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rely, Vanessa RAW novel - Chapter (105)
선생님께, 바네사로부터 105화(105/146)
커다란 손에 쥐어진 가는 발목은 한 줌 같았다. 그는 가만히 바네사의 다리를 당겨 쭉 펴도록 했다.
바네사는 소리 죽여-그 와중에도 예민한 옆집 사람을 신경 쓰는 훌륭한 이웃이었다- 외쳤다.
“왜, 왜요!”
그는 대답도 하지 않고 반대쪽 손으로 살결을 쓸었다. 그의 손은 다리가 긴 거미처럼 움직였다. 느껴질 듯 느껴지지 않을 듯, 그 가벼운 느낌.
하지만 닿는 곳마다 온몸에 전율이 흐르는.
천천히 타고 올라오는 느릿한 전진에 애가 탔다. 절로 입이 벌어졌다.
뭔지 모를 긴장감에 혼이 빠졌던 것도 잠시였다. 바네사는 뒤늦게서야 그의 표정에 담긴 감정을 눈치챘다. 저거 어쩐지…
아차, 내 상처!
잠이 순식간에 달아났다. 바네사는 몸을 펄떡이며 변명했다.
“별로 안 다쳤어요! 색만 요란한 거라고요!”
“직접 보고 있는 사람에게 너무 뻔한 거짓말인데.”
덤덤한 목소리로 답한 남자는 눈매를 살짝 찡그리며 울긋불긋 화려한 흔적들을 살폈다. 다른 곳엔 상처가 더 없는지 확인하고픈 얼굴이었다.
그가 허벅지까지 길게 내려오는 윗옷에 시선을 던지자 바네사는 눈을 부릅떴다.
“위는 안 돼요.”
“…….”
짧게 숨을 내뱉은 기드온은 그녀의 상처를 더듬던 손을 떼어 냈다. 바네사는 득달같이 다리를 접으려 했으나 간단히 제압당했다. 남자의 손은 이내 스스로의 목깃으로 향했다.
그 즉시 기드의 반대쪽 손에 부드러운 하얀 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어느새 무릎에 파인 상처는 씻은 듯이 사라지고 멍도 희미하게 옅어졌다. 놀랍도록 깔끔한 치료 마법이었다.
“무슨 치료 마법이 이렇게 빨라요? 반응이 느리기로 소문난 건 줄 알았는데 나한테만 그런 거였어.”
바네사의 시무룩한 중얼거림에도 기드온의 얼굴은 쉽사리 풀리지 않았고, 삐딱하게 들려 있는 한쪽 눈썹은 내려올 줄을 몰랐다.
그의 심각한 얼굴에 바네사는 입을 다물고 속으로 투덜댔다.
못하는 게 대체 뭐야? 공격 마법에 능한데 치료 마법까지 잘하는 건 너무하는 거 아니야? 마력을 사용하는 방식 자체가 다른데. 타고난 마력이 얼마나… 어, 그러고 보니.
바네사는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손을 번쩍 들었다. 마치 교수님에게 질문하려는 듯한 동작에 기드온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검은 어디에 있어요?”
기드온의 마법 실현 조건은 ‘엘다르산 강철로 만든 검과 접촉할 것’이기에 치료 마법을 위해서는 검이 보여야 했으나 그는 맨 몸이었다.
어느새 일어나서 침대 가에 앉은 바네사가 호기심 넘치는 얼굴로 그를 이쪽저쪽 살폈다. 가만히 그를 내려다보던 기드온은 목깃의 핀을 하나 빼 주었다.
“여기.”
손 위에 놓인 것은 장식 하나 없이 기다란 몸체를 가진 금속이었다.
바네사가 장식된 금제 세공을 돌려서 빼자 그 끝은 베일 듯 날카롭게 마감되어 있었다. 그 모습이 어쩐지 검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게 뭔데요? 설마 엘다르산 강철이에요?”
“맞습니다. 내 조건은 엘다르산 강철로 만들어진 무언가를 검이라 인지하면 됩니다. 이건 ‘검’입니다.”
“와, 이게 검이라고요?”
