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99
제98화
소중걸과의 대결이 열흘 앞으로 다가온 날 오전 기다리던 이가 삼보장을 찾아왔다.
진천은 그를 부르는 기를 따라 죽림 속으로 들어갔다. 자그마한 공터에 이르니 짐작대로 권왕이 뾰족한 바위 끝에 가랑이를 벌리고 앉아 삐죽 튀어나온 코털을 뽑고 있었다. 진천은 그의 앞에 섰다. 강가 인근의 산줄기에서 헤어진 지 정확히 이십일 만의 재회였다.
“오셨습니까, 큰 형님.”
“오냐.”
“안으로 드시지 않고요? 다들 뵙기를 앙망하고 있습니다.”
“번거롭다. 내가 온 걸 아이들에게 알리지 말거라.”
진천은 권왕의 기분이 썩 좋은 상태가 아님을 알았다.
“알겠습니다.”
권왕이 양 손을 들어 귓구멍을 막는 시늉을 했다.
“왜 이렇게 시끄러운 게냐?”
“지하연무장을 건설하고 있습니다. 해가 질 때까지 공사 소음이 계속될 텐데, 다른 곳으로 모실까요?”
“됐다. 귀찮구나.”
심드렁하게 대꾸하는 권왕을 비스듬히 올려다보며 진천은 본론을 꺼냈다.
“가신 일은 어떻게 되셨는지요?”
권왕이 백미를 실그러뜨렸다.
“다 텄다. 반나절 내내 구슬렸는데도 콧방귀만 뀌더구나, 그 늙은이. 아, 물론 진짜로 콧방귀를 꼈다는 말은 아니다. 비유적인 표현일 뿐이니 행여나 나중에 그 늙은이를 만나더라도 사실 여부를 확인하려 들지는 말거라, 아우야.”
“물론입니다, 큰 형님.”
“그럭저럭 일 갑자 가까이 이어온 우정인데 그렇게 매몰차게 거절하다니, 그 늙은이. 이게 다 네 녀석 탓이다. 네가 부추기지 않았다면 내가 구태여 그 검에만 미친 늙은이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러 수천리 길을 달려갔을 리가 없으니 말이다.”
진천은 고소를 지었다. 혼자 흥분해서는 마도 타도와 파사현정의 대의에 검왕을 동참시켜야겠다고 나선 이는 권왕 자신이었다. 그의 잘못이라면 권왕에게 대륙 전체를 아우르는 형세판단을 들려준 것밖에 없었다.
다소 억울했지만 진천은 심정을 내색하지 않고 담담하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큰 형님.”
약간 찔렸는지 권왕이 뒷머리를 긁었다.
“뭐, 알면 됐느니라. 이미 끝난 일이니 이제 와서 책임소재를 따진들 무슨 소용이야. 내, 너그러이 넘어가마.”
“감사합니다.”
권왕이 바위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그러고는 그가 털썩 주저앉자 진천도 맞은편에 좌정했다.
“네게 멋진 선물을 주고 싶었다만 빈손으로 와서 유감이다. 소 형이 그리 나올 줄은 몰랐구나.”
검왕에 대한 호칭을 ‘그 늙은이’에서 ‘소 형’으로 바꾼 권왕의 변덕에 진천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우제를 챙기시는 큰 형님의 마음만으로도 황송할 따름입니다.”
“뭘, 황송씩이나. 거추장스러운 예 따윈 삼가라니까. 그나저나 오면서 곰곰이 되짚어보니 너는 이미 내가 실패할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더구나. 그렇지 않으냐?”
“…….”
“잔머리 굴리지 말고 이실직고해라, 아우야.”
“가능성이 크지는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강호에 알려진 그분의 성정과 큰 형님께서 알려주신 바에 따르면…….”
권왕이 진천의 말을 잘랐다.
“결국 네 녀석은 내가 퇴짜를 맞을 거라 예상을 했으면서도 오천 리가 넘는 장도를 헛걸음하게 만들었다는 뜻이구나. 괘씸한지고. 어째서 말리지 않았더냐? 너 때문에 내가 그 늙은이에게 온갖 사탕발림을 하며 굽실거리는 추태를 부렸잖으냐.”
진천은 권왕의 원망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헷갈렸다. 후자일 듯싶지만 속단하긴 어려웠다. 두 무왕 사이엔 그가 알지 못하는 경쟁심이나 알력이 있을 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권왕이 이번 만남에서 자존심을 상했을 수도 있었다.
진천은 권왕을 직시했다. 권왕의 일자 눈에 가려진 동공 깊숙이 반짝이는 기광을 본 진천은 그의 비위를 맞추는 대신 항변하기로 마음먹었다.
