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96
제95화
소중걸은 오른손에 쥔 채찍을 잡아당겼다.
하수린이 청사편을 놓지 않았기에 멀어져가던 그녀의 신형이 그에게로 딸려왔다. 하지만 소중걸은 그녀를 낚아채지 못했다. 정신을 수습한 하수린이 소수로 반격을 가했을 뿐만 아니라 뒤에서 가린이 그를 덮쳐왔기 때문이었다. 다리가 부러졌지만 가린은 양팔만으로 삼사 장이나 도약했다.
크아아.
괴성을 내지른 가린이 큼지막한 손으로 소중걸의 목을 움켜쥐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거의 움켜쥘 뻔했다. 하수린에게 장공을 날려 급한 불을 끈 소중걸은 황급히 채찍을 놓고 다른 손으로 가린을 상대했다. 핏빛으로 물든 그의 장심에서 솟아난 송곳 같은 장강이 가린의 팔뚝을 찔렀다. 강기가 확산하며 팔을 벨 듯하자 가린은 할 수 없이 다 잡은 고기를 놓아줘야만 했다. 그러나 상체를 뒤로 뉘이며 성한 왼다리로 소중걸의 복부를 걷어차는 데 성공했다. 진천에게서 배운 수법이었다.
칠팔 장이나 날아간 소중걸은 안면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입가에 선혈이 흐르는 것으로 보아 상당한 충격을 받았음에 분명함에도 소중걸은 신형을 추스르자마자 바로 가린에게 달려왔다. 가린도 팔을 발삼아 소중걸에게 짓쳐들었다. 한껏 벌린 입에서 빠져나온 길쭉한 송곳니가 달빛에 번들거렸다. 실로 괴기스러운 모습이었으나 소중걸은 조금도 겁을 먹은 기색이 아니었다.
양인은 중간에서 충돌했다. 승자는 소중걸이었다. 그의 쌍장에서 쏟아진 강기의 태풍이 가린의 동체를 가차 없이 쓸어버렸다. 하지만 가린도 일방적으로 당하지만은 않았다. 몸을 내준 대신 오른팔로 소중걸의 왼 어깨를 할퀴는데 성공한 것이었다. 조금만 옆으로 갔다면 심장을 상하게 할 수도 있었던 일격이었다.
분기탱천한 소중걸이 땅바닥에 쓰러진 가린에게 최후를 선사하려는 순간 그의 측면에서 하얀 빛줄기가 날아왔다. 가린의 명줄을 끊으려다 자신의 목이 부러질 것임을 자각한 소중걸은 방향을 바꿔 하수린의 공격에 대응했다.
소중걸의 우수에서 뻗어나간 장공이 하수린의 소수와 부딪쳤다. 이번에도 밀렸으나 하수린은 또 다른 패를 준비해두고 있었다. 빳빳하게 선 그녀의 청사편이 창처럼 소중걸의 배를 찔러갔다.
소중걸은 피하지 않고 과감하게 하수린을 추격했다. 청사편이 그의 옆구리를 뚫고 들어갔지만 그 대가로 하수린의 지척에 이른 소중걸이 잇달아 삼장을 퍼부었다. 하나는 소수로 막아내고 또 하나는 빗겨냈으나 마지막 하나를 허벅지에 적중 당한 하수린은 팽이처럼 돌다가 고꾸라졌다.
재빨리 하수린의 마혈을 찍은 소중걸이 그녀의 가슴을 발로 눌렀다. 그도 피투성이였으나 최종승리는 그의 몫이었다.
소중걸이 하수린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이제 나에게 복종할 텐가?”
하수린이 침을 뱉었다. 그러나 핏물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그녀의 침은 소중걸의 면상까지 도달하지 못하고 중간에 떨어졌다.
“너는 나를 죽일 수는 있어. 하지만 절대로 굴복시킬 수는 없어.”
