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ver Temptation of the Iceworld RAW novel - Chapter 25
24장. 청혼
현수는 쉬지 않고 진동하는 휴대폰을 바라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택시를 타고 오는 내내 울리던 휴대폰이 수진 언니의 아파트로 가는 엘리베이터에 탄 지금까지도 쉴 새 없이 울리고 있었다. 물론 그일 것이다. 레스토랑을 나온 현수는 곧장 지나는 택시를 불러 세웠고, 큰오빠의 집주소를 불렀다. 그녀가 택시를 탄 얼마 후부터 그녀의 휴대폰이 불이 나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휴대폰이시끄럽게 울려대자 운전기사 아저씨에게 미안해 진동으로 바꿔버렸을 정도였다. 아예 휴대폰을 꺼버리기도 했지만 이내 궁금함에 못 이겨 다시 켜고 말았다.
딩동.
벨이 울리자마자 안쪽에서 급히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만삭의 몸으로 참 재빠르게도 움직인다.
“어떻게 됐어?”
문을 열자마자 대뜸 묻는 수진의 질문에 현수는 입술을 삐죽였다.
“만약 그와 더 나빠지면 정말 그땐 언니 안 봐.”
“알았어. 우선 들어와. 내가 시킨 대로 했어?”
안으로 들어간 현수는 코트를 벗자마자 쏟아지는 수진의 질문공세에 답을 해야 했다.
“했지. 그 증거가 이거야.”
현수는 ‘부재중 전화 40’ 이라고 찍힌 휴대폰을 내밀었다.
“우와! 이 남자 열, 무지 많이 받았네.”
수진의 감탄에도 현수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젠 어떡해?”
“걱정 마. 아가씨. 지금은 이래도 곧 정신 차릴 거야. 우선 전화기는 꺼놓고.”
현수가 말릴 새도 없이 그녀의 전화기가 꺼졌다. 현수의 아쉬워하는 눈빛에 수진은 힘을 주어 당부했다.
“켜지 마. 켜면 궁금하고, 받고 싶을 거야. 그러면 끝이야. 지금까지의 공이 다 허물어진다고. 그러니 내일까지만 참아. 아니, 며칠만 참아. 조금만 더 고삐를 당기다가 슬슬 풀어주는 거야. 그럼 그 남잔 아가씨 말이라면 저 하늘의 달이라도 따다 줄 걸?”
“난 그런 거 필요 없어.”
“없기는 뭐가 없어! 넌 그렇게 당하고도 아직도 그래?”
현수는 인상을 쓰며 수진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무슨 소리야? 뭘 당해? 물론 그 남자가 귀국하면서 나한테 연락 한 번 없었던 건 너무 하다고 생각해. 하지만 오늘 보니까, 그 남자가 변심한 것도 아니었더. 아직도 날 여전히 원했다고. 푼타에서 헤어지던 그때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단 말이야.”
갑자기 수진이 이상하다는 듯 현수를 바라보았다.
“아무 일도 없었어?”
“무슨 일? 도대체 무슨 일을 말하는 거야?”
현수의 답답해하는 표정에 수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잘못 알았나? 아닌데, 그럴 리가 없는데….그럼, 극지연구소의 그 사람이 한 말은 뭐야?”
“무슨 말? 언니가 극지연구소 사람을 어떻게 알아?”
“응?아….사실은 내가 너한테서 그 남자가 변심했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듣고 그 남자가 근무하는 극지연구소로 전화를 해봤지?”
“헉! 미쳤어? 전해해서 그에 대해 물었단 말이야?”
현수의 경악하는 표정에 수진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설마, 그렇게 대놓고 묻기야 했겠니? 잡지사 기자인 척하고 이번에 귀국한 월동대와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했었지.”
순간, 안도의 한숨을 쉰 현수가 이번에는 아주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수진을 바라보았다.
“그랬더니?”
“홍보팀 직원이라는 남자하고 통화를 했는데, 그 사람이 진영이도 알고, 강태훈에 대해서도 잘 알더라. 게다가 금상첨화로 입까지 싸더라고. 묻는 것마다 다 말해주고, 심지어는 묻지도 않은 사실까지 자진해서 알려주던데?”
현수는 서서히 눈살을 찌푸렸다.
“뭘 알려줬는데?”
수진은 어깨를 으쓱 들어올렸다.
“그 남자가 결혼할 거라는 거.”
현수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뭐? 누가? 강태훈, 그가? 누구하고?”
수진은 흥분하는 현수를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쿡쿡쿡. 누군 누구야, 바로 너지.”
