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rely, Vanessa RAW novel - Chapter (112)
선생님께, 바네사로부터 112화(112/146)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 공간에는 딱히 문제가 없어 보였다. 그나마 있는 마법이라고는 유리창에 새겨진 것이었는데, 커다란 유리를 부수지 않고 가공하기 위하여 걸어 둔 강화마법이었다.
잠시 뺨을 긁적이던 바네사는 기드온의 눈과 마주쳐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보일 듯 말듯 슬쩍 눈을 접고는 다시 상황에 집중했다.
드디어 어리숙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 내, 내게 신전에 금을 보태라 권유한 자가 있소…. 나, 나는 정말로 나쁜 의도가 없었어! 공동회의에서 공께서 말한 그런… 그런 건….”
압박받는 상황에서는 머리가 굳기 마련이다. 거짓을 말하는 게 진실의 일부를 숨기는 것보다 더욱 어려웠다. 그래서 제냐타의 말은 모두 억울한 진심을 담고 있었다.
“나는 그냥, 기울어 가는 사업들이 아쉬워서 선을 좀 만들어 볼까 했을 뿐이야! 검은 마물이라니, 애초에 그런 건 관심도 없었다고!”
제냐타는 더듬더듬 제 속에 든 말을 꺼내 놓았다. 그는 시간을 끌어야 했다…. 제 앞의 사람들이 관심 있어 할 만한 이야기라면 무엇이든 좋았다.
“권유한 자의 이름은?”
나직한 목소리에 제냐타의 얼굴이 씰룩 일그러졌다. 아무리 훔쳐 내도 끊임없이 배어 나오는 땀이 얼굴 위에서 반짝였다.
“나, 나, 나는.”
계속해서 더듬대는 목소리에 기드온이 눈매를 좁혔다. 그의 눈에 이상할 정도로 경직된 제냐타의 얼굴 근육이 보였다. 지나치게 굳어 미세한 경련마저 일어나고 있는 그 모습은 긴장 때문이라고 하기엔 과했다.
같은 공동회의의 일원이라 해도 사적인 친분은 크게 없었다. 제냐타가 부른 건 특전대의 장이었지, 발데르 공작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미 제 사정을 털어놓을 마음을 먹은 것일진대 왜 이렇게 망설이는가.
무언가가 잘못됐다.
그때 바네사는 이제 책장을 지나 책상 근처로 다가가고 있었다. 너저분한 책상은 무언갈 찾아볼 의욕조차 사라지게 했다.
남의 물건을 함부로 치울 수도 없으니 그 위를 대충 눈으로 훑어보고 있을 때였다.
순간, 무언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시선이 온 길을 다시 역방향으로 되짚었다. 바네사는 필사적으로 그 감각의 끝을 잡아채려 애썼다.
뭐지? 뭐가 이상하지?
눈이 핑핑 돌았다.
저 책들의 배열이 왜 이렇게 익숙하지? 그 아래에 놓인 종이들은? 겹쳐진 면에 흐릿한 선?
“제냐타 백작님, 이건 정말 마지막 기회입니다. 지금쯤이면 어느 쪽에 붙어야 할지가 확실하실 텐데요.”
바라스가 답을 종용하는 사이, 기드온이 몸을 일으켰다. 그는 목깃에 꿰어 둔 ‘검’에서 손을 떼지 않고 있었다.
제냐타 백작이 놀란 눈을 하는 걸 무시하고 그는 방 안을 한번 크게 훑었다.
외부를 지키는 특전대원들은 아무 신호가 없었고, 방 안에 있는 세 명의 특전대원은 제각기 다른 곳에 서 있었다.
안나와 잰즈의 아무 이상 없다는 수신호에 그는 고개를 얕게 끄덕였다. 다만 한쪽 구석에 있는 바네사가 무언가에 몰두하는 모습이 보여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소위.”
“아…. 대장님.”
퍼뜩 고개를 든 바네사의 얼굴은 약간 얼이 빠져 보였다. 그는 차오르는 걱정을 내리누르고 조용히 속삭였다.
“무슨?”
“저 책상 위에, 책들이… 아니, 그, 책이 있는 게 당연한 거지만요.”
기드온은 책상 위로 시선을 주었다.
“저 종이 아래에 겹쳐진 선이 있는데-”
기드온은 특정 방향으로 뻗으려는 바네사의 손을 잡아챘다.
소리칠 틈도 없었다. 그는 바네사를 제 품 안으로 끌어당기는 동시에, 이 공간으로부터 책상을 분리하는 강력한 결계를 실현했다.
방 한쪽이 폭발하며 무너져 내렸다. 깨진 유리 파편이 빛살처럼 튀었다.
⚜ ⚜ ⚜
폭발음에 귀가 먹먹하여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바네사는 놀란 숨을 헐떡였다. 몸 위로 쿵쿵 번지는 박동이 자신의 것인지, 남자의 것인지 헷갈렸다.
