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rely, Vanessa RAW novel - Chapter (117)
선생님께, 바네사로부터 117화(117/146)
“바네사.”
음울한 목소리였다. 바네사는 그래도 멈추지 못했다. 속을 게워 내고 싶어서. 뭐라도 탓하고 싶었다. 그게 기드온이면 더욱 좋았다. 자신이 상처받은 것처럼 그도 상처받기를 원했다.
“사실 날 그냥, 동정해서 그런 건 아니에요? 구분하지 못한 건 아니냐고요.”
“바네사는 나를 너무 좋은 사람으로 보는군요.”
기드온이 참지 못하고 말을 잘라 냈다.
“내가 당신을 동정해서 이런 것 같습니까?”
“난….”
“당신 손길 하나면 기꺼워서, 하루 종일 정신을 놓고 다니는데. 이게 고작 동정이라고.”
“그럼 왜 말하지 않았는데요?”
바네사가 뿌옇게 변한 눈을 숨기려 시선을 내렸다. 눈물이 방울져 떨어질까 봐 일부러 눈을 크게 떴다.
“나와 새로운 관계를 맺기 전에, 아니 맺은 후에라도 말해 주었어야 하지 않아요? 도대체 뭐가 그렇게 걸렸어요?”
바네사는 눈을 마구잡이로 문질렀다. 결국 손등 위로 눈물 자국이 번졌지만 그를 티 내지 않으려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내, 내가 얼마나 선생님을 보고 싶어 했는지 알잖아요. 당신에게도 여러 번 말했잖아요….”
“…압니다. 항상 그게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러나 당신을 속이려는 의도를 가졌던 것은 아닙니다.”
“그럼요?”
떨어져 내리는 시선이 무거웠다. 그의 입술은 굳게 다물려 있었다.
답을 기다리고 있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바네사는 어딘가로 도망치고 싶었다.
답을 듣고 싶기도 했고 듣고 싶지 않기도 했다. 그에게 사실을 알려 달라 말한 게 후회되었다. 그의 입술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이 순간이 끔찍하게 떨렸다.
“당신이, 언제부터 좋아했냐고 물어본 적이 있죠.”
바닥을 긁고 나오는 듯 거칠었다. 바네사는 나직한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나는 그게 언제부터인지 잘 모릅니다. 처음엔 그냥, 당신의 편지가 흥미로웠습니다.”
그는 과거를 더듬는 것처럼 느릿느릿, 제 이야기를 토해 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편지가 오는 간격을 세고 있더군요. 그렇게 하루 이틀이 쌓이고 당신이 궁금해졌고… 님루드에 가서 당신을 만났죠.”
잔잔한 비에 젖어 드는지도 모르고.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신은 아주… 다정했고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땐 그게 다였습니다. 그저 당신이 행복하길 바랐고 즐거웠으면 했습니다.”
바네사는 제 손톱 끝이 손바닥에 파고드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실습이 끝나고 당신과 연락이 끊긴 후부터는 매일 밤,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항상 초조했고…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죠. 그냥 당신에게서 올 편지만을 기다렸습니다. 나에게는 보내지 않더라도 선생님에게는 보내 주었으니까.”
“…….”
“그리고 어느 순간, 이 감정이 무엇인지를 알겠더군요.”
기드온이 지친 미소를 지었다.
바네사가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는 사이, 기드온은 눅눅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정말 놀랍게도 당신은 내게 호감을 느꼈고, 애정을 표현했습니다. 도저히 그 손을 거부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건 제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니에요.”
바네사가 중얼거리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두 사람 모두 서로의 눈을 바라보지 않고 있었다. 시선이 어긋나 표정이 흐릿했다.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내가 당신에게 말하지 못한 건, 당신이 나를 버릴까 봐 무서웠던 것이니까.”
“뭐라고요?”
바네사는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지만 벽의 그늘에 가려진 그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버리다니, 그게 무슨 말인지….
“나는 내가 언제부터 당신을 좋아하게 된 건지 잘 모릅니다. 그래서 나에 대한 당신의 감정이, 내가 의도하여 만들어 낸 것이면 어떡하나 하고.”
우리가 만난 것은 우연이 아니지 않습니까. 님루드부터 퓌돔까지. 내가 오히려 당신의 편지에 기대어 애정을 취한 게 아닐지 하여.