현수는 입을 딱 벌렸다. 나? 그가 결혼할 상대가 나라고? 아, 물론 당연히 그와 결혼할 사람은 나지. 하지만 아직 그와 구체적으로 결혼에 대해 이야기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극지연구소 홍보실 직원이 그런 말을 했단 말인가? 아직 당사자도 모르는 사실을!
“웃기지 않아? 그 남자와 결혼할 신부가 너인데도 넌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남자가 변심을 했네, 안했네, 죽을상을 지었잖아? 거기다가 신부 측 가족들도 까맣게 모르는 결혼이 말이 되니?”
“아마….”
현수는 수진의 이죽거림에 겨우 입을 열었다.
“아마, 우리가 사귄다는 소문을 듣고 그 홍보실 남자가 그냥 어림짐작으로….”
“그랬다면 내가 이렇게 확신을 하겠어? 그 남자 말이 이미 연구소 직원들은 다 알고 있다고 하더라. 얼마 전에 자기가 직접 그 남자한테 물었다던데? 국수, 언제 먹느냐고.”
현수는 굳은 얼굴로 수진을 바라보았다.
“그랬더니, 그 남자가 뭐라고 했대?”
“조만간이라고 했단다. 네가 그 남자의 변심을 걱정하고 있을 때에 그 남자는 너와의 결혼사실을 장담하고 있었던 거지. 그래놓고 너한테는 엄청나게 무심했고. 물론 뭔가 계획이 있었겠지. 내 짐작에는 오늘 그 계획을 실천하는 게 아닐까? 했는데, 네 말을 들어보니 아닌 것 같네. 무슨 깜짝 파티라도 열려나보다 했더니…..”
실망이라는 듯 줄어드는 수진의 말이 현수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 남자는 이미 그녀와의 결혼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남극에서 출발해 한국에 들어온 지금까지도 그 남자는 여전히 그녀와의 결혼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오늘 밤, 그의 적극적인 행동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그런데 그가 왜 귀국사실을 알리지 않았을까? 또, 오늘 밤, 처음 그와 눈이 마주쳤을 때, 왜 그는 내게 애써 냉담한 척 굴었을까? 게다가 귀국한 이후로 그는 단 한번도 연락을 하지 않았다. 왜? 무슨 의도로?
“내 생각에는…..”
현수는 태연하게 입을 여는 수진을 바라보았다.
“그 남자가 널 깜짝 놀래 줄 생각이 아니었나 해. 그렇지 않고서야 그 남자의 행동이 이해가 안 가. 그동안 네 얘길 들어보면 그 남자도 꽤 적극적으로 사랑표현을 하는 것 같던데… 내 말이 맞지?”
끄덕. 현수는 간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남잔 항상 적극적이었어. 단 한 번도 그녀에게 무심한 적이 없었지. 하물며 남극에서 처음 만나 그녀를 못마땅해 하던 그때도 그는 그녀에게 무관심한 적이 없었다.
“잘 생각해봐. 오늘 아무런 낌새도 못 느꼈어? 혹시, 모르지. 오늘 너한테 청혼을 하려고 했는지도…..”
순간, 현수의 얼굴이 하얗게 얼어버렸다. 무언가 짚이는 것이 있었다. 갑자기 눈앞의 안개가 서서히 걷히는 느낌이었다. 얼기설기 엉켜있던 실타래가 점점 풀리고 있었다. 그럼 그때 그 문구가….
엘리베이터 한쪽 벽을 가득 채운 포스터의 문구가 떠올랐다. 오늘 모임이 있었던 건물의 엘리베이터였다. 스카이라운지…..월동대 모임도 스카이라운지에서 하지 않았던가, 스카이라운지에 있는 카페를 온전히 빌렸다고…..그렇다면 거기가 바로 엘리베이터 벽에 붙여져 있던 포스터의 장소였다. 러브메이커……강태훈, 그가 그녀에게 청혼을 하려했던 것이다. 바로 오늘밤!
현수는 이불 위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모든 신경은 저 밖, 거실의 탁자 위에 있는 휴대폰에 가 있었다. 엎드려도 보고 양도 한 천 마리쯤 세어보았지만 도자히 잠이 오지 않았다. 벌떡 몸을 일으킨 현수는 벽에 붙은 스위치를 눌렀다. 순간 환하게 쏟아지는 불빛에 눈을 감았지만 곧 눈을 가늘게 뜨고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열한 시 오십오 분……자정이 다 되어 가는 시간이었다.
