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rely, Vanessa RAW novel - Chapter (130)
선생님께, 바네사로부터 130화(130/146)
떨어진 곳은 빛 하나 없는 새까만 어둠 속이었다. 놀라 헛숨을 들이켰다. 귀를 기울이자 똑, 똑.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음산하게 들려왔다.
급히 빛을 불러냈다. 주변이 밝아지며 앞으로 길게 뻗은 통로가 드러났다. 그러나 그 끝은 아직 어둠에 먹혀 있었다. 몸에 한기가 돌았다.
바네사는 마음을 가다듬고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기드온과 함께 있던 동굴 속의 기억은 흐려진 부분 하나 없이 생생했다. 그 기억에 따르면 석회 호수까지는 오래 걸어야 했으므로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
이게 만약 함정이라면 어서 부딪치고, 함정이 아니라 누군가의 도움이라면 감사히 받아들이고 싶을 뿐이었다.
하지만 도대체 누가 이런 장난을 친단 말인가?
발을 조용하게 내딛어도 안에서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기드와 함께 걸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불안감이 몸을 잠식했다. 그건 마법 실력과는 완전히 별개의 문제였다.
바네사는 그제야 과거의 그가 저를 안심시키려 계속 말을 걸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다시 눈가가 경련했다. 마른침을 삼키고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크게 혼잣말했다.
“빨리 가서 마법진을 봐야지.”
잠자는 왕자님 아니, 잠자는 공작님을 깨울 단서를 찾아야 하니까. 그 공작님이 자는 게 더 좋아서 날 잊어버리면 안 되니까.
어둡고 축축하며, 고요했다.
바네사는 위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 하나에도 깜짝 놀라 예민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자꾸만 누군가가 튀어나와 공격할 것 같았다. 그러나 뒤를 돌아보면 있는 것은 여전히 어둠뿐이었다. 걸음은 점점 빨라졌다.
쉬지 않고 달리듯 움직인 덕분에 오래 지나지 않아 길이 넓어지는 부근에 다다랐다. 이제 정말 조금만 더 가면 호수였다.
그때와 달리 혼자이니 빛이 모두 꺼진 상태에서 호수로 뛰어들어야 할 것이다. 물론 물속에 들어가서는 그 안을 밝게 만들 수 있지만….
그래도 두렵기는 했다. 이렇게 새까만 어둠은 도시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으므로. 어딘가에 빛이 있어 고즈넉하게 느껴지는 게 아니라, 무언가를 잠식하는 듯하여 압도되는 빛깔이었다.
드디어 좁았던 길의 폭이 급격히 넓어졌다. 물이 떨어지는 청명한 소리와 함께, 동굴 안의 숨겨진 보석 같은 호수가 드러났다.
눈이 시릴 정도로 맑은 파란색. 여전히 놀랍도록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바네사는 그곳에 혼자가 아니었다.
“어…?”
호숫가의 암석 위에는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분명히 과거, 호수 근처 다섯 걸음 내에서는 마법을 쓸 수 없었는데 등만 보이는 그 사람은 빛에 둘러싸여 발을 달랑거리고 있었다.
뒤쪽에서 다가오는 사람을 눈치챈 듯 그 사람은 얼굴을 돌렸다. 이제 막 청소년기를 지나는 듯한 얼굴이었다…. 제멋대로 잘려 흐트러진 갈색 머리와 파란 눈.
바네사는 눈을 찡그렸다.
“…너.”
“바로 여기로 올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늦잖아.”
소년이 투덜거렸다.
“한 주가 넘게 기다렸다고. 내가 가장 심혈을 기울여 숨겨 놓은 곳이고 누나밖에 모르는 곳인데 여기를 늦게 오면 어떡하자는 거야?”
“야, 너….”
“눈치도 없지, 눈치도 없어. 아, 하긴. 그 남자도 여기를 알고 있구나. 누나만 안다고 하기엔 좀 그렇네.”
우울한 기분도 잊은 바네사는 새파랗게 눈을 치떴다. 모레아의 숲에서 바네사를 함정에 빠트렸던, 조나 힐의 서점에 나타났던, 자신을 반이라고 소개했던.
“안녕. 우리 오랜만이지?”
소년은 킬킬대며 웃었다.
