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rely, Vanessa RAW novel - Chapter (140)
선생님께, 바네사로부터 140화(140/146)
“푹 쉬고 다음에 보자고. 왕으로서 제대로 된 보답은 그때 하도록 하지. 이미 많은 걸 준비해 놨으니 앞으로 찾아올 소란을 기대하게!”
불안하게도 환한 웃음을 남긴 왕이 떠나고, 남아 있는 사람들 사이엔 정적이 찾아왔다.
기묘하게도, 모두 성의 주인인 공작이 아니라 침대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는 바네사의 눈치를 보며 주춤댔다. 그녀가 쓰러져 있는 사이에 누가 더 우위를 점하고 있는지 모두 확실히 눈치챘기 때문이다.
하긴, 공작의 낯빛과 안절부절 구는 꼴을 보면 눈치채지 못하는 게 바보였다.
바네사는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고 기드온은 바닥 어딘가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침묵 속에서 누군가 일생일대의 용기를 긁어모아 입을 열었다.
“저, 큼. 저희는 이,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좀 있다 바네사 로즈 님의 마, 마력 반응을 확인하러 다시 들르겠습니다….”
모두 최대한 소리 없이 짐을 챙기느라 분주했다. 바네사는 급히 표정을 풀고 미소 지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고생하셨어요.”
“아니,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저희야말로 눈뜨신 모습을 보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누군가 아첨하듯 줄줄 내뱉는 말에 바네사는 소름이 돋았다. 눈을 감기 전의 세상과 뜨고 난 후의 세상이 자신을 대하는 게 몹시도 달라서.
“음, 네.”
어색한 목소리에도 모두 고개를 꾸벅대며 방을 빠져나갔다.
어휴. 바네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모습에 남자가 움찔거렸다.
움직임을 눈치챈 바네사는 시선을 돌려 남자를 바라보았다. 시선을 피하고 있는, 창백하고 수척한 남자. 하지만 여전히 제 시선을 빼앗기에는 차고 넘쳤다.
화난 척을 조금 더 해 볼까 했는데. 저런 얼굴을 앞에 두고는 심술궂게 굴지도 못하겠다.
“이리 와요.”
부드럽게 떨어진 말에도 기드온은 멀찍이 떨어져서 머뭇거렸다.
“빨리.”
바네사가 단호한 목소리를 내자 기드온은 힘없이 다가왔다. 분명히 잠결에 들었던 목소리는 산뜻하고 부드러워서 여유롭게 느껴졌는데 실제로 마주한 그는 몹시 지치고 초조해 보였다.
두툼한 쿠션에 몸을 기댄 바네사는 속으로 혀를 찼다. 얼굴 꼴이 저게 뭐람.
남자의 뺨은 마르고 거칠었고, 입술은 갈라져 상처 난 흔적이 여럿 남아 있었다. 턱선은 어찌나 날카로운지 종이가 베일 듯했다.
그 모습을 하나도 빠짐없이 눈에 새기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내 편지 봤어요?”
“…봤습니다.”
“어땠는데요?”
“도대체 위험한지도 모르고 대체 왜 혼자…!”
기드온이 갑자기 울컥해서 낸 목소리에 바네사는 코웃음 쳤다.
“아니죠. 그 말을 하면 안 되지.”
“…….”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말해 봐요.”
“…바네사.”
기드온이 속삭였다. 바네사, 바네사.
탄식처럼 그녀의 이름을 부른 게 다였다. 경련하던 남자의 손이 제 이마를 짚더니 곧 고개가 수그러들었다.
머리칼이 제법 많이 자라 그의 귓가와 목덜미를 뒤덮고 있었다. 그는 말 한마디 없이 조용했다.
바네사는 입을 비죽이며 뭐라 하려다 다시 마주친 눈에 멍하니 입만 벌렸다. 무언가 그녀의 예상과 다른 게 보였던 것이다.
그렇게 그리웠던 밝은색의 눈에 투명한 물기가 가득 고여 있었다. 빛에 반사되어 잠깐 반짝였다. 그리고 단 한 번의 깜빡임에 넘쳐 마른 뺨을 적시며 흘러내렸다.
