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rely, Vanessa RAW novel - Chapter (135)
선생님께, 바네사로부터 135화(135/146)
⚜ ⚜ ⚜
기드온은 천천히 눈을 떴다. 어쩐지 눈꺼풀이 끔찍하게 무거웠다.
간신히 침대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정말 다행히 그리 오래 누워 있지 않았고 그는 아주 튼튼한 몸을 가졌으므로 큰 무리 없이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온갖 마법으로 상태가 나빠지지 않도록 유지한 덕분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잠시 비틀댔다. 갑자기 움직인 탓에 끔찍한 두통이 찾아왔으나 참을 만했다. 그는 멍하니 기억을 되새겼다.
쓰러졌었나?
몸을 가만히 내려 보았다. 오랜만에 움직여 경련하던 손끝이 힘을 되찾았다.
마지막 기억은 흐릿했다. 신전에서 결계를 친 뒤에 끔찍한 고통이 목 끝까지 치솟아 올랐었지. 입 안에서는 바네사의 이름만 여러 번….
아, 그래. 바네사.
급히 침대 아래로 다리를 내려 몸을 바로 세웠다.
정말로 쓰러졌었다면 시간이 제법 흘렀을 것이다. 상태를 보아하니 못 해도 이틀은 지났겠지. 그렇다면 바네사는 동부에서 돌아왔을 것이고 아마 퓌돔에 있을 것이 분명했다.
최악이었다. 가장 잘나고 굳건한 모습만 보여 줘도 부족할 판에 쓰러지기까지 하다니.
그녀를 만나러 가야 했다. 어서 가서 다시 잘못을 빌고 제 감정을 솔직히 털어놓아야 했다. 그녀의 자비에 기대어 용서를 구해야 했다….
몇 걸음은 비틀거렸다. 그러나 이내 힘이 빠진 다리에도 익숙해져 남자는 성큼성큼 걸어 문을 열어젖혔다. 온갖 종이를 늘어놓고 응접실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거기엔 심지어 황당한 표정의 제니언도 섞여 있었다.
기드온은 제니언이 있는 것을 보고는 어쩐지 조금 의아했으나 딱히 묻고 싶은 내용은 아니었다. 와야 했으니 왔겠지.
그가 궁금한 것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공작님!”
“아니, 저건 또 뭐야. 깨어났잖아.”
“마법진에 변화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니언이 대뜸 다가와서 기드온의 몸에 나타났던 검은 얼룩을 찾아보았으나 흔적 하나 없이 깨끗했다. 기드온은 피로한 얼굴로 그들이 옷자락을 뒤집는 걸 무시했다.
“쓰러졌었던 것이 맞군. 시간이 얼마나 흘렀지?”
기드온은 창문을 뚫고 비치는 햇살에 눈을 찌푸리며 말했다. 로난이 급히 커튼을 쳤다.
“두 주를 꼬박 채웠습니다. 괜찮으십니까? 걷지 말고 여기에 앉으십시오.”
발데르 성에 상주하는 의사가 달려와 기드온을 붙잡아 앉히려고 했다. 그는 그 손을 조용히 밀어내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오래 지났다고.”
“예, 신관들의 자백을 받아 냈고 그에 대한 일을 처리 중에 있었습니다. 로시니는 공동 회의의 일원이었던 자라 이래저래 말이 많은 모양입니다. 폐하께서도 무언가를 꺼리시는 듯하여-”
“나중에 파악하면 될 일이다. 제니언, 혹시 바네사는 어디 있는지 알고 계십니까?”
기드온은 냉정한 태도로 일 얘기를 쳐냈다.
대뜸 바네사의 행방을 묻는 말에 두 사람의 관계를 모르는 자들은 의아해했고 제니언은 숭숭한 눈썹을 찌푸렸으며 로난과 미구엘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제니언이 심드렁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얼마 전까지 편지를 주고받긴 했는데 정확히는 모르겠군. 질문만 많고 내가 묻는 거에 대해선 대답도 안 하더라고. 너랑 아주 똑같아서 말이야.”
너랑 똑같다는 부분에 억세게 힘을 주었으나 기드온은 느리게 눈을 깜빡일 뿐이었다.
“정확히는 모른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혹시 그녀가 이 성에 들른 적이 없습니까?”
바네사가 이곳으로 오지 않았다는 사실에 기드온이 마음속 우울함의 깊이를 더하기 직전, 로난이 침착하게 끼어들었다.