바네사는 떨리는 시선을 위로 들어 올렸다. 기드온의 시선은 이미 그녀를 훑고 있었다.
창백한 눈길이 발작적으로 바네사를 더듬었다. 동그란 이마, 짙은 눈썹 끝, 하얗게 질린 뺨과 떨리는 입술까지.
남자의 턱이 굳은 게 보였다. 바네사는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애써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그제야 그의 시선이 조금 가라앉았다.
간헐적으로 떨리는 손이 그녀의 뺨을 감쌌다가 떨어졌다. 닿았다 멀어지는 검은 가죽 장갑의 표면이 오늘따라 차갑게 느껴졌다.
강력한 결계는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을 안전히 보호해 주었으나, 그 너머로 보이는 광경은 참혹했다.
폭발의 원인으로 추정되는 책들이 창가에 있었기에 바닥이 내려앉지는 않았다. 하지만 창이 있던 벽은 완전히 부서져 그 틈을 타고 바람이 몰아닥쳤다. 깨진 유리가 흐릿한 빛에 반짝였다.
반쯤 불에 탄 책장이 흩날리는 가운데 기드온은 이상할 정도로 표정이 없었다.
“대장님! 괜, 괜찮으십니까?”
가로우 대위가 급히 다가와 두 사람을 살폈다.
안나 대위는 이미 제냐타의 팔목을 잡아 뒤로 결박하고 있었고 바라스는 입만 떡 벌리고 있었다. 그는 도저히 이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뒤도 생각지 않는 겁니까!”
바라스는 침음성을 터트렸다.
그 목소리에 미친 듯이 바네사만 보고 있던 기드온이 번뜩 깨어났다. 기드온은 바네사를 보호하고 있던 팔을 떼어 내고 천천히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느릿느릿 다가오는 그를 본 제냐타가 비명처럼 외쳤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 컥!”
그는 그대로 팔을 뻗어 제냐타의 목깃을 쥐어 당겼다. 커다란 손이 단숨에 숨통을 졸라맸다.
“커, 컥…!”
“그대의 딸이 로시니 후의 사촌과 결혼 이야기가 오가고 있다 했지.”
숨이 부족해진 제냐타 백작의 허연 눈자위에 핏발이 섰다.
“딸은 어디 있지?”
“나, 나… 나는….”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었다. 기드온이 던지듯 손을 놓자 제냐타 백은 무너지듯 소파 위로 주저앉았다. 그의 손짓에 안나 대위는 제냐타 백을 끈으로 결박했다.
긴 숨을 내쉰 기드온은 천장을 바라보며 화를 식혔다.
“엘로이스 제냐타였나.”
“맞습니다.”
“내, 내 딸. 제발 내 딸을 살려 주시오.”
제냐타 백작이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몸을 흔들며 외쳤다.
“내 딸! 그놈들이 협박했어. 고, 공작. 당신을 죽이라고…. 이 방법은 아, 아무도 모를 거라고, 난 도리가 없었어! 도대체 어, 어떻게 해야 이 멍청한 아비가… 마, 마지막 기회마저 끄, 끄, 끝난 거나 다름이….”
신음이 섞인 소리가 점점 헐떡이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제냐타 백작은 귀족의 품위도 잊고 몸부림치며 통곡했다. 살이 빠져 약간 헐렁해진 베스트가 엉망으로 뒤집혔다.
바네사는 미약한 동정심을 느꼈다. 가족을 지키겠다는 동기가 누군가를 해치는 걸 방조하는 결과로 이어진 건 경멸스러웠으나, 그는 악하다기보다는 어리석어 보였다.
하지만 기드온의 시선은 여전히 온도가 낮았다.
“제냐타, 마지막 기회를 주지.”
눈물범벅이 된 투실투실한 뺨이 씰룩거렸다. 제냐타는 달달 떨며 얼굴을 들었다. 태양처럼 환한 눈동자가 그를 서늘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눈과 달리 입매는 호선을 그렸다.
“내가 지나치게 얕보인 모양이야. 로시니는 두려워도 발데르는 그렇지 않은가 보군.”
“그런, 게 아니라.”
“이 멍청한 짓이 날 얼마나 화나게 했는지는 굳이 말하고 싶지도 않아. 만약 여기서 누군가가 다쳤다면.”
느릿느릿 떨어지는 목소리는 지나치게 부드러워 오히려 소름 끼쳤다.
“내 모든 걸 걸고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게 만들어 주었을 것이다.”
그 몇 마디로 이미 질릴 대로 질린 백작의 얼굴은 이제 푸른빛마저 감돌았다.
“하지만 다행히도 다친 사람은 없고, 아주 조금의 아량쯤은 발휘할 수 있겠어.”
“고, 공….”
“증언할 용기가 있나?”