그건 분명히, 굉장히 비현실적인 순간이었다.
“뭐, 뭐예요!”
난 아직 한마디도 제대로 안 했는데! 이게 뭐야! 왜 울어!
그는 소리도 없이 울었다. 놀라 얇은 이불자락만 쥐어뜯던 바네사는 허둥대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지만 부드럽게 잡혔다. 그녀의 손을 가둔 커다란 손아귀는 쉴새 없이 흔들렸다.
남자는 바네사의 손이 무너지는 절벽에 매달린 단 하나뿐인 구원 줄이라도 되는 양 간절하게 붙들었다. 손등에 이마를 대고 덜덜 떨었다. 커다란 등을 웅크리고 길게 울음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지금까지 버틴 게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무너졌다.
“당신이 잘못되었으면 나는….”
도대체 어찌하라고 그렇게.
손등 위가 흘러내리는 눈물로 젖어 들었다.
모든 기다림의 시간을 통틀어, 기드온은 자신이 그녀의 앞에서 이렇게 울기나 하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를 얼마나 걱정했는지, 그 시간이 얼마나 끔찍했는지를 이성적으로 털어놓겠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그를 구했고, 프리바를 구했으나 그게 고통스러웠다고. 다시는 위험 속에 혼자 뛰어들지 말라고 설득하려 했다.
하지만 감정은 이성과는 참으로 멀어서 이렇게 난장이었다.
그는 이 모든 것이 제 탓인 것 같았다. 그가 사랑해서 바네사가 쓰러진 것 같았다. 그가 사랑한 자들은 모두 사라졌기 때문에.
그래서 그녀가 깨어나지 못한 세 달간, 숨을 쉬어도 쉬는 것 같지 않았다. 모든 게 꿈처럼 멀게 느껴졌다. 농몽한 현실 속에서 살던 기드온은 바네사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지금에서야 그 공포스러웠던 순간들이 새삼 다가왔다.
그녀가 눈을 뜨고 있는 걸 아는데도 믿기 힘들었다. 피곤함에 잠시 눈을 감았다가 꿈을 꾸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눈을 뜨면 바네사는 의식이 없고 저는 다시 우두커니 어두운 방에 혼자 남아 있을 것이다.
두려움에 몸이 떨리는 걸 도저히 진정할 수 없었다.
그때 작은 손길이 끔찍한 상상 속에서 벌벌 떨던 남자를 끄집어냈다. 등을 토닥이는 손길이 여러 번 반복되자 천천히 몸의 떨림이 잦아들었다.
“그건 미안해요. 혼자 남는 게 얼마나 무서운지 알거든요. 당신이 내가 다치는 걸 가장 싫어했던 것도 알고요.”
바네사는 산뜻하게 사과했다.
“그래도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은 그거 아닌데.”
웃음 섞인 목소리에 기드온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남자의 밝은 눈동자는 물에 젖어 반짝이는 빛으로 어룽댔다. 흘러넘친 눈물은 수척해진 뺨을 적시고, 턱 끝에 맺혔다가 뚝뚝 떨어졌다. 헐떡이는 숨에 가슴팍이 크게 솟아올랐다가 꺼지기를 반복했다.
이게 처연해서 안쓰럽고, 그래서 예뻐 보이니 자신은 미친 게 틀림없다. 바네사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제 비뚤어진 취향을 비난했다.
그 마음을 숨긴 채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따라 해 봐요. 미안합니다. 다시는 비밀을 만들지 않겠습니다.”
“미안, 합니다. 다시는… 비밀을 만들, 지 않겠습니다.”
눅눅한 목소리가 더듬더듬 따라왔다. 바네사는 씩 웃었다.
“그리고 다음은요?”
바네사는 이번에는 정답을 알려 주지 않았다. 그가 말하기를 기다렸다.
“바, 네사. 내가 다시는 무언가를 숨기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울음을 머금은 목소리는 간절했다.
