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rely, Vanessa RAW novel - Chapter (120)
선생님께, 바네사로부터 120화(120/146)
신전은 모든 곳이 새하얗게만 보이는 곳이었다. 하얗게 부서지는 햇살을 형상화한 것처럼.
하얀색 기둥이 위로 치솟아 거대한 천장을 떠받들고 있었고 유려한 곡선들로 이루어진 문들은 삐뚤어진 곳 하나 없이 완벽한 대칭이었다.
거대한 규모와 달리 내부는 인적이 없고 몹시도 고요해서 단단한 군화 밑창이 돌바닥을 딛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아마 대다수의 신관들이 기드온의 마법에 짓눌려 있는 탓임이 분명했다.
근처에 서 있던 법무부원이 가볍게 눈짓하자 그 휘하 관료들이 곳곳으로 흩어졌다.
그들은 신전에 남아 있는 모든 서류를 들고 올 것이다. 의심스러운 구절을 찾아내어, 따지고 윽박지르며 진실을 토해 내라 소리치리라.
법무부와 별개로 특전대는 남아 있는 마법의 흔적들을 찾으러 흩어지기로 했다. 특전대원들은 울적하고 사나운 기드온과 남지 않으려 잽싸게 사방으로 흩어졌다.
“다들 대장님에게서 도망치는 솜씨가 훌륭하네요.”
“…….”
아리아나는 흥미롭게 기드온을 바라보았다. 워낙 감정의 폭이 크지 않은 것으로 유명했던 사람이었던 터라 서늘해 보이는 모습이 더욱 궁금증을 자아냈다. 그럼에도 기드온은 침울한 기분을 숨기지 못했다.
“고생하셨는데 일이 끝나면 식사라도 함께 하시는 건 어떠세요? 전 이야기 나누기에 제법 좋은 사람이랍니다.”
제법 자신감 넘치는 미소가 따라붙었으나 기드온은 냉정하게 눈길을 돌렸다.
쌀쌀맞게 몸을 돌린 기드온은 신전의 뒷길로 향하려 했다. 열려 있는 문틈 새로 뒤의 나무숲과 연결된 길이 보였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숨기기 딱 좋아 보이는 곳이라 다른 대원들을 보내기 전, 그가 먼저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마 누군가가 나타나지만 않았다면 분명히 그러했을 것이다. 흘러가는 시선에 새하얀 로브 자락이 눈에 띄었다.
기드온은 무료하게 시선을 마주했다.
“오랜만에 보네요, 기드온. 아, 이제 발데르 공이라고 해야 하나.”
“비에타 님.”
기드온이 가볍게 예를 표했다. 비에타라고 불린 소년인 듯, 청년인 듯한 사람은 빙긋 웃었다. 긴 검은 머리카락이 아무렇게나 자라 길이가 삐죽삐죽했다.
“돔 프리바는 붙여 주지 않는군. 하긴, 이미 빼앗긴 성이지…. 오느라 고생했어. 차 한잔 할래?”
“어찌 이런 짓을 하셨습니까.”
조용한 물음에 비에타는 눈을 휘어 웃었다.
“날 알잖아요. 아닌가? 일단 들어가요. 저긴 핀을 보아하니 법무부군. 법무부가 왔다면 함께 자리하지.”
순식간에 걸어온 아리아나가 옆에서 생긋 웃고 있었다. 기드온은 짜증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결국 뒤를 따랐다. 빌어먹을, 빨리 신관 내부 수색을 끝내고 돌아가야 하는데.
비에타는 안쪽의 작은 방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신전에 딸린 공간치고는 안이 제법 화려했다. 부족한 것이 없어 이곳이 어느 귀족의 성 안이라 착각할 법한 그런 모양새였다.
왕이 ‘어미와 함께 반역을 꾀한 동생’에게 관대하다더니, 그게 확실히 드러나는 모습이었다.
기드온과 아리아나는 우아한 곡선의 탁자에서 주인이 대접해 주기를 기다렸다.
비에타는 직접 주전자에 물을 담아 끓이기 시작했다. 기드온은 마력을 풀어 방 안을 확인하고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이곳에 설치된 마법진 따위는 없다는 뜻이었다. 아리아나는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까딱이며 웃었다.
“누님은 잘 계셔?”
“덕분에 밤잠 못 이루고 계시지요.”
아리아나가 빙그레 웃자 비에타는 물에 찻잎을 덜어 넣었다.
