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rely, Vanessa RAW novel - Chapter (108)
선생님께, 바네사로부터 108화(108/146)
“에, 에반은 지금은 정말로 친구예요. 체자르도 그냥 친절해서 그런 거예요! 책상이 너무 삭막해 보인다고 꽃을 건넨 거라고요.”
“꽃을 주는 게 친절이라.”
못마땅한 표정에 바네사는 머리가 핑 돌았다. 벽난로의 열기가 오늘따라 지나치게만 느껴졌다. 체자르에게 다른 의도가 있었다고? 그럴 리가 없는데.
“기드는 백작가의 차녀도 거절했다고 소문나서 나는 막…. 저번엔 어떤 여자가 뛰어들어 안기려고 했다면서요. 나도 마음고생 엄청나게 했단 말이에요.”
바네사가 애써 그에게로 방향을 돌리자 기드온은 씩 웃었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군요. 당신이 원한다면야 온 성에 내게 연인이 있다고 퍼뜨리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달콤한 속삭임에 바네사는 입을 딱 다물었다. 이건 분명히 불리한 화제였다.
기드는 갑자기 눈을 피하는 바네사를 보며 나직한 웃음을 터트렸다.
“마음이 바뀌면 언제라도 알려 줘요. 난 항상 준비되어 있으니까.”
“어, 음… 미안해요. 나도 숨기고 싶은 건 아닌데 소문의 중심이 되는 게 무서워요.”
바네사는 손끝을 꼼지락대며 사과했다.
갑자기 화제가 왜 여기로 갔는지는 몰라도 어쨌든 이건 정말 미안하긴 했다. 바네사도 ‘결혼을 하지 않는 프리바의 공작’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이 문제로 압박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결혼은 아니라도 약혼이라도 어서 하라는, 조언을 빙자한 공격들.
그래도 쉽사리 용기가 나지 않았다. 누군가 그가 보는 눈이 없다고 욕을 할 것 같았다. 그렇게 재더니 겨우 고아를 골랐다며 비웃을 것 같기도 했다.
자신이 욕을 먹는 건 두렵지 않았지만 기드온에게 쏟아질 악평들은 몹시 두려웠다.
바네사가 시무룩하게 제 손끝만 바라보자 기드는 툭, 이마를 맞댔다. 동그랗게 뜨인 새파란 눈을 보던 기드는 고개를 비스듬히 꺾었다.
뺨을 맞대어 위로하고, 쪼는 듯 가볍게 그녀의 입술을 머금었다. 점막이 맞물리는 소리가 반복되었다.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에 두 사람의 속눈썹이 몇 번이고 스쳤다. 마주친 황금색 눈동자에 이제 바네사의 뺨은 익어 버릴 듯 타올랐다.
잠시 시선을 마주하던 기드온은 곱게도 눈을 살포시 내리깔았다. 바네사는 길게 드리워진 속눈썹에 정신을 빼앗겼다.
우습게도 그 모습이 어쩐지 처연해 보였다. 바네사는 당장 모두에게 우리의 관계를 알리자고 외치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미안해하라고 한 말은 아닙니다. 그리고 충분히 이해합니다. 우리 관계에서는 항상 당신이 권력자니까 이런 일에 걱정하지 말아요.”
“왜 내가 권력자예요?”
“내가 더 좋아하니까 어쩔 수 없지요.”
말꼬리를 늘인 그는 미소 짓고는 몸을 바르게 세웠다. 바네사는 친구들이 이 놀음을 본다면 혀를 찰 것임을 알았지만 그래도 조금 억울했다. 저도 나름 짝사랑을 오래 앓았는데!
“더 좋아한다니, 그런 게 어디 있어요? 그리고 적어도 내가 더 오래 좋아했을걸요.”
“흠.”
믿기지 않는다는 삐뚜름한 목소리에 바네사는 눈을 치떴다. 그러고 보니.
“그러고 보니까 날 언제부터 좋아했는데요?”
기드온이 가만히 고개를 기울였다. 바네사는 지지 않고 그의 눈을 응시했다. 황금색 눈이 깜빡이길 여러 번, 어쩐지 그의 귀 끝이 붉게 달아오른 것 같았다.
머뭇대던 그가 입을 여는 순간 누군가가 응접실의 문을 두 번 정도 두드리고 벌컥 열었다가 급히 다시 닫았다. 그리고 밖에서 크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좀 있다 다시 오지요!”
