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rely, Vanessa RAW novel - Chapter (3)
선생님께, 바네사로부터 3화(3/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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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네사 역시 손을 내밀어 두 사람은 정중하게 악수를 나누었다.
“같은 학년이 될 바네사 로즈야. 중도 입학자라서 먼저 방을 쓰고 있었어.”
“괜찮아. 내가 짐을 아무렇게나 두고 가서 정리하기 힘들었겠다.”
“아냐, 공간이 충분해서 괜찮았어.”
서로를 탐색하는 예의 바른 대화가 끝이 나고 눈썹 위로 댕강 잘린 앞머리를 만지작대던 리나가 짐을 번쩍 들었다.
안쪽으로 바짝 들어온 리나는 제 책상과 침대 근처에 갖다 두고 정리하기 시작했다.
바네사는 머뭇거리다가 다시 제 책상 앞에 앉아 복습을 시작했다. 하지만 온 신경은 처음 만난 기숙사의 친구에게 쏠려 있었다.
“큼.”
작은 헛기침 소리에 바네사가 조심스럽게 뒤를 돌아보자 리나 델리나가 침대 위에 앉아서 바네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새로운 룸메이트가 꽤나 흥미로워 보였다.
“이름만 소개했잖아! 난 17살이고 오렐리아 지방에서 왔어. 우리 집안은 들어 봤지? 너는 어디에서 왔니?”
“아….”
바네사는 잠시 머뭇거렸다. 제가 고아원에서 왔다는 것을 말하면 이 예쁜 소녀가 불쾌해하며 뛰쳐나갈 것 같았다.
그래도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
“난 18살이야. 그리고 부모님이 안 계셔서 후원자의 도움으로 이곳에 왔어. 혹시 불쾌하다면 방을 바꿔도 돼.”
리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후원자가 밤베르크 아카데미에 들어가도록 도왔다고? 와, 너 제법 능력이 있나 보구나?”
“아니, 난 아무 능력도 없는데. 왜?”
“세에상에. 밤베르크 아카데미의 학비가 얼만데! 아카데미 중에서 가장 비싼 곳이잖아. 아무나 보낼 리가 없는걸. 그럼 넌 고아원에서 자랐니? 아니면 대부나 대모가 있었니?”
아무렇지도 않게 과거를 후벼 파는 듯한 말에 바네사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아마 고아원의 어린아이들이 저리 무례한 말을 했다면 엉덩이를 때려 주었을 것이다.
계속되는 침묵에 리나도 스스로가 무례했음을 깨달았다.
“저기, 미안. 그냥 궁금해서. 내가 그런 쪽을 전혀 모르는… 아니! 이것도 무례했어. 대답하지 않아도 돼.”
리나 델리나는 눈치를 보며 말했다. 그녀는 몸을 돌려서 제 입을 퍽퍽 때렸다. 망할, 리나 델리나!
“아냐. 음, 고아원에서 자랐어.”
“그래… 큼. 전에 있던 애는 수업 진도와 과제의 양을 따라가지 못해서 중퇴했어. 여긴 안 되겠다더라. 바르도 아카데미로 간다고 했던 것 같아. 공부 더 할 거니?”
“조금만 더 하려고. 짐 정리 편하게 해.”
“고마워.”
두 사람은 어색한 공기를 이기지 못하고 서로의 책상으로 갔다. 바네사는 아직도 할 것이 많았다.
간신히 과제를 끝내고 펜을 들어 ‘선생님’께 보낼 편지 일부를 작성했다.
겨우 몇 줄. 어쩐지 축축 처지는 기분이었다. 이런 기분이 편지에 나타날까 봐 결국 펜을 내려놓았다.
아카데미에는 잘사는 아이들이 많겠지. 똑똑한 아이들도. 그 사이에서 내가 잘해 나갈 수 있을까? 어울리기부터가 난관일 것 같은데.
어쩐지 들떴던 기분이 사라지고 불안감이 얕게 깔렸다.
책상에서 일어난 바네사는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큼, 연한 회색이 네 눈 색이랑 잘 어울린다.”
리나 델리나가 새침하게 말을 붙였다.
“고아원은 이런 색을 좋아하거든.”
리나 델리나는 이불 속에서 제 입을 쳤다. 빌어먹을, 밟는 것마다 지뢰네! 바네사는 그를 눈치채고 키득대며 웃었다.
“화난 게 아니고 그냥 진실이야. 고아원은 이렇게 때 타지 않는 색을 좋아해서. 혹시 보통은 이런 잠옷은 잘 안 입나?”
“잠옷이야 모양은 다 비슷하지.”
재질이 다르지…. 새하얀 잠옷을 입은 리나 델리나는 그 말은 꿀꺽 삼켰다. 바네사는 침대에 누워 이불 속에 파묻혔다.
잠시 침묵만 흐르는 공기 속에서 바네사가 머뭇대며 입을 열었다.
“저기, 중도 입학자가 따라가기 많이 힘들까? 다들 괜찮다는 말만 하셔서.”
“교수님들이 3학년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한 이유가 있을 거야.”
“내가 나이가 좀 많아서는 아닐까?”