바네사가 손 위에서 금속을 굴리며 흥미롭게 들여다보았다.
속임수와 다름없는 조건이었다. 대부분의 마법사는 모르는 자에게 마법 실현 조건을 밝히지 않는다. 조건은 약점으로 치환될 수 있으므로.
하지만 기드온의 조건은 아주 유명해서 여러 아카데미에서도 예시로 쓰이는 수준이었다. 그가 조기 졸업을 위해 공개적으로 그 내용을 밝혔기 때문이다.
만약 누군가가 기드온을 공격하려 한다면 실질적으로 검부터 빼앗으려 하겠지. 마법도 검도 쓰지 못하게 막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이 작은 물건 하나로 그 사람의 의도는 순식간에 빛을 잃게 되는 것이다.
검을 쏙 빼닮은 생김이긴 해도 지나치게 작은데. 이걸 검으로 인지했다면 그는 이 물건을 검으로써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일까?
바네사는 오랜만에 학문적인 흥미가 부풀어 올라 신이 났다.
가만히 그 모습을 보던 기드온은 손을 뻗어 ‘검’을 회수한 뒤에 다시 제 옷깃에 끼웠다. 아름다운 세공이 된 금속은 그와 몹시 잘 어울려 장식처럼 감쪽같았다.
“다칠까 무서워서 더는 안 되겠습니다.”
그의 울적한 목소리에 바네사는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애써 당당히 주장했다.
“기드가 다쳤던 것보단 훨씬 양호하잖아요. 줄기에 좀 얻어맞은 것 말고는 아-무 문제 없었다고요.”
당연히 줄기에 묶여 허공으로 끌려간 건 숨겼다.
기드온은 가만히 바네사의 –뻔뻔한-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간질였다. 바네사가 눈을 맞추며 구김살 하나 없이 활짝 웃자 그의 입가에도 희미한 미소가 돌아왔다.
“그래요. 건강히 돌아왔으니 약속은 지킨 걸로 하죠. 고생했어요, 바네사.”
그 나직한 목소리에 정말로 집에 돌아왔다는 실감이 났다. 바네사는 활짝 웃다가 무언가를 깨닫고 급히 이불을 끌어당겼다.
그러고 보니 기드의 치료 마법으로 화려한 색감이 사라진 덕분에 하얀 살결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 윗옷이 길어 천만다행이었다.
바네사는 큼큼, 헛기침하고는 웅얼거렸다.
“남의 맨다리를 그렇게 만지면 안 된다고요. 다음부터 주의해요.”
기드온은 억울한 표정으로 항변했다.
“당신이 벗고 열어 준 거 아닙니까. 왜 누군지 제대로 확인도 안 합니까? 다른 사람이었으면 어쩌려고.”
“아니, 그, 졸려서 정신이 없었어요. 어차피 주인이 아무나 들여보내 주지 않으니까… 그러고 보니 어떻게 들어온 거예요?”
이제는 제법 안심이 되었는지, 기드온은 대답도 없이 이곳저곳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키가 크고 두꺼운 몸을 가진 남자가 서 있으니 공간은 틈도 없이 꽉 차 보였다.
그는 작고 초라한 방에서,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장식품 같았다.
바네사가 그를 빤히 바라보았지만 기드온은 여전히 구경하기 바빴다. 햇빛이 가득 차는 방이라 남자의 황금빛 색채는 더욱 화려해 보였다….
근데 지금 해가 지고 있는 건가?
바네사는 믿을 수 없어 눈을 여러 번 비볐다. 도대체 얼마나 잔 거야?
“주인이 들여보내 줬어요?”
바네사가 채근하자 그제야 남자의 시선이 돌아왔다. 그는 이불을 둘둘 감은 바네사를 보고 작게 웃었다.
“네. 걱정 말아요, 성 앞에서 바로 공간이동 해서 이쪽으로 넘어왔으니까 본 사람은 없습니다. 주인이 쉽게 들여보내 주더군요. 정말로 안전한 거 맞습니까?”
얼굴 덕이겠지.