청혼…..그녀는 이미 확신하고 있었다. 오늘 밤, 그녀는 강태훈이 꽤 오랫동안 공을 들여 준비했음이 분명한 이벤트를 망쳤다. 그것이 사랑고백이었든, 청혼이었든 상관없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그녀가 천하의 강태훈이 자신의 눈앞에서 사랑을 고백할 기회를 빼앗아버린 것이다. 그것도 너무도 맥없이.
혼란스러웠다. 그가 그 대단한 자심감으로 그녀를 며칠 동안이나 방치하고 무시했다는 생각에 화가 났고, 하지만 기특하게도 이벤트까지 꾸몄다는 것에 한편으로 실없은 웃음이 나기도 했다. 수진 언니의 주장대로라면 이벤트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남자가 그녀에게 가지는 자심감이 더 문제라는 것이다. 여자가 남자에게 은근한 긴장감도 주고, ‘혹시 저 여자가 나의 사랑을 받아줄까’ 하는 작은 두려움도 가져야하는데 이건 뭐, 완전히 ‘윤현수는 내 여자다’ 라는 푯말을 극지연구소 정문 앞에 세워둔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그것도 당사자에게는 한 마디 의논도 없이. 그러니 수진의 주장은 명료했다.
‘튕겨!’
당분간은 튕기라는 것, 이미 있을 지도 몰랐던 이벤트는 물건너갔으니 지금이라도 그 남자에게 긴장감을 주라는 것이 수진의 주장이었다.
현수는 ‘후우’하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젠 그도 집으로 돌아가 잠이 들었을 것이다. 지금 휴대폰의 전원을 켠다고 해서 그가 전화를 할 리도 없을 테고 40통 이후로 걸려온 전화가 몇 통인지만 확인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문자라도 보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현수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방의 불을 껐다. 그리고 소리 없이 방문을 열었다. 수진은 이미 잠이 들었는지 거실은 고요했다. 살금살금 거실을 가로질러 탁자로 다가간 현수는 여전히 조용한 수진의 방문은 흘깃 확인하고 자신의 휴대폰을 들어올렸다. 그런 다음 곧장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방으로 들어가 조용히 문을 닫고 난 후에야 현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불 위에 철퍼덕 주저앉은 현수는 급한 손길로 휴대폰의 전원버튼을 길게 눌렀다.
부재중 41통.
‘에게? 겨우 한 통 더 왔네?’
마지막으로 전화를 확인했던 시간이 저녁 여덟 시쯤이었으니까 근 네 시간 동안 겨우 한 통이 더 온 것이었다. 화가 났을까? 그래서 다시는 그녀를 보지 않으려 결심했을까? 현수는 궁금해 미칠 것 같았다. 차라리 부재중 전화가 한 50통쯤 와있었다면 나았으리라. 이건 네 시간만에 딱 한 통이라니. 어느새 그녀의 손가락은 통화버튼에 가있었다.
‘전화를 해볼까? 그냥 그가 잘 있는지 목소리만 득고 끊어버리지 뭐.’
아무래도 네 시간동안 딱 한 통이라니 이상했다. 게다가 그렇게 쏟아지듯 울려대던 전화가 아니었는가 말이다. 그래. 잘 있는지 목소리만 듣고 바로 끊는 거야. 절대 대화를 해서도 안 되고, 절대 그의 말을 들어서도 안 돼. 수진 언니의 말대로라면 며칠 내로 그가 찾아와 무릎을 꿇을 거라지 않는가. 그럼 자연스럽게 그녀를 껴안으며 진한 사랑을 고백할 테고. 어쩌면 오늘밤 했을지도 모를 멋진 청혼을 할지도 모른다. 그래. 지금은 그의 목소리만 듣는 거야.
현수는 굳게 결심하고 엄지손가락으로 통화버튼을 길게 눌렀다. 그리고 떨리는 손길로 수화기를 귓가로 가져갔다. 단 두번의 신호음 만에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현수는 그의 낮게 울리는 목소리를 듣자마자 전화를 끊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거기 어디야? 할 말이 있어.]할 말?
“……무슨 말이요?”
[그건 만나서 해. 거기 어디야?]
현수는 그의 위압적인 목소리에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 남잔 항상 이런 식이야. 자기가 잘못 해놓고 항상 당당하지.
“지금 이야기해요.”
[윤현수!]
