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rely, Vanessa RAW novel - Chapter (122)
선생님께, 바네사로부터 122화(122/146)
땅을 뒤덮으며 나타난 건 녹색의 풀들이 아니라 수백 마리의 검은 뱀 떼였다. 몇 개체는 이상한 뿔과 다리가 달려 있었으나 그리 큰 개체는 없었다.
대원 하나가 불에 굽겠다며 이를 드러냈을 때, 나무들을 휘감고 부러트리며 신관들이 공들여 키운 무언가가 나타났다.
“저게 무슨…!”
대원 하나가 경악하며 신음을 내뱉었다. 기드온은 시선을 들어 올려 그 무언가를 마주했다.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키메라는 일견 용이 생각나는 모습이었다. 기드온은 바네사와 함께 보았던 ‘진짜’ 용을 떠올렸다.
그 생명체는 동굴의 그늘진 곳에서도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커다란 날개, 우아한 각도로 길게 빠진 꼬리, 날카로운 비늘과 온몸을 덮고 유영하는 근육들.
그 용과 싸우면서도 자연이 만들어 낸 작품에 경외심이 들었다. 그렇게 강하고 아름다운 생명체였다.
그러나 이 생명체는 인간의 욕심이 덧씌워져 그저 기괴했다. 거대한 뱀의 형상에 강제로 달아 놓아 달랑거리는 다리들, 이상하게 심어진 뿔들….
“웃기지도 않는군.”
냉담하게 떨어진 말에 간신히 뱀의 형상을 유지하고 있는 생명체가 쉭쉭 댔다.
그때, 뜬금없게도 용과 비슷한 무언가를 보니 기드온은 바네사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니스에서 그녀가 위험하지는 않겠지. 분명히 전혀 위험할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건강히 퓌돔에 돌아올 테고 그땐 어느 쪽이든 결정을 내리겠지. 다만 그 결정을 내리기 전에 다시 만나서 용서를 구할 수 있다면….
“대장님!”
확실히 정신이 나간 게 맞았다. 거대하게 벌어지는 뱀의 아가리 앞에서 촘촘한 속눈썹으로 감싸인 새파란 눈을 떠올리고 있으니.
기드온은 길게 숨을 토해 내며 애써 떠오르는 잔상들을 지워 냈다.
“물러나라.”
음울한 기드온의 목소리에 대원들은 재빨리 발을 뺐다.
칠흑 같은 검은 날이 허공을 날카롭게 가로질렀다. 빛의 선이 흐릿하게 스쳤을 뿐 어떠한 예고도 없었다. 그러나 나타난 힘은 분명히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그와 대원들을 중심으로 퍼져나간 파동은 그 범위에 속하는 모든 것들을 파괴했다. 숲의 반쯤 썩은 나무들이 무너져 내리고 작은 개체들은 그대로 절명했다.
그러나 가장 큰 키메라는 날렵하게 뒤로 몸을 뺀 덕에 그리 크게 다치지 않았다.
“몇몇 마물들의 가죽은 마법이 잘 통하지 않는데 그런 경우인 듯합니다. 일단 결계로 가둔 뒤에….”
누가 끼어들자 기드온은 무심하게 대답했다.
“그럴 수도.”
“예에- 억!”
기드온은 대원의 뒷덜미를 잡아당겨 뒤쪽으로 휘둘러진 꼬리를 피했다. 그리고 기회를 놓치지 않고 땅을 쓸어 내며 돌아가려는 꼬리에 검을 강하게 박아 넣었다. 힘이 실린 검이 마물의 근육과 뼈를 꿰뚫고 땅에 박히는 것이 느껴졌다.
키에엑-.
마물의 기괴한 비명 소리가 골짜기를 타고 위로 퍼졌다. 뱀의 몸에 달린 이상한 다리들이 마구잡이로 움직였다. 검에 박힌 꼬리를 찢어 내고 도망치려는 듯한 모습이었으나 기드온은 틈을 주지 않았다.
짙게 깔린 구름들 사이에서 순식간에 불꽃이 튀었다.
단 한 번.
“캬악!”
낙뢰가 내리쳤다. 대기가 번쩍이며 비명을 지르는 동시에, 내리친 강력한 힘이 마물의 껍데기를 녹여 버렸다. 마물이 고통 속에 뒹구는 와중에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단단했던 외피 일부가 녹아내리자 안쪽 연한 살이 드러난 마물은 희미한 햇빛에도 고통을 느끼는 듯했다.
