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rely, Vanessa RAW novel - Chapter (129)
선생님께, 바네사로부터 129화(129/146)
⚜ ⚜ ⚜
당연하게도, 다음에 방문한 마법진 역시 기상천외한 장소에 있었다. 리티니아스 산의 가장 꼭대기 암벽.
“이게….”
꿈은 아니겠지?
심각한 표정으로 올려다봐도 압도적인 경사는 여전했다.
들러 본 적이 없는 곳이었으므로 공간이동 마법은 쓸 수 없었다. 걸어서 올라갈 생각에 앞이 깜깜했다. 평상시의 상태였어도 고된 일이었을 텐데, 요 며칠간 악몽 탓에 제대로 잠을 이룬 적 없고 식사도 거의 챙기지 못했으니 망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나중에 기드에게 이 고생에 대한 대가를 청구하리라. 가만두지 않겠다. 아주 뾰족한 반지를 끼고 때릴 것이다.
속으로 그런 중얼거림만 계속했다. 그럼 그의 황당한 표정이 떠올라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다행히 생필품을 가지러 내려온 마법사들을 만나서 도움을 받을 수 있었으나 어느 정도까지는 걸어 올라가야 했다.
헉헉 몰아쉬던 숨이 나아지자마자 바네사가 한 일은 마법사들에게 왕의 허가장을 보여 주고 그들의 연구 내용을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나도 항상 생각했지만 정말 특이한 문장이긴 하지.”
골똘한 표정으로 마법진을 베껴 낸 종이 한구석을 노려보자 어느 마법사가 끼어들었다. 바네사는 퍼뜩 고개를 들고는 조심히 답했다.
“아, 네. 저는 마법진에 대해서 전문가는 아니지만요. 무언가를 억압하기 위한 목적이라고 하기엔 독특하네요.”
과거, 왕성 내부에 있던 마법진을 보고 느꼈듯이 이상한 구석이 있었다. 즐거운 노랫소리와 악몽을 내쫓는 문장이라니.
“내 추측은 현실보다 아름다운 꿈을 만들어 검은 마물을 계속 재우려는 게 아닌가 싶긴 하지만 뭐, 확실치는 않고. 어쨌든 내가 태어나 본 마법진 중 가장 아름다운 건 사실이지.”
본인이 구성하기라도 한 양 황홀한 표정에 바네사는 작게 웃었다. 아무렇게나 자른 짧은 머리의 여자는 ‘이 문장은 길이가 이렇게 긴 데도 꼬인 부분 하나 없다’, ‘명확하기 그지없으나 유려하다’ 등의 찬사를 쉬지 않고 내뱉었다.
그녀는 거의 십 분을 쉬지 않고 떠들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아, 또 이야기가 다른 쪽으로 샜군. 마법진에 미쳤다는 소리를 듣는 게 일상이라, 하하! 근데 뭐라고 했지?”
“전체적으로 북부 쪽에서 발견된 마법진이 많다고요.”
“그래, 그런 편이지. 밤 반달루가 그쪽에서 오래 살았다고 하니 단서가 많잖아. 그렇다 해도 다른 곳에 마법진이 없다는 건 절대 아니지.”
히죽 웃은 마법사는 턱 근처를 매만졌다.
“그쪽도 알겠지만 마법진을 구성할 때 가장 중요한 건 목적이지. 도대체 무얼 위해 초반 효율이 끔찍하게 떨어지는 회로를 설계하고, 보존을 위한 공을 들이냔 말이야.”
“네, 그렇죠. 목적에 따라 마법 회로를 다르게 구상해야 하는 점도 있고요. 보호를 위한 것이라면 흐름이 일정 부분에 치우쳐서는 안 되고-”
“그렇지. 흐름 말이야, 흐름!”
마법사는 대뜸 말을 끊더니 손가락으로 종이 위를 가리켰다.
“이 문장 보여?”
바네사는 눈매를 좁힌 채로 떠듬떠듬 글자를 읽었다. 완벽히 해석할 수는 없었으나 그 의도를 파악할 정도는 되었다. 요 며칠간 밤을 지새운 보람이 있었다.
“어어, 마력의 흐름을 보충하여 전달하기 위함인가요? 동, 아니 동서쪽, 서쪽….”
“오, 뭘 좀 아는구만! 아무래도 나라 전체를 감싸는 마법진이니 간단한 원 하나로 끝낼 수가 없었겠지. 흐름이 꼬여 기능을 잃을 수도 있고. 하여튼 여길 보면 분명히 서쪽에도 다른 마법진이 많을 거야.”
“그럼 이건 보조적인 역할을 하는 마법진이었군요.”
“우린 그렇게 추측하고 있다네.”
대화를 좀 더 나눈 뒤 바네사는 감사 인사를 했다. 마법사는 코를 비비며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장황한 말을 잘 들어 줘서 내가 더 고마운걸. 이제 내가 마법진 이야기를 하려고 하면 모두 도망가 버린다니까!”