하수린을 응시하던 소중걸이 그녀를 어깨에 들춰 멨다. 몸부림을 칠 수가 없었기에 하수린이 악다구니를 썼다.
“내려 놔, 이 새끼야. 그냥 죽여. 나를 능욕하면 기필코 네놈을 죽여 버릴 테다.”
“그러던지.”
담담히 대꾸한 소중걸이 하수린의 아혈마저 눌러버렸다. 그녀를 말 못하는 짐짝으로 만든 소중걸이 가린에게 경고했다.
“더 덤비면 머리통을 부숴버리겠다, 요괴.”
꿈틀거리며 상체를 일으킨 가린은 소중걸의 위협에 아랑곳없이 그에게로 기어왔다. 왼눈을 실룩거린 소중걸이 오른손을 쭉 뻗었다. 그의 장심이 발갛게 달아오른 순간 뾰족한 음성이 장내를 갈랐다.
“잠깐 기다려요!”
다급히 달려온 노미현이 가린의 앞에 섰다. 소중걸은 우수를 그대로 든 채 노미현을 노려보았다. 무기력하게 삼인의 혈투를 지켜만 보았던 삼보장의 친인들이 서둘러 노미현에게 합류했다. 상당한 부상을 당했으나 소중걸이 전투불능의 상태는 아니었기에 그들의 행동은 목숨을 내건 모험이었다. 소중걸이 천지문에서처럼 불문곡직 살수를 펼치면 아무도 살아남기 어려웠다. 대웅은 겉으로는 멀쩡해 보였으나 전날 만수보에서 원정지기까지 쥐어짰기에 고량보다 내상이 심각한 상태였다.
중인을 휘둘러본 소중걸이 묵직한 음성을 토해냈다.
“뭔가?”
노미현이 대표로 대답했다.
“당신은 마도의 율법을 어길 참인가요?”
소중걸의 왼쪽 눈가에 경련이 일었다.
“무슨 소리냐?”
노미현이 검지를 들어 소중걸의 어깨에 걸쳐져있는 하수린을 가리켰다.
“그녀는 하남신룡의 여자예요.”
소중걸의 고리눈에서 기광이 번득였다. 퍼런 눈빛을 살기로 여긴 노미현은 간이 졸아들 듯 두려웠으나 용기를 내어 말을 이었다.
“진정한 마인이라면 남의 여자를 뺏을 때 그럴 자격이 있음을 증명해야 한다고 들었어요. 그녀를 가지려면 당신은 먼저 하남신룡을 꺾어야만 해요. 그렇지 않나요?”
“…….”
소중걸이 때 아닌 침묵에 잠기자 모두들 숨을 죽였다. 하지만 노미현의 궁여지책이 통할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소중걸이 바보가 아니고서야…….
“그자도 태양신맥이었던가?”
소중걸의 질문이 중인의 단상을 끊었다. 모두들 노미현이 멋진 응수를 보여주기를 바랐다.
“그가 태양신맥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건 아니잖아요? 그녀가 그의 여자라는 게 중요하지. 못 믿겠으면 그녀에게 직접 확인해 봐요. 그녀는 죽으면 죽었지 자존심을 속이며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노미현의 말은 묘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소중걸이 하수린의 아혈을 풀어주었다.
“저 여인의 말이 사실인가?”
“그래, 이 새끼야. 나는 그의 여자고 그는 내 사내야.”
소중걸이 하수린을 던지듯 땅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의 턱을 잡았다.
“한 달 뒤에 다시 오겠다. 그날 하남신룡을 죽이고 너를 갖겠다.”
하수린이 반발하기 전에 노미현이 소리쳤다.
“좋아요. 그때 봐요. 당신이 그를 이기면 우리도 수긍하겠어요.”
몸을 일으킨 소중걸이 등을 돌려 정문으로 걸어갔다. 도중에 죽립을 주운 그가 대문 밖으로 사라지자 중인은 하나둘 참았던 날숨을 기다랗게 뱉어내었다.