“나는 도저히 당신이 나를 좋아하는 이유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사실 날 좋아하는 게 아닐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다정하고 상냥하고, 내가 아니라도 더 좋은…”
남자의 목소리가 낮게 갈라지다 이내 희미해졌다. 그의 목울대가 크게 울렁였다.
“당신이 내가 선생님이라는 걸 알아차리는 순간, 혹시 나에 대한 감정도 깨지는 것이 아닐까 두려워서… 그랬습니다. 미안합니다.”
바네사는 님루드에서 그를 만났던 날, 퓌돔에서 함께 거리를 거닐던 날을 떠올렸다. 그의 말대로 분명히 우연한 만남은 아닐지도 몰랐다.
하지만. 하지만 그건….
바네사는 울컥이는 숨을 내리눌렀다. 고르지 못한 숨에 가슴이 덜컥거리는 게 눈으로도 보일 지경이었다.
기드온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여러 번 입술을 달싹이다 결국 아무 말도 내뱉지 못하고 한 발짝 물러났다.
겨우 한 발짝인데도 그 간격은 몹시 멀게만 느껴졌다. 바네사는 위태위태하게 연결된 다리를 두고 절벽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자신의 한마디에 끊어질 수 있는, 얇은 줄 하나.
“당신이… 무슨 결정을 하든 내가, 최대한….”
희부연 빛에 속눈썹이 느리게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바네사는 그가 잠에 빠진 사이, 저 속눈썹을 소심하게 쓸어 보던 밤을 떠올렸다.
“그 말을 지키겠습니다. 편히 알려 줘요.”
바네사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그냥 몹시 피곤해졌다.
멍하니 서 있는 바네사를 보고 기드온이 속삭였다.
“들어가는 것만 보고 가겠습니다. 추우니 어서 들어가요.”
바네사는 떠밀리듯 숙소의 문 앞으로 향했다. 그리고 어떤 결정을 내리든, 이 말을 하지 못하면 후회할 것 같아 간신히 입을 뗐다.
“잘 다녀오세요.”
조용한 인사. 그는 매끄러운 미소의 가면을 썼다.
“그럴게요.”
바네사는 숙소 문을 열어 안으로 비틀대는 발을 내디뎠다. 등 뒤로 문이 닫히는 것이 느껴졌다.
“이 저녁에 무슨 일이래. 저번부터 궁금했는데 저 남자랑은 무슨 사이야? 설마 애인은 아니지?”
항상 모든 것에 관심 없이 심드렁한 눈을 하던 주인이 캐물었지만 바네사는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 차가워진 손으로 발갛게 달아오른 눈두덩이를 짚었다….
잠시 후, 바네사는 다시 뛰어나갔다. 하지만 이미 골목은 텅 비어 있었고 남자의 뒷모습도, 그 무엇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그런 고백을 듣고 싶었던 것이 아닌데.
그런 게 아니라, 그냥….
바네사는 저도 무엇에 대한 답인지 알 수 없는 말을 되풀이해서 중얼거렸다.
그런 게 아닌데.
⚜ ⚜ ⚜
바네사는 그날도 제대로 잠들지 못했다. 선생님에게서 온 편지를 꺼내 하나하나 읽었다. ‘선생님’이 아니라 기드온의 이름으로 왔던 것까지 모두 다.
‘그러게요. 항상 제 후원자 선생님께 고마워하세요.’
‘…그래요. 매일 생각합니다. 그날 일을요.’
어째서 그의 표정이 그렇게 많은 걸 담고 있었는지.
그건 선생님께서 졸업식에 불참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같고, 자신이 손을 내밀 때까지 그가 뒤로 물러서기만 했던 이유와 같았다.
잠들었는지도 몰랐는데 몸이 극심한 피로에 기절했는지 눈을 뜨니 이미 아침이 밝아 있었다.
바네사는 텅 비어 있는 호니르 입구를 보고 잠시 가만히 서 있었다.
“아….”
지친 한숨을 뱉고는 침대 위에 주저앉았다. 오후에 파견지로 움직이기로 했으니 오전은 쉬어야 맞았다. 이런 몸 상태로 가면 도대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이렇게 고민거리가 많은 상태로 다시 잠들고 싶지는 않았다. 아마 나쁜 꿈을 꿀 게 분명했다.