바네사는 아주 오랜만에 소리 내어 웃었다.
내려오는 길은 참으로 쉬웠다. 세상에 공간이동 마법처럼 쓸모 있는 마법은 없었다.
타박타박, 규칙적인 발걸음 소리와 함께 생각도 질주했다. 이건 중심을 찾기 위한 마법진에서 배제되는군. 서쪽으로 흐름을 보충하는 보조 마법진이라.
서쪽이란 얘기에 떠오른 건 당연히 기드온과 떨어졌던 동굴이었다. 석회 호수 안에 숨겨져 있던 마법진.
문제는 그 동굴로 향하는 길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었다. 과거 바네사도 기드온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왜 지도에 동굴 안의 마법진은 표시되어 있지 않아요? 그 마법진도 밤 반달루의 것이잖아요.’
‘모레아 숲의 이동 마법진은 일회성이었는지 곧바로 흐려져 조사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용을 타고 빠져나온 곳으로 이동해 보려 했는데 그조차도 막혔습니다. 의아한 일이지만 누군가가 아예 그 주변을 이동 제한 마법을 걸어 둔 게 아닐까 싶습니다. 마음이 급해 표식을 남기지 않은 게 크게 후회되더군요.’
‘으음, 아쉽다. 발견자에 내 이름도 넣어 달라고 하려고 했거든요. 기드와 바넷. 괜찮죠?’
그에 터진 부드러운 웃음소리가 떠올랐다. 발끝이 미세하게 흔들렸다가 다시 곧게 움직였다.
오래 걸은 다리는 피로를 호소하며 퉁퉁 부었다. 그래도 쉴 시간 따위는 없었다. 바네사는 서쪽으로 갈 수 있는 포털로 향했다.
마법진이 모레아의 숲에 있었던 건 아니지만, 어쨌든 모레아의 숲으로 가 보는 건 나쁘지 않은 생각이었다.
⚜ ⚜ ⚜
다음 날이 되자마자 서쪽으로 움직였다. 포탈을 사용했으나 모레아 숲에서 한참 떨어진 커다란 도시에 도착했다. 특유의 알록달록한 벽돌을 사용한 집들이 쭉 늘어서 있었다.
얼마 전에 있었던 커다란 진동 탓에 무너진 곳이 있는지 복구가 한창이었다. 그래도 크기가 큰 만큼 활기가 넘치는 곳이었다. 바네사는 지도를 보며 모레아 숲까지 필요한 마력을 가늠했다.
“저어, 죄송한데요. 혹시 여기서부터 타나미르의 모레아 숲까지는 마차로 얼마나 걸리나요?”
그녀의 질문에 가판대를 정리하던 남자는 잠깐 눈을 굴리더니 혀를 찼다.
“그 먼 데를 뭐 하러 간대? 마차로 가기엔 너무 멀지. 아무리 빠르게 달려도 5일 이상은 걸릴 테고 가겠다는 마부도 없을걸. 돈을 아주 많이 주는 게 아니라면 말야.”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조악한 지도에 표시된 축척, 마차의 속도와 5일이라는 시간을 통해 투자해야 할 마력을 빠르게 계산한 바네사는 좌표를 지정했다.
첫 번째로 도착한 곳은 밀밭 마을이었다. 특전대 실습 당시, 처음으로 마물을 만난 곳이었다. 벨롭의 눈알이 붙어 있던 검은 소.
바네사는 한숨 돌리는 동안 먼발치에서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걸 구경했다.
가끔 들려오는 웃음소리가 바람을 타고 멀리 번졌다. 밭에서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있는 사람들은 크게 노래를 부르며 일했다. 뛰어다니는 아이들은 낭랑한 소리를 내며 술래잡기를 했다.
검은 마물이 반쯤 깨어났다는 사실과 상관없이, 그 광경이 몹시 평화로워 나른한 숨이 흘러나왔다.
바네사는 한참을 주저앉아 있다가 다시 몸을 일으켰다.
두 번째 공간이동 마법을 통해 도착한 곳은 모레아 숲 근처의 통나무집이었다. 두 번을 거의 연속하여 이동했으나 이제 그쯤은 마력이 빠져나가는 느낌도 들지 않았고 어지럽지도 않았다.
땅에 발을 디디자마자 든 감상은 그랬다.
“여전하네.”
프리바의 중부에 완연한 봄이 찾아왔으나 모레아는 아직도 여전히 습하고 더운 날씨였다. 축축하게 달라붙는 습기에 곱슬거리는 옆머리가 이마에 들러붙었다.
바네사는 겉을 감싸고 있던 로브를 벗었다.
마물의 피해가 심하던 서부는 특전대의 대대적인 파견이 있었다. 덕분에 사람을 공격하는 마물의 수는 크게 줄어들고 원래의 상태를 회복했다고 들었다.
