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rely, Vanessa RAW novel - Chapter (142)
선생님께, 바네사로부터 142화(142/146)
Epilogue.
바네사가 깨어난 지도 어느새 2주가 넘게 흘렀다. 늦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오랜만에 공동 회의에 참석한 기드온은 온갖 조언을 빙자한 잔소리를 들으며 짜증스레 미간을 구겼다. 로시니와 제냐타가 빠진 자리는 휑했고, 모두 심심했는데 잘 걸렸다는 태도였다. 심지어 왕까지 내려왔으니 그 목적이 뻔했다.
“아이고, 바네사 로즈의 코빼기도 못 보게 하는 공작이 여긴 웬일인가!”
“…….”
“일도 한단 말인가! 그럴 시간이 어디 있어. 어서 가서 바네사 로즈를 돌봐야지!”
“그러게 말입니다, 폐하.”
라티시아 후가 촉새처럼 제 노고에 대해 털어놓았다.
“다들 공작께 연락하기 싫다 하여 제가 직접 찾아갔는데도 박대를 당하고… 서러워서 살 수가 없었습니다.”
“나이 든 후를 그리 갈구다니. 프리바의 예의가 어디로 갔는고.”
엣헴, 헛기침을 하며 하는 말에는 대답하고 싶지도 않았다. 기드온은 쌀쌀맞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사안이 대충 정리되었으니 이만 가 보겠습니다. 전 특전대의 집무실도 들러야 하는 터라-”
“아니, 무슨 소리야! 이제 시작이네. 내가 괜히 지금 왔는지 아나? 딱 그대들이 대충 회의 끝낸 시간에 내려온 거거든.”
왕이 종이 무더기를 탁자 위에 던졌다. 탁자를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의 표정이 암담해졌다.
“자, 함께 기분 좋은 저녁 시간을 보내 보자고.”
왕이 심술궂게 웃었다.
⚜ ⚜ ⚜
기드온은 피로함에 굳은 목을 주무르며 발데르 성으로 돌아왔다. 요즘은 정말이지 일이 넘쳐흘러 새벽이 되기 전에 퇴근하려면 최선을 다해야 했다.
그가 모른 척 미뤄 둔 일 때문만은 아니었다. 밤 반달루의 마법진을 보완한 바네사가 왕에게 추가적인 몇 가지 조치를 요구했고 여러 부서가 합작하여 일을 진행 중이었다. 물론 거기에서 특전대가 빠질 리 없었다.
일뿐만 아니라 다른 문제도 있었다. 회의가 끝난 뒤 어김없이 질척이며 달라붙는 사람들. 떨쳐 내는 게 고역이었다.
그들의 화제는 단연코 ‘프리바를 구한 바네사 로즈’에 대한 것들이었다. 물론 기드온은 바네사에 대한 이야기는 한 톨도 흘리고 싶지 않았으므로 입을 꾹 다물었다.
모두의 원성이 높았으나 상관없었다. 바네사가 아직 제대로 회복되지 않았으므로 그녀는 발데르 성에서 충분히 보호받아야 했다. 외적으로든 내적으로든.
바쁜 걸음으로 성문을 지나 성큼성큼 계단을 올랐다. 페레스가 나타나 무슨 말을 한 것 같긴 한데 마음이 급해 제대로 듣지 못했다. 아마 아무리 가까워도 마차를 타라는 둥의 잔소리를 했을 것이다.
기드온은 조심스레 그녀가 지내는 방문 앞에 서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급히 온 게 사실이지만 거친 숨이 티 나는 것은 어쩐지 조금 민망했다.
평온한 척 가장하는 것을 마무리하고 문을 두들겼으나 답이 없었다. 안쪽 공간이 커서 들리지 않을 수도 있었다.
“바네사.”
여전히 안쪽은 조용했다.
아직 잠들 시간이 아닌데. 어제 읽어 보고 싶은 책들을 한 아름 끌어안고 있더니, 읽다 잠이 들었을까?
그렇다 해도 확인은 해야 했다.
동화는 악당을 무찌르고 잠들었던 연인이 깨어나며 모두가 건강하게 웃으면서 끝이 나지만 현실은 조금 달랐다.
오래 잠들었던 바네사는 낮잠이라도 잤던 것처럼 가뿐하게 일어났으나, 몸의 상태가 썩 좋지는 않았다.
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도 오래 누워만 있으면 몸이 상하는 것인데 마력을 한계까지 쏟아 낸 바네사가 오래 누워 있기까지 했으니 멀쩡할 리 없었다. 그녀는 몸을 돌보며 쉬어야 했다.
그 와중에 바네사는 성실한 운동을 제하면 침대에만 있는 것이 답답한지 자꾸 이상한 곳에서 잠이 들곤 했다.
며칠 전엔 서재의 책장 뒤편, 작은 의자 위에서 조는 것을 발견했고 어젠 응접실의 소파 위에서 구겨져 자고 있었다.