바네사는 어쩐지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과 기드온을 모두 알고 있고, 제 말을 잘 들어 줄 사람. 말하는 것만으로도 해결되는 부분들이 있으니까.
고민 끝에 바네사는 어제 챙겨 둔 짐을 들고 숙소를 빠져나왔다.
특전대의 제복을 입고 나온 덕분에 흥미로운 눈초리가 따라붙었으나 그를 신경 쓸 정신은 없었다. 머릿속에 남은 건 오로지 리나네 집에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제발 리나가 아직 집에 있어야 할 텐데.
바네사는 비틀대는 걸음으로 인파가 가득한 거리를 걸었다. 재잘대는 소음이 가득했다.
자신에게 이렇게 큰일이 있었는데도 세상은 잘만 돌아갔다. 그 당연한 사실이 오늘따라 분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상점 가판대에 놓인 잘 익은 과일들의 울긋불긋한 색감, 질 좋은 천의 차르르한 광택이 제겐 모두 잿빛이었다.
어딘지 붕 뜬 발걸음으로 분홍빛이 강렬한 지붕을 가진 집 앞에 섰다. 제법 먼 거리였음에도 머리가 하얗게 빈 채로 걸어서 그런지, 어쩐지 순식간에 도착한 기분이었다.
문 앞에 달린 종을 울리자 정갈하게 차려입은 사용인이 나타나 문을 열어 주었다.
“어머, 안녕하세요. 리나 아가씨의 친구분이시죠?”
“네, 맞아요. 잘 지내셨죠…….”
웅얼대는 인사에도 상냥한 미소를 지어 준 사용인은 별다른 말도 없이 리나가 있는 곳으로 안내해 주었다.
다행히도 리나는 아직 출근하지 않고 나갈 준비를 마친 채로 식사 중이었다. 리나는 사용인과 함께 들어온 바네사를 보고 눈을 치떴다.
“뭐야, 바네사?”
“미안해, 리나. 혹시 지금 시간 되니? 곧 일할 시간인 거 아는데….”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해. 짐을 끌어안고 시무룩한 표정의 바네사를 보고 리나는 혀를 찼다.
“일단 들어와. 쉬는 시간 끌어 쓰면 되니까. 아니면 저녁에 더 일하지, 뭐.”
리나는 바네사가 서 있는 쪽으로 몇 가지 음식들을 밀어 주었다.
“아침 식사는 했어? 오늘은 일하러 안 가니?”
“아니… 식사는 안 했어. 오후에 파견지로 출발해서 오전은 쉬면 돼.”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바네사가 갑자기 훌쩍이기 시작하자 리나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너 지금 진짜 웃긴 거 알지? 나 아침 먹고 있었거든?”
“미안해….”
바네사는 짐을 아무렇게나 내려놓고 구석에 놓인 소파에 엎어졌다. 리나는 그 모습을 흥미롭게 구경했다.
“또 무슨 일인데? 난 네가 그럴 때가 제일 재미있더라.”
“재밌는 거 아니야!”
고개를 발딱 든 바네사가 버럭 소리쳤으나 리나는 더욱 활짝 웃었다.
“그건 내가 판단해야지. 자, 어서 말해 봐.”
리나는 빵에 버터를 두껍게 바르기 시작했다. 약간 여윈 바네사를 듬뿍 먹일 생각에 흥이 난 참이었다.
쟤는 좀만 혼자 두면 살이 빠진다니까. 제 몸이라고는 돌볼 줄 몰라서 그렇지. 그래도 요즘엔 ‘그 남자’가 잘 챙기는 것 같았는데, 바쁘다더니 잘 못 만났나?
일단 버터 바른 빵을 좀 먹이고, 후추를 뿌린 하얀 닭고기를 먹여야지. 잼은 네 스푼쯤, 설탕을 듬뿍 넣은 차랑 크림이 잔뜩 올라간 케이크까지 먹이면 그나마 만족스럽겠어.
리나는 신이 나서 버터를 두 겹이나 바르고 있었다….
“선생님이. 선생님이 기드온이었어.”
그리고 버터나이프를 떨어트렸다. 쨍 소리를 내며 떨어진 나이프를 잠시 바라본 리나는 얼굴을 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