바네사는 쾅쾅 발을 내디디며 소년에게 다가서다, 일정 거리를 두고 멈춰 섰다. 치밀어오른 짜증과 화를 애써 가라앉히고 꼼꼼히 소년을 살피며 혹시 모를 마법의 흔적을 찾았다.
도대체 어떻게 저 소년이 여기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겉모습과 달리 놀랍도록 대단한 마법사라 추측하긴 했지만, 이건 분명히 이상했다.
본인의 주장대로 정말 요정이라도 되는 것일까? 하지만 착한 요정일지는 좀 더 두고 봐야 알 수 있는 것이다….
바네사가 다가오지 않자 입을 비죽이던 소년은 바위 위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경계심이 있는 건 나쁘지 않지. 누나는 너무 곁을 잘 내주는 것 같았거든.”
경쾌한 발걸음이었다. 그러나 소년이 다가오자 바네사는 두 발 뒤로 물러났다. 여전한 간격에 소년은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걸음을 멈췄다.
“조건은 확실히 깨달은 것 같고. 충족은 잘 돼?”
대뜸 날아온 말에도 바네사는 움직이지 않고 침착하게 서 있었다. 대답 대신 질문을 되돌렸다.
“너 누구야?”
“말했잖아. 반이라니까. 반이라고 불러.”
“내가 묻고자 하는 의도를 알 텐데. 그래, 반. 여긴 어떻게 왔어?”
“그건 좀 웃긴 질문인걸. 저번에도 내가 알려 준 곳이잖아.”
바네사는 애써 구겨지려는 얼굴을 폈다. 그래, 네가 끌고 왔었지.
“이 모든 일이랑 관계있어?”
“그렇게 묻는 건 너무 포괄적이잖아. 치사하긴! 뭐, 그래도 대답해 주자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누나가 말하는 ‘그 일’들과 관계가 있다고 하기엔 좀 억울해. 특히 그 남자가 쓰러진 건 정말로 예상외야.”
구멍이 숭숭 뚫려, 모호한 말들만 두 사람 사이를 오갔다. 소년은 웃으며 팔을 벌렸다. 제가 누군지 맞춰 보라는 여유로운 태도에 바네사는 결국 인상을 찡그렸다.
단서랄 것도 얼마 없었다. 바네사는 소년을 만난 적이 별로 없었다. 모레아 숲에서 한 번, 조나 힐의 서점에서 한 번. 그리고 지금, 돌아온 동굴 안에서 한 번.
누군가를 파악하기엔 3이란 숫자는 너무나 작았다.
다만 소년은 누가 봐도 의문스러운 구석이 있었고 바네사는 그의 정체에 대해 아주 오랜 시간 고민했다. 매일은 아니더라도 가끔. 마법을 쓸 때마다, 책장 앞에 쪼그려 앉아 동화를 읽어 주는 바네사를 보며 웃던 소년이 떠올랐기에.
도대체 그 아이는 누구였을까? 그런 생각에 눈을 깜빡이다 잠에 빠져들곤 했다….
소년은 바네사의 인생에 분명히 영향을 끼쳤다. 하얀 종이를 완전히 물들이지는 못했더라도 그 위에 또렷이 점을 찍긴 한 것이다.
모레아의 숲에서 이동 마법진을 밟지 않았더라면 밤 반달루의 마법진 따위는 알지 못했으리라. 또한 그 동화가 아니었다면 마법 실현 조건 역시 알지 못했겠지.
물론 저 요정 같은 아이가 끼어들지 않았더라도 알아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시점이 분명히 미뤄졌을 것이다.
소년은 시간을 벌었다…. 하지만 무얼 위해서?
그게 가장 신경 쓰였다. 소년이 끼어든 건 바네사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아무 말 없이 소년을 다시 꼼꼼히 살폈다. 반은 여전히 방글방글 웃고 있었다. 저번에 봤을 때보다 키는 좀 큰 듯했으나 머리는 여전히 새집처럼 제멋대로 엉켜 있었다. 동그란 뺨에 물든 홍조도 그대로.
