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98
제97화
진천과 여상구는 둘 다 일어서서 하수린을 맞았다.
“어서 오게나, 하남편봉. 헌데 새벽같이 여기는 어인 일인가? 보아하니 임 생각에 싱숭생숭 잠을 못 이룬 모양일세 그려.”
여상구의 짓궂은 인사에 하수린이 진천에게 시선을 둔 채 응수했다.
“제가 눈치 없이 두 형제분의 ‘오붓한’ 시간을 방해한 건 아니죠?”
“잘 아는구먼. 모처럼 아우님과 형제간의 진솔한 담소를 즐기던 참이었으니 내가 쌍수를 들고 자넬 환영할 거라 기대하지는 말게. 이 늙은이를 보러 예까지 나왔을 성싶지는 않고, 아우님을 보러 왔을 테지? 그런데 이걸 어쩐다. 나도 조금 전에 막 시작했으니 아우님을 자네에게 양보하고 싶지는 않은데. 차례를 기다리는 게 어떤가? 한 시진쯤이면…….”
하수린이 여상구의 말을 끊었다.
“그냥 같이 얘기하면 안 될까요?”
“우리 사이에 끼어들겠단 말인가? 자네가 그런 취향을 가지고 있는 줄은 미처 몰랐네.”
하수린이 한숨을 내쉬었다.
“죄송하지만 농담할 기분 아니에요, 여 각주님.”
여상구가 짐짓 눈을 부라렸다.
“농담이라니? 자네는 내 말이 농담으로 들리는가?”
하수린은 여상구의 질문을 못 들은 척하고 진천을 응시했다.
“어떻게 할 건가요?”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이었지만 진천은 하수린이 무얼 묻는 건지 알고 있었다. 그에게서 즉답이 나오지 않자 하수린이 말을 이었다.
“여 각주님 말씀처럼 간밤에 한 잠도 자지 못했어요. 아무래도 당신이 그자와 싸우는 건 무리일 것 같아요. 이미 모두들 앞에서 공언했기에 철회하기가 부담스러운 건 알지만 자존심을 내새우다가 탈이 나는 것보다는 나을 듯싶어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할 게요. 그자와의 대결을 취소하거나 최소한 연기하길 바라요. 당신은 그와 붙을 의무가 없어요. 그자의 일방적인 선언이었을 뿐이니까. 더군다나 나는 두 사람의 승부에 걸린 판돈이 아니에요. 힘 센 사내가 여자를 취한다는 개떡 같은 발상에는 절대로 동의할 수 없어요.”
진천이 침묵을 지키자 여상구가 입을 열었다.
“좀 헷갈리는구먼, 하남편봉. 아우님더러 그놈과의 일전을 거절하거나 미루라고 요구하는 까닭이 아우님을 걱정해서인가, 아니면 그 대결 자체의 성격에 대한 거부감 때문인가?”
하수린은 솔직했다.
“둘 다예요. 굳이 경중을 따지자면 전자가 더 중대한 이유예요. 진 공자의 안위 문제가 아니었다면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지도 않았을 거예요.”
진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는 그 동작이 가진 의미와 정반대의 내용이 흘러나왔다.
“나에게 맡겨두오, 하 소저.”
하수린의 가지런한 눈썹들이 두 번 구부러졌다. 이마에 두 마리 갈매기를 얹은 하수린이 폭포수를 쏟아내었다.
“왜 오기를 부리는 거죠? 강가에서 꽤 심한 부상을 당했잖아요? 오른팔을 제대로 들지도 못하고 걸음걸이도 위태로우면서. 내상도 악화되었다면서요? 그런 몸으로는 그자와 맞설 수 없어요. 당신을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솔직히 정상적인 상태라 해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자예요. 누구보다 당신 자신이 잘 알 거 아니에요? 가린의 평을 들었으니. 내가 보기에도 그자는 벽력도문의 개새끼보다 강하면 강했지 약체가 아니었어요. 그러니 괜한 고집 부리지 말고 대결을 취소해요. 꼭 최강 후기지수의 명예를 걸고 그자와 한 판 하고 싶으면 당신이 부상에서 완전히 회복된 후로 날짜를 다시 잡아요. 무례하고 거친 작자였지만 의외로 말이 통할지도 몰라요. 만약 그자가 끝끝내 그날 싸워야 한다고 억지를 쓰면 우리 모두가 달려들어 그를 제압하면 돼요. 그건 정당한 행사이니 거리낄 것 없어요.”
여상구가 감탄했다.
“하아, 신기하구먼. 어쩌면 내가 간밤에 내렸던 결론하고 한 치도 어긋나지 않은가 그려. 자네와 나는 일심동체……, 아니 한 몸은 아니니 이심전심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나는 자네의 의견에 백 번 찬성일세. 잠깐, 그게 아니지. 반 각 전까지는 그랬지만 지금은 다르다네.”