오늘은 창틀에 기대 꾸벅이고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아니, 또다시 소파일지도. 긴 소파 위에 드러눕는 것을 좋아하는 듯하니까.
자다 깨서 껌뻑이는 시선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났다. 성에 돌아오기만 하면 바네사를 볼 수 있다니, 그가 누리고 있는 굉장한 특혜였다. 바네사의 건강이 완벽히 돌아오기를 바라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기드온은 문을 열었다. 안쪽은 몹시 조용했고 보이는 광경은 그의 예상과 거의 흡사했다. 소파 위, 몸을 웅크린 검은 형체.
그는 소파 근처로 다가가 그녀를 안아 들려고 했다. 도닥이며 잠을 깨우고 눈가에 고인 잠을 훔쳐 낸 뒤 가벼운 간식을 권유하려 했다.
아마 허공을 떠다니는 묘한 열기와 작은 신음만 아니었어도 분명히 그랬을 것이다.
“바네사!”
바네사는 대답할 정신도 없이 떨고 있었다. 그녀를 보듬어 안자 고개가 그의 목덜미 위로 툭 떨어졌다. 닿은 곳으로 느껴지는 이마가 불덩이였다.
그는 급히 바네사의 이마 주변의 공기를 얼렸으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당장 마법사와 의사들이 달려왔다.
그날은 단발성일 것이라 생각했으나 바네사는 그 뒤로도 밤에 몇 번 열이 올랐다.
처음 쓰러졌던 날에 비해 그 정도가 점점 나아지고 있었으나 기드온은 초조해 미칠 지경이었다. 건강에 지속적으로 악영향을 주는 무언가가 있는 것인가 하여 의사들을 더 고용하기까지 했다.
바네사의 평가에 따르면 ‘발데르 성엔 의사와 치료 마법사가 바글바글’했다.
그걸로도 부족해서 본인이 직접 곁을 지켰다. 지금도 그는 침대 머리맡에 앉아 일 분에 한 번씩 바네사의 이마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이렇게 확인해야 그나마 안심을 할 수 있는 듯했다.
수심이 가득 찬 눈을 보며 바네사는 이마 위에 놓인 그의 손을 감쌌다. 그는 그제야 웃는 척을 했다.
“아주 약한 미열이에요.”
“미열이라 하지 말아요. 어지러워서 속이 울렁댄다 하지 않았습니까.”
“…이걸 고열이라고 할 순 없잖아요.”
“오랜만에 바네사가 맞는 소리를 다 하는군. 이건 그냥 미열도 아냐. 간신히 미열이라 부를 수준이라고! 그러니까 소름 돋는 짓은 나 가면 해라. 짜증 나니까.”
소식을 듣고 발데르 성으로 찾아와 바네사를 살펴보던 제니언이 일침을 놓았으나 기드온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열이 계속 나는 건 분명히 어딘가에 문제가 있는 거 아닙니까.”
“정확한 건 아무도 알 수 없지.”
휘어진 코끝을 잡아당긴 제니언이 잠시 고민에 빠지더니 자신의 생각을 늘어놓았다.
“우리가 아는 건 아주 단편적인 부분이야. 하지만 얘한테는 분명히 아주 큰 사건이 있었지. 본인이 가진 마력을 모두 사용했고, 그 뒤로 채울 수 없는 몸이 되었어. 밤 반달루가 그걸 깨진 잔이라 표현했다고?”
“음, 그랬죠.”
“추측해 보자면 갑자기 몸이 텅 비었으니 그에 적응하는 과정일지도 모르겠어. 마력이 몸의 염증 반응을 줄인다는 연구 결과도 있고 하니, 있다가 없는 건 분명히 차이가 있거든.”
“그런데 지금 절 ‘얘’라고 부른 거예요? 그리고 그런 연구 결과가 있다고요? 신기하네.”
바네사는 그냥 흥미로워했으나 기드온은 달랐다. 그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계속 이럴 것 같습니까?”
“글쎄, 본 적이 없어서. 장담을 못 하겠군. 점점 나아질 것 같긴 한데.”
기드온이 묵묵히 머리를 쓸어올렸다.
“열나는 간격이 점점 멀어지고 있잖아요. 처음과 달리 심하지도 않고! 아무 일도 없어요. 얼굴 좀 풀어요.”
누가 누굴 위로하는지. 기드온은 희미하게 웃고는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눈을 가렸다.
“잠깐 눈 좀 붙여요.”
“별로 안 졸린데? 제니언, 내일 아침까지는 있을 거죠? 같이 식사하고 가요! 님루드로 가 봤자 식초 맛 나는 차나 마실 것 아녜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신경 꺼.”
“어쩜 그렇게 항상 다정한 말투세요? 눈물이 날 것 같다니까. 아, 제니언! 내가 감동적인 이야기 하나 들려줄까요?”
