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rely, Vanessa RAW novel - Chapter (138)
선생님께, 바네사로부터 138화(138/146)
“누워 있는 바네사보다 혈색이 더 나쁘시네요.”
리나가 새침하게 던진 말에 기드온은 쓴웃음을 지었다. 커다란 손이 초췌한 뺨을 대충 쓸어 냈다.
“괜찮으시다면 다음에 또 와 주시면 좋겠습니다.”
“물론 그럴 거예요. 딱 한 주 뒤로 예정해 둘게요.”
쌀쌀맞은 작별 인사나 건네며 대화를 마무리하려고 했던 리나는 남자의 한결 날카로워진 턱선이나 여유 없이 메마른 시선을 보며 짧게 한숨 쉬었다.
겉은 간신히 예의를 차리고 있지만 그 속은 엉망진창인 게 훤히 보였다.
아무리 그래도 바네사가 좋아했던 사람인데 저런 모습은. 누워 있는 친구도 원할 리 없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그거 알고 계시죠? 바네사는 ‘선생님’을 용서하기로 했던 거요.”
기드온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을 내리떴다. 알고 있었다. 그녀가 남긴 편지가 아니었다면 그는 지금 목이라도 매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가만히 그를 살피던 체바티는 방긋 웃고는 말했다.
“건강 잘 챙기세요. 바네사가 다시 자려고 하면 빛나는 미모로 꾀어내셔야 하니까요.”
그 말을 남긴 체바티가 발을 떼자 리나가 따라붙어 속삭였다.
‘아까 나한테는 조심하라고 해 놓고! 네 말이 더 심해! 저 사람 공작위를 가졌다고. 꾀어내다니, 여기가 무슨 골목 허름한 술집도 아니고.’
‘왜, 맞잖아요. 내가 추측한 거지만요, 바네사는 반짝이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아요.’
리나는 떨떠름한 표정을 짓다가 설득당한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그건 맞는 것 같기도 해. 바네사는 빛 마법을 제일 좋아한다고 했고, 저 남자는 아주 반짝거리니까.
기드온은 사용인이 두 사람을 아래로 안내하는 것을 확인한 뒤 다시 바네사가 누워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밤 반달루로 추측되는, 정체 모를 마법사가 조언한 것처럼 방은 화사했고 햇빛이 잘 들었으며 따뜻한 온기가 흘렀다. 성의 주인이 가장 신경 쓰는 공간이므로 모든 사용인들이 가장 공을 들이는 곳이기도 했다.
화사하게 피어난 꽃들이 곳곳을 장식했다. 곱고 섬세하게 짜인 레이스 천이 빈틈없이 탁자 위를 덮었고 반짝이는 유리창에는 작은 먼지 하나도 내려앉지 못했다. 온도와 습도까지 꼼꼼히 관리되어 쾌적했다.
다만 그를 즐길 방의 주인이 잠들어 있다는 게 문제였을 뿐.
곱게 머리를 늘어뜨린 갈색 머리 아가씨는 여전히 의식이 없었다. 항시 모든 것을 새롭게 느끼며 반짝이던 눈은 조용히 감겨 있었다.
“리나 양이 어찌나 날 노려보던지, 과거에 아카데미 교실에서 마주쳤던 날이 떠오르더군요. 그때도 그렇게 바라보았거든요. 그저 당신 곁에 서 있다는 것만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이번엔 너무 늦게 초대한 것이 맞으니 감수해야겠습니다.”
남자는 침대 바로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당신 친구들을 자주 초대하고 싶지만 사람들의 방문이 잦아지면 이상한 사람들이 끼어들려 할까 걱정이 되어서.”
그만큼 요즘 당신이 인기가 좋습니다.
기드온은 희미하게 웃으며 깨끗한 천으로 바네사의 손끝을 닦아 주었다. 둥근 손톱은 긴 부분 하나 없이 잘 관리되고 있었다.
