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rely, Vanessa RAW novel - Chapter (26)
선생님께, 바네사로부터 26화(26/146)
소리죽인 속삭임이 주변을 가득 채웠다.
“세상에, 기드온 님이 퓌돔으로 돌아오셨네!”
“나 머리 괜찮아? 하필 오늘 이 카페를 오시다니!”
“다치셨나 본데. 내가 보듬어 드리고 싶어.”
“미쳤니? 네가 왜.”
여자들도 남자에 대해 재잘거렸지만 남자들도 질투 섞인 말들을 내뱉었다.
“저 얼굴에 저 몸이라니.”
“젠장, 딱 하루만 저 몸으로 살아 봤으면 좋겠네.”
바네사는 기드의 이름이 그냥 기드인 줄 알았는데 ‘기드온’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왜 진짜 이름을 안 알려 줬을까. 나름 친한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쩐지 서운했다.
생각해보면 기드와는 우연히 마주치는 일이 잦았으니 굳이 이름 전체를 알려 줄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만남은 제가 펑펑 우는 것을 달래 주는 거였지.
바네사는 민망해서 고개를 푹 숙였다.
모르는 사람 붙잡고 이유도 없이 펑펑 울고 징징대고. 최악이다, 최악.
얼굴이 달아오른 바네사는 기드가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도록 종이 위에 머리를 박고 편지를 끄적거렸다.
기드온은 곧 카페로 들어와서 무언가를 주문하는 듯했다.
그쪽을 잠시 힐끔댄 바네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훔쳐본 그의 모습이 엉망이었다.
짙은 눈썹 근처엔 긁힌 상처가 보였고 한쪽 뺨과 목덜미 근처엔 습포가 붙어 있었다. 잔을 받아 드는 동작도 묘한 것이 팔도 부상을 입은 듯 보였다.
긴 속눈썹을 내린 채로 자신의 뺨을 쓸어 내는 큰 손에 옆에 앉은 여자가 숨이 막히는 소리를 냈다.
기드는 힐끔대는 시선들에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잔을 들고 나가 버렸다.
“제법 많이 다치셨나 봐.”
“요즘 경계가 아주 위태롭다는 말은 들었어. 비톨라도 난리라던데.”
“거기 왕은 아예 국경을 닫고 싶다고 했대.”
“저런 얼굴은 나라에서 보존해야 하는 것 아니야?”
경계? 그가 하는 일이 무엇이기에. 저번에 아카데미로 조사도 나오고…. 바네사는 눈을 깜빡였다.
그 전에 무슨 일을 하냐고 물었더니 비밀이라고 했는데 나 빼고는 다 아는 것 같네. 하긴, 우리가 무슨 사이라고.
약간 뚱하게 책상 위에 놓인 펜을 바라보던 바네사는 이야기를 훔쳐 듣는 귀를 닫고, 편지를 마무리하기로 했다.
기드 아니, 기드온은 바빠 보였다.
⚜ ⚜ ⚜
바네사는 결국 두 장을 빼곡하게 채운 편지를 들고 카페를 빠져나왔다.
두꺼운 스웨터와 재킷, 장갑까지 꼈는데도 칼 같은 바람이 옷 사이로 스며들었다.
바네사의 뺨은 추위로 금세 발갛게 달아올랐다.
“춥다….”
물론 밤베르크 아카데미가 위치한 서고트만은 못해도 수도 퓌돔도 겨울이긴 하네.
바네사는 종종걸음치며 중앙 거리에 있는 서점으로 향했다. 그리고 벽을 끼고 돌자마자 누군가와 마주쳤다.
“어어.”
“카페에서 일부러 고개를 돌리던데.”
벽에 기대고 서 있던 기드가 몸을 똑바로 일으켰다. 약간 길어진 그의 앞머리가 살짝 흘러내렸다.
잠시 벙찐 그녀를 빤히 바라본 기드는 새하얗게 드러난 바네사의 목선이 거슬렸는지 제가 두르고 있던 머플러를 풀어 바네사에게 둘러 주었다.
바네사는 커다란 손이 머플러를 매듭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내가 저번에 우는 것도 달래 주고 조언도 많이 해 준 것 같은데. 서운합니다.”
바네사가 민망한 과거를 언급하는 기드의 입을 노려보자 기드가 입꼬리를 올렸다.
“우리가 뭐 그렇게 친한가요. 난 기드 이름이 기드온인 줄도 몰랐는데.”
바네사가 뾰로통해서 입술을 비죽이고는 앞으로 걸어갔다. 그녀와 걸음을 맞춘 기드는 난감하게 웃었다.
“애칭을 부르는 것이 더 대단하지 않습니까.”
“이름을 알려 주고 애칭을 불러야 대단한 거죠.”
“음.”
“본명이 기드온 맞죠? 카페에서 들었어요. 아주 유명하던데요.”
기드온은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바네사는 잠시 그를 흘끗댔다. 어느 정도까지 물어봐도 되는지를 모르겠네.