바네사는 보지 않아도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주인은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어버버 더듬대다가 바네사 로즈가 어디, 몇 층에 있는지까지 줄줄 불었을 것이 틀림없다. 기드온이 비밀을 지켜 달라고 하면 홀린 듯 고개를 흔들었을 것이고.
바네사는 앓는 소리를 내며 새하얗고 푹신한 베개 위로 머리를 박았다.
방은 지저분하지는 않았지만 딱히 정돈되어 보이지도 않았다. 아무렇게나 벗어 던진 옷은 여전히 의자 등받이에 걸려 있었고 책상 위는 종이와 펜들로 너저분했다.
“이런 날에 오다니, 반칙이야….”
누운 채로 투덜거리는 바네사를 보며 기드온은 픽 웃었다. 그는 신기한 듯 바네사의 호니르를 쓸어 보고 책상 위에 놓인 책들을 이리저리 들추었다.
제목이 몹시도 긴 책들은 대부분 마법 이론 서적이라 그는 희미하게 웃었다.
위에 놓인 하얀 종이에는 책의 구절을 필사한 뒤에 줄을 벅벅 그어 둔 곳도 있었고, 가끔 ‘?’만 마구 휘갈겨져 있는 곳도 있었는데 바네사의 고뇌를 단번에 느낄 수 있었다.
정말 작디작은 방이라 한눈에 모든 것이 보였을 텐데도 그는 몹시 흥미롭게 이것저것을 구경하며 돌아다녔다.
바네사는 오히려 그런 남자를 가만히 살폈다.
종이 위의 글자를 보느라 내리뜬 눈, 입매에 걸린 희미한 미소. 그 모습이 마치 호기심 넘치는 소년처럼 해사해 보였다.
기드온은 이미 제 사정을 대충 파악하고 있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고아원에서 자랐고, 후원자의 도움 없이는 아카데미를 가지 못했으리란 걸 알았다.
그 정도면 바네사가 어떻게 삶을 꾸려 나가고 있는지도 대충 파악이 될 것이다.
그래도 작고 초라한 방은 마지막까지 절대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단정하게 꾸며도 겨우 방 한 칸. 제 마음속 최후의 보루 같은 느낌이었다.
그가 아무리 짐작하고 있다 한들, 직접 보는 것과는 차이가 있겠지. 너무 좁고 엉망이라 놀란 마음을 애써 숨길지도.
하지만 그가 들어오고 나니 별것도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렇게 흥미롭게 들여다보는데, 뭐.
그는 분명히 이런 걸로 누군가를 무시할 사람이 아니었다.
“기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기드온이 부드럽게 시선을 돌렸다. 그 온화한 눈길에 안심이 되어 절로 웃음이 났다.
그래, 별일 아니네.
눈이 다시 가물거렸다. 긴 잠에도 피로감이 그리 날아가지 않았다.
그를 눈치챈 기드온은 의자를 끌어 침대 곁에 앉아서는 바네사의 눈가를 쓸어 주었다. 따뜻하고 커다란 손이 눈가를 가리자 몸이 더욱 노곤하게 늘어졌다.
“첫 파견이었는데 어땠는지 말도 안 해 주는군요. 나는 혼자 걱정하느라 피가 말랐는데.”
“이미 대령님이 다 보고했잖아요. 민망하단 말이에요…. 제멋대로 굴다가 감봉 처리된 건 들었죠? 보고를 똑바로 하고 가면 좋았을걸.”
웅얼대던 바네사가 작게 하품했다.
“특전대 일이 이렇게 피곤한 줄은 몰랐어요…. 그러고 보니 아카데미는 어떻게 되었어요?”
바네사가 눈을 감은 채 질문하자 그는 자장가를 불러 주듯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다행히도 별문제 없이 조사가 끝났습니다. 바네사의 덕이 크니 당신을 직접 고른 폐하께서 아주 기꺼워하시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다 같이 한 건데요…. 퇴근한 거예요?”
“좀 있다가 다시 가야 할 것 같지만, 일단은 그렇습니다.”
바네사는 흘끗 눈을 들어 기드온의 낯빛을 확인했다. 그리 나빠 보이지는 않았지만 워낙 제 힘듦을 잘 숨기는 사람이라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겨우 한 번 파견 나갔다 온 자신이 이렇게 지쳤는데 모든 일을 총괄하는 그가 지치지 않을까?
