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97
제96화
창가에 새벽 어스름이 스며들었다,
운공을 마친 진천은 가부좌를 풀고 일어나 몸을 점검했다. 뼈까지 상했던 어깨와 다리의 부상이 한결 회복되어있었다. 진천은 조심스럽게 역천기결을 운용했다. 가슴에 통증이 느껴졌으나 그의 좌수 끝에 하얀 고드름이 돋아났다. 십성의 공력을 끌어올릴 수 있음을 확인한 진천은 절멸도를 도로 집어넣었다.
가린을 능가하는 회복력의 비결은 역천기결 상의 생환결이었다. 진천은 생환결로 심장에 깃든 독정을 녹여 치유의 원천으로 삼았다. 이사부에 따르면 생환결(生還決)은 사경에 처했어도 기사회생이 가능한 절대기공이었다.
그러나 탁월한 효능에 비례하여 부작용도 상당했다. 이사부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생환결을 사용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자신도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한 번 운용할 때마다 수년의 수명이 단축될 수 있기 때문이라 했다. 어쩌면 십 년 이상이 될 지도 모른다는 말을 덧붙였기에 진천은 명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날 강가의 추격을 벗어날 방도를 구상했을 때도 궁지에 몰리지 않는 한 생환결은 끝까지 아껴 둘 심산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신속한 회복이 불가피했다. 비단 소중걸과의 대결을 준비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마령 문가의 발호에 대비할 필요가 있어서였다.
진천은 마령 문가가 사월을 넘기지 않거나 늦어도 오월 중에는 백도방을 접수하러 나설 거라 예측했다. 그들은 백도방에 앞서, 혹은 동시에 삼보장을 정리하려 들 게 뻔했다. 그들로서는 실익 이전에 체면 문제였다.
권왕과의 친분을 들먹이며 마령 문가를 주춤거리게 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단지 그의 말만 듣고 결행을 중단할 지는 심히 의문이었다. 권왕에 기대지 않고 최소한의 자기방어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점은 마령 문가가 삼보장의 전력을 오판하고 있으리라는 점이었다. 그들은 그와 하수린만 정상적인 무력을 발휘할 수 있으리라 볼 것이었다. 다른 이들은 구인결에서 한 달 이내에 완치가 불가능한 중상을 입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계산에서 빠진 건 가린이었다. 가린은 구인결 이후 일절 삼보장에 드나드는 이들의 눈에 띄지 않았기에 마령 문가는 그가 원상회복되었으리라고는 꿈에서도 알지 못할 터였다. 후원의 연무장을 삼보장 외부의 먼 누각에서 볼 수 없도록 막을 세워놓았으니 그와 하수린의 비무도 노출되지 않았을 것이었다.
가린은 실로 든든한 우군이었다. 창천도군 급의 강호가 아닌 한 그를 어쩌지 못했다. 더욱 고무적인 사실은 가린이 그와 비슷한 무력의 절정고수들을 여럿 상대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강기를 두르지 못하는 칼은 그의 갑피를 범할 수 없었다. 집단전(集團戰)에서 가린은 특히 강미를 발할 터였다.
처소를 나온 진천은 대웅의 방으로 갔다.
밖에서 잠시 귀를 기울인 진천은 기척을 내지 않고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갔다. 뜻밖에도 대웅은 운공 중이 아니라 침상에 걸터앉아있었다. 처진 눈을 치떴다 내린 진천이 그에게로 걸어갔다.
“왜 왔어?”
대웅이 멍한 눈을 들어 물었다. 그의 옆에 앉으며 진천이 대답했다.
“그냥 왔다. 너하고 얘기나 나누려고.”
진천은 간밤에 지나치리만치 의기소침해 있던 대웅이 마음에 걸렸다. 강가에서의 위기와 권왕과의 조우 과정을 들으며 흥분일색이었던 다른 친인들과 달리 대웅은 시종여일 풀이 죽어있었다. 평소의 수다스러움도 온데간데없었다.
진천이 견봉(肩峰)이 불거져 나온 대웅의 앙상한 어깨를 툭 쳤다.
“기운 내라, 대웅.”
뜬금없는 격려에 대웅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나는 정말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놈이야, 천. 어제 도화각주가 노 소저에게 벼룩 운운했을 때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더라. 나야말로 벼룩만도 못한 놈이잖아. 전날 소중걸이란 자가 쳐들어왔을 때 나는 그자의 기운에 눌려 한마디도 내뱉지 못했다. 너에게만 고백한다만 그자가 노 소저가 아니라 하 소저를 데려간다고 왔다기에 속으로 안도하기까지 했다. 가린과 하 소저가 그자와 싸우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을 때도 나는 우두커니 지켜보기만 했을 뿐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그자에게 당당하게 맞섰던 용감한 노 소저가 비겁한 나를 보고 얼마나 비웃었을까. 나는 뒈져야 마땅한 놈이야.”