진천은 소중걸의 난동이 있은 후 엿새가 지나서야 삼보장으로 돌아왔다. 원주로 떠났던 날로부터 치면 아흐레만의 귀환이었다.
그가 절뚝거리며 나타나자 다들 의아해 했다. 야심한 시각 청와옥 일층의 대청 탁자에 둘러앉은 친인들에게 외가에서의 일을 보고하려던 진천은 마지막으로 들어온 하수린이 그 못지않게 다리를 저는 걸 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가린과의 비무에서 다쳤소, 하 소저?”
하수린의 아미가 갈매기를 그렸다. 노미현이 하수린을 대신해 육일 전에 있었던 사건을 설명했다. 그녀의 얘기를 듣던 도중 진천은 가린을 보았다. 소중걸의 장공에 맞아 무릎이 꺾이고 상반신이 곤죽이 되었다던 가린에게선 중상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진천은 다시금 가린의 경이로운 회복력에 혀를 내둘렀다.
“……그래서 그는 한 달 후의 대결을 기약하고 물러갔어요. 이제 이십사 일이 남았네요.”
노미현이 말을 맺었다.
아직도 눈썹을 찌푸리고 있는 하수린을 흘긋 바라본 진천이 노미현을 치하했다.
“잘 했소, 노 소저. 정말 잘 했소.”
“임시방편이었을 뿐이에요.”
여상구가 끼어들었다.
“벼룩도 뛰는 재주가 있다더니 너도 쓸 데가 있구나.”
노미현이 아름다운 눈으로 쌍심지를 켰다.
“좋은 것들도 많은데 하필이면 벼룩이 뭐예요, 청로. 그리고 청로야말로 아무 도움이 안 됐잖아요?”
“이것아, 내가 그놈이 올 줄 알았냐? 노 장주를 호위하러 나갔다가 벌어진 일이니 나에게 책임을 물을 생각일랑 마라.”
“흥, 차라리 없는 게 다행이었어요. 만약 청로가 있었으면 더 큰 불상사가 벌어졌을 거예요. 그치는 우리들에게 싸울 의사가 없다고 간주하고 손을 거뒀지만 청로의 살기를 접했으면 틀림없이 살수를 전개했을 거라고요. 아직 덜 나았으니 청로도 그자의 상대가 되지 못했을 테고 우리도 그 와중에 십중팔구 새우등이 터졌을 거예요.”
중인은 노미현의 말에 일리가 있음을 알았다. 결과적으로만 보면 여상구의 부재는 호재였다.
잠시 노미현과 티격태격하며 입씨름을 벌이던 여상구가 승산 없는 싸움을 포기하고 진천에게 눈을 돌렸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 아우님? 그놈을 때려잡고 아리따운 하남편봉을 지킬 묘책을 구상하고 있겠지?”
진천은 고소를 지었다.
“그의 행동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형님.”
“행동이라니?”
“그는 우리 대부분이 부상 중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혼자 찾아왔습니다.”
“그렇군. 무모하기 짝이 없는 종자로세 그려. 우리를 천지문과 동급으로 취급한 게지. 운이 억세게 좋은 놈이구먼. 아우님이나 내가 나설 필요도 없이 해골이나 금강권 둘 중 하나만 온전했어도 목을 따버렸을 텐데. 가린과 하남편봉의 합공에 쩔쩔 맸다니 쓸 만한 숟가락을 하나만 더 얹었어도 집어삼키는 데 어려움이 없었을 게야.”
진천은 여상구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반박을 삼갔다.
“아무래도 그에 대한 평가를 수정해야 할 듯싶습니다.”
“어떻게 말인가?”
