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rely, Vanessa RAW novel - Chapter (132)
선생님께, 바네사로부터 132화(132/146)
순식간에 동굴을 벗어난 용은 어둠을 가르고 몹시 높게 올라갔다. 날이 따뜻해졌음에도 고도가 높아지자 추위에 몸이 덜덜 떨렸다. 밤 반달루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지만 바네사는 그에게도 보온 마법을 걸어 주었다.
거대한 날개는 단 한 번의 펄럭임에도 먼 거리를 움직였다. 용은 수많은 산을 넘고 강을 건넜다. 바네사는 어디로 가는 것인지 파악해 보려 했지만 내려다보면 속도감에 기절할 것 같아 이내 포기해 버리고 말았다.
그때 밤 반달루가 입을 열었다.
“아주 먼 옛날엔 말이야.”
주변을 휘감는 날카로운 바람 소리에 들리지 않으리라 생각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귓가에 차분하게 내려앉았다.
“사람도 마물도 없었던 시절이 있었다고 해.”
밤 반달루는 아주 먼 과거를 노래하듯 속삭였다.
“그때, 우리가 살던 곳은 아주 광활했지만 그저 텅 비어 있었고 그저 고르기만 했다더군. 그러던 어느 날, 위대한 생명체들이 나타나 이 땅을 새로이 빚어냈지.”
바네사는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불타는 날개를 가진 라마이라와 물처럼 차갑고 투명한 누이르, 그리고 바위처럼 단단한 바이라코스.
라마이라는 거대한 날개를 휘저어 모든 곳에 공평하게 빛을 나누어 주었다. 누이르는 바닷속을 돌아다니며 그 움직임을 통해 해류를 형성하여 더러운 것을 씻어 냈다. 바이라코스는 튼튼한 다리로 땅을 부수고 산을 솟아오르게 했다. 세상은 풍요로워졌다.
“라마이라는 신의 이름 아니었나요?”
“그래, 그렇지. 하지만 라마이라가 신이라면 누이르와 바이라코스도 신이겠지.”
하지만 어느 날, 하늘에서 빛이 드리워졌다.
그 햇볕이 충분하여 라마이라는 날개를 접고 쉬다가 어딘가로 날아가 버렸다. 뼈대만 간신히 보일 정도로 투명했던 누이르는 물속까지 파고드는 빛이 따가워 협곡 깊은 곳으로 들어가 보이지 않았다.
자고 있던 바이라코스만 혼자 남았다. 그는 지루하여 몸을 일으켜 제멋대로 뛰어다녔다….
이야기는 제대로 된 맺음 없이 끝이 나고 말았다. 바네사는 어쩐지 조금 아쉬워졌다.
하지만 그 뒤로도 용은 아주 오래 날았다. 밤 반달루는 지루하지도 않은지 콧노래를 흥흥대고 있었다.
바네사는 평생 비행에 익숙해지지는 못하리라 확신했다. 미열이 오른 지친 몸과 주변을 휘몰아치는 찬바람이 만나 상태는 악화되었다.
결국 달달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 아직 멀었어요? 속이 진짜로 안 좋, 우욱.”
“좀만 기다려, 거의 다 왔으니까… 안 돼! 내 친구 위에 토하지 마!”
그의 말마따나 용은 점점 아래로 활강하기 시작했다. 바네사는 용이 향하는 곳의 끝에 거대한 암석들로 가득한 산이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곧 용의 날개 끝이 나무에 스칠 정도로 낮아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용은 내려앉을 만한 공터를 발견했다.
지축을 울리는 쿵 소리와 함께 용이 내려앉았다. 한숨 돌린 바네사는 빛나는 끈을 풀어 내고 용이 바짝 숙여 준 목을 타고 뛰어내렸다.
“오래 나는 동안 힘들었을 텐데 고마워. 항상 도움을 주는구나.”
돌기 사이를 살살 긁어 주자 용은 눈을 게슴츠레 뜨고 날개를 퍼덕였다. 바네사가 그를 보고 웃었다. 밤 반달루는 흥미롭게 오래된 제 친구인 까만 용을 바라보았다.
낯을 많이 가리는 친구인데 바네사의 손길을 제법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다. 가려운 곳을 잘 긁어 주나 보네.
그때 뒤에서 머릿속을 울리는 듯한, 기묘한 소리가 들렸다.