“일단 간략하게 상황 보고 먼저 드리겠습니다. 밤 반달루가 재웠던 마물이 깨어났습니다. 마물이 깨어남과 동시에 공작님께서 쓰러지신 것으로 추측됩니다. 특전대는 모두 위험지역으로 파견되어 왕국민들을 지키고 있고 폐하와 계약한 마법사들은 모여서 마물을 다시 재울 방법을 궁리 중이었습니다.”
기드온은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검은 마물과 특전대의 파견.
“마물이 깨어남과 동시에 내가 쓰러졌다?”
“예. 신관들은 공작님의 팔목 위쪽 상처가 검은 마물의 부산물로 만들어 낸 것이라고 진술했습니다. 공께서 가장 위협이 될 마법사라 생각한 듯합니다.”
“마물이 깨어나 그 힘이 강력해지자 마력의 흐름을 타고 네 상처가 번진 것으로 추측하고 있었지.”
제니언이 수염을 잡아 뜯으며 심드렁하게 끼어들었다.
“그 말에 따르면 내가 깨어난 것이 이상하군. 마물이 다시 잠들었다는 건가?”
기드온은 뻗어 나가는 생각을 뚝 끊어 버렸다. 어쨌든 그가 궁금한 것은 바네사의 안위였다.
“잔크발 중장에게 연락해야겠군. 일단-”
머뭇대던 미구엘이 조심스레 끼어들었다.
“저, 공작님. 호니르를 확인해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기드온의 시선이 미구엘에게 향했다. 미구엘은 안절부절못하다가 고개를 푹 숙이고는 제가 아는 모든 것을 고했다.
“쓰러지시고 얼마 뒤, 바네사 아가씨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분은 성에서 하루 머무신 뒤에 폐하의 허가장을 얻어 혼자 떠나신 것으로 압니다. 호니르 옆에 편지를 남기고 가셨고 그 뒤로도 몇 번 더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기드온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혼자 떠나다니,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가장 위험한 시기에 혼자 움직였다고? 대체 어디로?
그는 호니르의 방으로 향했다. 따로 분리해 둔 작은 탁자 위에는 바네사의 글씨가 적힌 편지 봉투가 몇 개 쌓여 있었다.
그녀가 보낸 편지를 모두 뜯어 본 남자는 이를 악물었다. 그는 말리는 사람들을 떨쳐 내고 급히 채비하여 직접 왕성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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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얼마간 쓰러져 있었을 뿐인데 천과 살갗 사이, 미묘하게 틈이 남는 느낌이었다.
기드온은 접견실 앞에서 초조하게 장갑을 꾹 쥐었다. 바네사의 앞에서는 단 한 번도 쓰지 못했으나 겨울마다 사용하여 가죽의 결이 반들해진, 그녀가 보냈던 검은 가죽 장갑이었다.
다행히도 왕은 공작이 깨어났다는 말에 놀라서 뛰어나왔다. 그래서 대면하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아니, 공작! 맙소사, 정말 다행이군. 안 그래도 성안에 있는 밤 반달루의 마법진에서 빛이 쏟아졌다고 해서-”
“폐하께서 바네사 로즈에게 허가장을 내렸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어디에 있는지는 파악하고 계십니까?”
왕의 말을 끊어먹지를 않나, 다른 일은 모두 제쳐두고 저것부터 묻지를 않나.
몹시도 무례한 짓을 하는 공작을 보며 왕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세상에, 이놈 정말 완전히 꿰였구나.
하지만 이해할 만한 범위였다. 왕도 누군가를 아끼기에 미친 짓을 하고 있는 때였으므로.
“나도 모르네. 공작을 깨울 방법을 찾고 싶다고 했어. 밤 반달루의 마법진을 확인해 보고 싶다고 했고 그를 허가했네.”
“혼자 움직이는 것이 위험하다는 걸 아셨을 겁니다. 어째서 그를 허가하셨습니까.”
끓어오르는 분을 참지 못해 얼굴 위로도 그게 드러났다. 왕은 냉정하게 말했다.
“동쪽 경계의 마법사, 애버딘 차라가 바네사 로즈에 대한 편지를 보냈네. 이번 동부 파견에서 엄청난 마법 능력을 보여 주었다고 하더군. 그 애버딘이 욕심을 낼 정도의 인재라면 혼자 움직여도 될 것이라 생각했고 바네사 로즈도 그를 원했네.”
