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rely, Vanessa RAW novel - Chapter (144)
선생님께, 바네사로부터 144화(144/146)
⚜ ⚜ ⚜
두 사람이 나가자마자 남자의 허리가 바짝 숙여졌다. 커다란 손이 뺨을 감싸고 바네사의 달아오른 얼굴을 들어 올렸다.
“기드, 그…”
무언가를 말하기도 전에 서로의 이마가 맞닿았다. 당장 입술이 지척인 아슬한 거리인데 그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왜 열이 안 떨어질까.”
꾀는 듯, 붉은 입술이 달싹였다.
열이 아니라니까.
눈썹을 찌푸린 바네사는 그의 멱살을 잡아끌었다. 입술이 깊이 맞물렸다.
순수하게 열을 재려는 척했던 남자는 금세 제 욕망을 드러냈다. 끌어당긴 건 바네사였으나 파고든 건 남자였다. 그는 점막을 핥고 깨물고, 혀를 얽으며 탐욕스레 굴었다.
밀고 들어오는 남자를 받아 주기에도 급급해 똑같이 욕심낼 정신이 없었다. 고개를 물리려 했으나 어느새 커다란 손이 퇴로를 막고 있었다.
답답해 그의 가슴을 치자 잠시 떨어져 겨우 호흡 한두 번 할 시간만 주더니 고개를 반대쪽으로 틀어 다시 입술을 겹쳤다.
분명히 한껏 발꿈치를 들고 있었는데 정신을 차리니 그가 들어 올린 상태였다. 팔은 자연스레 그의 목을, 다리는 그의 허리를 감고 있었다.
젖은 소리와 함께 떨어졌다. 달아오른 입술을 덧그리는 손길에 뺨을 붉혔다. 안쪽으로 파고들려는 긴 손가락을 깨물어 버리곤 그의 품에 얼굴을 묻어 헐떡이는 숨을 정리했다.
남자의 몸은 일부러 과시하듯 키운 게 아니라 실제 전투나 훈련으로 인해 만들어진 것으로 억센 근육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닿는 곳마다 틈 없이 단단하여 쓸데없는 상상이나 불러일으켰다.
기드온은 얼마간 더 지분댔다. 그는 요즘 욕구불만이라도 있는 것처럼 굴었다.
웃긴 점은 그게 모두 그의 탓이라는 것이다. 바네사가 아직 완벽히 건강을 회복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물론 이것 역시 이젠 그만의 주장이었다- 철저하게 금욕 중인 남자는 점점 인내심이 닳아 가는 듯했다.
물론 그의 금욕은 허리 위로는 적용된 적 없었다.
“열이 왜 안 떨어지냐니.”
당신 때문인 것 같은데. 바네사가 투덜거리자 기드온은 씩 웃고는 그녀를 소파 위로 내려놓았다. 그러곤 곁에 앉아 목덜미에 입술을 몇 번 더 찍어눌렀다.
바네사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반짝이는 파란 눈과 오물오물하는 입술에 기드온은 다시 몸을 붙이려 하는 저를 멈추느라 곤혹이었다.
“이제 공식적으로 대장직에 복귀했다면서요. 어땠어요?”
남자는 묘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바네사가 몇 번 더 채근하자 결국 입을 열었다.
“난장판이라 그만두고 싶더군요. ”
“말만 그렇고 또 밤을 새겠죠?”
“아니, 진심입니다. 서류 작업이…”
아득하다. 기드온은 그리 말하고는 고개를 뒤로 젖혔다가 바로 했다. 다시 마주한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바네사는 내 생각도 안 하고 잘 논 것 같네요. 조금 서운한데.”
“아, 리나와 체바티가 오니까 너무 좋았어요. 다음엔 에반과 달로이즈도 함께 부르려고요. 달로이즈가 편지를 이번 주에만 세 통이나 보낸 거 알아요?”
“글쎄, 그 두 사람은 일하느라 바빠서 못 올 텐데.”
기드온이 씩 웃자 바네사는 손을 들어 그의 입꼬리를 끌어 내렸다.
“괴롭히지 마요.”
“당신 친구들이 날 괴롭히는 거죠. 이번에 보고서를 어떻게 써냈는지 압니까?”
느낀 점을 적은 일기나 다름없었다. 냉정한 평가에 바네사가 소리 내어 웃었다.
두 사람은 격식을 차리지 않고 식사했다. 오늘은 식당을 가고 싶지 않았으므로 그냥 낮은 탁자에 찬 음식 몇 가지만 올려 두었다.