바네사는 씩 웃었다. 정답은 아니었지만 뭐, 그럭저럭 안쓰러우니까.
바네사는 가볍게 때리는 것처럼 착, 소리와 함께 양손으로 그의 뺨을 감쌌다. 엄지로 뺨을 적신 물기를 훑어 냈다. 눈을 맞추고 활짝 웃었다.
남자의 습한 속눈썹이 무겁게 깜빡였다. 닦아 낸 보람도 없이 다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한 대 때렸으니까 이제 됐어요. 그만 울어요.”
“너무…”
너무 관대하지 않습니까. 더 혼내라는 눈물 젖은 속삭임에 바네사는 어이없게 웃어 버렸다.
그가 쓰러진 걸 본 순간 들었던 생각을 도대체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가 깬 것을 보니 그냥 뭐든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마주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제가 해낸 일이 뿌듯해서 만족스러워지는 대단한 상이었다. 눈물까지 반짝이니 귀한 보석이나 다름없지.
“선생님은 물론 잘 아시겠지만 난 진짜 착하잖아요. 순하고.”
“난 착하고 순한 거 말고… 이기적인 게 좋습니다. 혼자는 무서우니 다른 사람들 끌고 가고 그런 거.”
용서해 준다 했더니 득달같이 꼬리를 잡아 무는 남자의 말을 들으며 바네사는 떨떠름한 미소를 지었다.
“이럴 일 다시는 없을 것 같지만 일단 알았어요. 끌고 갈게요. 어휴, 그만 좀 울어요.”
바네사가 그를 타박했다. 눈물이 어느 정도 잦아든 상태이긴 했으나 간헐적으로 흘러넘쳐 뺨이 마를 새가 없었다.
“왜 이렇게 수척해요. 뺨이 패였잖아요! 식사를 제대로 한 거 맞아요? 오래 누워 있었던 나보다 상태가 더 안 좋아 보인다고요. 도대체 뭘 하고 지낸 거예요?”
“당신이….”
잠들어서. 깨지를 않고. 간헐적으로 떨리는 숨에 말이 툭툭 끊겼다. 바네사는 샐샐대며 웃었다.
“아, 그래서 무서웠구나?”
반박이 흘러나올 줄 알았는데 남자는 시선을 떨구고 침묵을 지켰다.
그냥 분위기도 풀고 좀 놀리려고 한 건데! 당황한 바네사는 안절부절못하다가 침대에서 발을 끌어 내렸다.
그리고 뭔가 감각이 이상하네… 그 생각을 하며 침대에서 굴러떨어졌다.
“바네사!”
기드온이 대경하였으나 바네사는 멍하니 바닥을 짚고 있었다. 내가 지금 다른 방법으로 분위기를 푸네. 그런 허망한 생각을 하면서.
다행히도 푹신한 러그가 깔린 바닥은 그녀를 상처 하나 없이 보호해 주었다. 착지한 무릎도, 손바닥도 상처 없이 온전했다.
기드온이 급히 허리를 감아 일으켜 세우자 바네사는 엉거주춤 그의 팔과 어깨를 붙잡고 섰다. 다만 팔에도 힘이 별로 없어 그의 상체와 팔에 기댄 수준이었다.
남자는 손아귀에 최대한 힘을 주지 않고 그녀를 부축했다.
“아, 아니… 다리가.”
“바네사, 오래 누워 있었으니 당연한 일입니다. 다리를 쓰는 것이 익숙지 않을 거예요. 걱정하지 말아요. 금방 좋아질 겁니다. 마법으로 최대한 기능을 보존하려 했는데 예상보다 시간이 길어서….”
넘어진 바네사보다 기드온이 더 놀란 것 같았다. 그는 바네사를 안심시키려 침착한 척 여러 문장을 쏟아 냈으나 그녀의 허리를 감고 있는 팔이 간헐적으로 떨렸다. 닿은 몸 아래로 전해지는 박동이 거셌다.
그의 낯빛이 어찌나 창백하던지, 바네사는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되는 심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