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rely, Vanessa RAW novel - Chapter (115)
선생님께, 바네사로부터 115화(115/146)
“당연하지. 왜 그래?”
어리둥절한 목소리에 바네사는 눈을 여러 번 깜빡였다. 심상치 않은 표정에 슬리만 대위마저도 입을 다물었다.
“…잠시만 쉬고 올게요. 괜찮을까요? 대신 퇴근을 가장 늦게 하겠습니다.”
“그런 조건 내걸지 말고 그냥 쉬고 와. 창백해 빠진 사람 붙들어 놓고 일 시킬 정도는 아니니까.”
쌀쌀맞은 대답이었으나 어쩐지 바네사의 얼굴빛을 살피는 눈길이었다. 바네사는 슥슥 뺨을 훑고는 일어났다.
“네. 감사합니다….”
바네사는 멍하니 문을 열고 빠져나와 우뚝 멈춰 섰다. 어쩐지 갈 곳을 잃은 기분이었다.
특전대 건물에서 벗어나 근처의 정원을 서성거렸다. 날이 풀리는 와중이라 분명히 따뜻하다고 느껴야 할 날씨인데 손발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스스로의 뺨을 두들겨도 낯빛은 여전히 창백했고 제법 오래 어지러운 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바네사는 결국 하얗게 질린 입술을 여러 번 깨물고서야 혈색을 되찾았다. 여러 번 심호흡하고 최대한 표정을 정리한 뒤에 건물로 들어왔다.
바네사는 아무와도 눈을 마주치지 않고 다시 제 책상 앞에 앉았다.
“아직 창백한데. 뭔 일인데 그래? 대장님이 써 둔 서류에 문제라도 있어?”
그레인 중위가 의아한 기색으로 물었으나 바네사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냥 가죽 장정이 덧씌워진 서류를 밀쳐 내고 다른 것을 잡았다.
슬리만 대위는 슬쩍 눈치를 보는 기색이었다. 항상 무던한 편인 바네사가 이상하니 당황스러운 것 같았다.
“몸 안 좋으면 가서 쉬어.”
“괜찮습니다. 그럴 시간도 없는걸요.”
바네사는 애써 미소 지었다. 그레인은 바네사를 빤히 바라보다가 다시 제 서류에 집중했다. 슬리만이 퉁명스레 한마디 던졌다.
“오늘은 정시에 퇴근해. 픽 쓰러지지 말고.”
“그건 감사히 받을게요.”
바네사는 최대한 머리를 비운 채로 글씨만 읽어 나갔다. 가죽으로 덧씌운 것은 손도 대지 못한 채로.
퇴근 시간이 되자마자 바네사는 쫓겨났다.
항상 닭과 개처럼 사이가 나쁜 슬리만과 그레인답지 않게 두 사람은 입을 맞춰 합창했다. ‘그런 안색은 특전대원에게 걸맞지 않다’부터 시작해서 ‘파견 전에 아픈 것은 죄다’까지.
바네사는 고개만 꾸벅 숙이고 일어났다. 거절할 여유가 없었다.
수많은 관료들이 성을 빠져나와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모두 일에서 벗어나 즐거운 표정이었다.
하지만 바네사는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길을 걸었는지 몰랐다. 주변 풍경이 모두 희부옇게 보였고 발이 땅에 닿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떠밀리듯 걷다 보니 어느새 숙소였다. 바네사는 묵묵히 좁은 계단을 올라 열쇠로 문을 열었다.
초록색 문을 열면 바로 보이는 창가, 그 아래에 놓인 낮은 책상 위에는 책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갑자기 기드온이 이 앞을 흥미롭게 들여다보던 모습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으나 고개를 흔들어 떨쳐 냈다.
바네사는 몸을 숙여 책상 아래의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 든 보라색 상자는 선생님에게서 온 편지를 보관하는 곳이었다.
바네사는 상자를 열어 편지를 하나씩 꺼내 보았다. 선생님에게서 온 답장들, 선물들과 함께 보내 주신 작은 쪽지들.
그리고 종이 위의 살짝 옆으로 기울어진, 장식적인 필체.
아까 서류에서 봤던, 기드온의 또 다른 필체와 동일했다.
⚜ ⚜ ⚜
바네사는 그날 밤, 한숨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어두운 방 안에 몸을 웅크리고 누워 있다가, 빛을 불러내 방을 밝혔다가. 베개 옆에 둔 편지를 만지작거렸다. 색이 바랠까, 눅눅해질까 걱정하며 보관한 편지는 아직도 바스락 소리가 났다.
