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rely, Vanessa RAW novel - Chapter (107)
선생님께, 바네사로부터 107화(107/146)
⚜ ⚜ ⚜
바네사는 발데르 성의 응접실에 앉아 기드온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쩐지 나름 신경 써서 차려입은 옷이 어색하여 자꾸 매무새를 다듬게 되었다.
요즘 느낌으로는 왠지 제복을 입고 만나야 할 것 같단 말이지.
오늘 발데르 성의 응접실 내부는 새하얀 자작나무 가지들로 장식되어 있어 겨울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바네사는 창밖을 바라보며 시간을 가늠했다.
“공작님이 조금 늦으시네요.”
라모나가 탁자 위에 금색 꽃이 그려진 주전자를 놓아 주며 말했다. 바네사는 감사히 찻잔을 받아 들었다.
“아가씨를 굉장히 오랜만에 뵙는 것 같아요. 요즘 일이 많이 바쁘신가요?”
서운하다는 목소리에 바네사는 씩 웃었다.
“제가 요즘 일부러 발데르 성을 멀리했거든요. 이제 기드와 같이 일하잖아요! 들키면 정말 큰 일이니까요.”
라모나는 찻잎의 여린 향기에 즐거워하는 바네사를 보며 눈을 접었다.
참 성격이 좋은 아가씨야. 공작님께서 놓치시면 안 되는데. 능력까지 좋다 하니 탐을 내는 사람들이 많을 거야.
“제가 머리를 조금 만져 드려도 될까요?”
속내를 감춘 라모나가 곁에 앉아 상냥하게 웃었다. 잠시 고민하던 바네사도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저야 감사하죠. 머리 묶은 게 좀 서툴렀죠?”
바네사가 민망하게 웃자 라모나는 손사래 쳤다.
“그럴 리가요. 제가 해 드리고 싶어서 그렇죠.”
라모나는 부드러운 손길로 바네사의 긴 머리카락을 풀어헤치고 꽂혀 있던 머리 장식을 빼냈다. 굽이치는 머리카락이 등 뒤로 늘어지자 라모나는 머리를 땋기 시작했다.
“예쁜 머리꽂이네요. 세공이 섬세해서 정말 꽃 같아요.”
바네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드가 준 선물인데 한 번도 못 써 봤거든요. 오늘 꽂은 거 보여 주려고요.”
“어머. 직접 고르셨나 봐요. 보통 선물은 페레스나 저에게 일임하시는 편인데요.”
라모나가 눈가에 주름을 잡으며 활짝 웃자 바네사는 건네받은 섬세한 장신구를 조심스럽게 만지작댔다.
머리 장식의 꽃잎을 이루고 있는 부분은 붉은 보석들이 자리하고 있었고 잎사귀와 가지 부분은 새하얗게 빛나는 무언가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가 졸업식 날 꽂아 주고 간 것이었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누가 봐도 굉장히 비싸 보이는 것이라 당황스러웠던 기억이 났다.
“이렇게 위쪽만 살짝 땋고, 아래쪽으로 같이 묶은 다음에- 이렇게 머리를 접듯이 해서요.”
라모나가 재빠른 솜씨로 머리를 완성한 뒤에 뒤쪽에 보석 꽃을 꽂아 주었다.
그 후에도 이쪽저쪽 자연스럽게 손을 보고 옷매무새까지 다듬어주고 나서야 라모나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음, 완벽하네요.”
“감사해요. 사실 같이 멀리 외출하는 게 처음이라… 나름 신경 쓴 건데도 어색하네요. 스커트가 좀 짧은가? 하면서요.”
바네사가 쑥스럽게 웃었으나 라모나는 그대로 정색했다. 갑작스러운 표정 변화에 바네사가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험악한 얼굴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함께, 처음 놀러 나가신다는 말씀이세요?”
바네사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진실을 내뱉었다.
“네? 아, 네.”
“처음…? 처음이라고…?”
라모나의 표정이 어쩐지 어둑해지자 바네사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무슨 말을 잘못했나?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녀의 질문에 대답을 한 게 다였다.
“이런, 공작님께서 늦으시는군요. 회의가 길어지는 모양입니다.”