“특전대원들도 방문하고 싶다 난리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일으킬 소란이 뻔하니 시끄러워서 좋지 않은 꿈을 꿀까 봐 이것도 걱정이고. 그들이 내게 얼마나 난리를 쳤는지 모를 겁니다. 항상 그렇지만 당신 한정으로는 지나치게 과민하게 구나 싶은데.”
당신과는 항상 새로운 것투성이라 조금 어지럽습니다.
그렇게 속삭이는 남자의 입가에는 이미 웃음이 남아 있지 않았다.
“바네사.”
기드온이 중얼거렸다. 초점이 흐릿했다. 그는 쓰러졌다 깨어난 날부터 하루도 제대로 잠을 잔 적이 없었다. 그녀의 곁을 지켜야 했으므로.
밤 반달루의 가벼운 조언과 달리 바네사는 깨어나지 않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며 여유는 사라졌고, 웃음은 메말랐다.
그저 믿기지 않는 심정이었다.
어째서 그녀가 이곳에 의식 없이 누워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직 덜 깨어 제정신이 아닌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그러나 허공에 손길을 뻗어 가느다란 숨결을 느낄 때면, 이것이 현실임을 깨달았다.
그녀가 쓰러진 게 자신이 일어난 것에 대한 대가라면 다시 돌려주고 싶었다. 자신이 감당하고 싶었다. 누군가 목을 졸라매는 듯 숨이 막혔다.
‘나도 꼭 당신을 지켜 줄게요.’
그때 뭐라고 대답했던가.
페레스나 로난, 미구엘 등이 찾아와 잠시라도 쉬라고 간곡히 권했다. 그도 여기에 있는 것이 큰 의미가 없다는 걸 알았다. 바네사는 아무것도 모르고 평온하므로.
하지만 근처를 떠날 수 없는 건 그녀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 스스로를 위함이었다.
쉴 새 없이 불안증이 돋았다. 떨어진 사이 그녀에게 무슨 일이 날까 두려웠다. 침실로 돌아가 누웠다가도 악몽에 금세 깨어나니 의미가 없었다. 그는 이곳에 있어야 했다. 그녀의 곁에.
갈라진 목소리가 재차 흘러나왔다.
“바넷. 넷.”
닳을까 아까워서 쉽사리 부르지 못했던 애칭이었다. 익숙하지 않아서일까? 바네사는 여전히 미동도 없이 잠들어 있었다….
“내가, 잘못했습니다. 그러니 어서 일어나요.”
다시 사과할 기회를 줘요. 남자는 수없이 자신의 잘못을 속삭이다 그녀의 손등 위로 이마를 내리눌렀다.
다행히도 따뜻했다. 그 실낱같은 온기만이 그를 살렸다.
마치 먼 과거에 부모님을 잃었던 그 날처럼, 바네사가 쓰러진 이후부터 성안은 이상한 서늘함만이 감돌았다. 혼자 남은 성은 그가 사랑했던 사람들의 무덤 같았다.
“나랑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항상 건강히 돌아올 거라고.”
그가 간청했으나 역시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여전히 그는 고요한 공간에 홀로 남아 있었다.
머리가 텅 빈 듯했다.
지친 눈을 감고 시간을 흘려보내던 기드온은 머리맡에 놓인 꽃다발들을 정리하여 탁자 위에 놓았다. 생기 넘치는 꽃송이들은 몹시도 화사했으나 그게 잘 와닿지 않았다.
바네사를 가만가만 살피던 그는 품 안에 있던 편지를 끄집어냈다. 그녀가 발데르 성을 떠나기 전 남겼다는 것이었다.
수십 번 읽어 모서리가 약간 닳은 편지는 이제 눈을 감고도 내용을 외울 지경이었으나, 바네사의 목소리가 듣고 싶은 남자는 또다시 필체를 더듬었다.
「기드온에게.
