가? 내가? 그런데 이걸 어쩌나. 나는 댁이 별론데.”
“…….”
“당신, 누구야? 여기 와서 이런 시답잖은 수작을 벌이는 이유가 뭐야?”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지만 뜻밖에도 괴인에게서 정확한 대답이 나왔다.
“나는 소중걸이다. 너를 내 여자로 만들기 위해서 왔다.”
가린을 제외한 세 여인은 일제히 봉목을 부릅떴다. 괴인의 방문 목적에 황당해서가 아니라 그가 밝힌 이름 석 자 때문이었다. 진천이 북운상단에서 가져온 정보에 의하면 소중걸은 열흘 전 중립지대의 손꼽히는 강대문파인 천지문을 단독으로 박살 낸 마인의 성명이었다.
초절정고수로 자타가 공인하는 문주 백우영과 절정의 상으로 평가받는 철혈수 마지웅을 비롯한 천지십수를 홀로 몰살시킨 무위를 과시함으로써 소중걸은 일약 당금 무림 최강의 후기지수로 등극했다. 그와 하남신룡 진천 간의 우열을 두고 의견이 양분되었으나 북운상단주 오재승이 귀띔한 바에 따르면 대세가 차츰 소중걸 쪽으로 기우는 형국이었다.
기실 그들이 상대하고 물리쳤던 이들의 면면만 따졌을 때는 단연 하남신룡이 우세했다. 천지문주 백우영이 중립지대 최강을 다투던 강호라고 하나 마령 문가의 창천도군에 견줄 바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하남신룡과 창천도군의 일전은 순수한 무력의 대결이었다고 보기엔 무리가 따랐다. 남천도왕이라는 변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남천도왕이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을지는 불분명하나 창천도군에게 상당한 부담을 주었으리라는 데는 이견이 없었다. 하남신룡의 승리는 남천도왕의 존재에 힘입은 바가 컸다는 주장이 먹혀드는 이유였다.
반면 소중걸의 경우엔 전후 과정이 모두 깔끔했다. 그는 이백여 천지문도가 지켜보는 가운데 단 일 각 만에 십일 인의 고수들을 불귀의 객으로 만들었다. 조력자도 없었고 천지문 수뇌부의 양보는 더더욱 없었다. 소중걸은 진신무력이 고스란히 드러난다는 생사투에서 강적들을 모조리 저승으로 날려버린 것이었다.
하수린 등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목전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천지문 변사가 발생한지 열흘밖에 지나지 않아 아직 별호가 확정되지는 않았으나 강호 일각에서는 벌써부터 그를 두고 소장왕(小掌王)이라 칭하는 자들이 있다고 했다. 삼보장의 여인들은 그가 향후 진천의 강력한 경쟁자가 될 것임을 예감했다.
“얼마 전 천지문에서 난리를 쳤다는 이가 당신인가요?”
하수린은 자신의 말투가 다시 바뀌었음을 의식하지 못했다.
“난리가 아니다. 역도들을 벌했을 뿐이다.”
그로써 하중걸은 근래 대륙을 떠들썩하게 만든 풍문의 당사자임을 시인한 셈이 되었다.
하수린의 아미가 이마에 갈매기를 그렸다.
“역도? 당신이 천지문의 주인인 줄은 미처 몰랐군요.”
“…….”
“그런데 다짜고짜 나를 자기 여자로 만들겠다니, 대체 무슨 뜻이죠?”
좌안을 일그러뜨리며 소중걸이 반문했다.
“무슨 뜻이냐고? 그걸 이해하지 못한단 말인가?”
이번엔 하수린이 침묵했다. 소중걸이 내처 물었다.
“너를 내 여자로 삼겠다는데 다른 설명이 필요한가?”
하수린이 발끈하려는 찰나 소중걸이 말을 덧붙였다.
“네 얘기를 들었다. 천지간에 오직 나만이 너의 짝이 될 수 있다.”
하수린의 뇌리에 퍼뜩 한 가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당신은 혹시……?”
소중걸이 그녀가 얼버무린 뒷말을 채워주었다.
“나는 태양신맥(太陽神脈)이다.”
청와옥과 백와옥에서 대웅과 고량이 차례로 나왔다.
차소영이 얼른 달려가 위태롭게 걸어오는 연인을 부축했다. 노미현은 대웅을 도우러 가지 않고 제자리를 지켰다. 차소영이 불청객의 정체를 알리자 고량은 깜짝 놀랐다. 하지만 방문목적을 듣고는 안심하는 기색이었다. 천천히 걸어와 뒤늦게 도착한 대웅도 노미현의 속삭임에 고량과 동일한 반응을 보였다.
대웅과 고량을 번갈아 쳐다본 소중걸이 중얼거렸다.
“너희는 하남신룡이 아니군. 태극마선도 아닐 테고.”
여상구는 삼보장에 없었다. 그는 노덕과 함께 주안 외곽의 빈민촌에 가 있었다. 원주로 출발하기 전 당분간은 위험한 상황이 없을 것 같다는 진천의 판단에 따라 노덕이 한동안 타인에게 맡겨두었던 마을 건설 현장을 시찰하려 하자 여상구도 그의 호위 노릇을 하러 따라간 것이었다.
