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rely, Vanessa RAW novel - Chapter (116)
선생님께, 바네사로부터 116화(116/146)
“이니스는 슬리만 대위가 이끌고, 그레인 중위와 로즈, 리아스 소위가 함께 간다.”
그레인이 급히 손을 들었다.
“저는 북부가 잘 맞습니다! 더위를 많이 타거든요. 저만 다른 곳으로 빼 주십시오!”
“난 너희끼리 치고받고 싸우는 것에 관심 없다. 그레인 중위, 그렇게 대위랑 안 맞으면 번번이 사고 쳐서 승진에서 탈락하지 말고 위로 좀 올라가.”
잔크발 중장은 험악한 말투로 종이를 구깃구깃하게 접었다. 그레인은 더 이상 반박하지 못하고 시무룩하게 손을 내렸다.
“더 이상의 의견은 없는 걸로 알지. 있어도 마음속에 간직한 채 입은 다물어라. 파견지에 대한 정보는 서류로 나누어 주겠다.”
잔크발은 심드렁하게 종이 무더기를 책상 위에다가 던져 놓았다.
“모두 내일 정오까지 파견지에 도착하길 바란다. 준비를 철저히 하고 떠나도록.”
그러고는 그대로 문을 열고 떠나 버렸다.
공간 안에 와글와글 몰려 있던 대원들의 반응은 제각기 달랐다.
누군가는 내일 오전까지 주어진 휴식을 즐기러 빠르게 뛰어나갔고 누군가는 주어진 파견지의 내용을 탐독하며 어딜 먼저 확인해야 할지를 고심했다.
슬리만과 그레인은 당연히 전자라 종이 한 장 들고 쏜살같이 도망쳤고, 에반은 적당히 중간이라 읽다가 도망쳤다. 혼자 남은 바네사는 종이를 들고 복도로 걸어 나왔다.
너르고 길게 뻗어 있는 어두운 복도는 한산했다. 낯만 겨우 익힌 대원들이 가끔 돌아다니며 바네사에게 인사를 건넸다.
머뭇대던 발끝은 일단 아까 일하던 책상 앞으로 돌아갔다. 주어진 종이 위의 활자에 집중하여 이니스에 대한 정보를 익혔다. 찾아봐야 할 곳, 주변 지형, 발견 빈도가 높은 마물들을 꼼꼼히 확인했다.
하지만 그 일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시침이 한 바퀴 돌기도 전, 바네사는 종이 위의 모든 내용을 머리에 집어넣을 수 있었다.
펜을 놓은 바네사는 잠시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러다 손을 뻗어 책장에 꽂지 않은 서류 묶음 하나를 끌어왔다. 기드온의 이름이 새겨진 가죽 장정.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아….”
바네사는 힘없이 이마를 책상에 박았다. 나무의 차가운 기운이 이마의 열을 식혀 주는 듯했다. 그러나 두통은 쉽게 나아지지 않았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일어나서 책상 위를 정리한 뒤 그의 보고서를 챙겼다.
아무리 두렵고 무섭다 해도 지금이 아니라면 대화할 시간이 없었다. 기드온도 당장 내일, 왕의 명을 수행하기 위해 신전으로 떠날 테니까.
문을 열고 나오자 복도는 어느새 텅 비어 있었다. 대다수의 대원들이 내일 파견이 예정되어 있는 덕분이었다.
덕분에 2층에 있는 기드온의 집무실로 향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숨을 필요도 없이 그저 똑바로 걸어가면 충분했다.
다만 감정적으로는 단 한 걸음을 걷는데도 어딘가를 질주라도 하는 것처럼 숨이 가빴다. 가슴 아래 박동이 손끝에서도 느껴질 지경이라 눈앞이 자꾸만 아득해졌다.
제발.
바네사는 누구에게 하는지 모를 기도만 계속했다.
특전대장의 집무실은 두 번째 층 복도의 가장 끝 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바네사는 그 앞에 서서 주먹을 꾹 쥐었다. 마디가 새하얘지도록.
툭.
겨우 한 번. 두꺼운 문을 두드렸다가 놀라서 제풀에 물러났다. 그때 품 안에서 무언가 구겨지는 느낌이 났다…. 선생님의 편지였다.
바네사는 손에 쥔 서류를 내려 보았다. 그리고 그대로 문고리를 잡아 문을 열었다.