“왜요? 뭐가 그렇게 급해요? 새삼스럽게 날 그렇게 보고 싶어 하는 이유가 뭐예요? 남극을 떠날 때도 그렇게 급했어요? 아니면 서울을 도착한 일주일 동안 뭐 다른 볼일이라도 보다가 갑자기 내가 생각나기라도 했어요?”
[………만나. 만나서 설명할 테니까. 내가 지금 그리로 갈 테니까…..]
“뭘 설명해요? 귀국이 결정되었는데도 미처 내게 알리지 못했다는 변명? 아니면, 귀국하고도 나한테 연락을 하지 않았던 변명이에요? 그도 아니면…..오늘 밤, 계획했던 뭔가에 대한 설명이에요?”
현수는 스스로에게 놀라는 중이었다. 자신이 이렇게 말을 잘 할 수가 있다는 사실에 그녀는 무척이나 놀라는 중이었다. 그것도 강태훈을 상대로. 지금 그녀는 자만심 강한 강태훈을 구석으로 몰아대고 있는 중이었다.
[…….이미 알고 있었군.] “그래요. 정확하지는 않지만 짐작은 했죠.”강태훈. 날 그렇게 우습게보더니 어때? 당신보다 내가 한수 더 위지?
[그런데도 그냥 가?]응? 현수는 갑자기 당황스러워졌다. 그의 목소리가 조금 전보다 한 옥타브는 가라앉았다.
[내가 뭘 꾸미고 있는지 알면서도 가버렸다는 것은 …..거절인가?]에? 현수는 순간 벙하게 입을 벌렸다. 일이 이상하게 돌아간다.
“그건……”
[거절인가?]
이제 현수는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길이 자연스럽게 수진이 자고 있는 방 쪽으로 향했다. 언니를 당장 깨워서 이럴 땐 뭐라고 해야 하는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에게 그런 시간을 주지 않았다.
[거절이다로 한 번은 만나야 하지 않나? 어디야?] 그녀는 어느새 자신이 있는 큰오빠 집의 주소를 알려주고 있었다. 그리고 전화는 끊어졌다. 현수는 끊어진 전화기를 멍하니 바라보며 이 일을 어찌해야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잠든 수진 언니를 깨워야 하나? 아니, 아니. 언니에게 욕만 먹을 것이다. 분명 나가지도 못하게 할 게 분명했다. 그럼 상황만 더 악화시키는 것이 될 것이다. 그는 지금 그녀가 그를 거절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말이다!
제길. 그냥 언니의 말대로 잠이나 잘 걸.
현수는 수진에게서 빌려 입은 트레이닝복 위에 코트를 걸치고 살그머니 방문을 열었다. 조금 전 그가 아파트 입구로 들어왔다는 전화를 받고 더욱 많은 고민과 갈등을 했지만 결국 잠깐이라도 만나봐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물론 수진 언니는 모르게.
어두운 거실로 나간 현수는 살금살금 걸음을 옮겨 현관으로 향했다.
탁.
“헉!”
현수는 수진의 방문을 살피며 걷가 눈앞에 놓인 커다란 화분에 부딪쳐 놀란 숨을 들이켰다. 흔들리는 화분을 재빨리 붙잡고 수진의 방을 살폈다. 다행히 소리를 못 들었는지 수진의 방문은 굳게 닫힌 그대로였다. 현수는 가슴을 쓸어내리고 다시 현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도대체 내가 지금 뭘 하는 건지. 완전 로미오와 줄리엣이 따로 없었다. 그래도 다 그녀가 잘 되라고 하는 것이니 수진 언니를 탓할 수도 없었다. 사랑에 있어서 수진만큼 자신의 감정에 흔들림이 없고 확고하며 자신의 사랑을 이루려 노력하는 여자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수진이 스스로의 사랑을 인정하고 그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얼마나 인내하고 노력했는지 현수는 알고 있었다. 더물어 얼마나 힘들어했는지도.
현수는 아파트 입구로 천천히 걸어 나왔다. 밖은 온통 하얀색 천지였다. 아직도 커다란 눈송이가 까만 밤하늘을 온통 휘젓고 있었다. 초저녁부터 날이 흐려지더니 결국에는 함박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현수는 아파트 입구에 서서 잠시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송이를 바라보았다. 문득 남극의 눈보라가 떠올랐다. 블리자드가 휘몰아칠 때면 온 천지가 바람과 눈으로 덮여 한치 앞을 분간하기도 힘이 들었었다. 이제는 지나간 추억이 되어버렸지만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꼭 다시 가고픈 곳이었다.
그녀는 포근한 눈송이에서 눈길을 돌려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이미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왔을 테니 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엄마야!”
