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rely, Vanessa RAW novel - Chapter (141)
선생님께, 바네사로부터 141화(141/146)
기드온은 바네사를 다시 침대 위에 올바르게 앉혀 쿠션에 등을 기대도록 했다. 그러고서도 무섭도록 표정이 굳어 있었다.
물론 그의 심각한 얼굴과는 달리 바네사는 태평하게도 귓가를 덮는 살짝 긴 머리도 잘 어울린다는 생각 중이었다.
하긴, 뭔들 안 어울리겠느냐만.
“금방 나아질 거예요.”
“물론 그럴 겁니다.”
그러지 못한다면 바네사가 아닌, 그녀를 치료하는 의사와 다른 마법사들을 가만두지 않을 태세였다.
바네사는 샐쭉 웃다가 팔을 뻗어 힘이 들어간 턱선을 톡 쳤다.
“힘 풀어요. 괜찮아요.”
그 말에 그는 간신히 입꼬리를 휘었으나 눈매는 여전히 어둡게 침잠하여 있었다. 바네사는 거울을 보지는 못했으나 제 상태가 그의 예상보다 나쁘다는 점을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걱정이 가득하여 초조한 얼굴에 바네사는 심술궂게 말했다.
“나한테 막 선택하라고 할 때는 언제고.”
그녀의 뺨을 쓸던 손끝이 움찔 떨리더니 천천히 물러났다.
가장 마음에 들지 않았던 말이었다. 우리가 공유한 시간을 쉽게 포기할 수 있다는 것처럼 들려서. 바네사에겐 아주 소중한 것이었으나 그에겐 그렇지 않았을까 하여 혼자 분통이 터졌다.
“보내 줄 용기가 있었으면 이런 것쯤이야 평온하게 넘길 줄 알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미안합니다. 당신이 나와의 관계를 후회할까 무서워서 그 자리를 피하려고… 아무 말이나 내뱉은 것 같습니다.”
힘없이 가라앉은 목소리에 바네사는 그를 더 괴롭힐 의지가 깨끗하게 사라졌다.
됐다, 충분해. 이제 다시는 이걸로 그를 찌르지 말아야지. 애처롭게 패인 뺨을 보면 그는 충분히 마음고생을 한 것 같으니까.
그때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기드온이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다감한 애정은 어디 가고 시퍼렇게 날 선 목소리가 튀어 나갔다.
“누구냐.”
“저….”
문 틈새로 조심히 얼굴을 들이민 건 아까 빠져나갔던 의사였다.
의사는 아주 긴장되는 표정으로 손을 떨고 있었으며, 이마 위에는 식은땀마저 흘리고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오랜만에 눈을 뜬 연인이 반갑지 않을 자가 어디 있으랴! 그 웃음이 눈물 나도록 그리웠을 테니 설탕처럼 다디단 눈빛과 꿀처럼 달콤한 대화를 주고받고 있을 테지.
그런데 안면도 썩 익지 않은 의사 따위가 훼방꾼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행여나 공작과 그 연인이 은밀하고 즐거운 시간을 가지고 있었다면 당장 쫓겨나도 할 말이 없었다. 요즘 발데르 공작이 사나운 것이야 모르는 사람이 있나? 자신을 당장 어디 가두라고 하는 건 아닐까.
의사는 무서운 상상으로 오들오들 떨었다.
그러나 그들은 왕의 명을 받았고 바네사 로즈를 아주 훌륭히 돌보아야 할 의무가 있었다. 굳이 고르자면 왕성에서 눈을 번뜩일 왕이 더 무서웠다.
“그, 다, 다시 잠드시기 전에 상태가 어떠신지 화, 확인하고… 또, 그, 오래 몸을 세우고 계신 것이 무리가 되실까 하여 제, 제가. 아니, 그 모두 함께….”
누가 봐도 떠밀린 모습인 의사가 횡설수설 내뱉었다. 그는 문간에서 발도 들이지 못하고 당장 눈물을 흘리고 싶은 얼굴이었다.
그 안쓰러운 모습에 바네사가 고개를 끄덕였고 기드온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럼에도 그는 바로 몸을 물리지 않았다. 의사는 눈치 빠르게도 ‘조금 있다가 다시 오겠다’며 방문을 닫았다.
기드온은 계속 머뭇대다가 조곤조곤 속삭였다.
“몸이 안 좋거나 한 곳이 있다면 언제든 말해요. 누구한테든 좋습니다.”
“그럴게요.”
“필요한 것 있으면 부르고.”
“그것도 그럴게요.”