작은 디저트 몇 가지를 들고 들어온 페레스가 탁자 위에 쟁반을 올리자 라모나가 그를 강한 힘으로 붙잡았다. 페레스가 어리둥절한 눈으로 그녀를 보았지만 비죽 치켜 올라간 눈썹은 여전했다.
“페레스. 공작님과 아가씨, 두 분이 함께 외출하시는 것 본 적 있어?”
“뭐? 나야 모르지만… 어련히 잘 하셨겠지.”
라모나는 허허로운 그의 웃음에 쐐기를 박았다.
“오늘이 첫 외출이라고 하시는데?”
페레스와 라모나의 눈이 동시에 바네사에게 돌아왔다. 바네사가 움찔거렸다.
“처음이시란 말입니까? 전에, 그 밤에 찾아오신 지가 벌써 몇 개월이나 되시지 않았습니까!”
페레스가 마치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경악했다. 바네사는 헛기침을 했다. 그 밤이라면 바네사가 술에 취해 발데르 성에 떨어진 날을 말하는 것이 분명했다.
“둘 다 바빠서 멀리 나갈 시간이… 정말 처음은 아니고요, 그냥 퓌돔 근처에서 돌아다니기는 했는데….”
웅얼대는 대답은 단칼에 잘렸다.
“뭔 일이 그리 바쁘시단 말입니까! 가장 좋을 시기에, 함께 외출도 제대로 못 하시는 것이 말이 됩니까!”
페레스가 가슴을 치자 바네사는 눈만 굴렸다. 라모나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물론 퓌돔이 아름답기는 하지만 다른 곳도 많이 가 보셔야지요. 일이야 쳐내면 되는 것인데 공작님께서 다 받아들이고 계시니.”
“요즘 워낙 바빠서 그럴 수가 없었을 건데….”
바네사가 소심하게 그를 변호하려 했지만 두 사람은 냉정하게 바네사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쑥덕댔다.
“미구엘에게-”
“좀 있다 잠시-”
두 사람은 바네사를 응접실에 두고 음모를 꾸미는 것처럼 속닥거리며 사라져 버렸다. 바네사는 황망하게 빈 응접실을 둘러보다가 뺨을 긁적였다.
음, 난 몰라.
차는 여전히 향긋하고 목 넘김이 좋았다. 바네사는 평온하게 이 휴식을 즐기기로 했다. 기드온한테 뭐라고 하겠지, 뭐.
기드온은 얼마 지나지 않아 성으로 돌아왔다. 응접실로 들어오는 그는 인상을 한껏 찌푸리고 있어 바네사는 모른 척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래요? 회의에 문제가 있었나요?”
바네사의 물음에 기드온이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쓴웃음을 지었다.
“아닙니다. 들어오자마자 페레스와 라모나에게 끌려가 혼이 좀 나서… 근데 내 죄가 맞아 하나도 반박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바네사의 옆에 앉아 몸을 늘였다. 오늘은 상당히 가벼운 차림이었다.
실크 타이라도 사용해서 목 끝까지 조이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새하얀 깃은 편안하게 늘어져 있었다. 다만 몸에 꼭 맞는 연한 회색 베스트에 간단한 은색 자수들이 놓여 있을 뿐이었다.
커다란 몸이 느슨하게 기울어지자 바네사는 기드온의 눈가를 살살 매만지며 장난스레 웃었다. 그는 간지러운 듯 바네사의 손을 잡아 가두었다.
커다란 손안에 갇힌 작은 손이 꼬물대자 희미한 웃음이 번졌다.
기드온은 다감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바네사가 하고 있는 머리꽂이를 눈치채고 웃기 시작했다.
“아, 오랜만에 보는군요. 그거 내가 제법 오래 가지고 있었습니다.”
“언제 산 건데요?”
“당신이 답장을 안 하고도 한참 지났을 때인데… 1311년 10월쯤인 것 같네요. 성 바란도 탄신일에 보내고 싶어서 산 거니까.”
기드온은 새빨간 꽃잎을 살짝 매만지며 부드럽게 속삭였다.
“그런데 보내지를 못해서… 거의 1년 동안 보관만 하다가. 졸업식에 꽃다발 대신 건네려고 했는데….”