그녀는 놀란 비명을 빽 질렀다. 그리고 그녀는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난 그에게 손목을 잡혀 다짜고짜 주차장으로 끌려가기 시작했다.
“잠깐만요. 태훈 씨.”
현수는 무조건 그녀를 끌고 가는 그에게서 팔을 빼려고 했지만 그의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 그의 손에 끌려가다시피 하며 현수는 점점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이 남잔 매운 맛을 봐야 해!
“이거 좀 놔 봐요. 놓고 얘기해요.”
그녀가 다시 한 번 강하게 말을 하며 손을 잡아 빼려는 찰나 그가 걸음을 멈추었다.
“타.”
검은색 RV차량 앞에 서서 문을 여는 그를 바라보며 현수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젠 정말 매번 번복되는 이런 식의 그의 독단에 화가 날 지경이었다.
“싫어요.”
“뭐?”
“싫다고요. 할 말 있으면 여기서 해요.”
태훈은 입술을 꼭 다물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요리조리 도망만 잘 다니는 줄 알았더니 고집까지. 하긴 반항하는 것도 그녀의 주특기였지.
“우선 타. 내 아파트로 가서 이야기 해.”
“안 돼요. 새언니한테 말도 않고 나왔어요. 들어가 봐야 해요.”
“젠장.”
자신의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헝클어트리며 그가 고개를 들어 한동안 검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차가운 눈송이가 그의 반듯한 얼굴 위로 쏟아져 내리는 것이 보였다. 현수는 슬며시 옷깃을 여미며 반 발짝 그에게서 멀어졌다. 그가 다시 그녀를 향해 고개를 홱 돌렸다. 마치 화가 나 미치겠다는 듯, 자신의 화를 억누르려는 듯.
“좋아. 멀리 안 갈거야. 우선 타.”
현수는 순간 그를 믿어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했지만 설마 그가 다른 짓은 못할 거라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차에 올라타자 잡고 있던 차문을 부서질 듯 닫아버리고 운전석으로 돌아가는 그의 모습은 화가 나있었다.
그러라지. 나도 좋은 기분은 아니니까.
현수는 그와 마찬가지로 입술을 꾹 다물고 그가 차를 몰아 호수공원 근처로 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깊은 밤에 눈까지 내려 한적한 공원은 하얀 남극의 어느 공간을 떠올리게 했다. 공원의 주차장에 차를 세운 그가 그녀를 향해 고개를 홱 돌렸다.
“지금 나하고 장난하는 건가?”
장난이라는 단어에 현수는 퍼뜩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장난이라니? 장난이라니!
“아뇨. 당신은요?”
“제기랄. 내가 지금 장난하는 것 같아 보여?”
“그럼 난? 난 장난하는 것처럼 보여요?”
그의 높아지는 목소리에 그녀의 언성도 높아졌다.
“그럼 오늘 밤, 네 행동은 뭐야? 한국으로 돌아오면 당장이라도 결혼할 것처럼 해놓고 오늘 밤 내가 청혼을 할 줄 알면서도 가버려?”
기가 막혔다. 현수는 그의 억지에 대꾸할 말조차 잊어버렸다. 어찌나 당당하게 큰소리를 쳐대는지 오히려 그녀가 아주 큰 죄인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당신은요? 당신은 잘못한 게 없어요? 그리고 내가 어떻게 알아요? 당신이 오늘밤 내게 청혼을 할지, 이별을 선언할지!”
“이별? 무슨 이별? 누가 누구하고 이별을 해! 그런 생각을 한 것부터가 날 못 믿었다는 거 아니냐고!”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현수는 기가 막히고 코까지 막혔다.
“자기가 그래놓고! 남극을 떠나는 순간부터 나한테는 딱 연락을 끊어버리고, 한국에 들어와서도 전화조차 안했어!”
“그건….”
“입 다물어요! 내 말 안 끝났어요. 내가 하라고 할 때까지 입도 떼지 말아요!”
태훈은 눈물을 끌성이며 악다구니를 쳐대는 현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어째 생각대로 잘 풀리지가 않는다. 순진하고 착하기만 한 윤현수를 구석으로 몰아쳐 결혼동의도 받아내고 이참에 그동안 그녀를 향했던 욕구불만도 풀어내버릴 심산이었다. 그리고 은근슬쩍 결혼시일까지 앞당겨 한 달 이내에 그녀를 공식적인 내 여자로 만들 심산이었다. 그런데…..