바네사는 그제야 제 자세를 깨닫고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억울하게도 누가 본다면 자신이 그를 덮치고 있다 오해할 만한 모습이었다.
“어, 어떡해요!”
“괜찮습니다.”
“내 평판을 어떡하냐고요! 덮친 것 같잖아!”
“아, 그런 뜻이었습니까? 너무 편히 앉아 있기에 신경 쓰는 줄 몰랐는데.”
급히 그의 몸 위에서 내려오다 휘청였다. 기드온은 픽 웃으며 바네사의 구겨진 드레스 자락을 다듬어 주었다.
바네사가 붉게 물든 얼굴을 가리고 있는 사이에 기드온은 성큼 걸어가 응접실의 문을 열었다. 그 앞엔 페레스가 헛기침하며 서 있었고, 라모나는 그 뒤에서 페레스를 한심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이 안에서도 두 분은 행복하시겠지만, 오늘은 성에 계실 수 없어요. 어서 나가세요! 날이 아주 좋으니 거닐기에 완벽한 날씨일 거예요.”
라모나의 단호한 목소리에 기드온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드온은 돌아가 바네사에게 손을 내밀었다. 바네사는 한쪽 손은 홧홧하게 달아오른 얼굴에서 떼지 못한 채로 반대쪽 손을 그 위에 올렸다.
⚜ ⚜ ⚜
바네사는 그의 품에 안겨 있다가 눈을 떴다. 익숙해지면 괜찮다는 말답게 이제 공간 이동마법을 사용해도 두통이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와!”
바네사는 흥분해서 먼저 뛰어나갔다.
어디인지는 정확히 몰라도 퓌돔보다 날이 훨씬 따뜻한 것을 보아하니 남부인 것이 틀림없었다.
아주 작은 호수 근처에 커다란 나무가 늘어져 있는 모습이 밤베르크 아카데미 생각이 났다. 온통 꽃대가 올라오는 풀들이 흐드러져 있었다.
“여기 꼭 밤베르크 아카데미 같아요! 저 나무 그늘이 정말 비슷해요.”
바네사가 얕게 찰랑이는 호수를 들여다보며 하는 말에 기드온이 낮게 웃었다.
“맞습니다. 나도 그 생각이 나서 샀어요.”
“…샀다고요.”
“네. 여기 주변이 사유지라서.”
산뜻한 대답이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바네사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내 주변엔 왜 이리 부유한 사람들이 많은 거야.
기드온은 나무로 가려진 뒤쪽을 가리켰다.
“어느 날 그냥 모든 소음에 지쳐서 누구한테 말도 없이 무작정 남부로 왔습니다. 지나치게 숲길을 깊게 들어왔는데 이 호수가 있더군요.”
그도 바네사 옆에 무릎을 구부려 앉고는 물을 찰박이며 튀겼다. 파문이 일며 호숫물에 비치던 두 사람의 모습이 일렁였다.
“저 뒤에 작은 집이 있습니다. 같이 가 볼까요? 당신이 좋아할 것 같습니다.”
바네사는 기드온의 손을 잡고 오솔길을 걸었다. 날이 좋아 흙을 밟는 소리가 바삭바삭했다.
겹쳐 잡은 손가락으로 밀고 당기며 장난을 쳤다. 도망친 엄지손가락이 그의 살결을 쓸던 와중, 갈라진 곳이 느껴졌다.
바네사가 얽힌 손을 들어 올리자 그의 팔목 위로 작은 상처가 보였다.
“이게 뭐예요? 다쳤어요?”
못 보던 상처에 바네사가 눈썹을 살풋 찡그리자 그는 여상하게 말했다.
“아까 살짝 긁혔습니다. 피도 멈췄고 별거 아니라서.”
“도대체 무슨 상처가 되어야 대단한 게 되는 건데요?”
기드온은 길이 아름답지 않냐는 헛소리를 하며 대답을 피했다. 바네사의 새파란 눈이 가늘어지자 흐드러지게 피어오르는 꽃줄기를 하나 꺾어 무언가를 만들기 시작했다.
“뇌물.”
그 말과 함께 손에 풀꽃 반지를 끼워 주었다. 바네사는 소리 내어 웃었다.
