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rely, Vanessa RAW novel - Chapter (13)
선생님께, 바네사로부터 13화(13/146)
⚜ ⚜ ⚜
기드가 나타난 뒤로 님루드 생활은 몹시 시끌벅적해졌다. 선생님께 편지를 보낸 대로 낯 가릴 틈도 없이 친해진 덕분이었다.
일반적으로 제니언은 서재에 틀어박혀 연구만 하는 괴짜 마법사였고 가끔 바네사가 기어들어 가 그를 괴롭히는 것이 일상이었다면, 기드는 훨씬 숙련된 방법들을 사용했다.
그는 제니언을 괴롭히는 다섯 가지 방법을 알려 주었는데 항상 잘 맞아 들었다. 오늘 오전만 해도 그랬다.
“…….”
제니언이 망연하게 난장판이 된 주방을 바라보았으나 기드는 너른 어깨를 으쓱했다.
“음식 저장고가 너무 텅 비지 않았습니까. 도대체 뭘 먹고 사는 겁니까?”
“내가 굶든 말든 네가 뭔 상관이야!”
기드는 웃으며 커다란 버터 한 덩이를 반죽에 던져 넣었다.
“걱정이 되니까 그렇지요. 존경하는 놀라운 대마법사, 제니언 포키스 폴리스 스타게라 선생님께서-”
“네가 그딴 말을 하면 왜 이렇게 짜증이 나지?”
으르렁대는 목소리에도 기드는 느긋하게 미소 짓고는 양철 냄비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는 설탕물에 졸이고 있는 베리가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잘 좀 챙겨 드십시오. 혼자라면 몰라도 같이 있는 바네사가 불쌍하지도 않습니까? 당신에게 부탁한 사람이 있을 것 아닙니까.”
“쟨 혼자서도 여기저기 뒤지면서 잘만 먹던데.”
제니언의 냉정한 말에 바네사가 키득거렸다. 그건 맞았다.
“제니언은 매일 서재에 틀어박혀 있으니까 나 혼자라도 잘 먹어야죠. 그래도 내가 매일 놀아 주러 가잖아요.”
“누가 놀아 달라고 했어? 난 혼자가 좋다고! 넌… 넌 아주 누굴 똑 닮았어!”
제니언이 벌컥 소리 질렀지만 기드는 바네사를 보며 부드럽게 웃어 주었다.
“제니언의 건강을 생각해 주는 마음씨가 상냥하네요. 서재에만 있으면 아무래도 피폐해지기 쉽죠.”
“그렇죠? 제니언은 제 맘도 몰라 줘요. 이렇게 제니언을 생각해 주는데요!”
제니언은 바네사와 기드를 바라보며 환장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제 말이라고는 지지리도 안 듣고, 무서워하지도 않는 두 사람이 합세하니 답이 없었다.
그래서 제니언은 기드를 공격해 보기로 했다.
“야, 저놈 저거. 웃는 거 다 사기다. 밖에서 얼마나 차갑게 구는지 알아? 성격도 엄청 더러워서 웃는 꼴을 본 적이 없어!”
“바네사는 제 친구니까 잘 대해 주겠습니다. 걱정 말아요.”
“고마워요, 친구.”
“별말을 다.”
기드를 폄하하려는 말은 그렇게 흘러가 버렸다. 너른 등판만 보이는데도 기드의 입가에 걸린 삐뚜름한 미소가 보이는 듯했다.
결국 제니언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둘 다 나가. 나가서 놀라고!”
“제니언, 파이가 다 되었단 말이에요. 잠시만 기다려요.”
바네사는 두툼한 장갑을 끼고 오븐을 열었다. 다 익은 밀 특유의 고소한 향기가 주방을 가득 채웠다. 그제야 제니언이 조용해졌다.
바네사가 흘끗 돌아보니 그는 어느새 포크를 들고 얌전히 접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네사는 웃음소리가 날까 이를 악물었다.
‘여기서 더 놀리면 역효과니까 알아 두세요.’
‘기드, 제니언 놀리기 논문이라도 쓴 거예요?’
‘준비는 했었습니다.’
두 사람의 속닥거림은 다행히 제니언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잘 구워진 파이는 몹시 맛이 좋았다. 바네사와 기드는 물론이고 제니언도 두 접시나 덜어 먹었으니 그 맛은 확실했다.
제니언은 기드가 요리할 줄 안다는 사실이 몹시 놀라운 듯했다.
“네가 요리할 일이 있어? 사람들은 뭐에 쓰고?”
“글쎄요, 아버지가 가끔 하셨죠.”
기드는 베리잼은 식혀서 햇빛에 말린 유리병에 담아 두었고 오래 두고 먹을 수 있는 검은 빵은 차곡차곡 쌓아 그늘진 곳에 넣어 두었다.
