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rely, Vanessa RAW novel - Chapter (124)
선생님께, 바네사로부터 124화(124/146)
두 사람은 몸을 경직시켰다. 바라보고 있는 광경에 압도되어 몸에 힘이 빠졌다. 자연의 강력한 힘 앞에서 그들은 모래 알갱이처럼 느껴졌다.
에반은 애써 떨림을 숨기고 침착하게 말했다.
“해일이야. 도시 사람들을 대피시켜야 해.”
“저쪽 평야로 가면 높은 지대가 있어. 거기로만 가면 돼. 그게 아니라도 가장 높은 건물로….”
애써 담담한 척하려 해도 말끝이 파르르 떨렸다. 이니스는 제법 거대한 도시였다. 해안가의 암벽이 막아 주는 곳이 있기는 해도 물이 들이닥칠 곳이 있었다. 한쪽만 뚫려도 엄청난 양의 물은 오히려 강력한 압력을 덧입고 모든 걸 파괴할 것이다.
“가자.”
굳세게 내뱉은 에반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그대로 뒤를 돌아 달렸다. 가서 마법으로 목소리를 증폭시켜 대피령을 내리고 보호벽을 쳐야 했다. 기반은 부서질지언정 사람들이 다쳐서는 안 됐다.
하지만 바네사는 함께 달리다 머뭇대며 발을 멈췄다. 에반의 뒷모습이 멀어지고 있었으나 그녀는 아직 해변가의 모래사장 끄트머리쯤에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뒤를 돌아보았다.
파도가 다가오는 속도는 너무나 빨랐고 이니스는 높은 곳이 거의 없는 도시였다. 해안가와 연결되어 있어 제대로 된 성벽조차 없었으니 그래 봤자 그들은 가장 높은 건물 위로 갈 것이다.
하지만 옆쪽에 높게 솟은 암벽들은 거대한 파도도 견뎌 내겠지.
들이치는 부분만 막으면 된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몇 분쯤은 막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 그러면 누군가는 더 안전해질 것이다. 만약 하다가 그만두어야 할 순간엔 공간 이동 마법을 쓰면 되잖아.
바네사는 항상 조절하려고만 하던 범위를 생각하지 않고 마력을 그냥 너르게 풀어 버렸다. 분명히 아까 자파로를 상대하고 왔는데도 흘러넘치는 힘이 스스로도 신기했다. 물이 샘솟는 것처럼 마력은 다시금 채워지고 있었다.
여러 경험으로 말미암아 못 하리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몰려오는 파도를 바라보았다. 상상은 쉽고 간단했다. 위기감은 간절함을 더하고, 사람들을 보호하고 싶은 마음은 쓸데없는 생각을 지워 냈다.
쏟아지는 빛이 시야를 잠시 가렸다. 바네사는 눈을 질끈 감았다….
바네사가 오지 않은 것을 눈치챈 에반이 멀리서 고함쳤다.
“바네사!”
몰아닥친 파도가 겨우 지척이었을 무렵, 일렁이던 빛은 결계의 형태가 되어 해변가를 뒤덮었다.
눈을 떴다. 다행히 마법의 힘은 바네사를 배신하지 않고 그녀의 의지를 따라 주었다. 거대한 해변가를 결계가 모조리 뒤덮어 파도를 막아 내고 있었다. 그러나 감히 마법사가 자연의 힘에 대적하냐는 듯, 내리누르는 물의 무게가 소름 끼쳤다.
금세 깨달았다. 이 방법으로는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결계 위로 미세한 실금이 가고 있었다. 샘솟는 듯한 마력도 거대한 규모의 결계를 복구하느라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있었다.
“얼마 못 버티니까 빨리 사람들 대피시켜. 평야 끝까지 가면 안전할 거야.”
바네사가 소리치자 에반은 창백한 얼굴로 망연히 서 있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 도대체 언제 저렇게 성장한 것일까? 보기만 해도 격이 다른 마법이었다. 그게 오늘처럼 억울한 날이 없었다.