“무얼 목표로 움직였는지도 모르시지 않습니까!”
“밤 반달루가 재운 마물을 찾고 있었겠지. 여러 마법진들을 확인한 기록이 있네. 그리고 그대라면 연인이 쓰러졌는데 가만히 시키는 일이나 할 것인가? 그럴 리가.”
왕이 딱 잘라 말했다. 기드온은 지끈대는 이마를 눌렀다. 이상한 초조감이 손발을 들쑤셨다.
“일어나자마자 성질이라니. 몸을 좀 더 보하도록 해, 발데르.”
“…저는 잠시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특전대의 확인 사항은 잔크발 중장과 의논하시고 공동회의의 일은 돌아와서 처리하겠습니다.”
“공작, 그러다 엇갈릴 거야. 바네사 로즈는 곧 돌아올 테니 제발 자리에 있기나 하게. 깨어난 게 아쉬울 정도로 일이 많다고! 젠장, 지금 검은 마물에 대한 정보도 턱없이 부족한데 특전대의 장인 그대가 자리를 비울 수는 없어.”
“제가 깨어나지 않는 동안에도 충분히 잘 돌아가지 않았습니까. 혹시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면-”
기드온이 날카롭게 반박하려는 찰나, 두꺼운 문을 뚫고 고함 소리가 울려 퍼졌다. 기드온이 몸을 돌리는 순간, 다급한 표정의 궁내부원이 접견실에 몸을 던져 넣었다.
“폐하, 왕성 위로 용이 나타났습니다!”
왕은 표정을 굳히고 몸을 일으켰다.
“젠장, 별 지랄 같은 일들이 왜 이리 많은가. 용은 또 뭐야.”
“용이란 커다란 날개를 가졌으며 머리에 돌기가 가득하고-”
“아니, 장난치나. 나도 그건 알아!”
그러나 왕이 걸음을 떼기도 전에 기드온이 뛰어나갔다. 왕이 어리둥절한 사이에 그는 이미 뒷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기드온이 성을 빠져나오는 사이, 용은 이미 몇 그루의 조경수를 뭉개고 땅에 발을 디딘 상태였다.
근위병들과 몇몇 마법사들이 경계하는 모습을 아랑곳하지 않고 노란 눈의 용은 멀뚱멀뚱 서서 꼬리를 휘두르고 있었다. 꼬리가 땅을 스칠 때마다 정원 한편이 사정없이 뭉개졌다. 정원사가 봤으면 피눈물을 흘렸겠으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는 이 자리에 없었다.
급한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오던 기드온은 단번에 저 용이 바네사와 동굴 안에서 보았던 용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그리고 그 위에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도.
그러나 기드온이 입을 떼기도 전에 용이 그를 먼저 발견했다.
과거, 동굴 안에서는 사이가 썩 좋지 않았던 용은 나름 봤던 사이라고 아는 체를 하며 머리를 흔들었다. 입을 벌려 허공에 불까지 쏘며 그를 반긴 것이다.
물론 대다수 사람들은 용이 반가움을 표하는 것인지 성질을 부리는 것인지 알 수가 없어 더욱 긴장했다. 침을 꿀꺽 삼킨 근위병의 창대와 마법사들의 손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아니, 발데르 공. 언제 깨어나신 겁니까?”
“공! 정말 다행입니다.”
예의를 차릴 틈도 없이, 웅성대며 모여 있는 사람을 밀쳐 내고 기드온이 용에게 다가갔다. 관료 몇몇이 당혹을 감추지 못하고 말을 걸었으나 기드온의 시선은 그저 용과 그 위에 있는 흐릿한 형체에 박혀 있었다.
“위험합니다. 물러서십시오.”
누군가 그리 말했으나 기드온은 놀랍게도 용에게 말을 걸었다.
“위에 누굴 태운 거지? 너 혹시 바네사를 본 적 있나?”
동공을 좁혀 기드온과 시선을 맞춘 용은 켁켁 대며 뭐라 했으나 물론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리고 용 대신에 다른 청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당신이 ‘그’ 발데르 공작이군. 내가 알던 발데르 공작이랑은 굉장히 다르게 생겼는걸.”
처음 듣는 목소리에 기드온이 눈을 찌푸리는 찰나, 용이 긴 목을 바짝 숙여 주었다. 누군가를 안은 청년이 위에서 떨어져 내렸다.
“소년의 몸으로는 업을 수가 없어서 말이야. 난 이 얼굴이 싫은데 별수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