“여긴 같은 학년이어도 나이는 제각각이야. 당장 3학년에는 16살부터 24살까지도 있는걸? 그래서 학년이 가장 중요해. 그런 곳에서 굳이 나이 때문에 그랬을 리 없어.”
리나가 응원하듯 씩씩하게 말했다. 바네사는 등불을 껐다.
“고마워, 잘 자.”
바네사가 속삭이며 인사하자 리나 델리나도 웅얼거렸다.
“잘 자.”
이윽고 네 번째 층, 오른쪽 가장 구석에 있는 방은 고요해졌다.
⚜ ⚜ ⚜
<3월 8일, 에디르네력 1309년>
선생님께.
안녕하세요, 선생님. 바람이 제법 따스한 어느 봄날이에요. 모든 일들이 평온하시길 바랍니다.
저는 아주 잘 지내고 있어요. 매일 새로운 것들을 배우느라 정신이 없어 편지의 간격이 조금 멀어졌네요.
네? 잠시 전혀 상관없다는 목소리가 바람결에 들린 것 같기도 한데, 착각이겠지요?
첫 답장을 받고는 제가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르실 거예요.
저는 사실 선생님께서 제 편지를 읽지 않으셔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전 너무 말이 많잖아요!
바쁜 분이실 텐데 시간을 쪼개서 답장까지 해 주셔서 정말 행복해요.
아주 예쁜 상자를 구했어요. 선생님의 편지는 이곳에 차곡차곡 보관될 예정이에요.
드디어 1주 전부터 정규 수업이 시작되었어요. 그날은 아침부터 얼마나 긴장을 했는지, 속이 답답해서 물 한 잔도 마시지 못했어요.
제가 너무 창백해지니까 기숙사 룸메이트가 아무 말도 없이 물을 한 잔 건네주더라고요.
제 룸메이트는 정말 예쁜 여자애예요. 댕강 잘린 앞머리와 딱 예쁠 정도로만 곱슬거리는 붉은 머리카락이 어깨 끝을 스치는데 귀공녀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아직 많은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아주 좋은 집안의 첫째 딸이라는 것 같아요. 이름은 리나 델리나고요.
처음에는 절대로 친해지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단정한 교복에 넥타이를 리본 모양으로 우아하게 묶을 때만 해도 말이에요.
많은 사람들이 ‘바네사? 고아원에서 자란 애?’라는 편견 속에서 저를 대할까 걱정하면서 저도 리나를 편견 속에서 판단한 거죠.
하지만 리나는 정말 좋은 애였어요. 건네준 물을 제가 겨우 한 모금 넘기니까 계속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신경 써 주더라고요.
다행히도 첫 수업은 3학년 공통 수업인, 마리나 교수님의 <거의 모든 것에 대한 역사> 수업이었어요. 정말 다양한 나라에 대한 역사를 조금씩 살펴보는 수업인데 너무 광범위한 것들을 다루니까 어지러워요.
제가 옆에서 책을 꼭 껴안고 벌벌 떨면서 걷자 리나가 제 허리를 탁 치면서 말했어요.
“목은 길게, 허리는 펴고, 시선은 정면을! 우리 엄마랑 아빠가 매일 하는 말이야. 우아함은 자세에서 나오는 거거든.”
그 말을 듣고 저는 최대한 곧게 몸을 폈어요. 리나는 저를 요리조리 둘러보고는 씩 웃으며 교실 뒷문을 열었죠.
그러자 여기저기서 리나를 부르더라고요. 리나는 같이 가자고 말했지만 그 근처에 남은 자리는 오직 하나뿐이라 저는 따로 앉았어요.
리나가 절 돌보아 줄 필요는 없는 거잖아요. 그렇죠?
그리고 1주쯤 되니까 왜 알리사 선배가 적응이 어렵지 않을 거라는 말을 한 건지 알았어요. 다들 과제에 치여 시간도 정신도 없거든요.
물론 주말에는 가끔 시간이 나긴 하지만요, 저는 놀 시간이 없어요. 나머지 과제 덕분에요.
어제는 새벽 2시에나 모든 걸 끝내고 잠들었다니까요.
교수님들은 나머지 과제에는 딱히 기한을 주지 않으세요. 하지만 저는 뒤처질까 봐 두려워서 꼭 너무 빠르게 끝내고 말아요.
그러면 교수님은 또 과제를 주시고, 저는 악에 받쳐서 빠르게 하고, 그럼 또 과제, 또 하고….
이런 걸 악순환의 고리라고 하나요?
선생님은 요즘 무슨 일을 하면서 보내시나요?
날씨가 좋은데 하루에 한 번씩은 산책을 하고 계신가요? 제 편지도 즐겁게 읽고 계신 거겠죠?
전 가끔 선생님의 모습을 상상하곤 해요.
선생님은 멋지고 커다란 책상 앞에 앉아서 빠듯하게 예의를 차린 정장을 입고 계세요.
그리고 우아하게 넘긴 하얀 머리카락과 뾰족하게 기른 콧수염을 다듬으며 서류를 보시다가 제가 보낸 편지를 읽고 웃으시는 거죠. 그럼 조금 뿌듯해져요.