“이런 거 엄청 오랜만이에요! 공작님이 어떻게 이런 걸 다 아세요?”
“공작님이라니. 아버지가 자주 하셨습니다. 어머니께 얻어맞고 쫓겨난 다음 날. 잘 배워 두라고 말씀하셔서.”
그 말대로 뇌물 반지는 잘 먹혔다. 바네사는 손가락을 펴서 이리저리 살펴보고는 씩 웃었다.
봐주겠다고 그의 귓가에 속삭이자 그도 눈을 접어 웃었다.
뒤에 숨어 있던 작은 집은 오래되어 몹시도 고풍스러웠고 동그란 창은 색유리를 끼워 알록달록한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퓌돔에 있었으면 촌스럽다고 할 만한, 그런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이 나무들과 작은 꽃들에 둘러싸여 있으니 완벽해 보였다.
안쪽은 자잘한 무늬가 가득한 벽지들이 덧발라져 있었고 방을 채운 가구들은 작고 소박했다.
그래서 더더욱 둘만의 공간처럼 보였다. 바네사가 언젠가 살고 싶다고 상상한 꿈의 집처럼 아름다웠다.
그가 주기적으로 관리를 부탁했다던 사용인은 안쪽을 깨끗하게 정리해 두고 떠났는지 갈대로 짠 바구니 안에 달콤한 과일이 수북하게 담겨 있었다.
“안에 있고 싶습니까?”
바네사가 창밖 풍경을 바라보며 감탄하자 기드온이 웃으며 물었다.
바네사는 고민 끝에 고개를 도리질 쳤다. 창을 통해 보는 것이 이렇게 아름답다면 직접 마주하면 더하겠지. 그리고 집 안이야 저녁에 더 구경하면 되니까.
바네사와 기드온은 작은 과일들 몇 개를 들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 라모나의 말대로 날이 참 좋아서 따뜻한 햇빛과 시원한 바람의 조화가 훌륭했다.
특전대는 새롭게 마법진이 있을 만한 위치를 추측하는 중이었다. ‘그들’의 손발을 묶어 놓았다고 해서 안심할 수는 없었다. 지금도 흐려지고 있는 것들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덕택에 바네사는 곧 또 다른 파견 임무가 주어질 것이고 기드온은 신전을 직접 상대하게 될 것이다. 그 뒤에 있는 무언가도.
그래서 오늘이 지나면 꽤 시간이 흐른 후에야 다시 함께 외출할 수 있음을 알았다. 바네사는 아쉬움이 남지 않도록 온전히 이 시간을 즐기기로 했다.
“기드가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고 여기까지 내려왔었다니 의외예요.”
바네사는 고운 새의 지저귐에 팔다리를 쭉 폈다. 넓게 펼친 자리 위, 누운 두 사람의 머리 위로 햇빛이 쏟아졌다. 기드온이 손을 들어 직접적으로 떨어지는 햇살을 막아 주자 바네사는 작게 웃었다.
바네사는 그의 팔이 아플까 고민되어 그냥 기드온 쪽으로 몸을 틀어 누웠다. 그 모습을 곁눈질로 바라본 기드온의 입가에 미소가 맺히더니, 이내 그도 돌아누워 시선이 맞닿았다.
그는 커다란 손으로 바네사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다정한 손길이 눈가부터 시작해 오뚝한 콧날, 뺨… 이윽고 입술까지 더듬었다.
살짝 벌어진 도톰한 입술 틈을 단정한 손가락이 부드럽게 매만졌다. 바네사는 도저히, 타오르듯 붉어지는 얼굴을 조절할 수 없었다.
뺨이 촌스럽게 달아올랐을 텐데.
바네사는 저도 모르게 눈을 내리깔아 그의 시선을 피했다.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손가락은 입속으로 비집고 들어갈 것처럼 붉은 경계를 아슬하게 더듬다가 떨어졌다. 그제야 바네사는 막혔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아슬한 긴장감에 제가 했던 말도 잊고 있었는데 그에게서 느릿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때는 어쩐지 도망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모든 것에 지쳐서요.”
“어렸던 기드온은 일을 하기 싫었던 걸까요?”
바네사의 물음에 기드온은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16살에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바로 공작 위를 물려받았으니 거의 10년이 다 지나간 이야기였다. 되짚는 데에는 시간이 제법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