“당신이 그러는 동안 내가 무슨 생각을 했겠어요? 이 남자가 변했구나, 현실과 동떨어진 남극에서 다시 현실로 돌아오니 나에 대한 마음은 한 여름 밤의 꿈이라고 깨달았구나…..별별 생각을 다 했어. 난 어차피 사랑복도 없고, 연애운도 없으니까…..”
“지금 무슨 소리를…..”
현수는 또다시 끼어드는 그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그러자 그가 아주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차창 위로 쌓이는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런데 난 이번엔 견딜 수가 없었어요. 당신이 내가 잔 유일한 남자라서가 아니야. 당신과 만나 사랑을 한 곳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남극이라서도 아니었어. 지금까지 알아왔던 사람들보다 천 배는 더 좋은 사람들과 함께 당신의 추억을 공유해서도 아니었어. 난……난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진짜 당신을 사랑한단 말이야. 진짜 사랑을!”
현수는 눈물을 흘렸다. 서러웠다. 지난 며칠간 가슴 졸이며 이 남자가 변했으면 어쩌나, 이 남자가 없으면 어떻게 살아가나, 갖은 불길한 생각들로 잠 못 이룬 밤이 서글펐고, 그 밤 내내 흘렸던 눈물을 모았더라면 저 호수의 100분의 1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더욱 화가 났다.
태훈은 바로 코앞에서 울고 앉아있는 그녀를 가마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물 한줄기에 죽일 놈이 된 기분이었다. 그깟 청혼이 뭐기에, 자신의 서프라이즈에 놀라 기뻐할 그녀의 웃음이 뭐기에 괜스레 이벤트 따위는 계획해서 그녀의 눈물을 빼는가 말이다. 목숨보다 소중한 그녀에게서 말이다. 빌어먹을 놈!
태훈은 거친 손길로 머리를 헤집었다. 그리고 여전히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는 현수를 바라보았다.
‘진짜 당신을 사랑한단 말이야. 진짜 사랑을!’
태훈의 입술이 슬그머니 벌어졌다. 그녀가 진짜 사랑을 한단다. 나를 정말로 사랑한다지 않는가, 그럼 뭐가 문제야? 아무것도, 아무 것도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이제 말해도 되나?”
태훈은 자꾸만 벌어지는 입술을 겨우 진정시키며 차분한 목소리를 내었다. 지금 웃었다간 그녀의 화만 돋울 것이 뻔했다.
그녀가 슬쩍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태훈은 최대한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시선을 마주 보았다.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보였다. 마음대로 하라는 식으로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휴지를 하나 꺼내들어 팽 하고 코를 풀었다.
“사랑해.”
순간, 그녀의 행동이 모두 정지되었다. 또다시 휴지를 한 장 빼내던 그녀의 손길이 멈추고 빨갛게 변한 코를 문지르던 손길도 멈추었다.
“미칠 듯이 사랑해. 너 없이는 죽을 것처럼 사랑해. 아니, 네가 없는 세상에서 사는 것조차 상상이 안 돼. 원한다면 남극점의 저 깊은 빙하까지 퍼다 줄 수 있어.”
현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더없이 진지한 표정이었다. 물론 조금 어색하기는 했다. 월동대 부대장이자 빙하보다 무뚝뚝하고 차가웠던 그가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니 마치 펭귄이 천적인 스쿠아에게 평화협정을 제의하는 것처럼 어색했다. 하지만 그녀는 행복했다. 펭귄이 스쿠아와 결혼을 하든, 친구를 맺든 내 알 바 아니었고, 지금 이 순간 그녀는 위버 반도의 눈밭에서 처음 그의 사랑을 고백받았던 순간만큼 행복했다.
“결혼하자.”
현수는 또다시 눈물을 흘렸다. 당연한 수순처럼 그의 어색한 사랑고백 뒤에 들려오는 청혼은 감미롭고 따스했다. 그녀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직도 차오르는 눈물을 글썽이며 막 고개를 끄덕일 참이었다.
‘일생일대 완벽한 청혼의 파노라마가 펼쳐집니다.’
순간, 현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일생일대, 가장 중요한 말이다. 그가 준비한 청혼이벤트까지 놓쳤는데. 그가 다시 이벤트를 준비할 것 같지는 않다. 만약 이대로 그의 결혼하자는 말 한마디에 순순히 동의를 하고 나면 그녀는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온 멋진 청혼 승낙의 기회를 그냥 이렇게 보내고 마는 것이다.
“글쎄요. 난….”
“뭐?”