커다란 창을 배경으로, 제복 안에 커다란 몸을 가둔 남자가 앉아 있었다. 붉게 노을 지는 빛에 물든 머리카락은 반짝이는 황금색이었다.
바네사는 무표정했던 남자의 얼굴이 그녀를 발견하고 화려하게 피어나는 것을 보았다. 잠시 크게 뜨였던 눈이 휘어지며 환한 웃음을 머금었다.
바네사는 저도 모르게 숨을 삼키며 서류를 뒤로 숨겼다.
“바네사.”
기드온은 일어나서 바네사의 곁으로 성큼 걸어왔다. 그는 기쁨을 숨기지 못하는 태도였다. 커다란 손이 조심스레 창백한 뺨을 쓸었다.
“예상치 못하게 찾아오니 정말 선물 같군요. 물론 당신은 언제든 그렇지만… 왜 이렇게 창백합니까. 파견이 결정 났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동부의 이니스로 간다고.”
바네사는 더듬더듬, 뭐라고 대답했다. 남자는 걱정스레 눈을 살짝 찡그렸다.
“괜찮습니까? 어쩐 일로 여기를 다 찾아왔나 했는데. 몸이 좋지 않아서 온 겁니까?”
바네사는 그가 이끄는 대로 낮은 탁자 옆 소파에 앉았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하나의 몸체에서 두 개로 나뉘어 자란 마음이 싸웠다.
지금이라도 나가. 아무 말 하지 마. 그와 지금 행복하잖아. 그가 선생님인 것이 무슨 상관이야.
비밀을 숨기고 행복해질 수는 없어.
왜? 도대체 뭐가 궁금해?
그가 무엇 때문에 숨겼는지 알고 싶어. 말할 기회가 여러 번 있었잖아.
숨긴 이유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러면….
“바네사. 바네사?”
커다란 손이 그녀의 손을 감싸 주무르기 시작했다. 차갑게 굳은 손끝에 닿은 남자의 체온이 몹시 뜨겁게 느껴졌다.
바네사가 영 대답이 없자 그는 진심으로 걱정스러운 기색이었다.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눈도 부은 것 같은데….”
그의 손이 아직 열감이 남은 눈시울을 어루만졌다. 섬세하게 움직이는 손끝은 닿는 것만으로도 부서지는 유리 조각을 더듬듯 조심스러웠다.
그 다정함을 느낀 눈시울이 경련했다.
제발.
“이게 뭔지 듣고 싶어요.”
기드온은 의아한 표정으로 불쑥 내밀어진 서류를 잡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서류를 몇 장 넘겨 본 남자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바네사는 품속에 있던 편지도 꺼내 그에게 건넸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왜….”
공간 안에는 바네사의 목소리만 고요하게 울렸다. 남자는 창백해 보일 정도로 하얗게 질려 있었다. 힘이 들어간 턱선이 눈에 띄었다.
“왜 말 안 했어요?”
“바네사.”
“지금까지, 이게 다 뭐예요? 내가 불쌍해서…”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은 것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바네사는 결국 말을 끝맺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시야가 부옇게 흐려졌다. 습해진 속눈썹이 무겁게 느껴졌다.
기드온이 초조하게 입을 떼려 할 때, 누군가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대장님, 제냐타 백에게서 연락이-, 이런.”
잔크발 중장이었다. 그는 바네사를 흘끔 보고는 심드렁히 내뱉었다.
“급한 일이니 나가 주겠나, 소위?”
“잠시-”
“네, 그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바네사는 벌떡 일어나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그녀를 놓친 기드온이 눈을 질끈 감았다.
“대장님? 소위랑 무슨 일이.”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잔크발이 그를 불렀으나 이명처럼 웅웅 대는 소리만 들렸다. 기드온은 이를 악물고 간신히 눈을 떴다.
“보고해.”
⚜ ⚜ ⚜
바네사는 작은 방 안에서 파견 나갈 때 가져갈 짐을 챙기고 있었다.
짐은 많지 않았다. 봄이 찾아왔기에 옷은 점점 가벼워졌고 특전대임을 숨길 필요가 없어 챙겨 갈 건 별로 없었다.
아무렇게나 짐을 던져 가방 안에 넣었다. 안에 든 것들이 엉망진창으로 뒤섞여도 일단 밀어 넣고는 가방을 닫았다. 어느새 두툼해진 가방만 덩그러니 바닥에 남아 있었다.
