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rely, Vanessa RAW novel - Chapter (126)
선생님께, 바네사로부터 126화(126/146)
⚜ ⚜ ⚜
무슨 정신으로 걸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잔크발 중장의 말대로 발데르 성은 삼엄한 경계로 보호되고 있었다.
보통 때는 보이지 않던 결계가 새파랗게 성을 뒤덮고 있었고 성문 앞은 경비병의 수가 배로 늘어나 있었다. 언뜻 보이는 정원에도 창을 든 경비병들이 창을 들고 움직이고 있었다.
“아무도 들어갈 수 없다.”
경비병이 성문 근처로 다가가는 바네사에게 날카롭게 소리쳤다. 바네사는 차가워진 손으로 서신을 내밀었다.
“특전대의 잔크발 중장님 서명입니다.”
경비병은 서신을 대충 훑어보고는 눈썹을 찌푸렸다. 그는 특전대라는 말에 잠시 고민하다가 안쪽으로 서신을 전달하기로 한 듯 보였다. 좀 더 어려 보이는 경비병이 안쪽으로 뛰어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허가가 떨어졌다.
바네사는 4명이나 되는 경비병 사이를 통과해서 살뜰하게 꾸며 놓은 정원을 지나쳤다. 그러다 성의 입구를 바로 눈앞에 두고 멈춰 섰다.
꿈이 현실이 되면 어떡하지. 괜히 들어갔다가, 잠에서 깼는데 나쁜 소식을 듣게 될지도 몰라.
바네사는 굳어 버린 듯 발을 떼지 못했다. 작은 덩굴이 제 발을 칭칭 감은 듯했다. 가끔 결박 마법을 사용했을 때 상대편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돌아가자. 돌아가서… 오늘이 며칠인지 확인하자. 그런 다음에…
갈피를 못 잡고 이리저리 흔들리던 생각은 누군가의 목소리로 금방 흩어졌다.
“왜 거기에 서 계셔요. 어서 들어오세요.”
벌게진 눈을 한 라모나였다. 성긴 숄을 걸친 그녀는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바네사를 이끌었다. 바네사는 비틀대며 끌려갔다.
“다행이에요.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서 들어오시지 못할까 걱정이 되어서 계속 여기 서 있었어요…. 공작님께서…”
라모나는 잠시 마른침을 삼켰다. 새어 나오는 목소리가 작았다.
“…기다리시는 분이 따로 있겠어요. 귀한 분들 백 명이 오셔도 아가씨 한 분만 못하리라 생각이 들어요.”
라모나가 간신히 미소를 지으며 하는 말에 바네사는 속이 길게 긁히는 것 같았다. 내가 마지막에 그에게 무슨 말을 건넸더라.
입을 떼기가 어려워 비틀대는 걸음만 계속되었다. 라모나는 바네사를 흘끗 보고는 다정하고 살뜰하게, 도닥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금방 일어나실 거예요. 폐하께서 대단한 마법사들을 붙여 주셨어요….”
애써 희망을 긁어모은, 저 말 자체가 그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증빙인 듯하여 바네사는 숨이 막혔다. 헐떡이는 신음이 흘러나올까 두려워 입술을 짓씹었다.
성안은 기묘한 침묵만이 흘렀다. 항상 재잘대며 지나가던 하인들도, 다른 사용인들도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다만 경계하는 표정의 병사들 몇몇만이 복도를 지키고 서 있었다.
정신없이 라모나를 따라가다 보니 힘없는 발이 어느새 네 번째 층에 닿았다.
바네사는 이 층을 디뎠던 것이 벌써 먼 옛날처럼 느껴졌다. 그때도 그와 말다툼을 벌였던 것 같다. 그는 바네사를 보호하고 싶어 했고 바네사는 그가 힘든 걸 모른 채로 퓌돔에 남아 있는 것이 싫었다….
그래도 결국 마지막엔 함께 웃었고 손을 잡고 잠들었었는데.
바네사는 그의 침실로 향하는 문을 열면서도 무감각했다. 라모나는 뒤로 물러서서 들어오지 않았다. 등 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바네사 로즈.”
침실과 연결된 응접실에는 먼저 온 손님이 자리하고 있었다. 의자에 앉아 무심하게 창밖을 내다보던 사람은 바네사에게 시선을 돌렸다.
“폐하.”