“그렇게라도 내 생각을 해 주신다면 좋지. 나야 항상 누님을 좋아하였지 않아.”
물을 따르는 소리가 났다.
“투정이 과하셨습니다.”
비에타가 건넨 찻잔을 공손히 받아 들며 아리아나가 말했다. 비에타는 삐뚜름하게 웃었다.
“투정이라니.”
“프리바 전역에 피해가 컸습니다. 사망한 자들이 얼마나 되는지는 알고 계시나요?”
“하하,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네. 난 그대를 모르고, 그대도 날 모르지.”
비에타는 기드온에게도 찻잔을 넘겨주고 의자를 끌어 앉았다. 아무렇게나 길어진 검은 머리, 홍채의 색이 옅어 맹금 같은 회색 눈동자. 일견 왕이 떠오르는 모습이었다.
아리아나가 다시 입을 열려 하자 비에타는 손을 들어 막았다. 그리고 기드온에게 시선을 돌렸다.
“법무부가 대신 말하게 시키는 건 아니지? 내가 하는 모든 말을 증거 삼으라 데려온 것은 맞지만 관심은 없어. 오랜만에 그대랑 말하고 싶은데.”
“…….”
“당신은 누님의 가장 강력한 측근이 될 사람이었지…. 검만으로도 충분했는데 내가 여기에 들어오고 나서 퍼지는 소문에는 굉장한 마법의 힘까지 타고났다고.”
기드온은 여전히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비에타는 희미하게 웃었다.
“부럽군, 부러워. 하긴 난 딱히 재능도 없어 그렇게 되진 못했겠지만. 그래도 그림 실력은 그대보다 좋을걸? 여기서 할 거라곤 그 정도라. 아, 아니지. 연기 실력도 제법이거든….”
“그래서 이 일에 참여하시게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
기드온이 조용히 묻자 비에타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늘어트렸다. 그는 가만히 있다가 불쑥 중얼거렸다.
“미친 어미한테 보고 배운 게 그거라 그렇지, 뭐. 알잖아. 우리 어머니가 폐하를 죽이고 날 왕으로 세우려 했던 거.”
“비에타 님.”
건조한 목소리가 탓하듯 따라왔다. 비에타 돔 프리바는 킬킬댔다.
“아니, 진짜로. 내가 아직도 그대 등에 대롱대롱 매달렸던 어린애는 아니잖아. 그렇게까지 안 믿긴다는 눈이라니. 하긴, 그때는 그대도 어렸지. 내가 그대 목검을 가지고 도망쳤는데. 기억나?”
기드온도 생생히 떠올릴 수 있었다. 어린 소년의 질투 가득한 눈빛, 하지만 손길 하나에 다 잊어버리고 말갛게 부풀던 웃음.
하지만 소년의 어미가 소년을 이용하여 왕위를 넘본 뒤로 그 평온했던 일상은 날카롭게 깨져 버렸다. 왕은 여자를 처형했으나 차마 제 무릎 위에 뉘어 재우던 동생은 죽이지 못했다. 정치적 부담까지 지며 그를 살렸고, 신전에 유폐한 뒤 기록을 삭제했다.
“하여튼 미안해. 나 때문에 고생했겠어. 내가 함정을 파느라 그대를 노리라고 자주 칭얼거렸거든. 죽여도 죽지 않을 것 같아서 그랬는데….”
기드온은 흐려지는 말끝이 딱히 불쾌하지 않았다. 비에타의 말이 옳았다. 다른 자들을 노리느니 차라리 자신을 노리는 게 나았다. 수많은 직함으로 보호받고 있으니 시도가 몇 번 걸러져 그나마 안전했을 것이다.
“그래도 내 덕에 로시니를 좀 더 쉽게 잡았을 테니 봐 달라고. 혹시 못 잡았나?”
“잡았습니다.”
“그렇군. 그는 아직도 내 어머니가 죽고 혼자 살아남은 것에 대해 죄책감을 가지고 있더군. 나름 동생을 아꼈는지… 이용하기 좋았지.”
비에타는 로시니 후작이 제 친척이 아니라는 것처럼 이질적으로 발음했다. 차를 한 모금 넘기고 나서야 낭랑한 목소리로 돌아왔다.
“근데 기드온, 낯빛이 왜 그래? 내가 그댈 오랜만에 봐서 뭘 모르는 건가.”
