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rely, Vanessa RAW novel - Chapter (137)
선생님께, 바네사로부터 137화(137/146)
⚜ ⚜ ⚜
리나와 체바티는 계단을 타고 올라갔다. 처음 방문하는 곳임에도 거침이 없는 발걸음에 두 사람을 안내해 주던 여자는 까만 눈을 부드럽게 휘며 미소 지었다.
“친구분들이 오셨으니 분명히 좋아하실 거예요.”
좋아하다니 그걸 어찌 알까. 그 애는 기약도 없이 누워 있는데.
리나는 쌀쌀맞은 생각을 삼키며 손에 쥔 꽃다발을 꾹 쥐었다. 곱게 색을 물들인, 겉을 감싼 종이가 사정없이 구겨졌다. 체바티는 시무룩한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두 사람은 바네사가 발데르 성에 누워 있다는 소식을 접한 지 2주나 지나서야 초대받을 수 있었다.
성에서 떠날 생각을 하지 않는 공작이 매우 예민하게 군다는 소문은 유명했다. 그는 모든 일정을 거부하고 발데르 성을 지키고 있었다. 동화 속에 나오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을 지키는 사나운 용이라도 된 것처럼.
그가 회의에 직접 나선 날은 딱 하루뿐이었는데 사건과 관련된 자들의 처벌 안건에 의견을 내기 위해서였다.
발데르의 입장은 몹시 강경하여 물러섬이 없었다. 성을 떠나지도 않으면서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 공동회의의 일원들도 그의 의견에 재빨리 동의 의사를 표했다. 반쯤 돌아 버린 게 분명한 눈빛 덕분일 수도 있었다.
결국 신전을 포함하여 이 일에 연루된 자들의 몰락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재판은 순식간에 진행되었다. 프리바를 망하게 하고, 왕을 바꿔 제 사욕을 채우려던 자들은 오로지 목숨만을 붙인 채 모든 것을 빼앗겼다.
프리바에 있던 마지막 신전의 문은 완전히 닫혔다. 왕이 강제로 행한 일이 아니라 사실관계가 널리 퍼져 신을 비난하는 자들이 넘쳐흘렀기 때문이다. 지진으로 인해 가족이 사망한 자들은 분노를 터트리며 신전에 달려가 돌을 던졌다.
다만 어디에서도 왕의 동생에 대한 이야기는 퍼져 나오지 않았다.
모르는 자들은 그저 되찾은 평화에 기뻐했고, 아는 자들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를 위해 누군가가 무얼 대가로 지불했는지는 평생 알지 못할 일이었다.
그렇게 어느 정도 일이 끝나자 공작은 또다시 성에 처박혀 나오지 않았다.
그에 왕이 직접 친필 서신을 전했으나 그에 대해 죄송함이나 감사함을 전혀 표하지 않고 오히려 냉랭함만 더했다.
항상 친밀했던 왕과 공작 사이의 사나운 기류에 공동회의와 내각 모두 숨을 죽였다. 마침내 왕조차 포기하고 내버려 둔다는 이야기가 온 나라에 퍼졌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놀라움을 숨기지 못했다. 발데르 공작이 일을 쉰단 말이야?
소문에 따르면 발데르가 보호하고 있는 ‘그 마법사’의 방은, 가장 유명하고 현명한 마법사들이 모여 공간을 보호하는 마법진을 새겼고 허락받지 않은 자들은 감히 그 안에 발을 디딜 수 없다고 했다….
“이곳이랍니다.”
여자가 어느 문 앞에 멈췄다. 리나와 체바티가 긴장한 듯 입술을 달싹이고 움찔대는 것을 본 여자의 눈가에 고운 주름이 잡혔다.
문이 열리고 따뜻한 기운이 밖으로 흘러나왔다.
햇빛이 잘 드는 방이었다. 침대의 휘장은 반쯤 걷혀 그 햇살의 온기를 분명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의식 없이 누워 있다 해도.
누워 있는 여자의 곁에는 훌륭한 얼굴의 남자가 앉아 무언가를 두런두런 이야기하고 있었다.
격식 없이 간단한 차림의 남자는 평상시보다 살이 내려 소문처럼 날카롭고 예민해 보였다. 그러나 갈색 머리의 여자 곁에서는 그저 햇볕처럼 다사롭기만 했다. 다정한 목소리가 끊임없이 속삭였다.
두 사람의 손은 서로 다른 나무가 뿌리부터 얽힌 것처럼, 단단하여 떨어지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근처에 무언가 가림막이라도 있는 것처럼 다가가기가 힘들었다. 두 사람만의 그 안온하고 평화로운 공기를 방해하는 기분이었기에.
초대한 사람들이 들어온 것을 본 기드온은 조심스레 얽혀 있던 손을 풀고 구름 같은 이불 안에 놓아 주었다. 펜대에 닿는 곳에 굳은살이 있던 바네사의 손가락은 그 흔적이 약간 희미해져 있었다.
그걸 아쉽게 느끼며 입을 열었다.
“리나 델리나 양, 체바티 밀로 도티 양. 흔쾌히 발걸음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제 친구인걸요.”
리나가 어쩐지 쌀쌀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도 그럴 것이 바네사가 성에 있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방문하겠다는 내용의 서신을 몇 번이고 보냈으나 모두 무시당한 것이다.
마지막에야 겨우 답장 한 번이 왔는데 그녀의 안전을 위해 마법진이 완성될 때까지는 방문을 받지 않겠다는 내용이었다.
적대적인 시선에도 기드온은 희미하게 웃었다.
“자리를 비켜드리겠습니다. 그녀가 꿈에서 깨어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하니 두 분 편히 대화 나누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것도 제가 알아서 하겠-”
“네, 알겠습니다! 감사해요.”