“나 공간이동 마법 할 줄 아니까 걱정하지 마.”
내가 제일 안전할걸. 바네사가 웃었다.
“너, 너 다치면 다 일러 줄 거야. 리나랑 체바티랑… 네 애인한테 다 이를 거라고!”
버럭 소리친 에반은 뒤를 돌아 달려갔다. 바네사는 힘이 빠지는 와중에도 실실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았다.
그것참 무서운 협박이네. 하긴, 기드온이나 리나가 알면 정말로 저를 어디 묶어 두기라도 할 것이다. 체바티는… 울 것 같은데. 그럼 미안하다고 사과해야지.
태평한 생각과 달리 속에서는 신물이 올라왔다. 저 멀리서 또다시 물이 밀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아까보다는 작지만 역시 거대한 규모였다.
내가 과연 두 번째 파도를 견딜 수 있을까?
표면 위로 실금이 생겼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때 누군가가 뒤에서 걸어오는 소리가 났다. 발밑에서 모래가 파스스 흩어지는 소리.
“어서 대피해요!”
바네사가 화를 내며 뒤를 돈 순간 마주한 사람은 제법 익숙한 얼굴이었다.
“아주 감동적인 모습이군요.”
느릿느릿, 점잔빼는 목소리였다.
예전에 분명히 만난 적이 있었다. 퓌돔의 성벽 아래에서, 왕보다 더 화려했던 망토와 긴 손가락에 주렁주렁 달린 금반지들. 화려한 거미 같은 느낌이 든다고 생각했던 남자.
“애버딘 차라…?”
경계의 마법사. 동부를 재해로부터 지키는.
“이 모든 곳을 결계로 보호할 마법력이라면 저 파도의 벽을 얼리는 게 나았을 텐데. 그게 마력이 더 적게 필요할 겁니다. 딱 한 번만 하면 되거든요. 하긴 이런 건 경험으로 아는 거니까 어린 마법사들은 그저 결계로 보호할 생각이나 하죠.”
태평하게 그런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남자를 보고 바네사는 버럭 소리 질렀다.
“그런 말 할 시간 있으면 도우라고요! 당신이 경계의 마법사잖아요! 결계 부서질까 봐 미치겠는데-”
“그렇게 우아하지 못한 말투라니. 뭐, 이건 사실 내 일이니까 그 말대로 하지요.”
애버딘 차라는 콧수염을 다듬으며 우아하게 새끼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금붙이들이 짤랑이는 소리가 노래처럼 들렸다.
또 다른 파도가 몰려와 눈앞에 닥쳤다. 거대한 파도가 은은하게 일렁이는 결계를 뒤덮기 직전에 마법이 실현되었다.
몰려오던 해일은 단숨에 얼어붙어 마치 얼음으로 만든 벽처럼 보였다. 투명하게 빛나는 얼음 결정들이 햇빛에 난반사되어 보석처럼 반짝였다.
바네사는 힘이 풀려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동시에 결계는 빛의 조각으로 화해 부서져 내렸다.
애버딘 차라는 아직도 성장하고 있는 마법사를 흥미롭게 내려다보았다. 계절에 맞지 않는 긴 망토에는 빛을 반사하는 화려한 금붙이들이 달려 짤랑거렸다.
“저쪽에 자파로 떼가 수백 마리 널려 있던데. 그것도 당신이 한 겁니까?”
“알아서 뭐 하시게요. 왜 이제 오세요?”
바네사의 까칠한 태도에도 굴하지 않고 애버딘 차라는 생각에 잠겨 느긋하게 중얼거렸다.
“당연히 당신이었겠지…. 그렇다면 그쪽에서도 대규모 마법을 사용했을 텐데 이런 거대한 결계를 칠 힘이 남아 있었다니. 아직 기절도 하지 않았군요?”
“기절하라는 거예요?”