내 눈앞에 보이는 광경이 이해가 잘 되지 않아요.
당신이 눈을 감은 모습은 정말 낯설어요. 항상 졸음에 꾸벅대다 먼저 자는 건 나였으니까요. 조곤조곤 속삭이는 목소리를 들으면서요.
그게 얼마나 대단한 사치였는지를 이제야 깨달았어요.
나는 그냥 기드가 돌아오면 내 편지를 읽겠지, 그럼 우리 모두 일을 끝내고 다시 얼굴을 마주하겠지, 그때 다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면 되겠지. 그렇게 생각했어요.
하지만 모든 일이 그렇게 쉽지는 않네요. 내가 안일했죠. 미루지 말고 당신을 붙잡아 모든 이야기를 끄집어냈어야 했어요.
아냐, 당신이 그랬어야 했죠. 날 붙잡아서, 당신의 생각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싶다 했어야죠. 안심시켜 달라고 했어야죠.
왜 멋대로 내 마음을 의심해요? 나는 그냥 조금 놀라고 혼란스러웠던 거라고요.
감정의 시작을 정확히 알 방법 따위는 없어요. 알 수 있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 분노 같은 것이겠죠. 명확한 사유가 있는 것들 말이에요.
하지만 내가 느끼는 감정은 그런 것이 아니에요. 존재하는지도 몰랐는데, 물을 주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피어 있었던 거니까.
그래도 확신하고 싶다면 알려 줄게요. 내가 당신을 좋아하는 이유를요.
하지만 여기에 쓰고 싶지는 않아요. 왜냐고요? 감고 있는 눈이 미워서요.
농담이고, 깨어 있는 당신을 마주하고 말하고 싶어요. 이런 말을 하는 건 처음이니까.
모두의 앞에서는 항상 침착하게 굴지만, 내 앞에서만은 겁이 아주 많은 사람도 안심이 될 수 있도록 눈을 맞대고 차근차근 알려 줄게요.
잠든 공작님을 깨우는 비결이 없으니 몸을 움직여야겠어요. 그렇게 예쁘게 자고 있으니 때릴 수도 없네요.
하지만 분명히 당신은 깨어날 거고, 기회는 찾아올 거예요.
주변이 너무 조용하네요. 침묵이 끔찍하게 느껴져요.
금방 올게요. 푹 쉬고 있어요.
당신의,
바네사.
p.s 누가 알려 줬는데 반지를 끼고 때리는 게 가장 아프대요.
pp.s 가만 안 둘 거야.」
그래, 침묵은 끔찍하게 느껴지지. 당신 말이 맞아. 항상 조용했던 성이라도 유독 상실감이 들어 견디기가 어려워.
그러니 어서 일어나서 달래 주었으면 했다. 이유를 알려 주고 제 멍청함을 비웃어 주길 바랐다.
기드온은 바네사라고 적힌 서명을 손끝으로 쓸어내렸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숙여 바네사의 손등 위에 입술을 묻었다.
반지를 끼고 때리든, 발로 걷어차든 상관없었다. 흔쾌히 맞아 줄 수 있었다. 당신이 요구하는 건 무엇이든 들어줄 것이다.
물론 이건 바네사의 수많은 편지가 그를 안심시켜 준 덕에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그녀가 그를 버리지 않고 용서만 해 준다면 나머지는 모두 쉬운 일이었으므로.
당신이 날 좋아하게 된 이유를 말해 준다면 나 역시도 곁에 앉아 함께 속삭이겠다. 수십 번이고 수백 번이고 반복하여 떠들겠다. 다시는 당신이 나의 마음을 의심할 일 없도록, 마주 잡은 손이 더 굳건해질 수 있도록.
하지만 이 모든 다짐이 감긴 눈앞에서 무력했다.
그도 그녀를 구하기 위해 무엇이라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오로지 흘러가는 시간을 감내해야 할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