“아마 의사들이 확인한 뒤에 당신은 바로 잠들 시간이긴 하지만, 줄을 당기면 되니까…”
끝없는 걱정에 바네사는 슬쩍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결국 기드온은 미련이 가득한 모습으로 발을 뗐다.
그 모습이 어찌나 안쓰러워 보이던지 바네사는 결국,
“기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기드온이 기다렸다는 듯이 몸을 돌려 시선을 마주하자 바네사는 설핏 웃었다.
이제 자신도 깨어났으니 그가 안심하여 평안해지기를 바랐다. 그저 완전히 마음을 놓고 평화롭게 휴식할 수 있는 밤이 되기를.
“걱정하지 말아요.”
기드온은 그녀의 말을 이어지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바네사는 씩씩한 목소리를 냈다.
“왜냐하면 우리는 내일 또 만날 거니까요.”
난 이미 너무 많이 잤거든요. 내일은 새벽부터 일어나서 산책하고 싶어요. 와서 부축이나 좀 해 줘요. 당신 말대로 아일리아 꽃을 봐야겠어요.
바네사는 아무렇지도 않은 말투로, 가볍게 말하며 손을 흔들었다. 그 모습을 문틀에 기대 바라본 기드온은 녹아드는 것처럼 엷은 미소를 지었다.
너는 어쩌면 그렇게 항상 내가 듣고 싶은 말을 해 줄까.
남자는 성큼성큼 다시 침대가로 다가왔다. 바네사가 어리둥절해서 올려다보려는 순간 그의 몸이 바싹 낮아졌다. 시선이 올곧게 맞닿았다.
“왜 자꾸 무릎을 아무 데나-”
“나는 당신을 사랑해.”
그녀가 건강해진 뒤에 말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눈을 뜨자마자 마주한 진심이 지나치게 버겁고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녀가 웃는 순간, 도저히 참지 못했다. 참고 삭이던 감정이 부풀어 올라, 임계점을 훅 넘어섰다. 넘쳐흘렀다.
항상 진심을 숨기고 그 일부만을 보여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아끼고 사랑하는 것들은 가장 완벽한 순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으니까.
그러나 바네사는 꿈에서 깨어나 그의 곁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남자는 이제 머뭇대지 않기로 했다. 적어도 바네사 앞에서는. 그게 얼마나 아까운 일인지 알았으므로.
최선을 다해, 조금 더듬거리고 느리더라도, 그는 마음과 생각을 온전히 전하려 노력했다.
“당신이 선생님이 나라는 것을 알아챈 순간 느낀 실망감과 서운함이 죄스럽습니다. 그 감정이 오로지 나 때문에 느낀 것이라 생각하니 더욱 미안할 뿐입니다.”
그의 커다란 손이 바네사의 손을 조심스레 옭아맸다. 관대한 바네사 로즈는 기꺼이 그에게 잡혀 주었다.
“그 비밀이 항상 가시 같았습니다. 당신과 있어 미치도록 행복한 순간에도 손끝에 걸려 미묘한 통증을 남기는. 나는 다시는 그러지 않을 겁니다. 당신에게 어떠한 비밀도 만들지 않겠습니다.”
그의 손에서 땀이 배어나는 게 느껴졌다.
“나는 당신에 한해서는 아주 욕심이 많아서, 온전히 행복하지 못했던 그 작은 시간들마저 아쉬우니까요. 항시 노력하겠습니다. 다시 돌아와 줘서 고맙고, 용서해 줘서 감사합니다.”
바네사는 웃었다. 긴장하여 떨림이 가득한 그의 말이 마음에 들었다.
좋아, 그러면 이번엔 제가 안심시켜 줄 차례였다. 그때 하지 못했던, 그의 의심을 깨끗하게 날려 주기로 했다.
붉어진 뺨을 숨기지 않고 그의 멱살을 냅다 잡아당겨 여윈 뺨에 입을 맞추었다. 돌아오는 남자의 웃음이 찬란해서 눈이 멀었다. 그래서 민망하거나 부끄럽지 않았다.
외풍이 심했던 여관 숙소, 마법진을 탐구하던 절벽 위, 까만 동굴 안.
혼자 걷는 동안 그와 다시 마주하면 해 줄 말을 아주 오랜 시간 골랐으므로, 더듬대는 부분 하나 없이 거침없었다.
“난 당신이 그렇게 날 보면서 웃는 게 좋아요. 당신은 모르겠지만 눈에서 애정이 흘러넘쳐 보일 지경이거든요. 그걸 느끼면 찬바람이 거센 날에도 아주 따뜻해져요. 스스로에겐 엄격한데 남에게는 보일 듯 말 듯 너그러운 게 사랑스럽고, 훌륭하다고 생각해요. 같이 있을 때면 아무리 피곤해도 항상 나보다 늦게 눈을 감으려 노력하는 게 좋고, 나보다 훨씬 커서 푹 안기면 편안해요.”