기드온이 그런다는 게 발데르 성 사용인들에겐 엄청나게 놀라운 일인 듯했다. 하지만 페레스의 얼굴이 몹시 흐뭇해 보여서 좋은 일이겠거니 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소파에 한껏 기대어 먹다가 뺨에 크림이 묻었으나 신경도 쓰이지 않을 만큼 즐거웠다. 기드온이 두 사람의 관계를 알게 된 공동회의 참석자들의 표정을 따라 해 주자 바네사는 숨도 못 쉬고 웃었다. 누군지는 몰라도 라티시아 가문의 주인이 굉장히 놀란 건 확실했다.
“푸하, 거짓말!”
“진짠데. 이것보다 더 입을 벌렸던가.”
“말도 안 돼. 왜 그렇게 놀라셨을까요? 당신이 너무 잘 숨겨서 배신감이 들었나?”
“그랬을지도. 라티시아는 애인이 셋인데 부인에게 모두 들켰으니까. 그 부인께서는 훌륭하게도 라티시아 후작의 재산 반절 이상을 떼어 갔습니다.”
“와, 그에 비하면 난 정말 소박하네요. 애인이 하나밖에 없으니까.”
기드온은 씩 웃었다.
“당신은 하나로도 충분할 겁니다.”
“왜 그렇게 자신해요? 내 취향이 사실 검은 머리일지도 모르잖아. 붉은 머리도 좋고요.”
“머리카락 색이 뭐가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그렇게 말한 남자는 몸을 바짝 기울여 바네사의 귓가에 속삭였다.
“‘여자고 남자고 가리지 않고 숨을 멎게 만드는 미모’라고 썼던 것 같은데. 아닙니까?”
“아아악!”
경악한 바네사는 벌떡 일어나 도망치려 했으나 단숨에 허리가 붙잡혀 그의 커다란 품속으로 끌어당겨졌다. 저건 분명히 그를 처음 보고 선생님께 보낸 편지에 쓴 내용이었다.
두 사람은 이제 과거를 농담처럼 던질 수 있게 되었다. 마음을 의심케 하고 그 뒤로 여러 고난을 초래한 일이라 해도 이미 잘 나누어 깨끗이 정리되었다. 해묵은 감정이 없으니 서로를 찌를 가시가 없었다.
분명히 발전은 발전이었고, 좋은 일은 좋은 일이었으나 저 편지는 찢어 버렸어야 했다.
“놔요!”
바네사는 귀를 막으려 했지만 그가 뒤에서 몸 전체로 결박하듯 껴안아 불가능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소용이 없었다.
“단정하게 드러난 이마와…”
“아, 안 들려! 안 들린다고!”
“이 뒤가 생각이 잘 안 나는데. 이 편지는 나도 여러 번 읽기 어려워서. 그냥 가져와서 읽을까요?”
“하나면 충분해요. 애인 하나면 충분하다니까!”
“좋은 선택입니다.”
뻔뻔한 대답에 바네사는 씩씩대며 뒤통수를 그의 가슴팍에 쾅 내리찍었다. 최선을 다한 박치기에도 기드온은 아프지도 않은지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때, 온갖 야단법석에 탁자에 있던 유리잔이 흔들리며 물이 조금 쏟아졌다.
“아쉽다.”
“뭐가 말입니까?”
“옛날이었으면 저거 단번에 말릴 수 있었을 텐데.”
기드온은 잠깐 쓴웃음을 지었다. 가슴팍에 머리를 기댄 채로도 그의 감정을 눈치챈 바네사는 손사래 치며 말했다.
“아니, 생각해 보면 겨우 이 정도의 아쉬움밖에 없다는 거니까 좋은 거라고요. 물이야 마른 천으로 닦아 내면 되니까요.”
“아쉬웠던 적은 더 없습니까? 이젠 그럴 때마다 내가 해 주겠습니다.”
뒤에서 껴안은 그가 머리칼 위로 여러 번 입을 맞추었다. 다정한 말에 마음이 간지러웠다.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머리를 굴렸다. 정말로 아쉬운 게 딱히 없어 생각나는 것도 별로 없었다.
“음, 좀 더울 때? 이렇게 노래하면 금방 바람이 불었는데. 그렇죠?”
바네사는 입술을 동그랗게 모았다. 바람이 스치고 지나가는 듯한 소리가 났다. 그리고 그 순간.
와장창!
거세게 휘몰아치는 바람 탓에 정원 쪽을 바라보고 있던 발데르 성의 모든 창문이 그대로 박살 났다.
⚜ ⚜ ⚜
바네사와 기드온은 아연한 표정으로 부서진 유리 조각을 바라보고 있었다. 잘게 깨져 조도가 낮은 조명 불빛 아래에서도 반짝거렸다. 아래층에서 뒤늦은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무슨 일이야!”
“어떤 놈이 이런 짓을! 당장 잡아내!”
두 사람 사이엔 잠시 침묵만 흘렀다. 바네사는 눈가를 파르르 떨며 침을 꼴깍 삼켰다.
“…기, 기드. 혹시 마법 썼어요?”
“아니, 내가 아닙니다….”