“침대가 너무 좁은데… 누울래요? 잠깐만.”
기드온은 약간 멈칫했다. 눈을 감고 있는 바네사는 별 의도 없이 한 말이겠으나 그에게는 썩 그렇지 않았다.
당황한 기드온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바네사는 꾸역꾸역 벽에 최대한 붙었다. 그렇게 움직이면서도 눈을 반쯤 감은 채였다.
“옆으로 누우면 어떻게 되지 않을까요? 안 되나….”
또다시 작은 하품.
기드온은 가만히 있다가 몸에 딱 맞는 제복 겉옷을 벗어 뒤쪽에 걸쳐 두었다.
그는 계속 멈칫댔다. 발데르 성에서 함께하는 것과 그녀의 작고 안온한 공간에서 함께하는 것은 분명히 큰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수십 번을 곱씹어 봐도 안 되는 이유 따위는 없었고, 유혹은 지나치게 강렬했다. 오래 굶어 허기진 자는 향기로운 내음에 쉽사리 넘어갔다.
몸을 올리려 했으나 침대는 그의 몸에 비해 지나치게 좁고 작았다.
결국 기드온은 옆으로 누운 채로 바네사를 완전히 끌어안아 품에 넣었다. 그제야 침대 위에 두 사람이 누울 수 있었다.
그의 큰 키에 다리가 침대 밖으로 약간 튀어나오긴 했지만 뭐, 그럭저럭 괜찮았다.
기드온의 가슴께에 머리를 기댄 바네사는 눈을 반쯤 떠서 남자의 목을 조이는 끈을 풀어 냈다. 그리고 그의 등을 끌어안고 토닥이기 시작했다.
바네사는 긴장해서 바짝 서 있는 등 근육을 눈치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품 안이 몹시 따뜻하고 편안했으므로.
“조금 자요… 많이 피곤하죠….”
그 말만 남긴 채 다시 눈을 감은 바네사는 천천히 고른 숨을 내쉬기 시작했다.
분명히 자고 싶은데 내가 막 들어와서 맘이 불편하니 같이 자자고 한 것이 틀림없다.
기드온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속절없이 녹아내렸다. 완전히 제 품 안에 폭 안긴 바네사가 지나치게 달았다. 그는 가끔 그녀가 꿀이나 설탕으로 이루어진 무언가가 아닐까 생각했다.
바네사는 기드온이 그리 의심하는 사이에 완전히 잠에 빠져들었다.
그는 이 좁은 방에서, 화려하고 아름다운 성안에서도 느끼지 못한 행복을 느꼈다.
오직 둘밖에 없는 이 방이 얼마나 만족스러운지. 들리는 소리라고는 바네사의 색색대는 작은 숨소리뿐이었다. 지나치게 완벽하여 현실감이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심장이 선득해지는 불안감이 찾아왔다. 유제니아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진실은 빨리 밝히는 편이 좋을 것이라 조언드리죠, 후원자 선생님.’
그래, 분명히 더 많은 거짓을 쌓아 올리기 전에 말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평생 숨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직도 바네사는 그녀의 ‘선생님’에게 애정을 담은 편지를 보내고는 했다.
그러나 기드온은 이제 그 편지에 제대로 답장을 보낼 수가 없었다.
‘선생님’과는 다른 애정이 녹아든 것이 탄로 날까 두려웠고 그녀를 속인다는 죄책감에 펜이 무겁게만 느껴졌다. 그래서 간신히 몇 줄 적어 답하는 것이 다였다.
하지만 그렇게 보내고 나면 짧은 편지에 그녀가 서운해할까 또 다른 걱정이 생겼다. 바네사는 이유도 모르는 채로 소식이 뜸해진 선생님을 걱정하고 있을 텐데.
바네사가 나를 용서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배신감을 느낀 당신이, 이 모든 것이 거짓이라 느껴 나를 버리면 어떡하지.
불안해진 그는 품 안의 작은 온기에 매달렸다. 속으로 그럴 리 없다 되뇌며 애써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