바네사는 기드온의 손을 밀어내고는 눈을 반짝였다. 제니언은 부담스러운 듯 인상을 구겼다.
“애버딘 차라 알아요? 동쪽 경계의 마법사요!”
“안다, 그 싹퉁머리 없는 놈.”
냉정한 평가에 바네사는 눈을 굴렸다. 어째 두 마법사가 서로에게 하는 평가가 참으로 비슷했다. 누구의 탓인지는 몰라도.
“싹퉁머리… 하여튼 그 마법사가 저한테 제자 할 생각 없냐고 했거든요.”
“그놈이 제자 들일 실력이나 돼? 섬세함이라곤 개뿔도 없어서 그냥 몰아치기만 하는 주제에-”
“근데 제가 이미 제니언의 제자라서 안 된다고 했어요. 어때요, 잘했죠?”
갑자기 제니언의 입이 딱 다물렸다. 잠시간의 침묵 뒤, 아무렇게나 치솟은 수염 아래 피부가 드문드문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기드온은 옆에서 그를 흘끔대며 피식피식 웃고 있었다.
“제니언, 더우신가 봅니다. 어쨌든 이 감동적인 이야기에 대한 감상은 없으십니까?”
“커, 커허험! 그, 뭐, 당연한 걸 가지고 뭘! 그 허접한 놈 제자 되느니 내 제자가 훨씬 나, 낫지.”
계속 헛기침을 하던 제니언은 급히 일어나 쿵쾅대며 문 쪽으로 걸어갔다.
“빨리 잠이나 자! 몸이 나아지려면 잘 자고 잘 먹어야 하는 거야.”
“걱정 고마워요, 제니언.”
바네사가 샐샐대며 인사하자 그는 허둥지둥 도망쳐 버렸다.
기드온은 방문이 닫히자 근심도 잊은 채로 침대에 이마를 누르고 웃었다. 그건 바네사도 마찬가지였다.
⚜ ⚜ ⚜
처음의 고열은 흔적조차 없이, 아주 가끔 미열만 올랐다. 바람에 식히면 될 정도로 하찮은.
물론 그건 바네사의 기준으로 기드온에겐 그렇지 않았다. 그는 항상 새로운 마음으로 걱정했다. 어느 날은 그냥 운동하기 싫기에 다리가 아프다 핑계를 댔더니 크게 마음 아파하며 온종일 업고 다녔다.
그가 토닥이듯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는 게 좋아 그냥 놔뒀을 뿐인데 그 뒤로 벌어지는 일은 걷잡을 수 없었다.
기드온은 아예 집무실을 바네사가 사용하는 층으로 옮기고 –그건 그야말로 대혼란이었다- 제 침실보다 바네사의 침실을 더 자주 들르기 시작했다.
미처 눈치채지 못했지만 본인의 침실에서 자다가 매시간 바네사를 확인하러 오기까지 했다. 혹시 그녀가 또다시 아플까 두려운 탓이었다.
바네사는 뒤늦게서야 보좌관들의 대화에서 그 사실을 알아챘다.
“뭐라고요?”
새파랗게 치뜬 눈에 미구엘이 급히 스스로의 입을 쳤으나 바네사는 이미 으르렁대고 있었다.
“말려야죠! 그럼 그 사람이 쉴 시간이 하나도 없잖아요!”
“저희 말은 듣지를 않으시는 터라….”
로난의 조심스러운 변명에 바네사는 이마를 짚고 한숨만 쉬었다.
그날 새벽, 기드온이 침실로 들어오는 모습을 본 바네사는 발끈 성질이 났다. 아주 오랜만에 기드온이 편히 쉴 수 있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가서 좀 쉬라고요! 열나면 뛰어나갈게요.”
“열나면 이미 정신이 흐려지는데 뭘 뛰어나가요. 저번엔 바닥에 누워 있던 기억이 선한데.”
“그게 도대체 얼마 전 이야기인지는 알아요? 계속 매시간 오겠다고요?”
결국 책을 접고 성질을 냈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쩐지 서운한 표정에 바네사는 제가 잘못한다는 기분이 들어 억울했다.
도대체 언제 쉬겠다는 거야?
귀족들 여럿이 이름을 빼앗기고 처벌받은 이후로 공동회의 참석자 명단은 줄어들었고 밤 반달루의 마법진이 있던 곳들은 복구가 한창이었다.
말하자면 공동회의의 수장 격인 발데르 공작과 마물과 관련된 사건을 담당하는 특전대의 장은 미치도록 바쁘다는 이야기였다.
그는 잠깐이라도 깊은 휴식이 필요했다. 이렇게 매시간 누군가를 확인하러 오는 게 아니라.
노려보는 시선에도 기드온은 가만히 웃으며 바네사의 이마에 손등을 대고 온도를 확인했을 뿐 별 대꾸를 하지 않았다.
“좋아요.”
잠시 고민하던 바네사는 결단을 내렸다.
“여기에서 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