“그럼 나…?”
그도 진심으로 당황스러운 기색이었다. 왜냐하면.
“이 층은 모두 마법 금지 회로가 숨어 있는데 어떻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몸을 타고 흐르는 마력은 여전히 느껴지지 않았다. 검은 늑대와 밤 반달루의 말마따나, 부서진 잔에 물을 채울 순 없는 법이다.
하지만 또다시 한 도전에도 마법이 실현되었다. 다만 힘의 조절이 조금 어려웠다. 그저 눈앞을 밝힐 빛 정도를 원했을 뿐인데 동그란 빛들이 침실을 가득 채워 눈이 몹시 따가웠다.
“…….”
“혹시 아픈 곳은?”
“없는데요….?”
황당한 얼굴로 제 손을 내려다보던 바네사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호, 혹시 밤 반달루의 마법진이 잘못된 건 아니겠죠?”
초조한 얼굴에 기드온은 아닐 거라는 말을 반복해 주었으나 바네사는 쉽게 진정하지 못했다.
결국 그는 왕성에 연락을 취했다. 빠르게 내용을 갈겨 적는 순간에도 바네사는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방 안을 가득 채운 빛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기드 또 쓰러지는 거 아니에요? 아니죠? 괜찮아요? 혹시 어디 아픈 데 없어요?”
바네사는 횡설수설 말을 늘어놓으며 그의 목덜미부터 어깨, 가슴까지 더듬거렸다. 얼마나 놀랐는지 눈물마저 그렁한 눈가에 기드온은 다정히 입을 맞추어 주었다. 그리고 그녀를 품에 안아 들어 욕실로 들어갔다.
⚜ ⚜ ⚜
물소리가 졸졸 흐르는 욕실에서 바네사는 겁나는 감정을 씻어 버렸다. 따뜻한 물과 창밖으로 멀리 보이는 푸른 정원, 기드온이 도움이 되었다.
그의 팔목에 있었던 상처는 흔적 하나 없이 나아 사라졌다. 피부엔 검은 얼룩 없이 깨끗했다. 그러니 아무 일도 없었다.
리나의 말이 맞았다. 불안감을 다스리는 시간이 필요했다.
여러 사유로 발갛게 달아올라 나왔을 때는 왕성에서 이미 연락이 도착해 있었다.
“밤 반달루의 마법진은 평상시와 다르지 않다는 내용입니다. 아주 좋은 상태인가 본데.”
기드온은 머리칼에서 물을 뚝뚝 흘리며 왕의 직인이 찍힌 서신을 흔들었다. 바네사는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는 깨진 창문들에 대한 뒷수습을 하러 잠깐 떠나고, 혼자 남은 바네사는 마법을 써 보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침대에 누웠다.
대체 뭐지. 분명히 이제 마법을 못 쓸 거라고 그랬는데. 몸에 마력이 채워지지 않을 거라고. 실제로도 느껴지는 게 전혀 없기도 하고.
생각은 깊어졌으나 해답은 없었다.
돌아온 기드온은 당연스레 그녀의 곁에 누워 팔베개해 주었다. 여러모로 지친 바네사는 푹 안겨 눈을 깜빡거렸다.
그는 바네사가 하품하다가 가물거리는 눈을 감을 때까지 자지 않았다. 콧등 위로 햇볕처럼 부드러운 시선이 끊임없이 쏟아졌다. 그게 따뜻해서 깜빡 잠이 들었다.
그러다 무언가 발끝을 스쳐 잠에서 깼다.
“어어….”
어느새 아주 깊은 밤이었으나 밝은 달 덕분인지 정원의 등불 덕분인지, 휘장 너머로 새어 들어오는 희미한 빛을 통해 흐릿하나마 주변을 식별할 수 있었다.
외부 환경으로부터 침대를 분리하는 휘장이 위에 걸쳐져 바람에 부드럽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게 그녀의 발끝을 스친 듯했다.
분명히 그가 침대 휘장을 완전히 내려놓으며 들어왔는데. 창문이 열렸나? 아까 깨졌던 탓에 걸쇠가 망가진 걸까? 일부 유리 조각이 제대로 붙지 않았나?
아무리 날이 좋다 한들 밤에는 바람이 찼다. 만에 하나 기드온이 감기에 걸리면 안 되니까.
바네사는 조심히 허리에 감긴 기드온의 손을 풀어냈다. 그는 바네사의 등 뒤를 완전히 뒤덮은 채로 껴안고 있어 움직임이 절로 조심스러워졌다.
보통 때라면 바네사의 움찔거림 하나에도 득달같이 일어났을 남자는 다행히 오늘따라 깊은 잠에 든 듯했다.
얇은 이불을 걷어 내고 침대에서 몸을 내렸다.
바닥에 발을 디뎌 휘장을 완전히 벗어난 순간, 눈에 보인 광경이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