체바티는 재빠르게 리나의 발을 짓밟고는 방긋 미소 지었다. 아픔을 참은 리나는 흥 소리가 나도록 코웃음 쳤다.
하지만 기드온은 자리를 비킨다는 말과 달리 계속 침대 근처를 머뭇거리며 발을 떼지 못했다. 남자는 몹시 불안해 보였다.
리나가 참지 못하고 한마디 하려는 순간, 그는 바네사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고 몸이 차가워지지 않도록 이불을 좀 더 위로 끌었다. 그리고 허리를 숙여 그녀의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어쩐지 속이 간지럽고 울렁거렸다. 저 남자는 제 눈 밖으로 새어 나오는 감정을 알고 있을까?
드디어 할 일이 끝났는지, 남자는 리나와 체바티에게 가벼이 눈인사를 건네고 자리를 떠났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리나가 애써 퉁명스레 입을 뗐다.
“나 참. 무슨 어디 멀리 떠나는 것도 아니고. 그래 봤자 복도 앞 서성댈 거 아니야.”
“리나, 저 사람은 프리바의 공작님이라고요. 조심 좀 해요!”
“내 뒷배가 더 강해. 딱 봐도 바네사 한마디면 나한테도 아무 말 못 할걸. 그치, 바네사? 내 편 들어 줄 거지?”
리나는 씩 웃고는 의자를 끌어 바네사 옆에 털썩 앉았다. 보통 때라면 황당한 눈길과 함께 타박했을 바네사는 여전히 조용했다.
“이것 봐, 내가 아카데미 다닐 때 잠 좀 잘 자라고 했지? 그때 하도 안 자서 지금 오래 자는 거잖아.”
“맞아요, 바네사는 너무 조금 잤어요. 난 나보다 더 조금 자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니까요.”
“나는 비교하기도 어렵지. 가끔은 서너 시간도 겨우 잤잖아! 지금 몰아서 자는 게 틀림없어.”
리나가 킬킬댔다. 체바티도 슬쩍 미소 지었다.
“너무 피곤할 때는 잠만큼 달콤한 게 없으니까요. 나쁘지 않네요.”
“에반이랑 달로이즈도 오고 싶어 난리던데 네 대단하신 애인이 거부했어. 일단 우리 둘만 왔으면 좋겠다나!”
“난 사실 인정받은 기분이라 좋아요. 우리 둘이 바네사와 제일 친하다는 걸 안 거죠.”
체바티가 귀엽게 엣헴, 헛기침을 했다. 리나는 팔짱을 끼고는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렇게 따지면 나만 왔어야지. 체바티는 2순위잖아.”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네요. 기숙사 같이 쓴 게 뭐가 그리 대수라고. 바네사는 우리 집을 더 많이 왔거든요. 우리 부모님과 세 번이나 저녁 식사를 함께 했다고요.”
사실관계를 정확히 따지는 내용에 리나는 입을 부루퉁하게 내밀었다. 어쩐지 한심하게 두 사람을 바라보는 바네사의 눈길이 느껴진 것 같았다.
리나와 체바티는 자신들의 근황을 남김없이 털어놓았다. 리나는 사업을 성공적으로 동부에 안착시켰고 체바티는 제 기술 하나를 특허 신청했다고 말했다. 아직 결과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좋은 평을 얻었다 했다.
“가장 웃긴 게 뭔지 알아? 이 모든 대-단한 성공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가장 유명한 업적이 네 친구가 되었다는 거야.”
리나가 새침하게 말하자 체바티도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온갖 사람들이 찾아와서 바네사 로즈를 아냐고 묻는데 얼마나 놀랐는지. 바네사가 했다는 일을 듣고는….”
체바티는 약간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동그란 안경 아래 어리기만 해 보였던 작은 얼굴은 어느새 조금 성숙해져 있었다.
“딱 네가 할 짓이라고 생각했어. 공부할 때는 세상에서 제일 보수적으로 굴어서 몰랐는데, 넌 항상 이상한 부분에서 겁이 없다니까.”
리나는 한숨 쉬며 바네사의 손등을 토닥여 주었다.
“여러 번 말했잖아. 모른 척 좀 하라고…. 왜 네가 가장 먼저 달려간 거야.”
바네사는 여전히 미동 하나 없이 잠들어 있었다.
그래도 힘들어 보이지도, 아파 보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훌륭한 돌봄 덕에 혈색이 좋았다. 열린 창문 틈 사이로 작은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도 잘했어요. 고마워요, 바네사. 우리를 지켜 줘서. 그러니까 조금만 더 쉬고 여름이 완전히 지나기 전에는 일어나요. 여름에 함께 바닷가에서 놀기로 한 거 기억나죠?”
“그래, 시기적으로도 그게 맞아. 생색을 내기 위해서는 그쯤에 일어나는 게 최적이거든. 그래서 대가를 무지막지하게 받아 내야 한다고.”
리나가 교활한 표정을 지으며 속닥댔다. 그 말을 들은 체바티는 깔깔대며 웃었다.
“맞아요! 이제 숫자를 셀 거예요. 그 전까지는 일어나야 해요. 알았죠? 더 빨리 일어나면 더 좋지만요.”
그 뒤로도 한참을 즐겁게 대화한 리나와 체바티는 챙겨간 꽃다발을 머리맡에 놓아 주고는 일어났다. 다음에 또 오겠다는 인사를 남겼지만 발길은 잘 떨어지지 않았다.
두 사람은 계속해서 침대 쪽을 흘끔대며 방문을 열었다. 아쉽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리나의 예상대로 그들은 문을 열자마자 고요한 낯의 커다란 남자와 마주쳤다. 오랜만의 만남이 끝나기를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몇 시간이나 떠들었는데 이 앞을 지켰다는 점이 놀랍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