기드온이 수척해진 뺨을 대충 쓸어 내자 비에타는 갸웃 고개를 기울였다.
“꼭… 무슨 차인 사람 같아. 칙칙하고 어두운 게… 정신도 반쯤은 딴 데 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닙니다.”
어쩐지 힘없는 대답이 돌아오자 비에타는 흥미로운 얼굴을 했다.
“뭘 아니야? 내가 여기에 갇혀 있긴 했지만 사람들 감정 알아채는 데엔 탁 트였다고. 재미있을 것 같은데! 말 좀 해 봐. 왜 그런 얼굴이야?”
“제게 따로 더 언질 줄 게 있으십니까?”
“나 참, 말 돌리는 거 봐. 죽어 있는 눈에 대고 뭔 말을 하겠어? 차라리 법무부원 붙잡고 혼잣말을 하지.”
투덜대는 목소리에 한숨이 터져 나왔다. 어림잡아 15년 만에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간파당할 얕은 속이라니.
비에타의 말이 맞았다. 정신이 빠져 있었다.
그냥 이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넘기고 싶었다. 모든 것의 끝과 그 마무리가 궁금하지도 않았다. 자신이 없어도 알아서 잘 해결될 테니 어서 신전을 떠나 퓌돔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바네사에게 제대로 사과하고 싶었다. 마지막 대화에서는 오직 제 변명만 급급했던 것 같아서 곱씹을수록 스스로가 미친놈처럼 느껴졌다.
그냥 빌어도 모자랄 판에 당신의 선택을 존중하겠다고? 이게 뭔 개소리인가. 아쉬움이랄 것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그의 마음이 동정에서 시작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도 불식시켰어야 했다. 그녀만 그녀의 사랑스러움을 몰랐다. 어쨌든 그것 역시 자신의 죄였다.
그러니 혹시, 그녀가 다시 얼굴을 볼 기회를 준다면. 그냥 제 잘못을 빌고 간청하고. 다시는 당신에게 비밀을 만들지 않겠다, 그리 약속하면.
혹시 당신이 나를 한 번쯤 다시 돌아봐 주지 않을까.
작은 희망을 틔우다가도 절망의 수렁으로 처박히느라 바빴다. 제멋대로 치솟았다가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낙차가 심한 감정 변화에 조금의 틈만 나도 쉽사리 어지럼증이 돋았다. 그러니까, 이번엔 우울할 차례였다.
기드온은 바네사에게 어떻게 빌어야 할지 고민하느라 뒤에 있는 문이 열려도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비에타는 시선을 돌렸다가 희미한 인상을 가진 남자의 목깃에 꽂힌 핀을 보았다.
왕홀 모양을 가진 궁내부의 핀. 그렇다면 저 뒤의 키 큰 사람은….
“오랜만이구나, 비에타.”
탁자 가까이 다가온 호리호리하고 키가 큰 사람이 후드를 내리니, 짧고 숱이 많은 머리카락이 쏟아졌다. 검은 머리칼에 회색 눈동자.
그녀는 프리바의 왕, 비나 돔 프리바였다.
기대했던 얼굴에 비에타는 옅게 미소 지었다.
“폐하.”
그의 미소는 본체만체하고 왕은 항상 왔던 곳인 것처럼 제멋대로 걸음을 옮겼다. 기드온과 아리아나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가볍게 손을 휘휘 저었다.
“아, 됐어. 좀 앉아 있어. 성가시니까…. 찻물이 좀 남았나?”
왕은 주전자를 건드려 보고는 혀를 찼다. 그리고 다시 탁자로 돌아와 늘어지듯 앉았다. 그녀는 입을 쩍 벌려 하품했다가 입맛을 쩝 다셨다.
“졸려 죽겠군. 내가 도대체 몇 시간 동안 깨어 있었는지 알아?”
“꼭 삼십 시간째이십니다.”
뒤에서 궁내부원의 부드러운 대답이 돌아오자 왕은 투덜거렸다.
“젠장, 그냥 안타깝다고 말이나 하면 되지…. 공작, 그대가 입구에 신관들을 저렇게 엎어 놨어?”
“예.”
“성질 하고는.”
그 뒤로 왕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찻잔 위로 피어오르는 김이 점차 가늘어질 무렵 다시 입을 열었다.
“어찌 그랬니.”
아까와는 달리, 감정을 완벽히 가리지 못해 낮아진 목소리에 선선한 대답이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