제니언은 난장판이 된 주방을 보며 혀를 차고는 간단히 나무 몽둥이를 쿵쿵댔다. 그러자 주방 식기들이 제자리를 찾아 움직였다.
“어떻게 하는 거예요?”
“넌 알아도 못 해.”
제니언의 퉁명스러운 목소리에 바네사가 입을 비죽였다. 그 모습을 본 제니언은 바네사에게 두꺼운 책 하나를 던져 주었다.
책은 짙은 녹색 천으로 잘 감싸서 양장해 둔 것이었지만 제법 오래된 것처럼 보였다.
기드는 제니언이 저 책을 굳이 서재를 뒤져 찾아낸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가 기초 마법을 볼 일 따위 없으니 당연했다.
물론 그 ‘굳이 찾아온 마음’은 밉살스러운 목소리에 가려졌다.
“기초 언령마법이니까 나가서 공부해. 무슨 아카데미 학생이 매일 저리도 펑펑 놀아?”
“선생님이 방학은 공부 생각 없이 행복하게 보내라고 했단 말이에요!”
바네사가 항변했으나 제니언은 심드렁하게 귀를 후볐다.
“그 선생님도 네가 이렇게 멍청한지 몰랐을걸.”
“제니언.”
기드의 황금색 눈동자가 묘한 기색을 담아 느릿하게 깜빡였으나 바네사는 남자의 너른 등 뒤에 있었으므로 그 얼굴을 보지 못했다. 그저 제니언이 코웃음 치고는 다른 층으로 가 버리는 모습만 보았을 뿐이다.
기드는 커다란 손으로 부루퉁해진 바네사의 뺨을 살짝 찔렀다.
바네사는 그제야 입에서 바람을 빼고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속으로 감탄했다.
완벽한 비율로 빚어진 이목구비와 희미한 웃음기가 머무르고 있는 황금색 눈동자는 여전히 익숙해지기 힘들었다. 이렇게 떠들고 장난쳤음에도 가끔 경탄이 새어 나오니 놀라울 일이었다.
“제니언이 어제 서재에서 저 책을 얼마나 찾았는지 모릅니다. 바네사를 주고 싶어 그런 듯하니 서운해 말아요.”
“일부러 가지고 내려왔으면서 왜 저렇게 말하는 거예요? 부끄럼도 많지.”
바네사가 투덜거리자 기드는 미소 지었다.
“저는 할 일이 있어 잠깐 올라가 봐야겠습니다.”
“걱정 마세요. 전 혼자도 잘 놀거든요.”
기드는 씩 웃고는 제니언의 뒤를 따라 다른 층으로 사라져 버렸다.
와글대던 저택 안이 조용해지자 바네사는 정리되지 않은 앞마당으로 나가 주저앉았다. 그리고 굳게 다짐했다.
오늘은 꼭 언령마법 중 하나라도 성공해 내고 말겠다. 제니언의 코를 납작하게 누르겠어.
방학 내내 수식과 이론에 대해 공부했으니 그리 어렵진 않을 것이라 생각하면서.
⚜ ⚜ ⚜
다시금 불꽃이 일렁이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역시,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바네사는 몇 시간 전에 한 제 생각이 얼마나 오만했는지를 느끼며 힘없이 책장을 넘겼다.
방금 기초 언령마법의 실현을 무려 열한 번째 실패했던 것이다. 과거부터 연습한 걸 합치면 셀 수도 없었다.
“의지를 담으라니, 의지를 이렇게 가득 담았는데 어떻게 더 담아?”
바네사는 책장을 노려보았지만 다른 설명 같은 건 없었다. 마법사들의 의지가 마법을 실현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말들뿐.
“이게 끝이냐고!”
언령마법에는 내뱉는 언어 자체에 이미 수식들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마법사의 재능과 의지만 충분하다면 실현은 어렵지 않았다.
물론 어렵지 않다는 건 잘 훈련된 마법사들에게 한정되는 것으로, 바네사와 같은 초보 마법사 -제니언의 말에 따르면 마법사도 아니고 햇병아리-들에겐 그조차도 끔찍하게 어려웠다.
바네사는 책을 팽개치고 뒤로 넘어갔다.
새파란 하늘엔 구름 한 점 없었다. 저 멀리 조각구름 하나만 보일 뿐.
“덥다.”
바네사는 그렇게 중얼거렸지만 딱히 그늘 밑으로 기어갈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연달아 마법이 실패해 시무룩해진 덕분이었다.
제니언의 말이 맞았어. 즐겁게 놀 때가 아니었나 봐. 혹시 재능이 없는 건 아닐까? 난 그늘에서 쉴 자격도 없어.
선생님이 진짜 제니언의 말대로 내가 멍청하다고 생각하시면 어쩐담.