이만 줄일게요. 오늘도 과제에 파묻혀서 하루를 마무리하려고 해요.
이 편지를 받은 선생님께, 항상 좋은 일이 있으시기를 기도해요.
겨우 1주일 만에 볼이 홀쭉해진,
바네사 로즈 올림.
⚜ ⚜ ⚜
바네사는 편지를 마무리하고 봉한 뒤에 호니르에 넣었다. 편지를 봉한 밀랍은 붉은색이어서 그림처럼 예뻐 보였다.
호니르의 안쪽에서 부드러운 노란빛이 얼마간 계속되더니 편지는 이미 온데간데없었다.
앞을 보니 오늘 수업이었던 <원소 마법의 이해>, <수학3>의 교과서가 책상 위에서 그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누군가의 발등 위에 떨어지면 뼈가 동강 날 두께였다.
바네사는 결국 폭, 한숨을 내쉬었다.
“포기하면 편해.”
한숨을 눈치챈 리나는 침대에 드러누워 새침하게 말했다.
“바네사, 넌 악명 높은 수업을 너무 많이 신청했다니까. 공통 수업인 <원소 마법의 이해>랑 <거의 모든 것에 대한 역사>, <프리바의 문학>. 이 셋만 해도 죽을 것 같은데 <수학3>이랑 <마법의 원리>에 <마도 공학의 기초>까지?”
리나 델리나는 단호하게 판결을 내렸다.
“넌 미친 거야. <교양 음악>, 이런 것을 신청했어야지! 아니면 외국어라든가.”
바네사는 우울하게 말했다.
“교양 음악 좋네. 널 빨리 만났으면 나도 알았을지도 몰라. 하지만 분명히 내가 보충 수업을 들을 때는 귀도 교수님이 숙제를 별로 내주지 않으셨단 말이야.”
“그게 바로-속임수지. 귀도 교수님은 마법적인 재능을 가진 학생을 하나라도 더 발굴하려고 노력하시거든. 대부분은 그냥 모자를 날리는 수준이 끝이고 마법의 재능이 아예 없는 경우도 많아서.”
바네사는 헝클어진 머리를 쥐어뜯었다.
“맙소사. 난 아마 오늘도 새벽 3시가 넘어서야 잘 거야….”
“나처럼 그냥 눕는 것은 어때?”
바네사는 리나 델리나를 잠시 흘겨보았다. 리나가 유혹하듯 드러누워 손짓하는 것이 얄미웠다. 보송보송해 보이는 이불에서는 당장 파묻히고 싶을 정도로 부드러운 비누 향기가 났다.
“말만 그렇지, 너는 <수학3> 과제도 벌써 끝냈잖아. 통계를 어떻게 그렇게 잘하는 거야?”
“무역 사업을 하는 집안에서 태어나면 그렇게 되지. 난 4살부터 수학 공식을 외우면서 자랐거든.”
리나가 키득거렸다.
바네사와 리나는 아옹다옹하며 잠시 말다툼을 했다. 두 사람은 함께 보낸 1주일간 꽤 많이 친해진 상태였다.
그때 바네사의 호니르에 부드러운 푸른빛이 감돌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호니르로 돌아가자 호니르의 입구에서 사탕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어, 어!”
바네사가 넘치는 사탕 몇 개를 받아 냈지만 미처 받지 못한 초콜릿, 태피 사탕, 젤리들이 책상 위로 무수하게 쏟아졌다.
“네 후원자가 보낸 건가? 오, 이거 알피네 사탕이잖아!”
리나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닥에 떨어진 사탕을 하나 집었다.
“알피네?”
“뭐, 대단한 마법사는 아니지만 마법사가 만든 사탕이야. 이 사탕, 먹으면 아마 조금이나마 기운이 날걸. 엄청 비싼 거야. 원래 조금이라도 마법이 들어가면 비싸지잖아.”
어쩐지 사탕 껍질도 예사롭지 않았다. 황금색, 파란색, 은색.
온갖 색깔들이 가득한 포장지에는 누군가의 서명이 들어가 있었다. 아마 알피라는 마법사의 서명이리라.
바네사는 사탕 두 개를 들어서 하나는 리나에게 주고 하나는 껍질을 까서 입에 쏙 넣었다. 리나도 하나를 넣고는 오독오독 깨물었다.
바네사는 어쩐지 정말로 몸에 기운이 솟는 것 같았다.
“좋아. 오늘은 꼭 새벽 1시에는 잠들겠어.”
바네사는 눈에 힘을 주며 머리를 올려 묶었다. 리나 델리나는 코웃음 치고는 이불을 뒤집어썼다.
⚜ ⚜ ⚜
삐이이이이-익!
바네사는 피곤한 얼굴로 제 옆에서 요란하게 꽥꽥대는 자명종을 한 대 쳤다.
분명히 잠깐 눈을 감았던 것 같은데 아침이라니, 이건 거짓말이야. 차라리 리나 잘 때 같이 잘걸….
울적한 마음도 잠시, 금세 눈이 크게 뜨였다. 호니르의 입구에 편지 하나가 들어 있었으니까.