바네사는 일부러 머리를 비우려고 노력하며 어질러진 방을 정리했다.
많은 생각이 독이 되는 경우가 있었다. 바로 오늘 같은 날이었다. 지나치게 부정적인 생각들이 밀려와 스스로를 잡아먹었다.
특전대장의 집무실을 빠져나오며 수십 번을 후회했다.
말하지 말걸. 그냥, 모른 척 지나갈걸.
아니, 말하더라도 적어도 오늘이 아니었어야 했다. 당장 그는 신전으로 떠날 텐데 아무것도 정리하지 못한 채로 떨어지게 되는 거니까.
그의 창백해진 표정이 마음에 걸려 속이 답답했다. 안 그래도 피곤했을 텐데 제가 마지막 일격을 날린 셈이었다.
적어도 새하얗게 질리는 얼굴을 보니 자신이 불쌍해서 만나 준 것이 아니라는 건 잘 알겠다. 그럼 도대체 왜 말하지 않은 거야. 적어도 새로운 관계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말했어야 하잖아….
바네사는 단단한 침대에 이마를 세 번이나 박으며 스스로를 괴롭혔다.
말했어야 할 문제인데, 왜 말하고 후회가 되는지.
사실 답은 알고 있었다. 그건 아마 그의 눈빛을 보았기 때문에.
바네사는 입술을 꾹 물었다.
똑똑.
퍼뜩 고개를 들었다. 누군가가 방의 나무 문을 두들기고 있었다.
“로즈 양? 미안한데 잠시 문 좀 열어 줄래요?”
숙소 주인의 목소리였다. 다만 보통 때와 달리 아주 조심스럽고 점잔 빼는 목소리라 몹시 다르게 느껴졌다. 바네사가 급히 문을 열자 주인은 벙긋 웃고 있었다.
“무슨 일이세요?”
“아래에 손님이 왔거든. 불러 달라고 부탁해서 말이야.”
바네사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주인은 비밀을 알려 주듯 속삭였다.
“후드 아래로 살짝 보인 게 다지만, 내가 본 사람 중에 가장 잘생겼던데. 몸도 좋고 말이야.”
바네사는 말없이 얇은 겉옷을 걸쳤다.
기웃대는 주인을 뒤로하고 바네사는 일 층 문을 빠져나왔다. 기드온의 눈을 마주치지도 않고 팔을 잡아 좀 더 깊은 골목 쪽으로 끌었다. 저번에 제냐타 백작 저택에 다녀온 날 새벽, 그가 있던 곳이었다.
그때는 그가 찾아와 그저 기뻤는데, 지금은 그럴 수가 없다는 게 못내 씁쓸해졌다. 같은 자리, 같은 사람. 하지만 다른 기분.
흐릿한 빛 아래에서 마주한 남자는 흐트러져 보였다. 급히 왔는지 정리되지 못한 숨이 눈에 띄었다.
바네사는 그가 먼저 입을 떼기를 기다렸지만 어디론가 달려가는 마차 소리만 간혹 들려올 뿐이었다.
“모사라로 갈 준비를 하고 있을 줄 알았어요. 당장 내일 새벽에 떠나야 하는 것 아니에요? 사안이 급하잖아요.”
그녀의 속삭임에 기드온은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내 반쯤 먹힌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맞습니다.”
“그럼 가세요. 나도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요.”
바네사는 최대한 부드럽게 말하려고 했으나 그에게는 그렇게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 같았다.
기드온이 느리게 눈을 내리떴다. 바네사는 강하게 쥐고 있는 그의 손 마디가 희게 질린 것을 눈치챘다.
긴장감이 지나쳐 숨이 막혔다. 가장 하고 싶은 말 대신 다른 걸 물었다.
“그 글씨체는 어떻게 된 거예요?”
“…왼손으로 쓰면 그렇게 됩니다. 예전에 다쳤을 때, 그쪽 손으로 펜을 잡아서.”
“그렇구나. 다듬어진 필체라서.”
다른 사람이라고…. 말끝이 흐려졌다. 남자의 입술이 다시 굳게 다물렸다. 그 모습이 어쩐지 부서질 듯 아슬해 보여 갑자기 화가 치밀었다.
“날 좋아했던 건 맞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