그날의 일이야 아직도 눈에 선했다. 선생님이 오지 않으신 것이 서운했고, 기드온을 오랜만에 만나 감정은 들썩이고. 결국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시계탑에 갔다가 기드온을 만났었다.
“당신이 날 쳐다도 안 보더군요.”
남자는 가볍게, 장난처럼 말하는 듯했지만 아직 그때의 씁쓸했던 감정이 잊히지 않은 모양이었다. 바네사는 그 감정을 덜어 주기로 했다.
“누가 보기만 해도 들킬까 봐요.”
“뭘?”
그가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바네사는 희미하게 웃었다.
“기드를 좋아하는 거요. 누가 알아채면 비웃을까 봐 무서웠어요.”
프리바에 하나뿐인 공작님과 고아라니. 지금도 가끔 얼떨떨한 일이었다. 그땐 바네사에게 항상 네가 최고라며 응원을 보내 주던 리나와 체바티조차 어찌 위로를 해야 할지 고민했으니 정말 놀라운 일은 맞았다.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내가 건너 듣기론 아카데미에서 인기가 아주 많았다던데. 처박혀 일이나 하던 공작님이야 껌뻑 넘어갈 줄 알았어야죠.”
기드가 눈을 접어 웃자 바네사는 뺨을 붉힌 채 투덜거렸다.
“내가 아무리 인기가 많아 봤자 기드만큼은 아니었겠죠. 일하면서도 듣는 게 참 많다고요!”
“그렇습니까? 나도 들은 게 좀 있는데.”
“뭔데요?”
“재무부의 누가 마법부의 누굴 좋아했다던가. 그런데 마법부의 그녀가 특전대에 가서 눈물을 훔쳤다고 하더군요.”
바네사는 저도 몰랐던 이야기에 잠시 어리둥절했다.
“진짜요?”
“그렇습니다. 그 남자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일은 안 하고 복도만 열심히 돌아다녔나 봅니다. 어떻게 마법부 안에 있는 당신을 봤는지.”
못마땅함을 가득 담아 한껏 편향된 말이었다. 바네사는 어쩐지 억울해졌다.
이 문제에서는 질 수 없었다. 그가 잘나서 마음고생을 한 적이 한두 번인가?
내각에서 ‘기드온 솔 발데르’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결혼한 관료들도 그를 마주치면 입을 떡 벌리고 서류를 떨어트리기 일쑤였다.
“건너 들은 거잖아요. 난 직접 봤거든요? 저번에 기드가 제2성 복도 지나갔을 때, 당신 얼굴 한 번 보겠다고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몰려나왔는지 알아요? 다들 눈이 막!”
바네사가 손짓으로 사람들의 휘둥그런 눈을 묘사할 때, 기드온은 바네사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놀랄 틈도 없이, 바네사는 그의 몸 위에 올라탄 모습으로 기드온을 마주하고 있었다.
중심을 잡아 주려 제 허리를 감싼 커다란 손아귀가 느껴졌다. 항상 올려다보는 각도가 익숙하여 정면에서 마주한 얼굴이 몹시 낯설게만 느껴졌다.
마주 닿은 부분 아래로 느껴지는 단단한 허벅지에 바네사의 눈동자가 지진이 난 듯 떨리자 기드온은 입매를 휘었다.
그런데 어째, 올라간 입꼬리와 달리 눈빛이 차가웠다.
“에반 리아스는?”
다정한 목소리에 바네사는 움찔댔다.
“에, 에, 에반이 뭐요?”
“아하. 모르는 척이라…. 그럼 당신의 친구, 체바티의 가족이 마법기술부에 있었죠. 체자르 밀로 도티였던가. 그가 당신을 제법 자주 찾던데.”
“어, 어떻게 알았… 아니, 그리고 별것 아니에요! 그냥 조금 떠들기도 하고 기술적으로 조언을 얻는다고.”
“기술부 사람들에게 조언을 얻어야지, 왜 당신에게? 마법부랑 관련이 있는 내용입니까? 작은 꽃은 왜 들고 오고.”
기드온이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자 바네사는 화들짝 몸을 들썩였다.
도대체 어떻게 알았지? 2성에는 잘 오지도 않는 사람이.
저절로 더듬대는 변명이 튀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