“…마법이 잘 통하지 않는다며?”
“…저도 그런 줄 알았는데요.”
대원들 몇몇이 쑥덕댔다.
입에 재갈이 물리고, 무릎이 꿇린 채로 지켜보던 어린 신관은 눈을 크게 떴다.
어떻게 사람에게 저런 힘이 있는가. 하늘에서 낙뢰를 내리치는 힘이라니. 그러고도 땅에 굳건하게 발을 디디고 서 있지 않나.
하지만 동시에 그런 생각을 했다.
잘 골랐다.
결국 마지막은 그들의 승리로 끝날 것이다….
마물은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듯 커다란 머리를 기드온에게 향했다. 고통에 커다래진 동공이 붉은 홍채 속에서 번뜩였다.
“진짜 용보다는 훨씬 낫군. 불을 뿜지는 않으니.”
거대한 마물을 눈앞에 두고도 기드온은 몹시 심드렁해 보였다. 특전대원들은 다른 마물들을 찍어누르고, 후려치면서도 ‘대장이 진짜 제정신은 아니다.’라는 생각을 했다.
저 안광을 보면서 저렇게 태평하게. 특이 능력이 있으면 어쩌려고?
마물이 입을 크게 벌려 날카로운 이를 드러냈다. 유독 크고 날카롭게 빛나는 송곳니에서 검은 물이 뚝 떨어지자 흙이 타는 듯 끓어올랐다.
몸을 완전히 수축했던 마물은 튕겨 내듯 머리로 기드온에게 돌진했다. 다른 대원이 자신이 상대하던 마물을 밀어내 경로를 방해하자 거대한 뱀은 그대로 마물을 물었다.
키익!
뱀은 머리를 휘둘러 마물을 던져 버렸다. 바닥에 쓰러진 채 발버둥 치는 마물은 물린 곳부터 살점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독이군요.”
“증기화 되지 않으면 문제없다.”
거대하게 벌어진 목구멍 사이로 죽음을 예고하는 요정의 울음처럼 날카로운 소리가 치솟았다. 다른 마물을 상대하던 몇몇 대원들이 귀를 막으며 고통스러워했다.
그 틈을 타 일그러진 모습의 뱀이 쓸모없는 다리를 휘저으며 달려들었다. 하지만 기드온의 뒤에 있던 특전대원이 그를 보호하기 위한 결계를 순식간에 실현했다.
화려하게 펼쳐진 단면의 결계가 일격을 막아 내는 동시에 처참하게 부수어졌다.
그러나 기드온에게는 그 몇 초만으로도 충분했다.
반대쪽 손이 펼쳐졌다. 그 손끝에서 나무 그늘에 숨어 있던 어둠이 섬광처럼 여러 갈래로 뻗어 나갔다.
별다른 마법도 아니었다. 비교적 간단한 공격 마법이었다. 하지만 담고 있는 마력과 복잡한 수식은 분명히 차이가 있었다. 여러 각도로 제멋대로 얽히며 벼락처럼 달려간 사나운 마법은 피할 틈도 없었다.
강대한 마력을 가지고 뻗어 나간 검은 줄기는 마물을 사납게 꿰뚫고도 거친 소리를 내며 뒤에 달려오던, 다른 마물들까지 찢어 냈다.
“와.”
헐떡이며 다른 마물을 후려치던 리에트가 짧게 감탄사를 내질렀다.
지저분하게 꿰뚫린 몸통에서 울컥하며 초록색 피가 솟아올랐다. 뱀은 잠시 멈춰 기드온을 내려다보는 듯했다….
이윽고 거대한 뱀의 머리가 시계추처럼 부드럽게 흔들렸다. 천천히, 느릿느릿.
좌우로 비틀리다 한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변화하는 각도를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조금씩.
그러나 이내 쿵, 둔중한 진동과 함께 바닥에 떨어졌다.
기드온은 등허리를 가로지르던 나머지 검을 뽑아 걸어갔다. 보폭이 넓지만 소리 하나 없는 걸음이었다. 바닥에 늘어진 뱀은 혀를 내밀어 그가 다가오는 진동을 느끼는 듯했다.
아마 인간을 해치던 것은 아니었으리라. 그렇다면 이렇게 커졌는데도 알아차리지 못했을 리 없다. 산속에서 조용히 살던 마법 생물을 끌어내 다른 마물들의 다리까지 붙이며 연구했겠지.
기드온은 속으로 짧게 애도했다.