〚과거의 마법사, 그리고 처음 보는 인간이로군.〛
그 소리는 공기를 울리는 것이 아니라 뼈를 울리는 것 같았다.
바네사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마침내 거대한 절벽과 같은 형상을 마주했다.
⚜ ⚜ ⚜
거대한 형체는 늑대의 모습처럼 보였다. 커다란 머리와 쭉 찢어진 입, 타오르는 듯한 붉은 눈. 검은 털이 무성했다.
늑대는 밤 반달루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주 오랜만이구나.〛
“오래 주무셨죠.”
밤 반달루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의 태도와 관계없이 바네사는 보자마자 알아챘다.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다.
저건 마물 같은 것이 아니야. 저렇게 강력하고 타오르는 듯한 힘은 절대로 인간이 분류한 마법 생물 따위에 속하는 것이 아니야….
〚또 누군가가 나를 깨웠군.〛
“항상 있었던 일입니다. 인간들의 탐욕이란 참으로 우습죠.”
〚너는 마치 인간이 아닌 것처럼 말하는구나.〛
“천 년을 사는 인간은 없지요. 이제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인간도 아니지만 괴물도 아니지요.”
〚약속을 후회하나?〛
“후회하지는 않지만 지루하기는 합니다. 아주아주 가끔은 보람찰 때도 있지만요.”
밤 반달루는 빙긋 웃었다. 살짝 가늘어진 검은 늑대의 눈이 데구르르 굴러 바네사에게 향했다. 그 눈은 별처럼 빛나 응시하기 힘들었다. 저도 모르게 고개가 수그러졌다.
〚처음 보는 마법사로구나.〛
바네사는 비틀대는 목소리로 답했다.
“바네사 로즈라고 합니다.”
그의 존재가 무엇인지 묻고 싶었으나 차마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 하지만 짐작되는 바는 있었다. 밤 반달루가 해 준 옛날 이야기가 단순히 어린 아이들을 위한 동화는 아니었던 것이다.
〚강력한 힘을 가지고 태어났구나. 하지만 아직 서툴러. 작고 어리다. 하지만 꽃을 피우듯 곧 만개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보기 좋겠구나.〛
몸이 덜덜 떨렸다. 대화하는 것만으로도 그 진동에 뼈가 부수어지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입을 열었다.
“그게 진짜 몸이신가요?”
〚아니, 이건 그냥 형상체이지. 이 산 같은 게 내 몸이란다. 이런, 굳어서 암석처럼 보이는군. 하지만 내 털은 햇빛이 비치면 여러 가지 색으로 찬란하게 빛나지. 검은색은 모든 색을 끌어안아 만들어진 거거든. 궁금하면 보여 줄까?〛
뽐내는 듯한 목소리였다. 이 거대한 산맥이 제 몸이라고 말하는 위대한 생명체를 본 바네사는 눈을 질끈 감았다. 단 한 발만 내디뎌도 프리바의 일부가 초토화될 것이다.
“저는 여기에 부탁을 드리려고 왔어요.”
〚흐음.〛
바네사가 마른 침을 삼키자 거대한 늑대는 입을 길게 찢어 웃었다.
〚깨우는 자들이 있으면 재우려 하는 자들도 있는 법이지.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하지 않아도 알겠다.〛
“맞아요. 제가 원하는 건 당신이 다시 잠에 드시는 겁니다. 불쾌하실 걸 압니다. 하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겠어요. 제발 방법을 알려 주세요.”
바네사는 초조하게 손을 모아쥐며 깊이 고개를 숙였다. 밤 반달루가 말했다. 뭔가를 할 수 있을 거라고. 그러니 자신은 무언가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러서서는 안 됐다.
내려 본 손끝은 새파래져 있었다.
〚너는 왜 날 재우고 싶으냐?〛
“…제게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고 싶습니다.”
〚그래? 딱히 내게 물어볼 필요가 없을 텐데.〛
바네사가 의아한 눈을 깜빡이다 조심히 고개를 들었다. 검은 늑대의 눈은 밤하늘처럼 여러 가지 반짝임이 공존했다. 흰자 하나 없이 검은색을 바탕으로 파란색, 붉은색, 노란색…. 수십, 수백 가지 별똥이 튀었다.
긴장한 듯, 어리둥절한 듯한 눈을 마주한 검은 생명체는 웃는 듯 입을 길게 찢었다.