눈을 멍청하게 끔뻑이던 제냐타는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기드온은 봐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
“나는 지금 그대의 딸을 억류하고 협박한 로시니 후작을 범인이라 증언할 용기가 있냐고 묻는 거다.”
시선이 맞닿았다. 잠시간의 침묵 뒤, 제냐타 백작의 머리가 힘없이 위아래로 흔들렸다.
기드온은 무심하게 내뱉었다.
“그래, 그렇다면 그대의 딸을 데려오도록 하지.”
제냐타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멍하니 벌어져 있던 입에서 침이 튀었다.
“뭐, 뭐라고…? 뭐라고 하셨습니까?”
“바라스, 엘로이스 제냐타의 행방을 주시하고 있었지.”
“예, 정보국에서 계속 쫓고 있었습니다. 담당자를 부르면 쉽게 특정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추적 마법의 흔적이 끊겼어도 그 근처에 숨겨진 로시니 가문의 안전 저택을 찾으면 될 테니 말입니다.”
가치가 없는 정보라 여겼는데 제법 귀한 정보였군요. 바라스가 어깨를 으쓱이며 한 말에 제냐타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저, 정말로.”
“딸이 건강하다는 소식을 들을 수는 있겠으나 바로 마주하기는 어렵겠군. 제법 오래.”
냉정한 목소리가 떨어짐과 동시에 가로우 대위는 제냐타 백작의 입에 천 뭉치를 쑤셔 넣었다. 욱욱 대는 소리만 간신히 들려왔다.
가로우 대위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질문했다.
“대장님, 직접 가실 겁니까? 저희도 함께 가겠습니다. 위험하실 수도 있으니-”
“아니, 너희 대원들은 돌아가.”
“예?”
두 대위는 즉시 반항했다.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저희도 잠입을 해 보고 싶었단 말입니다!”
“맞습니다! 어둠 속에서 이렇게 저렇게!”
물론 그 방향이 조금 달랐다. 물론 그들의 대장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들의 욕구를 뭉갰다.
“위법성이 짙은 일이다. 특전대가 제냐타 백작을 체포한 건 그럭저럭 말이 되지만 백작의 딸을 구하는 데에 함께 쳐들어갔다? 분명히 안 될 말이지.”
“하지만 그럼 대장님도 안 되시는 거 아닙니까!”
“너희 대원들은 돌아가서 특전대의 건물에 불을 밝히고, 내가 부상을 입어 발데르 성으로 갔다고 보고해.”
바네사가 조용히 눈을 깜빡였다.
“엘로이스 제냐타를 구하는 자리에 없었다고 주장하실 건가요?”
“그래.”
기드온은 손에 낀 장갑을 단단히 고정하며 결계를 해제했다. 그는 책상 위로 돌아가 책 몇 권을 들어 올려 가로우 대위에게 건넸다.
“이건 제냐타 체포에 대한 증거물로 제출하고.”
거대한 소음에 달려왔던 저택의 사용인은 이어진 그의 명령에 급히 검을 가져와 바쳤다.
기드온은 허리에 달린 검은 가죽 벨트에 장검을 단단히 고정하고, 안나와 잰즈의 단검마저 챙겨 품 안에 넣었다.
멍하니 그 모습을 보던 바네사는 그제야 자신을 파견 보낼 때 드러났던 기드온의 마음을 완벽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가 여기에 있는 누구보다 강한 것을 알아도 이렇게 걱정이 되어 초조한데, 한참 부족한 자신을 보낼 때 얼마나 걱정이 되었을지.
게다가 그는 혼자였다. 후에 정보국과 범죄관리국의 누군가가 오더라도 턱없이 부족한 인원.
입이 바짝바짝 마르는데 자신은 대놓고 그를 걱정할 수도 없었다. 그는 대장이고 자신은 일개 대원일 뿐이었다.
그게 갑자기 억울해졌다. 바라스의 시선 아래에서는 그를 쳐다보는 것조차 조심해야 했으니까.
그와의 관계를 알리지 않은 게 나쁜 선택이라 생각한 적 없었다. 그러나 오늘은 후회가 되었다.
바라스는 책상 위에 마법의 흔적이 남은 것들을 싹싹 긁어모으며 말했다.
“이십 분 내로 정보원을 발데르 성에 보내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기드온은 뒤를 볼 새도 없이 빠르게 저택을 떠났다.
같이 가지 못해 발을 쾅쾅 구르는 가로우 대위를 무시하고, 안나 대위는 반쯤 불탄 책을 넘겨 보며 혀를 찼다.
“여기에 마정석과 문장을 숨겨 놨었군. 이걸 마법진처럼 배열한 건가?”
“그런 것 같은데. 이런 게 되는지도 몰랐는데.”
“제냐타가 제 목숨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런 계획에 동의할 줄은 아무도 몰랐겠지.”
대원들은 죽음이 일상과 맞닿아 있는 것처럼 침착하게 굴었다. 바네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