바네사는 잠시 고민했지만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난감하게 미소 짓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항상 제게 잘해 준 사람이 아닌가. 제니언의 집에서 우연히 만났을 뿐인데!
그가 말하고 싶지 않다면 굳이 캐묻고 싶지 않았다. 교수님과도 함께 만났으니 위험한 사람은 아닐 테고 아마 왕성에서 근무하는 마법사일 것이다.
“왜 그렇게 다쳤어요?”
바네사는 다시 걸음을 옮기며 화제를 돌렸다. 기드온은 순순히 따라오며 대충 뺨을 뒤덮은 습포를 만졌다.
“일을 하다 다쳤습니다. 치료마법이 잘 안 되더군요.”
“무슨 일인데요? 또 비밀이라고 할 거면 저리 가요.”
“마물을 상대하는 일입니다.”
바네사는 걸음을 우뚝 멈췄다. 그리고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거짓말하기 없기.”
기드는 새끼손가락을 내밀어 바네사의 것과 엮고 진지하게 맹세했다.
“거짓말은 하나도 없습니다.”
바네사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거리며 흥미롭게 말했다.
“혹시 경계의 마법사거나 특전대원이세요?”
“특전대…… 에서 근무 중입니다.”
“와.”
바네사는 짧게 감탄했다. 특전대라니. 에반의 우상이잖아.
“특전대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제 친구들이 엄청 많은데. 신기해요. 오늘은 무슨 일이세요? 여기에 마물이라도 나타났나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와르르 질문을 쏟아붓는 바네사를 보고 기드온은 미소 지었다.
“그냥 휴가입니다. 몇 주 만에 일이 끝나서. 그런데 할 것이 없어서 나와 걷던 와중이었습니다.”
“와, 기드랑은 우연히 마주치는 일이 잦네요. 저도 오늘은 혼자거든요.”
“어딜 가던 길이었나요?”
기드온이 부드럽게 묻자 바네사는 순순히 대답했다. 두 사람은 걸음을 맞추어 걸었다. 하나, 둘.
“서점에 밀러의 신작을 사러요.”
“할 것이 없는 불쌍한 저를 버리지는 않겠죠.”
“….”
바네사가 떨떠름하게 바라보자 기드온은 낮게 웃었다.
그 웃음에 뺨에 붙은 습포가 움직이는 걸 보며 바네사가 안타깝게 물었다.
“요즘 마물이 많이 늘었다는 소식은 들었어요.”
“일반적인 마물이 아니라 인위적인 것들이라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혼재되어 있는 만큼 약점을 찾기가 어려워 소탕하는 것이 더딥니다.”
기드는 마차가 빠르게 다가오자 바네사를 살짝 끌어당기고는 제가 길가에서 걷기 시작했다.
“미안해요.”
바네사가 대뜸 말하자 기드가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난 그냥 한량 마법사인 줄 알았어요. 실력은 좋은데 뭐 적당히 일하는….”
기드가 헛웃음을 터트리자 바네사는 붉어진 코끝을 머플러에 파묻고는 웅얼거렸다.
머플러에서 좋은 향기가 났다. 딱 그 같은 향기였다. 우아하면서도 부드러운, 하지만 커다란 나무 같은 향기.
“진짜 잘난 마법사들은 좀 편히 사는 경우도 많잖아요.”
“그것도 나쁘지 않지요. 수도는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퓌돔에서 만나니 신기합니다.”
“친구가 초대해 주어서요. 방학에 갈 곳이 따로 없었거든요.”
“이런, 제니언이 서운해하겠습니다.”
바네사는 코웃음 쳤다. 제니언에게서 가끔 오는 편지의 서두는 대부분 멍청이로 시작했기 때문에 바네사의 답장은 할아버지로 시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퓌돔은 마음에 드십니까?”
“정말 아름다운 도시인 것 같아요. 활기차고. 사실 지금 서점을 가려고 했는데 못 가겠어요.”
“왜 못 갑니까?”
바네사는 힐끗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야말로 신이 빚어낸 피조물이란 말이 가장 어울리는 남자였다.
살짝 흘러내려 이마를 덮는 앞머리는 그를 더 편안해 보이도록 했고 단단한 턱선과 높은 콧날이 화려한 이목구비를 완성했다. 햇빛에 금빛으로 빛나는 속눈썹이 움직일 때마다 묘한 감상이 들었다.
“시선이 너무 집중되거든요.”
기드는 제 얼굴을 빤히 바라보는 바네사의 눈빛을 알아채고는 픽 웃었다.
그는 바네사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한 뒤, 근처 잡화 상점에 들어가 로브를 사서 겉옷 위로 둘렀다. 안 그래도 큰 몸이 로브까지 뒤집어쓰자 더욱 크고 높아 보였다.
“이쯤이면 데리고 다닐 만합니까?”
“좋아요. 데리고 다녀 줄게요.”