“잘 들어왔군. 혹시 못 들어올까 하여 따로 명을 내려 둘까 고민했었거든.”
오늘따라 머리카락을 깨끗하게 정돈한 왕은 습관처럼 입매를 휘었다. 하지만 이내 완만한 호선은 가라앉아 입꼬리가 끌려 내려갔다.
왕은 몹시 지쳐 보였으나 바네사는 멀리서 그를 관찰하는 기분이었다. 누구의 감정도 제 마음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처럼. 감히 왕조차도.
“자리를 비켜 주겠네. 생각이 어수선해서 여기 있던 참인데 방해꾼이 된 기분이군.”
“마법사들은 다녀갔나요?”
“그래. 그들도 본 적이 없는 일이라 마법 반응을 조금 본 뒤에 고서를 뒤지러 달려갔네…. 최고로 불리는 자들까지 모두 끌어모았는데 그래도 부족한 기분이군.”
창문 너머로 우르릉 소리가 울려 퍼져 두 사람의 시선을 끌었다. 짙은 구름 아래에 순간 번쩍이는 무언가가 보였다가 사라졌다. 구름 속에 숨은 무언가의 눈 같아 섬뜩했다.
“공작은 내가 이 성에 오는 것을 굉장히 싫어해서 말이야. 내가 상의할 게 있어 몰래 온다 하면 급히 정원까지 나와서 할 말 다 하고 날 내쫓았거든. 근데 지금은 지나치게 조용하군.”
지나치게 조용해. 왕은 느릿하게 말하고는 일어났다. 바네사는 고개를 숙이고 침실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안은 몹시 따뜻하고 고요했다. 누군가가 마법진을 이용하여 내부 온도를 높였는지 열기마저 느껴졌다.
문이 닫히자 그 작은 바람에, 침대에 늘어진 휘장이 부드럽게 흩날려 뒤쪽에 있는 흐릿한 형체를 살짝 드러냈다….
바네사는 누가 떠민 듯 비틀대며 걸음을 옮겼다. 갈피를 잡지 못한 발끝이 이리저리 서성대다가 뚝 멈췄다.
난 속은 거야. 사실 그는 햇빛이 들이치는 집무실에서 일을 하는 중이고, 나는 그 옆에서 졸고 있어. 다음 서류를 짚다가 그걸 본 기드가 나직한 웃음소리로 날 깨울 거야. 눈을 마주치며 민망하게 웃으면 모든 게 해결될 거야….
현실을 외면하려는 멍청한 생각만 되풀이했다. 당장 여기를 뛰쳐나가고 싶었다. 그러다 탁자 위에 놓인 펜과 잉크병을 발견하고는 거친 숨을 들이켰다.
간신히 침대 곁에 서고 나서도 드리워진 휘장을 들지 못했다. 이미 최악을 상정하고 왔지만 그를 마주하는 것은 더한 용기가 필요했다.
꽤 오래 심호흡을 한 뒤에야 얇디얇은 휘장을 들어 올릴 수 있었다. 그럼에도 잠시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남자는 마치 깊은 잠에 든 것처럼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짙은 눈썹 아래, 색이 연하고 숱이 많은 속눈썹이 길게 뻗어 색채가 화려한 눈동자를 가리고 있었다.
아무리 가려져 있어도 바네사는 저 눈이 항상 저를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알고 있었다. 온통 따뜻하고 부드러운 종류의 수식어들로만 설명할 수 있는 그런 것들.
그래도 눈을 들어 보여 주면 좋을 텐데.
남자의 미간은 살짝 찌푸려져 있었다. 나쁜 꿈을 꾸는 걸까?
우습게도 바네사는 그게 몹시 걱정스러워졌다. 잠시라도 모든 일과 유리되어 편히 쉬는 것이면 차라리 나을 테니까.
바네사는 조심히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허공을 휘청이던 손끝이 남자의 뺨과 눈가를 조심스레 쓸었다. 그리고 살살 미간을 펴 주었다.
다행히 남자의 미간은 다시 일그러지지 않고 숨소리도 조금 편안해졌다. 그게 유일한 위안이었다. 바네사는 설핏 웃었다.
시선은 그의 모든 곳을 꼼꼼하게 확인했다. 짙은 눈썹, 높은 콧대, 다물린 입술과 조각처럼 단단한 턱선….