선생님에게서 왔던 첫 답장. 아직도 기억에 선했다. 항상 비어 있던 호니르에 들어 있던 무언가가 너무 반가워서.
나도 답장이 올 곳이 있다고, 누군가에게 그렇게 자랑하고 싶었다….
잠들었다가도 이상한 꿈에 금방 깨어나니 결국 그냥 벽에 몸을 기대어 앉아 있었다.
답답했던 어두운 밤을 지나, 이상할 정도로 새파랗게 느껴지는 새벽이 다가왔다.
씻고 나온 바네사는 대충 물기를 털어 내고 거울을 봤다. 핏기 없는 얼굴은 창백해서 볼품이 없었다. 다시 제복을 차려입고 목깃에 특전대의 핀을 꽂았다. 그리고 선생님의 편지 하나를 품에 넣었다.
녹이 슨 열쇠로 문을 닫고 나와 아직 인적이 드문 거리를 걸었다. 상점 앞을 비질하는 소리, 마음이 급한 마부가 마차를 달리는 소리만 가끔 들려왔다.
처음엔 발데르 성으로 향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내 걸음은 멈추었다. 겁이 나서 도저히 그곳으로는 갈 수가 없었다.
이쪽으로도, 저쪽으로도 갈 수가 없었다. 스스로도 무슨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지 몰랐으므로.
바네사는 결국 길거리에 있는 나무 벤치 위에 앉아 멍하니 시간을 흘려보냈다.
얼마나 오래 앉아 있었는지도 몰랐다. 다만 몸이 차가워지고 거리에는 슬슬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가씨, 발 좀 치워 줄래요?”
상점 앞을 비질하던 주인이 조심스레 말했다. 바네사는 급히 일어나 고개를 숙이다 잠시 휘청했다.
“죄송해요.”
“그럴 것까진 없고. 이 아침부터 왜 여기에 앉아 있어요? 이른 봄날이니 아침엔 아직 추울 텐데. 따뜻한 차나 한잔하고 가지 그래요.”
자연스럽게 가게에 비싸고 귀한 찻잎이 들어왔다 자랑하는 주인에게 바네사는 간신히 미소 비슷한 것을 지어 보였다.
“다음에 와서 마실게요.”
“그래요, 오늘 하루 잘 보내고.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기운 내요.”
바네사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제법 오래 걸어야 하는 성은 오늘따라 가깝게만 느껴졌다. 제2성의 문을 지키고 있는 경비병들은 바네사의 얼굴을 보고 혀를 찼다.
“특전대 업무가 과중하다더니. 아주 살이 쏙 빠졌네!”
“마법부로 다시 바꿔 달라고 하지 그래.”
바네사는 말없이 웃으며 고개만 저었다.
제2성의 문을 지나 특전대의 건물로 향하는 길은 언제나 그렇듯 아름다웠다. 바네사의 어지러운 마음과는 아무 상관도 없이.
누군가가 뒤에서 강한 힘으로 어깨를 쳤다. 바네사는 헛구역질을 애써 참고 시선을 돌렸다.
“바네사!”
에반이 씩 웃고 있었다. 바네사는 당연한 듯 마주 웃었다. 하지만 에반은 바네사의 얼굴을 보자마자 웃음을 거둬냈다.
“너 얼굴이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냐.”
“아니긴 뭐가 아니야. 상태가 이렇게 안 좋은데. 몸이 아픈 거야?”
에반이 당황해서 바네사와 시선을 맞추었다. 선한 갈색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였다. 바네사는 팔로 제 얼굴을 가렸다.
“그런 것 아니야. 괜찮다니까.”
“너 지금 입술까지 창백해! 알고 있긴 한 거야? 내가 대위님께 말씀드릴게. 다시 가서 좀 쉬어.”
“아냐, 오늘은 일해야 끝나.”
“말도 안 돼! 일하다 쓰러지겠다고….”
에반이 입을 뚝 멈췄다.
“야, 바네사…. 너 설마 지금.”
우냐는 말은 내뱉지도 못했다. 바네사의 팔로 가려진 부분 아래로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얗게 질린 뺨이 눈물로 젖어 들었다. 바네사는 결국 쪼그려 앉아 얼굴을 모두 가렸다.
에반은 급하게 바지부터 시작해서 가슴팍에 달린 주머니까지 모두 뒤졌지만 당연히 손수건 같은 것은 없었다. 그는 다쳐도 손으로 슥 훑어 낸 다음에 다시 뛰어다니는 그런 종류의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아으, 진짜!”