그는 바네사와도 비슷한 색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래서 더욱 헷갈렸다. 말도 안 되는 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밤베르크 아카데미 시절, 가장 큰 중앙 건물의 현관을 지나면 그 위로는 밤베르크 아카데미를 졸업한 위대한 마법사들과 위인들의 초상화가 커다랗게 걸려 있었다. 옆에는 그들이 해낸 놀라운 업적들이 적혀 있었고 학생들은 그 아래를 지나며 꿈을 키웠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초상화는 단연코 밤베르크 아카데미 설립자인 밤 반달루의 것이었다.
갈기처럼 휘날리는, 색이 바랜 갈색 머리카락. 웃음기를 머금은 파란 눈과 인자한 눈가 주름. 꿍꿍이가 있는 듯한 미소.
바네사는 자신과 비슷한 눈 색깔을 보며 희망을 품기도 했다…. 나도 대단한 마법사가 될 것이라는.
그래서 바네사는 입을 떼면서도 제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밤 반달루?”
그리고 헛웃음을 터트리며 바로 고개를 저었다.
“하하, 내가 미쳤네. 당연히 아니겠-”
“정답. 한 번에 맞췄으니 상이라도 줘야 할까?”
명랑한 목소리에 바네사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얼떨떨한 표정에 소년, 아니 밤 반달루가 크게 웃기 시작했다. 아이답게 경쾌한 웃음소리가 동굴 벽을 타고 크게 울렸다.
“한 번에 맞춰 놓고는 표정이 그게 뭐야. 웃기다.”
그 말에도 바네사는 영 공손해지지 못했다. 오히려 눈썹이 삐죽 하늘로 치솟았다.
“정말 네가 밤 반달루라고?”
“그렇지. 밤베르크 아카데미를 세운 마법사 말이야…. 천 년쯤은 살아야 이렇게 요정처럼 필요한 곳에 쏙쏙 나타나지 않겠어?”
싱글대며 웃는 미소가 얄미웠다. 바네사는 코웃음 치곤 냉정하게 쏘아붙였다.
“내가 말하고도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네가 밤 반달루라니. 그걸 어떻게 믿어? 차라리 이름 모를 천재 마법사라고 해.”
저를 쏘아보는 새파란 눈에 밤 반달루는 개구지게 눈을 반짝였다.
마법사라면 의심이 많은 게 당연하지. 놀랄 일도 아니다. 그리고 천 년 전의 괴물이 어린아이의 얼굴로 나타났으니, 지금 세상에서 가장 순진한 사람이 앞에 있어도 비웃을 말이었다.
그렇다면 증거를 보여 줘야지.
통통 튀는 발걸음으로 몸을 돌린 소년은 호수 앞에 앉았다. 그리곤 바네사에게 열심히 손을 휘저었다.
“이리 와 봐. 아, 빨리! 누나를 공격할 거면 아까 했지, 뭐 하러 지금 그러겠어? 그 의심스러운 눈초리 좀 제발 거둬 봐.”
짧게 한숨을 쉰 바네사는 그와 멀찍이 간격을 두고 호숫가에 섰다. 바네사가 불러낸 빛은 순식간에 꺼져 버렸으나 반이 불러낸 것들로 공간은 환했다….
“…….”
생각해 보니 이것도 증거라면 증거였다. 밤 반달루가 마법 금지 회로를 새겨 두었을 텐데 그걸 무시할 방법을 알고 있는 것이었다.
바네사는 얼굴이 하얗게 탈색되는 걸 느꼈다. 내가 아까 좀 무례하게 굴지 않았나?
소년은 작은 손을 뻗어 호수의 표면을 톡, 쳤다. 점점이 작은 파문이 일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호수 안의 물이 치솟아 뱀처럼 빙빙 휘감기기 시작했다. 거대한 흐름을 따라 허공을 수놓는 모습이 꼭 춤을 추는 것 같았다. 바네사의 눈이 놀라 휘둥그레 커졌다. 저도 모르게 발이 뒤로 물러났다.
이윽고 밤 반달루의 마법진을 보호하던 물이 모두 끌려 나와 두 사람의 머리 위를 맴돌았다. 소년이 손짓하자 바네사는 비틀대는 발걸음으로 다가가 호수 안을 들여다보았다.
넓고 깊은 구덩이만 남았다. 그리고 그 바닥에 새겨진 마법진.
마법진의 빛은 완전히 잦아들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희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