그래서인지 비어 있던 통나무집에는 주인이 돌아와 있었다. 썩어 안쪽이 드러났던 벽은 보수되어 있었고, 울타리에 걸쳐진 모자가 작은 바람에 흔들거렸다. 살짝 열린 창문 틈으로 음식 냄새가 풍겨 왔다.
바네사는 설핏 웃으며 안에 있을 사람에게 입속으로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리고 몸을 돌렸다.
모레아의 숲은 정말로 지척이었다. 그래도 위험했던 지역임을 알리듯 숲의 입구에는 얇은 줄이 하나 쳐져 있었다. 바네사는 단 하나의 망설임도 없이 줄을 들어 올려 숲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숲은 여전히 습기로 축축했고 너무도 짙어 가끔은 검게 보이는 녹빛으로 뒤덮여 있었다.
눈에 소년이 달려가는 모습이 보이는 것처럼 생생했다. 이끼로 뒤덮인 나무 등지를 지나서, 역시나 이끼로 뒤덮인 바위들을 돌아갔다. 그때 기드온과 다른 대원들이 나타났고 그가 경계하는 사이에 바네사가 이동 마법진을 밟았다….
이쯤부터 시작하면 되겠다. 바네사는 바위 근처부터 허리를 숙여 땅에 손을 짚었다.
아주 작은 단서라도 괜찮았다.
손끝이 젖은 흙 속을 파고들어 미세한 흔적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혹시 몰라 장갑조차 벗어 던졌다.
그때 근처에서 으르렁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눈길을 돌리니 몸을 낮추고 날카로운 이를 드러낸 작은 짐승이 보였다. 네발 달린 동물이었으나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다. 갈기와 무늬가 독특하다는 정도.
짐승은 어쩐지 조금 마른 듯 뼈가 드러나 있었다.
“저리 가.”
퉁명스럽게 말했으나 날카로운 이를 드러낸 짐승은 물러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오히려 자세를 더더욱 낮춰 언제라도 달려들 준비가 만반이었다.
하긴 제법 먹음직스러워 보이겠지.
바네사는 심드렁하게 손을 휘저었다. 딱히 동작이 필요하지 않았지만 저 동물에게 제가 했다는 것을 보여 줄 필요가 있었다.
손을 휘두르는 순간, 바네사 앞쪽에 있던 나무가 일제히 무너졌다. 굉음이 울려 퍼지고 날카로운 나무 조각들이 땅에 떨어지자 정체 모를 생명체는 빠르게 달아나 버렸다.
다시 혼자 남은 바네사는 잠시 제 손끝을 들여다보았다.
이제 마법이 너무 잘 되어서 두려울 정도였다. 제 사지를 움직이는 것처럼 의지만으로 순식간에 마법이 실현되었으니까. 그 마법이 간단하든 몹시 복잡하든 큰 차이는 없었다.
웃긴 점은 이런 경험이 쌓여 ‘스스로를 믿을 것’이라는 조건이 너무도 쉽게 충족되고 있다는 것이다….
짧게 한숨을 쉰 바네사는 허리를 숙여 다시 숨겨진 선들이 없는지 확인했다.
도대체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이 일은 요령을 피울 수가 없어서 손끝이 까맣게 물들도록 주변을 뒤지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묵직한 통증이 밀려와 잠깐 허리를 폈다. 길게 숨을 내뱉으며 몸을 쭉 늘이다 무언가 이상한 빛을 발견했다.
“뭐야…?”
저 멀리 나무를 휘감은 빛은 보드랍게 깜빡이다 빙글빙글 돌기를 반복했다. 누군가 발견해 주길 원하는 것처럼.
바네사는 위험한 상황이 일어날 때를 대비하여 결계를 펼칠 수식을 입속으로 계산하면서 나무 근처로 다가갔다. 하지만 빛은 어느 위협도 없이 다시 이동하여 살금살금 멀어졌다.
멍하니 바라본 것도 잠시였다. 비틀대며 걷다, 멀어지는 빛을 쫓아 숨도 쉬지 않고 달렸다. 꿈꾸던 보물을 앞에 둔 것처럼 숨이 차는지도 몰랐다. 숲의 초입이 순식간에 멀어졌다.
그러다 얼기설기 설킨 나무뿌리에 발이 걸려 바닥을 본 순간 망막에 날카롭게 맺힌 건.
“아.”
훼손된 곳 하나 없이 온전한 모습의 공간이동 마법진이었다.
아름다운 선 위에 부연 빛이 몰아치다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누군가가 밟기를 원하는 것처럼.
머릿속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함정일지도 몰라.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지?
기드온이 나를 위해 위험을 감수했듯, 나도 그를 위해 이쯤은 할 수 있었다.
바네사는 주저 없이 그대로 이동 마법진을 밟았다. 웅웅 대며 치솟아 오른 빛이 그녀의 몸을 휘감았다.
그리고 숲은 다시 인기척 하나 없이 고요해졌다. 벌레 우는 소리만 징징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