놀란 그의 목소리가 쨍하고 들려왔다. 그의 눈썹이 험악하게 일그러지고 예상하지 못했던 그녀의 대답에 그의 얼굴은 실망으로 굳어졌다.
“그러니까 난…..”
“젠장! 좋아. 미안해. 난 좋은 의도로 했던 거지만 그래도 널 며칠 동안 속이며 마음 졸이게 했고, 아프게 했던 거, 미안해. 됐지? 그러니까 결혼한다고 해! 당장!”
‘안 그러면 내 행동에 책임 못 져!’ 라는 표정으로 그의 얼굴은 심각했다. 그녀는 흘깃 그를 살핀 후 또다시 고개를 숙이고 두 손을 꼼지락거렸다.
“사과는 받아들일게요. 그런데 결혼은…..”
“윤현수!”
드디어 그가 폭발했다. 하긴 그가 지금까지 참아준 것도 커다란 인내심을 낸 결과였다. 현수는 그가 다시 폭발하기 전에 재빨리 입을 열었다.
“청혼요! 다시 해봐요. 청혼.”
“뭐?”
그가 바보처럼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청혼이요. 당신이 하려다가 못한 청혼. 그거 다시 해봐요.”
그런데 이 여자가…..태훈은 인상을 쓰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러니까, 그 멍청한 이벤트를 다시 하라고?”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본다.
“그 이벤트가 멍청했어요?”
“유치했지.”
“얼마나? 어떻게 하려고 했는데?”
이젠 아예 눈까지 빛내며 적극적으로 물어오는 현수를 태훈은 지그시 바라보았다.
“두 번은 못할 만큼 유치의 극치였어.”
“안 했잖아. 결국은 못 했잖아요.”
실망하는 그녀를 보며 태훈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건 네 사정이고. 그러니까 누가 그렇게 맘대로 가래? 그렇게 궁금하면 이벤트 맛이라도 보고 가던가.”
현수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는 몰랐다고요. 새언니 집에 가서 언니하고 얘기를 하다가 알게 됐다고요. 내가 알았으면 그런 기회를 놓쳤겠어요? 평생 한번 올까말까 한 기회를.”
너무도 실망하는 그녀의 모습에 태훈은 다시 미소를 지었다.
“이벤트는 없지만 성의 있는 청혼은 어때?”
“성의 있는 청혼?”
“그래. 유치하다는 면에서는 일맥상통하지만.”
썩 내키지 않는다는 태훈의 태도에 현수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라도 해봐요. 해요.”
그가 씨익 미소를 짓더니 갑자기 차문을 열었다. 그러자 차가운 밤바람이 일시에 몰려들었다.
“내려.”
현수는 내리라는 말 한마디만 남기고 눈이 오는 밤공기 속으로 들어가는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뭘, 어떻게 하려고 저러지?
“저기 호수는 세종호수야”
현수는 하얀 눈밭에서 함박눈을 맞으며 서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녀에게서 세 발자국 정도 떨어진 곳에서 하얗게 얼어버린 호수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리고 저긴 마리안 소만이고.”
그녀는 그가 또다시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멀리 산등성이가 보이고 그 산등성이는 지금 끝이 없이 쏟아지는 함박눈으로 하얗게 변해있었다. 언뜻 보니 얼음투성이 마리안 소만과 닮은 것도 같았다.
“저기는 음….세종기지.”
그녀는 다시 그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눈을 돌렸다. 멀리 아파트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이 보였다. 피. 저기가 세종기지라고?
“저건 오로라.”
말도 안 돼! 현수는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른 부정의 말을 애써 삼켰다. 아파트 단지 옆으로 화려한 네온사인이 너울너울 춤을 추고 있었다. 아마도 호수공원 옆에 위치한 유흥가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빛이 어우러져 내는 빛인 것 같았다. 마치, 위버 반도의 하늘 위로 치솟았던 오로라의 향연처럼.
“기억나?”
현수는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우리가 처음 데이트를 했던 대기관측동.”
현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서서히 그의 의도를 이해할 것 같았다.
“우리가 처음 입을 맞췄던 기계동의 이층, 세탁실.”
그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처음으로 하나가 되었던 그 작은 방.”
그는 그때와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사랑을 나누었던 남극은 지구가 멸망하는 그날까지 영원할 거야. 순수한 지금의 그 모습, 그대로.”
현수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그는 지금 그녀에게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고 있었다. 남극처럼 영원할 그의 사랑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 이보다 더 멋진 청혼이 있을까?
“그리고…..”