키메라가 된 마물의 얇은 눈꺼풀이 마지막을 깨달은 듯 느슨히 내려앉았다. 고통 대신 빠른 안식을 위해 기드온은 검으로 마물의 머리를 꿰뚫었다. 긴 검신이 모조리 살에 파묻혔다.
경련하던 뱀의 몸이 천천히 풀리고 이윽고 정적이 찾아왔다.
기드온은 검을 뽑아냈다. 금속을 타고 거뭇한 녹색 피가 흘러내렸다.
그때, 기드온은 팔목부터 올라오는 차가운 기운을 느꼈다. 혈관 하나하나에 바늘이 박히는 듯 고통이 번졌다. 그는 순간, 인생 처음으로 제 검을 놓칠 뻔했다.
“대장님!”
그는 다시 팔을 내렸다. 두꺼운 가죽 장갑 속에 감춘 손은 고통에 경련해도 다행히 티가 나지 않았다….
“마물이 아래쪽으로 내려갔나?”
“확실치는 않습니다. 다만 뱀의 형태라 몇 마리 놓쳤을까 걱정됩니다.”
“안달루스와 나이바가 있으니 그리 걱정할 필요는 없으나… 내가 아래로 가겠다. 다른 병사들과 이곳을 정리하고 폐하께 내용을 전달 드려라. 폐하의 직속 부대이니 폐하의 말씀을 따르면 된다는 것은 알고 있겠지.”
“예.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기드온은 검을 검집에 넣고 손을 몇 번 쥐었다 폈다. 잠깐 사이에 고통에 익숙해져 어쩐지 경련이 나아진 듯했다.
기드온은 숲 전체를 원형의 결계로 둘러쌌다.
옆에 서 있던 대원 하나가 조용히 감탄했다. 순식간에 실현된 거대한 규모의 결계는 벽처럼 단단해 보였고 은은한 푸른빛이 감돌았다. 남아 있는 마물이 있다 한들 쉽게 빠져나올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기드온은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빠져나간 마력을 대신하듯 고통이 목 끝까지 치솟았다.
이제 팔이 경련하는 것을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다.
“대장님?”
대원들이 움직이지 않는 그를 보고 의아해했다. 그러나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때,
대지가
쿵.
울렸다.
⚜ ⚜ ⚜
바네사와 그레인은 걷다 휘청거렸다. 온 땅이 진동하며 울린 탓이었다.
“뭐야?”
넘어질 뻔한 그레인이 당황해서 중얼거렸다. 저 멀리 보이는 들판 위의 작은 숲에서 새들이 떼를 지어 날아가고 있었다.
“지진인가요?”
바네사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건물을 뒤흔드는 강한 진동에 뒤쪽에 보이는 도시도 소란스러웠다. 무언가 무너진 것 같았다.
잠시 발의 감각에 집중하던 그레인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잘 모르겠지만 멈춘 것 같은데.”
“잠깐 그랬나 봐요….”
바네사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심장 한구석이 이상하게 두근대는 것을 느꼈다. 분명히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강한 진동이었다.
“일단 가던 곳으로 가자… 어?”
그레인이 눈을 좁혀 먼 평야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기우뚱 젖혔다.
“저기 나무들이 움직이는 건가?”
바네사도 눈을 들어 멀리 있는 평야 위, 빽빽한 나무가 솟은 쪽을 바라보았다. 깊은 숲, 멀리서 봐도 나무들이 스산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분명히 바람 한 점 없었으므로 이상한 일이었다….
바네사도 어쩐지 불안한 기분에 입이 바짝 말랐다.
“설마 벨로즈에서 봤다는 그 도트람의 가지들은 아니겠지? 움직이는 나무….”
그레인이 멍하니 중얼거리자 바네사가 미소 지었다. 다만 그 미소는 억지로 만들어 낸 듯 몹시도 경직되어 있었다.
“이렇게 해가 쨍쨍한 곳에서요? 아닐 거예요.”
“그렇지? 하하.”
애써 희망적인 이야기를 내뱉었지만 굳은 표정은 어찌할 바가 없었다. 두 사람의 발걸음은 점점 빨라지다가 어느새 쏜살같이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이 불안감을 해소하기 어려웠다.
잽싸게 다리를 놀리던 그레인이 경악 섞인 소리를 내질렀다.
“저게 뭐야!”
그 비명의 원인은 하늘로 길게 가지를 뻗은 나무들 사이로 튀어나오는, 수많은 형체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