대웅이 속을 토해내도록 내버려둔 진천은 그가 말을 마치자 그의 야윈 등을 부드럽게 다독거렸다. 그러나 말은 엄하게 했다.
“그녀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 자학하지 마라, 대웅. 네 자격지심은 스스로 만든 함정이야. 그러니 누가 건져주기를 바라지 말고 스스로 빠져나와야 한다. 무인지로에 들어섰으면 누구나 좋든 싫든 그때와 유사한 상황을 맞닥뜨리게 마련이다. 솔직히 말해 용감하고 비겁한 것과는 큰 상관이 없어. 그런 상황에서 태도를 결정하는 건 기본적으로 강약의 차이야. 우리는 모두 똑같아. 강자 앞에서는 약해지고 약자에겐 강해진다는 점에서. 미치거나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고서야 예외는 없다. 나도 마찬가지고. 그러니 굴욕감을 느끼기 싫거들랑 부지런히 강해져야 한다. 몸도 마음도.”
진천이 대웅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대웅은 저항하지 않고 홀린 듯 기립했다.
“너 자신을 과소평가하지 마라, 대웅. 지난 두 달 간 네가 치렀던 싸움들을 돌이켜봐라. 벽력도문에 있을 때라면 상상조차 못할 일이었지 않으냐. 너는 벌써 세 차례나 벽을 넘었다. 그것도 범인이라면 감히 도전할 엄두도 내지 못했을 벽들을.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은 이렇게 주저앉아있는 게 아니라 너 자신을 믿고 꾸준히 나아가는 거다. 이미 올바른 방향을 잡았으니 포기하지 않고 계속 가기만 하면 된다.”
대웅의 해골면상이 벌겋게 상기되었다.
“내가 할 수 있을까, 천?”
“물론이다, 대웅. 내가 속에 없는 소리를 하는 부류가 아님을 알지? 나는 네가 장차 팔대무왕 못지않은 무존이 될 거라 확신한다. 그날이 오면 천하의 누구도 너를 건드리지 못할 거야.”
“하지만 지금 당장만 해도 너를 포함해 나보다 강한 자들이 셋이나 있잖아. 어쩌면 더 있을 지도 모르고. 정맹이나 월교에도 너나 건이 같은 괴물들이 나왔을지 누가 알겠어. 내가 세져도 더 센 자들이 무림에 바글거린다면 말짱 꽝이잖아.”
“나는 네가 장차 천하제일인이 될 거라고는 장담할 수 없다, 대웅. 하지만 그러지 못할 거라 단언할 수는 더더욱 없다. 그저 하루하루 주어진 시간들을 최선을 다해 살아내자꾸나. 그러다 보면 훗날 무언가가 되어 있을 테지. 그게 천하제일인이면 좋겠지만 아닌들 어떠냐? 후회 없는 삶을 살았으면 그뿐.”
“너도 천하제일인이 되고 싶냐, 천?”
“그래, 대웅. 어릴 때 어머니에게 맹세했다. 반드시 지상 최강의 무인이 되겠다고. 하지만 내가 천하제일인이 되려는 건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다. 나는 내 꿈을 실현하기 위해 절대지존이 되려는 거다.”
“마도와 사파를 멸하고 태평성대를 이루겠다는 꿈?”
“그래.”
“응원할게, 천. 하지만 천하제일인의 권좌를 차지하는 게 쉽지는 않을 거야. 이제부터 나도 배전의 분발을 할 참이니까. 지금은 너에게 뒤쳐졌지만 기필코 따라잡을 테다.”
“좋아. 다른 이들은 몰라도 우리 둘은 마지막까지 선의의 경쟁자로 남자꾸나. 그럴 거지?”
“당연하지. 나는 절대로 너에게 등을 돌리지 않을 거야. 설령 내가 너를 능가하는 무인이 된다고 해도 업신여기지도 않을 거고. 너는 영원히 내 최고의 벗이야.”
“고맙다, 대웅. 이제 그만 운공에 드는 게 어떠냐. 수련을 재개하려면 몸부터 빨리 나아야지.”
“알았다. 이따 오후에 보자, 천.”