하수린이 여상구를 쏘아보았다.
“무슨 뜻이죠?”
“아우님의 결정에 따르겠다는 말일세. 아우님을 믿게나. 아우님에겐 다 대책이 있다네. 자네도 알다시피 아우님은 치기나 만용을 부리는 부류와는 거리가 구만리쯤 떨어진…….”
진천에게 시선을 돌린 하수린이 여상구의 말이 장광설로 흐르기 전에 자르고 들어갔다.
“대책이라는 게 뭐죠?”
뜸을 들이면 하수린이 질문공세를 퍼부을 게 빤한지라 진천이 바로 답을 주었다.
“그날까지는 몸이 다 나을 것 같소.”
“어떻게요?”
“내가 익힌 심공엔 체내의 잠력을 이용해 부상의 치유를 앞당기는 기능이 있소. 지난밤의 운공으로 효과가 있음을 확인했소. 그러니 내 상태에 관해서는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되오, 하 소저.”
“그런 비법이 있다는 걸 왜 미리 말하지 않았죠? 괜히 나 혼자 애를 태웠잖아요.”
“미안하오.”
진천이 싹싹하게 사과하자 하수린의 분기가 풀렸다.
바람직한 결말에 여상구가 흡족한 미소를 머금었다.
“자, 이제 우환거리가 사라졌으니 우리 의형제에게 회포를 풀 시간을 주는 게 어떤가, 아리따운 아가씨?”
하수린은 여상구의 축객령에 응하지 않았다.
“아직 덜 끝났어요. 설령 진 공자가 온전한 무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해도 그자와의 승부에서 우위를 점할 거란 보장은 없어요.”
“아우님이 그놈에게 질 리가 없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하지만 세상일이라는 게 다 생각대로 되는 건 아니잖아요.”
“맞는 말이긴 하지만 하나마나한 말이 아닌가. 어째 중요한 대결을 앞두고 초치는 소리로 들리는구먼.”
“제 말은 가능한 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그자와의 일전에 대비해야 한다는 뜻이에요. 조금이라도 승산을 높이기 위해.”
“자네가 아우님을 도울 수 있다는 말인가? 어떻게? 미인계로 그자의 심기를 어지럽혀…….”
“농담이라도 그런 말씀은 마세요. 아무리 여 각주님이라도 모욕적인 언사는 참지 않겠어요.”
“쩝, 내가 사과함세. 그런데 나는 아직도 자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잘 모르겠구먼.”
“간단해요. 저는 그자의 무공에 대해 진 공자에게 상세히 알려줄 참이에요. 가린은 언어적인 문제로 한계가 있으니 오직 저만이 구체적이고도 생생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어요. 지피지기면 백전불태(百戰不殆)라잖아요. 비등한 무위의 무인들끼리 격전을 치를 때는 아주 작은 차이가 승패와 생사를 가르는 법이에요.”
여상구가 반색했다.
“그놈의 약점을 파악했는가?”
“꼭 그런 건 아니에요.”
실망감을 감추지 않으며 여상구가 이마주름을 잡았다.
“그렇다면 별 소용이 없을 것 같은데. 그놈의 무력과 방식이야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괜히 아우님을 나에게서 가로채려고…….”
하수린의 눈썹이 갈매기를 만들었다. 그녀가 폭발하기 전에 진천이 상황을 수습했다.
“그렇잖아도 오늘 따로 시간을 내어 하 소저에게 그와의 일전에 대해 자세한 복기를 청하려 했소.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지금 들려주는 게 어떻소? 경청하리다.”
일그러졌던 하수린의 아미가 쭉 펴졌다.
“좋아요. 여 각주님한테는 별 소용없는 내용일 테니 가셔도 괜찮아요.”
여상구가 타협했다.
“아우님을 두고 내가 어딜 간단 말인가. 나도 아우님과 같이 귀를 기울일 터이니 구박하지 말게나.”
의형의 너스레에 진천은 고소를 지었다. 여상구의 변화는 약여했다. 그는 더 이상 괴팍하고 음산한 은둔고수가 아니었다. 구인결에서 화월도군과 치렀던 사투를 통해 심중의 응어리가 녹은 덕분인지 여유롭고 너그러운 성정으로 변모하고 있는 의형을 바라보며 진천은 눈빛에 기쁨을 담았다.
달빛이 호젓했다.
그러나 진천은 은은한 월광 아래 아름다운 여인과의 밀회를 즐기는 대신 후원의 연무장에서 가린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다. 공방전이라고 하지만 가린은 공격일변도였고 진천은 철저하게 방어에만 치중했다. 연무장 주변에 흐드러지게 핀 꽃들이 가린이 발산하는 맹렬한 투기에 몸살을 앓았다.