소중걸이 진천을 들먹이자 중인은 갑자기 그의 부재감이 얼마나 큰지를 깨달았다.
“그들은 잠시 외출 중이에요.”
노미현이 진천과 여상구가 곧 돌아올 거라는 인상을 주려고 ‘잠시’를 강하게 발음했다. 소중걸은 그녀의 의도에는 신경도 쓰지 않는 듯했다. 그의 눈길이 다시 하수린에게로 옮겨갔다.
하수린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아무도 수군거리지 않았지만 친인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빤히 보였기에 볼이 화끈거렸다.
태양신맥의 사내는 구음절맥의 여인과 유일하게 육체적 결합이 가능한 상대였다. 둘만이 서로의 음기와 양기를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허리에 양손을 짚은 하수린이 소중걸을 쏘아붙였다.
“당신이 태양신맥이든 뭐든 내 알 바 아냐. 그러니 내 여자니 뭐니 헛소리는 집어치우시지.”
주위 지인들은 그녀가 민망함을 들키지 않으려고 일부러 냉랭한 음성을 뱉어냈음을 알았다.
소중걸이 왼눈을 찌푸렸다.
“나를 거역할 참인가?”
“거역? 웃기지도 않는군. 네가 내 상전이라도 돼? 나는 손님이 원하면 치마를 내려야 하는 기루의 미희가 아니야.”
“…….”
“내 의사를 밝혔으니 이제 그만 꺼지시지. 너를 거역하지 않을 여자는 딴 데 가서 찾아보고.”
불쾌감을 여과 없이 표출하는 하수린을 보며 중인은 조마조마했다. 소중걸의 무위가 강호에 전해진 대로라면 그를 자극해서 좋을 것이 없었다. 더욱이 그는 굴복의 명에 응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천지문주와 천지십수를 학살한 마인이 아니던가. 하지만 속이 비틀린 하수린을 말리기도 어려웠기에 다들 묵묵히 사태의 추이를 관망했다.
소중걸의 두툼한 입술에서 무뚝뚝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너는 나를 거부할 수 없다, 하남편봉.”
“거부? 정말 오만한 위인이군. 어쩜 그렇게 하는 말마다 거부감이 들지? 내가 거부한다면 어쩔 테냐?”
소중걸이 오른손을 들어 손바닥을 펼쳐보였다.
“마도의 율법에 따라 강자로서 너를 복종시키겠다.”
상황은 급전직하했다.
하수린이 허리춤에서 청사편을 꺼내들기도 전에 가린이 소중걸에게 쇄도했다.
거리가 워낙 가까웠기에 가린은 순식간에 소중걸에게 달라붙었다. 삼보장의 식구들은 흥분했다. 육박전에서 가린은 천하무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의 손아귀에 잡히는 순간 승부는 끝이라고 보아야 했다. 진천이나 여상구도 가린에게 붙들리면 대책이 없었다.
하지만 소중걸은 얌전히 당하지 않았다. 가린이 붙기 직전 이형환위를 발한 소중걸의 몸이 유령처럼 사라졌다. 맞불을 놓지 않고 피했다는 것은 그가 전날 만수보에서 파혼도 문수창이 가린에게 어떻게 무너졌는지 알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위기를 벗어났지만 소중걸은 아주 무사하지는 못했다. 가린의 날카로운 손톱에 걸려 왼 가슴부터 오른쪽 옆구리까지 길게 갈라졌기 때문이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뼈가 상했을 터였다.
간발의 차이로 목표물을 놓친 가린은 좌측 이삼 장 떨어진 지점에 나타난 소중걸에게 재차 달려들었다. 그러나 이번엔 달려든 속도 그대로 튕겨나갔다. 지켜보던 고량이 부지불식간에 부르짖었다.
“장강(掌鋼)이다!”
소중걸이 바닥에 뒹구는 가린을 쫓으며 맹공을 퍼부었다. 그의 쌍장에서 시뻘건 화염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끄어억. 강기가 서린 장공에 적중당한 가린이 고통에 찬 비명을 토해내었다. 가린의 등판이 움푹 꺼졌다. 오른다리는 무릎이 꺾여버렸다.
초장부터 강력한 패를 꺼내든 소중걸은 가린을 마저 뭉개지 못하고 몸을 돌려야 했다. 하수린의 청사편이 그의 목을 감아왔기 때문이었다. 날이 선 채찍을 맨손으로 잡은 소중걸이 남은 손으로 하수린에게 장공을 쏘았다. 이미 하얗게 변해있던 하수린의 좌수(左手)도 백강(白鋼)을 뿜어냈다.
검붉은 장공과 희디흰 소수(素手)의 충돌은 전자의 우세로 판가름 났다. 신형을 크게 휘청거렸지만 소중걸이 제자리를 고수한 반면 하수린은 피를 토하며 뒤로 밀려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