“천지문에서의 만행을 역도에 대한 응징이라고 했다면 뭔가 자기만의 명분이 있었다는 거고 그렇다면 그가 무도한 살인마는 아니라는 뜻이겠지요. 더욱이 여기서 그가 보인 행태도 일반적인 마인들의 그것과는 달랐습니다. 하 소저에게 무례를 범하긴 했지만 그는 다른 이들에겐 피해를 주지 않았고 쓰러진 가린에게 가일수도 하지 않았습니다.”
의형제의 대화를 듣던 하수린이 눈썹을 찡그렸다.
“그자를 두둔할 셈인가요? 내가 적시에 개입하지 않았으면 가린은 매우 위험했어요. 나에겐 따로 흉심이 있으니까 살수를 자제했지만 가린에겐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고요. 다른 이들을 살려둔 것도 아마 당신이나 여 각주님이 돌아올 경우를 대비해 인질로 삼을 작정이었을 거예요.”
진천은 하수린의 흥분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그녀의 추론엔 구멍이 숭숭 뚫려있었지만 굳이 지적하지 않고 넘어갔다.
“그는 얼마만큼 강했나, 가린?”
진천의 질문에 홀로 서있던 가린이 으르렁거렸다.
“가린은, 그를 이긴다.”
“그래. 하지만 다음번엔 내 차례야. 그보다 그가 어느 정도였는지 알려줘. 일전에 왔던 칼잡이와 비교하면 어때?”
가린이 고민에 빠졌다. 모두들 그의 튀어나온 입을 주시했다. 이윽고 가린이 답을 내놓았다.
“가린은, 모른다.”
충분한 답변이었다. 소중걸이 곽건과 우열을 가리기 힘든 무위의 소유자라는 뜻이었다.
진천은 입술을 깨물었다.
순수한 무력만 따지면 곽건은 그보다 아주 약간이나마 우세했다. 소중걸이 그와 비등한 강자라면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웠다.
더욱이 지금은 내외상이 심각한 상태였다. 강민의 쌍전에 다친 오른 어깨와 강정의 파즉살에 당한 허벅지의 부상은 완전히 낫는 데 족히 한두 달은 걸릴 터였다. 더욱 큰 문제는 내상이었다. 곽건과의 혈전에서 입은 내상이 강가에서의 흉전(凶戰)으로 도지는 바람에 평소 무력의 절반도 발하기 어려운 지경이었다. 그냥 내버려두었을 경우 이십사 일 이내에 공력의 운용에 지장에 없을 정도로 내상이 아물 가능성은 전무했다.
소중걸과 대결하려면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다. 몇 가지 방안을 검토해 본 진천은 비상수단을 쓰기로 결심을 굳혔다.
여상구가 모두의 최대관심사를 물었다.
“그놈에게 본때를 보여줄 수 있겠지, 아우님?”
진천은 쓰게 웃었다.
“모르겠습니다, 형님.”
“팔다리의 부상이 신경 쓰이는가? 그러면 날짜를 미루는 게 어떻겠는가? 그놈이 정히 그날 싸워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면 내가 아우님을 대신해…….”
노미현이 여상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핀잔을 주었다.
“청로는 수린 언니의 사내가 아니잖아요. 그자는 상대로 인정하지도 않을 걸요? 게다가 청로 역시 내상이 완치되려면 아직…….”
“이것이. 그깟 놈은 지금 당장 붙어도…….”
“흥, 억지 부리지 마요. 솔직히 정상적인 몸이라 해도 그자에게 이길 거라는 보장이…….”
“뭐라, 이것이 나를 뭐로 보고…….”
진천이 서로의 말허리를 자르는 노소의 언쟁을 중단시켰다.
“제게 맡겨두십시오, 형님.”
중인의 시선이 그에게로 모이자 진천이 하수린을 일별하며 말을 덧붙였다.
“어여쁜 하 소저를 무뢰한에게 뺏길 수는 없지요.”
진천의 너스레에 하수린의 뺨에 홍조가 피었다. 그녀의 귓불까지 빨갛게 달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