〚작은 마법사야. 넌 네 힘을 잘 모르는구나.〛
“제힘이에요. 모르지 않아요….”
〚네 힘은 날이 갈수록 강성해지는 종류의 것이다.〛
바네사는 잠시 침묵했다.
〚시간이 흐르고 네가 스스로에 대해 오히려 과신하고 자만하게 될 때, 네 힘은 더욱 강력해질 것이다. 네가 가진 힘은 위대한 지배자가 원하는 종류의 것이지.〛
“전 그냥-”
〚내 말을 들어 보아라. 당장 10년만 지나도 너는 대륙을 지배할 힘을 가지게 될 것이다.〛
바네사는 흐르는 시간이 초조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난 당장 기드온이 일어나기만을 바랄 뿐인데.
〚내가 약속하리라. 나는 네가 다스릴 땅에는 발을 디디지 않겠다.〛
“무슨, 무슨 소리예요? 전 다스리는 땅 같은 거 없어요.”
〚내가 일어나 잠시 산책을 하는 사이에 많은 것들이 사라지겠지. 비어 버린 땅에는 강력한 마법사들이 새 나라를 틔워 낼 것이다.〛
바네사는 그제야 텅 비어 버린 역사책이 기억났다. 누구도 알 수 없었던 이야기들. 에디르네 제국이 어째서 멸망했던가. 추측만 무성했다.
〚내게 악의는 없다. 나는 그저 거닐었을 뿐이지. 인간이 개미를 신경 쓰지 않듯 나도 인간들을 신경 쓰지 않을 뿐이다. 다만 약속하겠다. 너의 땅은 지켜 주겠다. 너는 새로운 대지의 지배자가 될 것이다.〛
“그럼 당신은 다시 잠들지 않겠다는 것인가요?”
〚너에게 줄 영광을 거래로 나는 잠시 햇빛을 느껴야지. 라마이라의 흔적이 그리웠으니. 그는 어찌 그리도 일찍 사라졌을까?〛
바네사는 주먹을 꾹 쥐었다. 밤 반달루는 제 소임을 다했다는 양, 저쪽 돌 위에 앉아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바네사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는 고통스러울 텐데. 그 검은 핏줄들.
떨리는 입을 열었다.
“저는 그런 것 필요 없어요.”
〚아무것도 모르니 그럴 테지. 모든 인간은 결국 영광을 좇는다.〛
“아뇨. 제가 원하는 건 달라요.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 땅 위에서 안전했으면 좋겠고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 깨어나서 저와 눈을 마주했으면 좋겠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당신이 다시 잠들어야 해요.”
바네사는 간절히 빌었다.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드릴게요. 제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하겠어요. 그러니 방법을 알려 주세요.”
검은 늑대의 눈은 밤하늘의 별 같기도 했고 타오르는 태양 같기도 했다. 어쨌든 한낱 인간이 오래 마주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바네사는 질끈 눈을 감았다.
그는 제법 오래 대답하지 않았다.
〚라마이라의 햇빛이 아쉽기는 하나 나는 사실 이미 너무 오래 살았어. 딱히 산책 같은 것이 필요 없을지도 모르지.〛
검은 늑대가 속살거렸다.
〚밤 반달루가 나를 위해 만들어 둔 마법진은 아주 좋은 꿈을 선사했어. 그래서 잠드는 것이 괴롭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즐거웠을지도 모르지….〛
그러더니 커다란 입을 찢어 웃었다.
〚하지만 망가진 마법진들을 되살리기 위해서는 아주 강력한 마력이 필요해.〛
“제가 굉장한 마법력을 가졌다고 하셨으니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할 수 있겠지. 하지만 네 힘을 대가로 내놓아야 한다.〛
바네사가 입을 다물었다.
〚깨달았던 힘을 잃는 것만큼 뼈저린 고통이 없지. 하지만 깨져 버린 잔에 어찌 다시 물을 채울까? 지나치게 강력한 힘을 소모한 네 몸은 다시는 마력을 채우지 못할 것이다. 너는 쓸모없는 인간이 되리라.〛
바네사는 눈을 깜빡였다. 위대한 생명체는 흥미롭게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인간의 감정은 참으로 재미있어서 산책이 아니라도 즐거운 볼거리를 선사했다.
〚쓸모없는 인간이 되어 살겠느냐, 새로운 땅의 위대한 지배자가 되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