갑자기 줄줄 나오는 칭찬에 그는 약간 얼떨떨해 보였다.
하지만 금세 깨달을 수 있었다. 그녀가 편지에 약속했던, 그를 좋아했던 이유였다. 남자의 귓가가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그게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이야기처럼 귀를 기울여 주는 것도 좋아요. 내가 찾아오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시간을 내려고 하는 것도 좋고, 내가 하고자 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결국엔 그걸 따라 주는 것도 고마워요.”
오래 쓰지 않아 약해진 성대는 쉽사리 힘이 빠졌으나 그에게 말해 주어야 할 것들은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진실을 숨긴 이유가 내가 떠날까 봐 두려워서라는 것도 사실은 좀 좋은 것 같아요. 너무 나쁜가? 하지만 무서워하는 것 하나 없는 당신이 고뇌했던 이유가 오직 나뿐이라는 게 그냥 좋아요. 결론적으로 우리가 화해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건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그래요.”
바네사는 활짝 웃었다.
“이건 선생님의 편지가 만들어 낸 게 아니라 당신이 만들어 낸 거예요.”
우리의 만남은 아마 우연이었을 것이다.
그가 말했듯, 그는 바네사 로즈를 발데르 가문의 수많은 후원자 중 하나로 추가했을 뿐이다. 아무런 사심 없이, 관심도 없이. 바네사 로즈는 그냥 추위에 언 뺨을 가지고 빨래를 널던 불쌍한 여자였으니까.
하지만 그 인연의 끈을 길게 늘인 건 바로 무지에 가까운 편지 한 장이었다. 후원자에게 어떻게 편지를 보내야 할지 몰라 애정을 담아 버린.
그러니까 사실 우연을 필연으로 만든 건 그가 아니라 자신이었던 셈이다. 마법의 조건이 ‘스스로를 믿을 것’이었던 마법사는 자신의 인연마저도 훌륭히 붙잡아 만들어 냈다.
그러니 의심해야 할 건 바네사 로즈의 진심이 아니라 기드온 솔의 진심이었다. 그는 정말로 바네사 로즈를 사랑하는가?
그러나 바네사는 그의 마음을 의심하지 않기로 했다. 자신이 경험해 온 것들을 믿었다. 그의 진심 어린 목소리를 믿었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그저 평온하게 손을 잡고 산책하면 되었다. 어린아이들이 읽을 만한 동화의 마지막 장처럼.
어떻게 끝나더라. 보통 그들은 아주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아닌가?
그럼 그렇겠지.
기드온은 뜨끈해진 뺨으로 입술만 달싹이다 이내 그녀의 손에 얼굴을 파묻고 웃었다. 잔떨림이 전해지니 바네사는 기분이 아주 좋아졌다.
“마음에 드는 구석이 더 많아지도록 열심히 정진하겠습니다.”
“그래요. 편지에 약속했던 대로 이유를 알려 줬으니 다시는 내 진심을 의심하는 말 하지 말아요. 이제 민망하니까 나가요. 내일 아침에 일찍 오고.”
헛기침한 바네사는 투덜대며 자신의 손을 쏙 빼냈다.
한참을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던 그가 몸을 일으켜 방을 나서자-물론 그는 나가는 걸음걸음마다 뒤돌아봐서 바네사가 결국 짜증을 냈다- 복도에서 서성대던 마법사들과 의사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갔다.
서서히 닫히는 방문 틈으로 제니언의 고함 소리가 들렸다. ‘미쳤냐’부터 시작해서 ‘너는 더 혼쭐이 나야 한다’는 것까지.
기드온은 완전히 닫힌 문을 아쉽게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앞에는 로난과 미구엘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재빨리 들고 있는 서신을 요약해서 보고하려 했으나 기드온은 직접 서신을 집었다.
“어쩐 일로 일을 다 하시려,”
로난이 미구엘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힐난하는 눈빛을 던지며 너는 입이 죄라고 속삭였다.
기드온은 픽 웃고는 서신을 뜯으며 걸어갔다.
잠시 그녀의 곁을 떠났다가 돌아오는 게 두렵지 않았다. 바네사는 분명히 약속을 지킬 것이고 내일은 함께 정원에서 바람을 쐬며 휴식할 것이다.
뭐, 세상은 평온해졌고 앞으로 함께 할 날들은 몹시 많았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