“제가 어찌 감히 큰 형님의 결정에 토를 달 수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내심 기대하는 바가 없지도 않았습니다. 가능성은 낮다고 보았지만 전무한 것은 아니었으니까요. 만약 큰 형님께서 검왕 어르신을 설득할 수만 있다면 그야말로 막강한 원군을 얻은 셈이었습니다. 그리 되면 당장 마련과 전면전을 벌이기는 힘들지라도 차후 일어날 그들의 중립지대 침탈은 막아낼 수 있을 거라 보았습니다. 큰 형님과 검왕 어르신께서 마왕과 장왕을 견제해 주시면 저와 제 동료들이…….”
권왕이 손을 내저었다.
“허허, 그 녀석 여전히 청산유수로세. 그쯤이면 됐다. 요설이 아님을 안다만 네 달변을 듣고 있으면 워낙 그럴듯해 홀릴 지경이구나. 아무튼 소 형을 끌어들이는 건 물 건너갔으니…….”
말을 하다 말고 권왕이 돌연 좌수를 뻗어 진천의 어깨를 공격했다. 삼 척의 난쟁이인지라 팔도 예닐곱 살 아이처럼 짧았으나 강력한 기운이 서려있었기에 권왕의 수도는 곧장 진천의 몸에 닿았다.
진천이 반사적으로 상체를 젖히는 동시에 땅을 박차고 뒤로 튀어 오르자 권왕이 지체 없이 쌍장을 휘둘렀다. 여섯 줄기의 강풍이 허공에 뜬 진천의 동체를 그물처럼 덮쳤다. 진천은 팔영보 상의 화연을 발해 그물을 빠져나갔다. 비술을 발한 진천이 좀 전에 자신이 걸터앉아있던 뾰족 바위에 오르자 권왕이 손을 거두었다.
“내려오너라.”
진천은 순순히 권왕의 지시에 응했다. 불과 삼 보 떨어진 곳에 선 진천을 응시하며 권왕이 일자 눈을 게슴츠레 떴다.
“아까 대나무를 헤치고 나올 때부터 뭔가 신경에 거슬렸는데 역시 부상에서 완쾌된 것이었구나. 어찌 된 게냐? 스무 날로 회복할 수 있는 상처가 아니었거늘. 대라신선이 찾아오기라도 했더냐? 아니면 근골까지 아물게 하는 특별한 금창약이라도 발랐더냐?”
진천은 권왕에게 생환결에 대해 알려주었다.
진천에게서 소중걸에 관해서 들은 권왕이 물었다.
“그러니까 그놈을 상대하려고 응급처방을 내렸단 말이지? 아까운 수명까지 깎아가며.”
소중걸만이 아니라 마령 문가와 외가의 도객들에 대한 대비도 겸한 결단이었으나 진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진천을 지그시 바라보며 권왕이 질문을 이었다.
“이길 자신은 있느냐?”
“저로서는 그저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물에 물 탄 듯 싱거운 소리는 그만 두고 탁 까놓고 얘기해 봐라. 이길 것 같으냐?”
“친인들에게서 그의 무위가 전날 저와 대등하게 겨루었던 벽력도문의 곽건이란 자와 차이가 없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 붙어보기 전에는 결과를 예단할 수 없습니다.”
“예단이 아니라 예측이잖으냐? 너는 나처럼 닥쳐야 부딪치는 족속이 아니니 분명 그놈을 물리칠 방도를 머릿속에 품고 있을 테지?”
“나름대로 구상한 작전은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더냐? 아니다, 됐다. 그냥 알아서 하려무나. 그보다, 아우야.”
“네, 형님.”
“자고로 제 여인을 남에게 빼앗기는 사내만큼 한심한 종자는 없는 법이다.”
“…….”
“어째서 대꾸가 없느냐? 내 말이 틀렸느냐?”
“아닙니다.”
“너는 반드시 그 소중걸인지 소대가린지 하는 놈에게 이겨야 하느니라.”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허어, 이 녀석이 또.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소대가리를 박살내야 한다. 알겠느냐?”
“……?”
“하남 무림 팔정파의 여아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이 노형을 위해서 말이다.”
“……!”
“그 소대가리는 틀림없이 막가의 후인일 게다. 나, 태진광의 아우가 막가놈의 제자 따위에게 져서야 말이 안 되지. 막가가 거들먹거리는 꼴은 죽어도 보기 싫다. 그러니 너는 기필코 소대가리를 팍팍 구워삶아야 하느니라. 흠, 비유가 이상했나? 내 말은 딴소리를 못하도록 일방적으로 깨뜨려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겠다고 약속하려무나.”