대웅의 방에서 나온 진천은 그를 기다리고 있던 여상구에게 눈인사를 했다.
여상구가 밖에서 대웅과의 대화를 엿듣고 있음은 진즉부터 알고 있었다. 기실 엿들었다는 표현은 어폐가 있었다, 여상구는 두 청년이 나누는 우정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기운을 죽이고 있었던 것이었다.
여상구가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복도를 걸었다. 진천도 발소리를 내지 않고 그의 뒤를 따랐다. 청와옥을 나온 두 사람은 후원으로 향했다. 어둠이 깔린 길을 일다경가량 걸어간 의형제는 천년노송 옆의 바위에 나란히 엉덩이를 붙였다.
“다리의 부상이 생각보다 심하지 않은 모양이구먼, 아우님. 다행일세.”
여상구의 말에 진천은 생환결에 대해 알려주었다. 여상구의 이마주름이 깊게 패였다.
“허어, 그런 비법이 있었다니. 하지만 함부로 쓰면 안 되겠구먼. 아우님 수명이 줄어든다니 상상만 해도 끔찍할세 그려.”
여상구가 과장스럽게 몸서리를 쳤다. 진천은 그저 쓰게 웃었다.
“여하간 한시름 덜었구먼. 실은 간밤에 아우님 걱정에 잠시도 눈을 붙이지 못했다네. 벽력도문의 아이와 치른 혈전에서 내상을 입은 데다 이번에 강가에서 또 작지 않은 부상을 당하지 않았는가. 아무리 아우님이라도 그런 몸으로 소중걸이란 강적과 싸우기는 어렵다고 보았네. 아침에 아우님을 보면 어떻게든 대결 날짜를 미루는 등의 대책을 강구하자고 조를 참이었네. 그런데 괜한 노파심이었구먼. 역시 아우님이 맡겨달라고 호언장담했을 때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게야. 이 우형의 믿음이 부족했네. 사과함세.”
“아닙니다, 형님. 심려를 끼쳐드려서 제가 죄송합니다. 제 불찰입니다. 미리 알려드려야 했었는데.”
여상구가 껄껄 웃었다.
“이걸로 비긴 셈 치세나.”
진천도 미소를 머금었다.
여상구가 별안간 정색했다.
“그나저나 이 우형은 섭섭하기 이를 데 없구먼. 아우님이 권왕과 선연을 맺은 것은 참으로 환영할 만한 경사이나 그 어른과 형제결의까지 할 건 무어야. 내 동의나 허락을 받을 일이 아님을 아네만 그래도 못내 서운하다네. 이제 아우님에게 어마어마한 큰 형님이 생겼으니 이 우형은 찬밥 신세가 되겠구먼. 훌륭한 아우님을 얻었다고 희희낙락했다가 졸지에 처량한 처지가 될 줄이야. 그럼 그렇지, 내 주제에.”
진천은 의형을 달래지 않고 웃음기도 그대로 유지했다. 그의 불만과 한탄이 진심이 아님을 알고 있어서였다. 의형은 권왕과의 결연을 질시하기는커녕 누구보다 기뻐하고 있을 터였다. 진천은 자신에 대한 의형의 애정이 배타적인 소유욕이 아니라서 기꺼웠다.
위장술이 진천에게 통하지 않자 여상구가 겸연쩍은 웃음을 흘렸다.
“실망일세. 그래도 이 우형에게 위로 한마디쯤은 던져줄 줄 알았더니.”
“저와 형님의 관계에서 위로 같은 것은 필요가 없으리라고 봅니다만.”
여상구가 파안대소했다.
“크하하핫, 도저히 아우님을 당해낼 수 없구먼. 옆구리 찔러 절 받기는 깨끗이 포기함세. 어쨌거나 이제 기우도 사라지고 혀도 풀렸으니 어젯밤에 하다만 얘기나 마저 하세나. 무릇 저자의 코딱지만한 객잔이라도 숙수와 점소이들을 부리고 다루는 주인이 있는 법일세. 하물며 장차 무림의 중심으로 자리 잡을 우리 세평회(世平會)야 더 말할 것도 없네. 둘러가지 않음세. 아우님이 회주가 되어 우리를 이끌어 주게나. 일일이 물어보진 않았으나 다들 한마음일 거라 확신하네. 자고로 어떤 조직이든 우두머리가 성패를 좌우하는…….”
열변을 토해내던 여상구가 중간에 멈추고는 진천을 따라 고개를 좌로 돌렸다. 어둠 속에서 희뿌연 인영 하나가 유령처럼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