가린은 신이 나서 진천을 몰아붙였다. 지난 열흘 동안 그는 진천을 상대로 육십여 차례의 승리를 거두었다. 하루에 물경 여섯 번 꼴이었다.
진천은 비무 도중 가린의 손에 잡히면 패배하는 것으로 사전에 정해두었다. 진천이 절멸도를 쓰지 않기로 했기에 가린은 마음 놓고 그에게 달려들었다. 진천은 연무장을 벗어나지 않고 가린을 피해 다녔다.
가로세로가 공히 팔구 장에 달하는 연무장은 결코 작은 크기가 아니었지만 가린의 속도를 감당하기에는 터무니없이 좁았다. 팔영보를 극성으로 펼쳤음에도 진천은 번번이 가린에게 붙들리고 말았다.
진천은 가린의 무력이 두 달도 안 되는 사이에 유의미하게 상승했음을 알았다. 가린은 더 이상 멧돼지처럼 돌진만 하는 우격다짐의 전사가 아니었다. 힘과 속력은 그대로였지만 완급조절의 묘를 터득한 데다 필요할 시엔 변칙수법까지 구사할 줄 알았다.
짧은 기간 내에 일취월장한 가린을 보며 진천은 이러다간 수 년 내에 정식 승부에서 그에게 패할 지도 모르겠다는 위기감을 느꼈다. 나날이 정이 쌓이는 가린이 승리의 전리품으로 그의 몸을 먹어치울는지는 의문이었으나 그러지 않으리라 확신하기도 어려웠다. 가린에게 살인과 식인의 습성을 재발시키지 않기 위해서라도 가일층 분발해야 했다.
가린의 팔다리 사이를 바람처럼 빠져나가다가 결국 연무장 구석에 몰린 진천은 비환을 발했다. 팔영보의 최절초로 거의 붙들렸던 가린의 손아귀에서 탈출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진천은 퇴로를 미리 점한 그의 다른 손에 발목을 내주고 말았다. 그가 버티는 시간이 늘어나는 만큼 가린의 수읽기도 나날이 발전하고 있었다.
우우웅.
가린이 승리의 포효를 터뜨리며 그의 팔에 대롱대롱 매달린 진천을 돌바닥에 내려놓았다. 진천은 아예 벌러덩 드러누워 턱밑까지 차오른 숨을 골랐다. 주위에 가린 뿐이었기에 부담이 없었다.
처음 얼마간은 매일 나와서 그와 가린의 기묘한 비무를 관전하던 친인들이 반복되는 광경에 지쳐 하나둘 발길을 끊더니 어제부터는 마지막까지 남았던 차소영마저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진천은 조금도 서운하지 않았다. 그들이 와옥에 틀어박힌 까닭이 소중걸과의 결전 준비에 무관심해서가 아니라 내상회복에 전력을 쏟기 위해서임을 알고 있어서였다.
“아타의 숲이 그립지 않나, 가린?”
반달을 올려다보며 진천이 물었다. 진천 곁에 털썩 주저앉았던 가린도 천공으로 시선을 올렸다.
“가린은, 여기 산다.”
동문서답이지만 진천은 우문현답으로 받아들였다. 가린은 과거에 연연해하지 않고 미래를 걱정하지도 않았다. 그는 항상 현재에 살았다. 장소도 마찬가지였다. 어디에 있든 그는 그 자리에 충실했다. 진천은 가린의 그런 점을 배워야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가린과 달리 감상에 젖기 쉬운 인간인지라 진천은 가끔씩 창인이 사무치게 그리웠다. 기경이 도처에 널린 중원에 비하면 삭막하기 이를 데 없는 땅이지만 진천은 창인 지하미로의 퀴퀴한 흙냄새까지도 사랑했다. 창인은 그에게 고향이자 이상향이었다. 서로 다른 지역에서 온 각기다양한 사람들이 난상토론 끝에 합의한 규약을 지키며 화목하게 어울려 살아가는 곳.
진천은 드넓은 중원에도 창인과 같은 평화가 펼쳐지기를 기원했다. 그런 세상을 만드는 대업에 힘닿는 데까지 기여하고 싶었다.
진천은 몸을 일으켰다. 원대한 과업을 이루려면 목전의 과제부터 해결해나가야 했다.
“충분히 쉬었으니 다시 시작해 볼까, 가린?”
가린은 튕기듯 일어서며 굵고 기다란 팔을 활짝 벌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의 일 장 전면에 선 진천은 심호흡을 했다. 보름 앞으로 다가온 소중걸과의 대결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일각은 연무장 안에서 가린에게 걸리지 않을 정도로 팔영보의 경지를 한 단계 더 끌어올려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