진천은 난감했다. 판단컨대 소중걸은 그의 하수가 아니었다. 비등하거나 약간이라도 윗길의 무력을 가진 이를 상대로 일방적인 승리를 장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틀에 박힌 표현이지만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이 최선이었다. 하지만 권왕은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을 터였다.
진천이 대답에 뜸을 들이자 권왕이 혀를 찼다.
“쯧쯧, 고지식하기는. 그냥 ‘무조건 이길 테니 나만 믿어라’하고 큰소리치면 될 것을. 싸움에 있어 자신감이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 줄 아느냐? 게다가 말이 씨가 되는 법이다. 이긴다고 계속 떠들면 정말로 승리의 과실을 따먹을 수 있음이야.”
진천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기겠습니다, 큰 형님.”
권왕의 오므라든 입술이 활짝 벌어지며 호탕한 웃음을 토해내었다.
“우하하하, 그래야지. 모름지기 무림에 몸을 담은 사내라면 그만한 기백이 있어야 하는 게야. 필승의 의지만큼 강력한 무기도 없느니라.”
“명심하겠습니다.”
만면에 흡족한 미소를 담은 권왕이 갑자기 목소리를 깔았다.
“그런데 그놈하고 언제 싸운다고, 아우야?”
“열흘 남았습니다, 큰 형님.”
권왕이 잡초처럼 자란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흠, 그렇다면 그 동안 나하고 특훈을 하자꾸나. 기간이 너무 짧으니 별 도움은 안 될 성싶다만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단 나을 터. 나도 십일 동안 뒹굴뒹굴 지내기보단 너를 굴리며 보내는 게 더 재미날 테고. 어떠냐?”
“분부에 따르겠습니다.”
진천은 크게 고무되었다. 기실 권왕이 소중걸과의 결전 이전에 삼보장을 방문하면 팔영보의 진전을 점검하기 위해 가르침을 청할 참이었다. 하지만 권왕이 그의 부탁을 들어줄는지는 의문이었다. 그런데 그가 먼저 제안을 하니 진천으로서는 횡재한 느낌이었다.
진천과 권왕은 주안에서 남동으로 일백오십 리 떨어진 봉천으로 향했다.
두 사람은 여상구가 소유한 도화각 인근의 장원에서 열흘 간 비무수련을 할 계획이었다. 삼보장을 두고 굳이 거기까지 가는 까닭은 권왕이 중인환시리에 진천과 치고받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다고 해서였다. 권왕이 주위의 이목에서 차단된 장소를 원하자 진천은 의형의 장원을 떠올렸다.
청와옥에 들어간 진천은 여상구에게 사정을 알렸다. 여상구는 진천의 요청을 흔쾌히 수락했다. 그에게 뒷일을 맡긴 진천은 죽림에서 기다리고 있던 권왕과 함께 바로 출발했다.
주안과 봉천 사이에 뚫린 평탄한 대로들을 두고 진천과 권왕은 인적이 없는 산중으로 이동했다. 많이 둘러가는 길이었으나 쉬지 않고 경공을 펼친 덕분에 노소는 삼보장을 떠난 지 한 시진도 지나지 않아 봉천에 도착했다.
도시 중앙에 봉우리처럼 우뚝 솟은 삼십삼 층의 도화각을 길잡이로 삼은 진천은 헤매지 않고 장원을 찾아갔다. 닫힌 대문 대신 담장을 넘자 이백 평가량의 마당과 소담한 단층와옥이 두 사람을 맞이했다. 진천은 좌측의 화원으로 갔다. 그가 꽃밭 가장자리의 우물에 뛰어들자 뒤를 따르던 권왕이 눈살을 찌푸렸다.
진천이 우물 벽의 고리를 잡아당기자 바닥이 갈라지며 통로가 나왔다. 진천이 앞서가고 웬 두더지소굴이냐며 구시렁거리면서도 권왕이 그를 쫓았다. 가파른 계단을 한참 내려가니 철문이 보였다. 진천은 두꺼운 철문을 밀었다. 족히 오백 평은 됨직한 넉넉한 넓이에 지하임에도 천장에 알알이 박힌 야명주들 덕분에 대낮처럼 밝은 연무장을 본 권왕은 비로소 투덜거림을 멈추고 만족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권왕과 오륙 장을 격하고 선 진천은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가 ‘가르침’과 ‘배움’ 등등을 운운하는 정중한 인사말을 내뱉자 불필요한 격식은 집어치우라며 권왕이 다짜고짜 수강(手鋼)을 쏘아냈다. 권왕의 손끝에서 뻗어온 강선(鋼線)을 회선보로 흘려낸 진천이 그에게 쇄도함으로써 양인의 비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진천은 백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귀중한 경험을 하리란 것을 예감했지만 그에게 얼마나 커다란 행운이 주어졌는지는 아직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