에반은 발만 동동 굴렀다. 그는 항상 예의와 품위를 강조하는 아버지가 손수건은 기본으로 들고 다니라는 잔소리를 하시던 것을 기억했다.
아버지, 저를 좀 더 혼내셨어야죠!
하지만 아무리 후회해 봐야 늦은 일이었다.
“나 손수건도 없다고! 야, 야! 내가 아까 너무 강하게 쳤어?”
에반이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바네사의 주변을 계속 서성대자 바네사는 고개도 들지 않고 팔만 뻗어 에반의 다리를 밀어냈다.
“먼저 가. 괜찮으니까….”
“어떻게 가! 친구가 우는데 가냐? 이건 자존심 문제야. 리나나 체바티였으면 가라고 했겠냐고!”
“아카데미도 아니고 일하는 곳이니까 가라고 했겠지. 시간 맞춰서 들어갈게.”
바네사의 목소리는 흔들림 하나 없이 멀쩡했다. 에반은 바네사가 우는 것을 본 것도 사실 착각은 아니었는지 헷갈렸다.
그래서 웅크린 바네사를 보다가 느리게 중얼거렸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없어?”
“괜찮아. 다른 문제야.”
그래, 그런 대답이 돌아올 줄 알았다. 하지만 이게 옳았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가 해 줄 수 있는 것도, 해야 하는 것도 없었다.
에반은 가만히 허리를 숙여 바네사의 어깨를 가볍게 쥐었다가 놓았다.
잠시 머뭇대던 발이 스쳐 지나가고, 바네사는 고개를 들어 흘렀던 눈물을 닦아 냈다. 날이 지나치게 좋아서 제가 하는 꼴이 더욱 우스웠다.
붉어진 눈을 바람에 식히고 들어가 슬리만 대위와 그레인 중위에게 어제는 죄송했다고 인사를 건넸다. 에반에게도 다시 정리된 미소를 돌려주었다.
⚜ ⚜ ⚜
바네사는 책상 위에 남아 있던 서류를 모두 해치웠다. 다른 특전대원들도 시간에 허덕이긴 했지만 노을이 지기 전에 맡았던 서류들을 모두 정리할 수 있었다.
그들은 마지막으로 지도에 위치를 표시하고는 펜을 내던졌다. 그리고 침대를 갈구하며 바닥을 굴러다니다 사람들의 발에 차였다.
“대장님이 위임하셨으니 파견 지역은 내 맘대로. 파견 인원 구성도 내 맘대로다.”
모두가 일을 끝냈다는 소식을 들은 잔크발 중장이 내려왔다. 그는 반대 의견 따위는 절대로 받지 않겠다는 단호한 얼굴이었다.
그 말에 에반은 주변을 곁눈질하고는 고개를 저었다. 온화하기로 유명한 대원들은 어딜 갔는지 영 보이지 않았다. 말하자면 어디랑 붙든 행복한 파견은 글러 먹은 것이다.
“밤 반달루의 마법진을 찾아낸 곳들은 거의 서부, 북부에 한정되어 있다는 걸 알고 있겠지. 남부, 동부는 비교적 평안했던 덕분인데 과거 특전대 토벌 지역들은 오히려 이쪽에 많아.”
“남부, 동부로 보내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동부 아말과 씨시, 샹벨, 이니스. 남부 힐리아나와 플레르, 레체로. 1차 파견은 이 정도로 하겠다.”
“이미 파견 간 대원의 수가 많습니다. 씨시, 이니스, 힐리아나, 플레르는 모두 대도시고요. 인원이 부족하지 않을까요?”
누군가의 질문에 잔크발 중장은 드문드문 난 턱수염을 문지르며 말했다.
“우리의 목표는 해당 지역을 토벌하는 게 아니다. 과거 토벌 지역을 살펴보고 밤 반달루의 마법진 흔적을 찾아내는 것이지. 위험할 게 없다. 귀찮을 뿐.”
잔크발 중장은 남아 있는 대원들을 대충 둘러보고는 몹시 성의 없는 말투로 그들의 이름을 줄줄 부르기 시작했다.
이름은 길게 이어졌다. 골목이 넓고 복잡하며 주변을 살필 곳이 많은 대도시에는 최대 5명까지 인원이 배정되었고, 육체적으로 특화된 대원들과 마법에 특화된 대원들이 알맞게 고루 분포되어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들의 이름이 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