그가 잠시 그녀를 바라보더니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네가 도망만 가지 않았더라면 멋진 청혼가도 부르고 꽃도 증정하면서 주려고 했는데….”
더 말하기 민망하다는 듯 조용히 말끝을 줄인 그가 그녀에게 작은 상사를 하나 내밀었다. 현수는 그를 멍하니 바라보다 다시 상자를 바라보았다.
“뭐예요?”
현수는 그를 다시 한 번 올려다본 후 천천히 상자를 받았다. 그리고 떨리는 손길로 뚜껑을 열었다.
“아…”
아름다웠다. 투명한 유리 속에 남극이 들어있었다. 만년설로 덮여있던 마리안 소만과 푸른 빙원, 그리고 붉은색 건물의 세종기지가 모두 들어있었다. 저 멀리 너울거리며 춤을 추는 오색찬란한 오로라가 있었다. 그리고 눈이 내리고 있었다. 눈 내리는 킹조지 섬을 그대로 옮겨놓은 스노우 볼이었다.
“잘 보면 팽구도 있어.”
정말 있었다. 세종기지 한 켠에 아주 작은 펭귄 모양이 보였다. 현수의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세종기지의 건물들 중 그 어느 것도 빠지지 않았다. 모두 실제처럼 그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연구동, 숙소동, 기계동, 발전동, 목조창고와 잠수동까지….그리고 세종호와 고층대기관측동까지….모두 있었다.
현수는 그를 쳐다보았다.
“이걸 언제….”
그가 씨익 미소를 지었다.
“네가 떠나고 나서부터 만들 계획을 세웠지. 사진을 찍어서 컴퓨터로 작업했어. 그리고 스노우 볼을 만드는 회사를 알아보고….그렇게 제작을 의뢰했어. 요즘은 돈만 있으면 다 되는 세상이니까. 마음에 들어?”
현수는 그를 가만히 흘겨보았다.
“말이라고 해요? 마음에 들고 말고요. 정말, 언제 다시 볼수 있을까 했는데….”
그가 갑자기 손을 쓱 내밀어 스노우 볼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예고도 없이 뒤집었다. 현수는 스노우 볼이 뒤집어지는 순간 쌓인 눈이 녹는 것 같은 장면에 또다시 미소를 지었다. 스노우 볼을 처음 보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스노우 볼은 특별했다.
“이거, 우리 특허 낼까? 많이 만들어서 팔면 무진장….”
“싫어. 그러면 특별함이 사라지잖아. 세상에 단 하나 뿐인 스노우 볼이어야지 의미가 있는 거야.”
현수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이걸 만든 곳에서 많이 만들 수도 있잖아요?”
“안 만들겠다는 약속을 받아 냈지.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도 이건 더 특별해.”
현수는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스노우 볼을 만든 곳에서 똑같은 것을 만들면 특별함은 사라지는 것인데 더 특별하다고?
그가 갑자기 스노우 볼의 밑바닥을 빙글빙글 돌렸다. 마치 원형 뚜껑을 돌리듯…..그리고 얼마후 그가 뚜껑이 열린 스노우 볼을 내밀었다. 여전히 뒤집혀진 스노우 볼을.
현수는 또 뭐가 남았나? 하는 궁금함에 냉큼 그가 내민 스노우 볼의 밑바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또 한 번 놀랐다.
푸른빛이 도는 다이아몬드였다. 아늑한 벨벳에 감싸여 찬란한 빛을 내뿜고 있는 다이아몬드 반지였다.
“결혼하자. 윤현수. 내 공주님.”
현수는 천천히 눈을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남극처럼 위대하고 순수한 사랑을 맹세하며 청혼을 하는 지금, 이 순간 그녀가 할 대답은 하나였다. 그녀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쓰윽 닦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청혼을 받고도 결혼 안 한다는 여자가 어딨어요? 당연히 결혼하죠.”
현수는 한 걸음 만에 그의 품속으로 뛰어들었다.
“젠장. 청혼은 이걸로 끝이야.”
그가 뭐라고 투덜거리며 그녀를 마주 끌어안았지만 그녀는 상관하지 않았다. 그가 투덜거리는 거야 하루 이틀 일도 아닌데 뭐. 그가 남극으로 돌아가 또다시 월동할지도 모르고 그녀와 떨어져 살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와 그녀의 미래에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무수한 문제가 쌓여있었다. 하지만 현수는 알 수 있었다. 그들 앞에 놓인 어떤 문제도 그와 함께라면 이겨낼 수 있을 거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