바네사는 우아하게 고개를 까딱거렸다. 영광스러운 은혜를 입은 기드는 허리를 숙여 그녀의 손등에 뺨을 댔다.
원래 바네사가 가려던 곳은 중앙 거리에 있는 거대한 서점이었다. 온통 화려하게 금칠 된 서점은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는 곳이었다.
하지만 기드는 밧니르 다리 근처의 작은 서점을 추천했다.
“진짜는 원래 숨어 있는 법입니다.”
두 사람은 밧니르 다리 근처로 걸어갔다.
가는 길은 인적이 그리 많지 않았다. 관리되지 않은 수풀과 잡초들이 옅은 햇빛을 찾아 돌바닥 사이로 삐져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골목을 돌자 눈앞에 작은 서점이 나타났다.
그 서점은 아주 허름해 보였다. 직사각형의 건물 왼쪽 위엔 작은 공간이 덧붙여져 당장에라도 기울어질 듯 삐딱해 보였으며, 서점의 내부 공간이 부족한지 수백 권의 책이 밖에도 줄지어 놓여 있었다. 반쯤 찢어진 책들도 허공에 매달려 습기를 날리고 있었다.
기드가 성큼성큼 먼저 들어가고, 바네사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널려 있는 책들을 매만지다가 따라 들어갔다. 눅눅하고 손때 묻은 책들의 향기가 피어올랐다.
“와.”
허름한 겉과는 달리 안쪽은 깨끗한 편이었다. 간신히 사람 하나 지나갈 통로들 사이로는 온갖 책들이 꽂혀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큰 몸으로 지나갈 수는 있어요?”
“몸을 구겨야죠.”
기드는 속삭이고는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책을 한 권 꺼내어 바네사에게 넘겼다.
“연애소설입니다. 바네사가 많이 봐야 할 것 같아서. 그러고 보니 이번 학기는 문학 수업 잘 들었습니까?”
“장난쳐요?”
바네사가 부루퉁하게 쏘아붙이고는 책장을 열었다. 책에는 낙서도 많고 줄 친 자국도 여러 곳이 있었다.
그런데 가장 앞장에 파란색 잉크로 쓴 짧은 글귀가 쓰여 있었다.
「사랑하는 핀넬에게.
두 주인공이 마치 우리 같아. 항상 당신의 사랑을 되새기며 노력할게.
나와 함께 있어 주어서 고마워.」
“우와.”
다정한 글귀에 감탄하는 바네사를 보며 기드는 짧게 웃었다.
“여기에서 나오는 핀넬이 누구인지 압니까?”
“잘 모르겠지만 향기로운 사람일 것 같아요.”
“돌로바의 연인입니다.”
“…그 돌로바요?”
기드는 머리 위를 덮은 로브를 끌어 내리고 들릴 듯 말듯 속삭였다. 화려한 금발이 쏟아져 내렸다.
“그 돌로바죠.”
돌로바는 프리바의 역사상 가장 대단한 음악가였다. 한쪽 귀가 들리지 않고 눈이 멀면서도 대규모 교향곡을 작곡해 냈다.
그리고 그 교향곡은 후대에도 선율이 가장 아름답다고 손꼽히는 작품이 되었다. 음악에 조예가 없는 바네사도 2악장을 들었을 때는 눈물이 났으니까.
하지만 그가 그리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핀넬의 도움 덕분이었다. 핀넬은 그의 눈이 멀고 귀가 들리지 않아도 그를 떠나지 않았으며, 탐욕스러운 가족들에게서 그를 보호하며 지켜 냈다.
“여기 주인이 이런 것을 모으는 데에 미쳤습니다.”
“이걸 제가 만져도 되는 것이 맞아요?”
기드는 씩 웃고는 바네사의 품에 책을 안겨 주었다.
“물론입니다. 그 주인은 책은 사람이 만져야 한다고 생각하니까요.”
다만 가장 귀한 책들은 꺼내 놓지 않을 뿐이다. 기드는 그런 말은 슬쩍 삼켰다.
바네사와 기드는 서점 내부를 꼼꼼하게 탐색했다.
기드가 무언가를 설명해 줄 때마다 바네사는 소리죽인 환호성을 질렀다. 부드러운 목소리가 서점 구석을 울렸다.
심지어 바네사는 밤베르크 아카데미 창립자, 밤 반달루의 짧은 글귀도 발견했다.
「가장 위대한 마법사는 힘의 상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리 삐죽 저리 삐죽, 호쾌하게 힘이 들어간 글씨체였다.
바네사는 감탄하며 속삭였다.
“여기는 정말 보물 같은 곳이네요. 왜 다들 잘 모르죠?”
“주인이 숨겨 둔 곳이니까.”
심드렁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그리고 박박 머리를 민 여자가 사다리를 타고 내려왔다.
그 여자는 담배를 입에 물고 있다가 연기를 훅 뱉어 냈다.
“연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