바네사가 퉁명스럽게 말하며 얼굴에 내리쬐는 햇빛을 가렸다. 사람들을 대피시키고 돌아온 에반이 달려오려 했으나 애버딘 차라의 우아한 손짓에 그대로 막혔다.
바네사의 의아한 눈길이 닿자 애버딘 차라는 콧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땐 뭐, 아니면 말고 식으로 던져 본 건데 이젠 정말로 탐이 나는군요.”
“뭐가요?”
“제자 말입니다. 경계의 마법사라는 직위에는 관심 없습니까? 나도 가끔 쉬러 가게. 그럴 땐 왕에게서 받는 금의 일부를 나눠 주지요.”
뽐내는 듯한 말투에 바네사는 누운 채로 멍하니 머리를 굴렸다. 이 마법사가 지금 뭐라는 걸까? 내용은 한쪽 귀를 타고 들어왔다가 반대쪽 귀로 그냥 흘러가 버렸다.
관심도 없었고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했지만 대답은 술술 흘러나왔다.
“전 이미 다른 마법사의 제자인데요?”
“누굽니까?”
“제니언 포키스 폴리스 스타게라요. 아세요?”
애버딘 차라는 콧수염을 더듬고는 얇은 입술을 삐뚤게 말아 올렸다.
“그 성격 파탄자 늙은이라니.”
바네사는 비슷한 것 같다고 중얼거렸으나 애버딘 차라는 못 들은 척하며 귀를 후볐다. 그리고 진심으로 의아하게 물었다.
“당신이 가진 힘은 아주 거대한 것입니다. 그런 힘을 가지고 겨우 특전대에 소속되는 건 아깝지 않나요? 그 힘을 대가로 아주 거대한 부를 축적할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사람들을 지키는 대단한 마법사들은 저 말고도 많은걸요.”
“특전대라면 당신 대장을 봤겠군. 틀렸습니다. 그 말고는 없을 겁니다.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니까.”
기묘한 표정으로 바네사를 내려다보는 애버딘 차라는 ‘그래서 너도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라 바네사는 그냥 힘을 놓은 채로 웃어 버리고 말았다.
마법사로서 내각 관료로 들어온 이유가 있었다.
후원자 선생님과 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훌륭히 생을 꾸렸다. 홀로 설 수 있었다. 하지만 갚을 방법이 없었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많은 사람들에게 돌려줄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나는 선생님을 볼 수 없지만, 선생님은 멀리서나마 날 보며 자랑스러우실 수 있도록.
동기는 그러했으나 소중한 사람들 덕에 이 일 자체가 만족스러워졌다. 내가 누군가를 돕고 나쁜 일로부터 보호할 수 있다는 것.
그걸 어떻게 저 마법사에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래서 웃는 것 말고는 도리가 없었다.
애버딘 차라는 에반을 막았던 결계를 해제해 주었다. 에반이 달려와 바네사를 부축하자 바네사는 그제야 후들거리는 팔다리로 간신히 일어났다.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지 연락해요. 당신은 경험이 좀만 더 쌓이면 아주 빠르게 발전할 것 같으니까.”
나보다도 더 빠르게 말이지.
그 말을 끝으로 애버딘 차라는 네 명의 특전대원에게 동부를 떠나라고 말했다. 모든 것은 그 거대한 진동에서 시작되었으니 진동의 원인이나 알아내러 퓌돔으로 가 버리라는 것이었다.
“당신은 진동의 원인을 알고 있습니까?”
부서진 집에 파묻혔던 주민들을 구조하고 달려온 슬리만 대위가 눈살을 찡그리며 묻자 애버딘 차라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글쎄, 당신들이 이곳에 찾으러 온 것과 관계있을 것 같군요.”
그는 옷 속에서 회중시계를 꺼내더니 지킬 곳이 많다며 사라져 버렸다. 남은 특전대원 넷은 서로의 눈을 마주쳤다.
밤 반달루의 마법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