그래서 저택 문이 열리는 소리에도 여전히 늘어져 있었다.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올 때까지.
“바네사, 왜 거기에 누워 있습니까? 덥지 않아요?”
바네사가 눈을 굴리자 내리쬐는 햇빛에 화려한 금발이 반짝이는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제니언과 무언가를 하는 동안 모습이 약간 흐트러져 있었는데 팔소매는 완전히 접어 올려 근육으로 갈라진 팔이 드러나 있었다.
눈을 휘어 웃는 남자는 누구라도 꾀어낼 힘을 가지고 있었으나 우울해진 바네사는 영 미소 짓지 못했다.
“전 마법사가 아닌가 봐요.”
바네사가 울적하게 중얼거리자 기드는 눈썹을 찌푸렸다.
“그럴 리가요. 아카데미 교수들은 바보가 아닙니다. 바네사가 그렇게 좋다 하는 후원자 선생님도 마찬가지고.”
“그럼 제니언이 말하는 대로 멍청한가 봐요.”
“그것도 아닌 것 같은데. 제니언의 못된 말에 넘어가면 안 됩니다.”
화려하게 생긴 남자는 보기와 달리 몹시 소탈하게 굴었다. 직접 잼을 끓이는 것도 신기했는데, 드문드문 흙이 드러난 바닥을 개의치 않고 편히 주저앉은 것이다.
남자는 바네사가 팽개친 책을 들어 올려 내용을 훑어보았다.
“버터를 녹이며 짓던 웃음은 어디 갔나 했더니. 어려운가 보군요.”
“몇 시간 전의 바네사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예요. 최악이라고요… 거기 보이죠? ‘기초’라고 적혀 있잖아요….”
“바네사, 마법은 기적이라고 불리는 만큼 절대로 쉽지 않습니다. 언령마법이라고 해도 마찬가지고.”
“그래도 4학년이 되면 해내야 한단 말이에요.”
세상 모든 시름을 다 짊어진 듯한 목소리에 기드가 가만히 고개를 기울였다. 바네사를 꼼꼼히 살피던 눈에 희미한 미소가 맺혔다.
어떻게 하면 시무룩해진 아가씨를 달랠 수 있으려나.
고민은 오래 가지 않았고 방법은 간단했다.
그의 입을 타고, 나뭇잎에 바람이 스치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커다란 손 위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은 그의 손을 지나 바네사의 머리까지 헝클이고 지나가 버렸다.
“우와.”
생각해 보니 제니언만큼 대단한 마법사가 여기 있었지. 언령마법쯤이야 일도 아닌!
바네사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무슨 느낌이에요? 이 책대로, 그냥 간절히 원하는 게 다예요?”
호기심이 반짝이는 눈에 기드는 약간 난감하게 미소 지었다.
“나도 잘 알려 주고 싶지만… 이걸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사실 느낌이 모두 다르기도 하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남자는 고민 끝에 가만히 손끝을 오므렸다. 바네사도 덩달아 손을 모아쥐었다.
“아주 작은 점에서 꽃이 피어나듯.”
손끝이 부드럽게 펼쳐졌다.
바네사는 그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무언가 잡힐 듯 말 듯한 감각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까만 점에서, 무언가 피어나는 것처럼….
바네사의 입술을 타고 아지랑이가 일렁이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드디어, 새하얀 손 위에 작은 불꽃이 꽃처럼 피어났다. 바네사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와. 우와! 어떡해, 어떡해!”
바네사가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며 발을 굴렀다. 그러면서도 손은 최대한 움직이지 않았다.
타오르는 붉은 꽃은 자꾸만 커지려고 해서 바네사는 열심히 집중해 크기를 유지하려 노력했다.
“재능이 넘치는, 아주 훌륭한 마법사로군요. 제니언이 틀렸네요.”
부드러운 속삭임이 들려왔다. 그는 어쩐지 뿌듯한 눈길로 바네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바네사는 활짝 웃었다.
“맞아요, 제니언이 틀렸어요.”
바네사는 햇빛 아래에서 찜 쪄지며 스스로를 괴롭히는 것을 그만두기로 했다.
두 사람은 사이좋게 나무 그늘 아래에 앉았다. 바네사는 다시 손 위로 불꽃을 일으켜 보고는 뿌듯함에 샐쭉 웃었다. 한번 해내니 자신감이 붙었다.
바네사가 열심히 책장을 넘기며 다른 마법들에 대해 공부하는 동안 기드는 품에 있던 몇 가지 편지를 뜯어 보며 한숨을 삼켰다.
“왜요?”
“일이 계속….”
그는 그쯤 말했지만 어쩐지 몹시 피곤해진 표정이라 바네사는 씩 웃었다. 그리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고 보니 무슨 일을 하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