모두 익숙했으나 다만 거슬리는 검은 얼룩이 목덜미를 타고 올라 턱밑까지 치솟아 있었다.
그 얼룩을 더듬었다. 길고 하얀 손가락과 대비되는 칠흑 같은 색이었다.
바네사는 검은 마물의 부산물로 만든 상처, 모든 것의 시작이라고 했던 그 팔목의 상처를 알고 있었다. 처음으로 함께 먼 외출을 한 날, 그의 손목 위에 갈라진 틈이 의아했을 때 돌아온 대답은 그저.
‘별것 아니라서.’
“그때… 이 상처를 다른 누군가에게 보였으면 이럴 일은 없었을까요?”
그래도 똑같았을까요?
누구도 답을 주지 않았다. 기드온은 여전히 고요한 잠에 든 것처럼 보여서 과거를 후회하는 내용으로 그를 괴롭히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를 만나면 하고 싶었던 이야기나 늘어놓기로 했다.
“내가 편지 보냈는데. 봤어요?”
바네사는 그의 단정한 이마를 살짝 쓸어 주었다. 그의 약간 길어진 앞머리가 흘러내리는 것을 보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음, 시간상으로 나 만났다가 바로 떠났을 테니까 못 봤겠네요. 걱정 많이 했어요?”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애써 웃음 지은 입매가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그와 함께 있으면 침묵조차도 좋았다. 불편한 시간이 아니라, 서로의 온기를 느끼는 그 시간이 평온하여 만족스러웠다. 행복했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떨리는 목소리가 입술 틈새로 새어 나왔다.
“많이 했다고 해요. 그럼 봐줄게요. 내가 선생님이나 기드온에게는 엄청 착하게 굴잖아요. 그래서 이번에도 용서해 줄 수 있어요….”
바네사는 결국 쏟아지는 신음을 이기지 못하고 침대 위로 이마를 내리눌렀다. 어떡하지, 정말로 그를 잃으면.
그를 잃으면 기드온도, 선생님도 모두 잃게 될 텐데.
바네사는 눈을 감은 채로 숨을 헐떡였다. 더듬거리는 손이 뻗어 나가 남자의 커다란 손을 굳세게 잡았다. 검은 얼룩이 번져 엉망이었으나 아직 따뜻했다. 보통 때와 다르지 않은 상냥한 체온을 전했다.
그 온기에 바네사의 눈이 천천히 뜨였다. 새파란 눈동자에 희미한 빛이 번졌다.
마지막에 한 게 겨우 그런 대화라니. 나는 그의 감정을 의심하고, 그는 나의 감정을 의심하고.
‘그럼 가세요.’
‘날 좋아했던 건 맞아요?’
그를 괴롭히고 싶었다.
‘당신이 무슨 결정을 하든…’
하지만 그건 우리가 다시 대화할 날이 있으리란 확신 때문이었다. 날이 섰든 혹은 갈무리하여 누그러졌든, 분명히 마주하여 서로가 가진 마음을 공유하리라고. 그리하여 그 끝엔 더 굳건해지리라고.
이런 끝은 생각한 적 없다. 이렇게 끝낼 수는 없었다. 그는 반드시 눈을 떠서 내 결정을 들어주어야 했다….
떨리는 손이 침대 위를 짚었다. 허리를 곧게 세운 바네사는 옆으로 난 큰 창을 바라보며 눈을 식혔다. 벌건 눈자위는 여전할 테지만 그래도 눈물은 어느 정도 말라서 이제 시야가 또렷했다.
바네사는 그의 검게 변한 손등에 입술을 묻었다. 탁자의 그림자가 더 길게 기울어져 발밑까지 닿았을 때가 되어서야 놓아줄 수 있었다. 이불을 정리하여 제가 흐트러트린 곳을 곱게 정돈했다.
“아무 걱정 말아요.”
그렇게 속삭여 주었다.
⚜ ⚜ ⚜
왕은 어느새 응접실에 돌아와 있었다. 밝은 회색 눈동자가 문을 닫는 바네사를 지켜보았다.
“폐하.”
바네사는 애써 입을 뗐다.
“왕성에 있는 밤 반달루의 마법진을 보러 갈 건가? 허가해 주겠네.”
왕은 그리 말했으나 바네사는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것도 맞긴 했지만 바네사가 원하는 건 조금 다른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